다 좋은데 자네만 없었으면 좋겠군 (2)

잉어킹 8 3,242
* 이 글은 허구입니다. 아무튼 실존하는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2

민혁은 옆에서 수건을 주워 방망이를 닦았다. 옆에는 털북숭이를 포함해 세 구인가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시계가 멈춰 버린 덕분에 어느 정도의 시간간격으로 놈들이 나타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체감 상으로는 10분마다 하나씩 나타나는 것 같았다.

"이래서야 끝도 없지."

민혁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야 운 좋게 놈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 나타나서 어찌 처치할 수는 있었지만, 이 알량한 목숨을 잃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하하하, 지금까지 잘도 버텼구나! 그만 죽어라!"

경마장 화장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몰골의 ‘나’가 장판을 뜯고 얼굴을 내밀었다. 장판의 밑은 분명 시멘트 바닥이어야 했건만, 시커먼 심연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끝도 없구만......다들 시간이 남아도나."

"전부 과제 따위에 목매는 멍청이들인 줄 알아? 최소한 이 시간의 '나'보다는 더 구구절절한 사정이 있다고!"

‘나’는 여전히 반쯤 몸을 내밀고 있었다. 민혁은 언제 알루미늄 배트를 내리쳐야 이 ‘나’를 효율적으로 해치울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다가, 이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깨달았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 

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적당히 야구방망이를 내리쳤다. 그걸 맞은 ‘나’는 머리가 터져 시뻘건 얼룩을 잔뜩 만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비틀거리며 살아있었다. 민혁은 놈의 머리채를 잡고 밑에서 끌어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야구방망이로 그를 두들겨 팼다.

"아이고 나 죽네! 동네사람들 여기 좀 도와주세요!" 

"어차피 들을 놈도 없어!"

‘나’는 기계적으로 내리치는 배트에 두들겨 맞으면서 자기가 왔던 장판을 다시 들춰냈다. 민혁은 ‘나’가 한번 밟힌 지렁이보다 조금 나은 행색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거 놔!"

"못 가, 이 자식아!"

‘나’는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버둥거렸지만 민혁은 손을 놓질 않았다. 물론 다른 쪽에는 여전히 야구방망이를 쥔 채였다. 

"놓아, 놓으라고!"

필사적인 몸부림 끝에, ‘나’는 가까스로 자기가 왔던 심연에 몸을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불행히도 그는 민혁을 완전히 떼어놓지 못했다. ‘나’의 몸은 콜타르에 잠기는 것처럼 천천히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민혁의 손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민혁은 한번 숨을 참았다가, 장판 밑의 심연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장판의 밑은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여기저기에 연결된 끈인지 해초 쪼가리인지 뭔지 모를 빈약한 지지대가 얼기설기 얽혀 있는 가운데, 수많은 빛깔과 소리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민혁과 '나'는 소용돌이의 아래로, 그리고 바깥으로 떨어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지대를 붙잡아야만 했다.
 
"이 미친놈! 이제 어쩌려고 그러냐!"
 
"미친놈이라니, 하긴. 유기화학 신청한 놈부터 제정신은 아니었지."
 
'나'는 지지대를 붙잡고 버티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해초인지 밧줄인지 모를 것은 두 사람분의 몸무게는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섬유가 찢어지며 보다 위태로운 구조로 변하고 있었다.
 
"놔라, 놔! 이대로라면 둘 다 죽는다!"
 
그게 허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떨어져 나온 지지대 조각들은 벽에 닿자마자 산산히 박살나 흩어지더니, 빨려들어 사라져 버렸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어! '나'들은 이 결과에 납득하지 못할 거야...... '나'까지 죽일 거야!"
 
"죽인다고?"
 
