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는 아직도 성황리에 영업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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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여기는 아가페 3, 아가페 3. 플라토닉 응답 바람.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으나 패키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이상."

그렇게 말하고, 바이저의 수신버튼에서 손을 떼어냈다. 10분 전만 하더라도 시끄럽게 소리지르던 슈프림 입자 탐지기는 거짓말처럼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높은 고층 빌딩의 옥상 위에서 내려다 본 교차로의 풍경 속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은 마법소녀는 커녕 그 나이대의 어린 소녀조차 없었다. 이런 일이 벌써 6번째라는걸 생각하면, 탐지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던 R&D 부서 녀석들의 말에도 신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맡은 일이고 하니, 마법으로 강화된 시력을 가지고 교차로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렇게 30분, 이곳에 게릴라가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허탕인 것 같네요. 늙어터진 여대생만 한 가득… 보고하고 복귀하는 걸로…"

"늙어터져서 미안하네."

슈팟- 하고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올리 없는 혼잣말에 대한 대꾸도 들려왔다. 대응해야…

하지만 고통과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1.

"내 이름은 매지컬 로라! 악의 제국, 엘름에 맞서 지구의 정의와 평화를 지킨 마법소녀야! 지금 TV 앞에 있는 너희들도 나처럼 마법소녀가 될 수 있어! 나와 함께 지구와 사람들의 사랑을 지켜내자!"

무심코 켜놓았던 TV에서 친숙한 목소리의 광고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엘름에 맞서싸웠던 동료였으니까. 하지만 엘름의 수괴를 물리친 뒤 마법소녀와 동시에 아이돌로 데뷔한 예림이의 모습에는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3년이나 지났건만, 위화감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억 속의 예림이는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자신있게 포즈를 취하며 광고를 찍을만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한참 엘름과 싸우던 시절, TV에 얼굴을 비추며 우리의 정체를 알린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고보니 엘름을 물리쳤었던 3년 전 그때의 내 나이가 지금의 예림이의 나이와 같았다. 나도 그땐 예림이처럼 귀여웠었을까? 3년 동안 TV에 출연하며 내공을 쌓아 자기 자신을 가꾸는 법을 배웠었겠지만, 그래도 3년 전의 나라면 해볼만한 승부가 될 지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입 밖으로 내지 않았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게 쪽팔려 죽겠다… 지금의 나는 엄연히 평범한 대학생이니까! TV를 보는 팬들에게 나는 전국구 아이돌 예림이와는 비교도 안되는 아줌마일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급격하게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뭐, 엘름과의 마지막 전투를 했을때 내 나이는 사실 마법'소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나이긴 했다. 17살, 고등학생 마법소녀라니, 그런거 쪽팔리잖아. 아이돌이라면 충분히 현역으로 뛸 만한 나이겠지만, 판타지에 가까운 마법소녀로써 17살은 아웃이라는게 내 마음 속의 철저한 규칙이었다. 음음. 오래된 생각이다.

「딩동」

"딩-동-! 다희언니이! 안에 계세요?"

경미의 목소리였다. 그녀도 나와 예림과 함께 싸우던 마법소녀였다. 퍼밀리어나 UMA 따위로 굳게 믿고있었던, 이른바 '마스코트' 포지션에 있었던 코코가 날 마법소녀로써 선택한 지 1년 뒤에 새로운 마법소녀로 선택했던 아이였다. 말하자면 내 직속 후임자 쯤 되는 애였는데, 내겐 1년만에 처음으로 생긴 동료여서, 오래지 않아 금새 가까워졌다. 그 인연은 마법소녀를 둘 다 은퇴하고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거고.

"케이크 사왔어요- 자칭 천재인 우리 언니는 보나마나 집 안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고 계셨겠죠?"

"윽. 언제나 맹한것 같으면서 정곡을 찌르다니…"

"언니와 만난지도 벌써 6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래서, 뭐하고 계셨어요?"

"뒹굴거렸다. 치. TV에서 예림이 나오길래, 잠시 혼자 생각하고 있었어."

"아, 그 광고 말인가요? 저도 봤어요? 요즘 완전히 물오른 것 같더라구요!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찍고 있고, 피부도 좋아진 것 같아요. 역시 17살이 여자의 전성기인 것 같아요."