"여기서 그 시간대의 '나'만 죽으면 모든 건 해결된다! 가라! 무한한 망각의 저 너머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붙들고 있던 지지대가 완전히 찢어져버리는 순간, 민혁이 그를 호되게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그 반동으로 민혁은 무사히 지지대 하나를 붙잡을 수 있있지만, '나'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벽 쪽으로 점점 다가감에 따라 그의 표정은 점점 공포로 일그러졌다. '나'는 어떻게든 닿는 속도를 늦춰보려고 비명과 함께 발버둥을 쳐 댔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내가 여기서 죽어봐야......"
 
그게 '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소용돌이의 벽에 닿자마자 온 몸의 골격이 형언할 수 없이 뒤틀리더니, 몸 안에서 허옇고 날카로운 것들이 가득 튀어나온 끔찍한 몰골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끔찍한 단말마를 질러대다가, 그는 세탁기에 넣은 고양이 같은 몰골이 되어서야 '무한한 망각의 저 편'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개판이구만."
 
민혁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는 이 밑으로 내려온 시점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한 셈이었다. 저 밑은 '나'들의 소굴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나'의 자백으로 입증되었으니까. 하지만 소용돌이의 벽에 휩쓸리지 않도록 힘겹게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의혹이 자리 잡았다.
 
과연 알루미늄 배트 하나로 충분한 걸까?
 
어쩌면 그는 뒷산에 있는 군부대 무기고라도 털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간다고 털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애초에 세 명이 이 미치광이 같은 곳을 통해 올 정도라면, 밑에는 더 많은 '나'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이제 돌아가 봐야 놈들은 다시 올 거고, 민혁은 중과부적으로 끝장이 날 게 분명했다. 결국 결심을 굳히고, 그는 소용돌이의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맨 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알루미늄 배트의 끄트머리를 대서 바닥이 '멀쩡한 것인지'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자 소용돌이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씨팔!"

민혁은 잡고 있던 게 갑자기 증발하는 바람에, 흙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왔는지 살폈다. 끝없이 펼쳐진 살풍경한 벌판과, 거기 세워진 애정부보다 조금 나은 디자인의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수없이 많은 ‘나’가 서 있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나’, 미쳐버린 ‘나’, 죽어가는 ‘나’, 병든 ‘나’. 그리고 그 가장 앞에는 역시 ‘나’가 서 있었다. 구역질 날 정도로 말쑥한 정장에, 미치광이 같은 눈을 한 ‘나’가.
 
"소개하지. ‘나’는 대변인이다. 유기화학에 의해 고통 받은 ‘나’들 모두의 입이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그러니 이만 죽어라."
 
맨 앞에 있던 ‘나’가 말했다. 그의 뒤에 있던 ‘나’들이 민혁의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은 저마다 각목, 돌, 야구 방망이, 그것도 아니면 날카로운 발톱이나 촉수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민혁은 이제 플랜 B로 돌입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바닥에 배트를 던져버리고,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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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또 허리 끊어진 글이나 될 것 같은 쎄한 느낌이. 재활은 아직까지도 요원한 일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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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 잉어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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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로크네스
분석화학에 고통받는 저에게 이것보다 무서운 글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물론 저라면 야구방망이보다는 분석화학 책을 무기로 쓰겠지만요. 항상 재밌게 읽고 있어요.
잉어킹
그러니 우리는 어서 악마의 손바닥을 찾아서, D4C를 얻은 다음 평행세계의 모든 나를 설득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Loodiny
작용 반작용 만만세.(?)

라든가, 차라리 유기화학 교실을 때려부숴... 라고 생각하는 전 무르군요.
잉어킹
그리고 그 날 수업은 강의실만 옮겨서 그대로 하게 되는데.
Nullify
死ぬがよい。

...일려나. 죽는 건 당연히(?) 저들이 되겠지만요. 하하.
잉어킹
그럴 수도 있겠죠.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카리스트
저는 민혁과 '나'라고 하니 좀 헷갈리는 느낌이 드네요. 민혁A나 B, 민혁들 이런 건 어떤가요?

'민혁들이 민혁의 쪽으로...' 취소하겠습니다. 이게 더 헷갈리네요.
잉어킹
다소 혼동되는 서술일 수도 있었겠군요.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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