"아이돌이니까 관리도 엄청 받겠지? 으앙… 실시간으로 늙어가는 기분이야… 아니, 실시간으로 늙어가고 있어…"

"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도 언니만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내 말을 부정해줘! 거기선 빈말이라도 부정해주란 말야!"

절규를 내지르며 경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푹신하고, 포근하고, 말랑하고. 이게 뭐야. 6년 전에는 나랑 똑같이 작았으면서! 이렇게 혼자 커버리다니… 배신감이 뼛 속까지 사무쳤다.

"화 푸세요오… 좋아하는 케이크도 사왔으니까요."

"윽… 사거리의 케이크 가게에서 파는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잖아. 으악… 이건 너무 맛있다. 넌 날 너무 잘 알아…"

"언니가 좋아하는 건 뭐든지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헤헤."

"으으… 고3 아냐? 이렇게 평일을 편하게 보내도 되는거야?"


"우우. 괜찮아요. 요즘에 대학 나와서 갈 수 있는 일자리도 없는데요, 뭘. 그리고 항상 말하잖아요? 천재 외과의사가 될 언니한테 시집가서 언니 등골 빼먹을거니까요!"

"우와. 너무 노골적인거 아냐?"

그렇게 서로 느긋한 오후를 함께 보내고 있을 때, 미처 잊고 끄지 않았던 TV에서 뉴스가 시작되었다. 나와 경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5시 뉴스의 화면으로 향했다.

「오늘의 첫번째 소식입니다. 지구를 침공했던 마도제국, 엘름과의 전쟁이 끝난지 3년이 되는 오늘, 이를 기념하는 종전 기념식이 다차원 평화 공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 미, 러, 일 대통령이 전원 참석한 이 자리에 엘름과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마법소녀, 매지컬 로라양과 지난 2월 전쟁 후 황폐해진 지구를 재건하는데에 모국인 마법연합 슈프림의 협력을 이끌어낸 성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받은 코코 국제 슈프림 대사도 참석해 행사를 빛냈습니다. 특히 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세계를 지키기 위한 공로를 인정하며 코코 국제 슈프림 대사에게 미국 의회 명예 훈장을 수여하여 눈길을 끌었습니다.
"(제가) 이 훈장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곘습니다. 이 지구를 지킨 것은 저희 모두(였기 때문에…)"
러, 일 대통령은 오늘 밤 귀국하며 미국 대통령은 오늘 한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내일 아침 귀국합니다. 두번째 소식입니다. 최근 도심에서 엘름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가… 」

초등학생 시절 때만 하더라도, 고양이와 마멋의 중간쯔음 되어 보이는 털달린 사족보행 동물이 TV에 나와 대통령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위화감에 피식 웃었다. 경미에게도 그런 느낌은 마찬가지였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폭소했다.

"코코씨는 잘 지내시나 보네요."

"그러게."

멋쩍은 침묵이 맴돌았다. 브라우니도 다 먹었고, 잡담할만 한 것도 떨어졌고, 뉴스에는 더 볼 게 없었다. 휴,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도, 경미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그녀가 이 곳에 찾아온 이유도 바로 그 할 일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미는 카메라를 들고 내 뒤를 따라왔다.



2.

벌써 5일째였다. '아가페 3'은 결국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고, 무선 보고를 비롯한 어떤 형태의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리에서 발생하던 이상한 신호도 같은 시기를 기점으로 더 이상 잡히지 않는 것을 보아 그 신호는 미상의 적군이 아군을 유인한 신호였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름과 맞서 싸웠던 시기의 마법소녀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알파 클래스의 '아가페 3'이 순식간에 당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름의 잔당도 거의 소멸해 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슈프림측 이외에 존재한다고?

이와 같은 이유로, 서울 근교에 자리잡은 국제 슈프림 대사관 및 마법소녀 관리국은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리국이 설치 이래 처음 있을 정도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코코는 공무로 인해 자리를 비운 상태여서,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아맘 공사의 스트레스는 분단위로 커져만 갔다. 수색대를 편성해 수색을 게시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이걸 본국에 그대로 보고했다간 엄청난 호통과 함께 징계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해야할지 고심하고 있던 아맘의 방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아맘 공사님, 보셔야 할게 있습니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비서의 목소리였다.

"중요한거야?"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럼 돌아가라고!"

"…봉투에 코코 대사님의 본명이 적혀있습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갈색 봉투를 손에 든 비서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뒤에 누가 오는 것은 아닌지 흘깃 지켜보고는, 문을 살며시 닫은 뒤 빠른 걸음으로 아만에게 다가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렸다. 봉투 위에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당연했다. 중요한건, 수취인란이었다. 비서의 말은 맞았다. 갈색 봉투의 수취인란에 적힌 이름은, 코코의 길고도 발음하기 힘든 풀네임이었다. 문제는,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대사관에서도 극히 일부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밀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지인들의 언어 사정을 감안해 그들이 편하기 쉬운 이름만을 이용하도록 한 본국의 매뉴얼 때문이었다. 

"이 안에 든게 뭔진 알아냈어?"

"독이나 폭탄이 들어있진 않습니다. 모든 안정성 검사를 통과했고, 슈프림 입자를 비롯한 다차원 물질 또한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아만은 미간을 찌뿌린채 봉투를 집어들었다. 봉투는 가벼웠다. 손가락으로 봉투를 훝자, 이내 그 안에 앏은 플라스틱 판과 비슷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봉투의 양쪽 끝을 집어들고, 살살 흔들어보자 이는 더 확실해졌다.

"…코코 대사님은 이 우편물에 대해 알고 계신가?"

"아직 모르실 겁니다. 어제부터 연락이 되지 않아서요."

"이 상황에 대체 어디있는거야… 그 양반. 현지 협조원에서 출세했다고 이렇게 막나가도 되는거야? 제기랄."

일단, 그는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무런 조치없이 열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터였다. 하지만 아만은 지난 며칠간 계속된 스트레스와, 코코에 대한 불신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가뜩이나 자신보다 출신도 불분명한 사내를 상관으로 두고 있던 그로써는, 배가 아파오고도 있었다. 미개한 현지인들에게 상을 받았다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라니,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봉투를 열었다. 칼로 봉투의 끝부분을 잘라내고, 반대쪽 모퉁이를 잡고는 흔들었다. 비서는 침을 삼키고, 그 봉투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지켜보았다.

DVD였다.

그 DVD 위에는 검은 유성 매직으로, 'PLAY ME'라고 적혀있었다. 그었던 획을 다시 몇번이고 그어 강조한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만은 떨리는 손으로 그 DVD를 집어들어 PC 안에 집어넣었다.



3.

"이름이?"

방은 어두웠다. 조명을 모두 떼어버린데다, 창문은 검은색 셀로판지로 도배했기 때문에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누구에게 말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름이?"

다시 물었다. 그녀는 움찔거렸다. 내 말을 못 알아 들을리는 없었다. 음. 뭐가 문제인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고 다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는 살아서 이 방을 걸어 나갈테니까. 내가 궁금한건 네 이름이야."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자신의 이름과, 목숨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겠지. 10대 초중반 소녀치고는, 상당한 인내심이었다. 그조차도 별거 아니지만. 기대했던 대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지…지희."

"지희라… 마법소녀가 된지 얼마나 됬지?"

지희는 입을 다물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입은 금이 간 댐과 같아서, 한번 연 순간 그 안의 말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2년… 2년째에요."

"2년? 클래스는?"

"알파. 알파 클래스요."

"대단한걸, 2년만에 알파 클래스에 도달하다니. 소질이 있어 보이네."

잠시 문을 열고 나가, 스탠드형 조명을 들고 들어왔다. 방향을 지희쪽으로 돌리고, 전원을 넣자 눈부신 빛이 지희를 향해 쏟아졌다. 눈을 뜨고 제대로 그 빛을 바라보기란 힘든 것이 당연해 보였을 정도로 강한 빛이라, 지희는 실눈을 뜨며 고개를 조명 반대편으로 돌려 빛을 피했다. 앳된 티가 남아있는 속옷을 제외하고는 다른 옷은 전부 벗겼기 때문에, 손목을 쇠사슬로 묶어 천장에 연결해 놓은 그 광경은 흡사 성인 동영상에서 볼 법한 광경과 유사했다. 하지만 그 지희를 둘러싼 분위기는 결코 음란하지도, 퇴폐적이지도 않았다.

"자, 내 질문에 잘 대답해준 지희양에게, 내가 상을 줄게. 묻는 질문에 모두 대답해주는거지."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조명의 바로 뒤에 서있었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지켜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환한 빛이, 오히려 지희의 눈을 가렸다. 마른 입술을 다신 지희는, 결국 질문을 꺼내 물었다.

"당신은… 엘름의 잔당과 한편인거죠?"

"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거야, 슈프림은 착한 편인데, 착한 편을 상대로 싸우고 있잖아요."

"하지만 슈프림은 착한 편이 아닌걸?"

"슈프림은 착한 편이에요! 지구를 침공한 엘름을 상대로 싸웠잖아요!"

"아니지. 지구를 위해 엘름을 상대한건 마법소녀들이었지. 슈프림은 그 소녀들을 도와줬을 뿐이었고. 슈프림은 지구에서 엘름과 직접 싸운적은 없어."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 달라, 지희야."

나는 이 어린 소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줬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건 어느샌가 생긴 버릇이었다. 나쁜 버릇이라는 건 알겠지만, 나름 재밌는 버릇이라고도 생각해서, 고칠 생각은 없었다.

"엘름이 왜 나쁜건지 이야기 해볼래?"

"엘름은… 지구를 손에 넣으려고 했어요."

"그게 나쁜 일일까?"

"당연하죠! 당신은 지구가 다른 자들의 손에 넘어가면 좋겠나요?"

"물론 아니지."

"그럼 엘름을 나쁜 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당연한거에요!"

"하지만 지희야, 슈프림이나 엘름이나, 지구를 손에 넣고 싶어하는 마음은 똑같아."

"그럴리가요!"

지희가 소리쳤다. 쇠사슬이 짤랑거리며 부딪쳤다. 자신의 처지를 순간 망각한 듯 했다. 그것을 노렸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오, 그게 맞단다. 단지 명분의 차이일 뿐이지. 엘름은 명분이 없이 힘을 앞세워 지구를 손에 넣으려고 했어. 하지만 명분 없이는 반발을 막을 수 없어. 슈프림은… 그 반발을 명분으로 삼아 우리에게 찾아온거고."

지희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내 말을 이해하는 눈빛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음… 알기 쉽게 옛 이야기를 해줄까? 옛날 옛적에,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옛날, 한 부족이 계곡에 살고 있었어. 부족은 그 계곡을 마음대로 다니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 그런데 그 계곡은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좋은 통로여서,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땅이었지. 어느날, 한 거대한 나라가 그 땅을 얻기 위해 계곡으로 쳐들어왔어. 그들은 매우 강했고 그 힘을 가지고 부족을 억눌렀지. 그때, 그 거대한 나라를 싫어하던 다른 나라가 부족을 찾아가 총을 주면서 속삭였어.

'이 총으로 저 자들로 부터 나라를 지키도록 하게. 만약 성공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계곡을 쓸 수 있게 도와주기만 하면 되.'

그 작은 부족은 환호하며 그 총을 받아들고 거대한 나라와 싸웠어.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나라는 결국 패배하고 자기의 땅으로 되돌아갔지. 부족을 도운 나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계곡을 활보했고, 부족은 더이상 계곡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었지. 자. 그럼 이 이야기에서 계곡을 차지한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부족을… 도운 나라요."

"그렇지. 정답이야. 지희야! 환하게 웃으렴! 좋아해도 좋단다!"

자, 이제 작업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위생 장갑과 모자, 마스크를 쓰고 가방을 열었다. 차갑게 빛나는 메스와 칼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수납되어 있었다. 소녀의 아름다운 피부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칼을 꺼내들어 날의 상태를 살펴봤다. 완벽해.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궁금하지는 않나 보지?"

"알고 있어요."

지희가 말했다.

"본부에서 이야기 해 줬어요."

"그래? 정말 잘 된 일이네. 내가 드디어 유명해졌잖아."

"그 칼로 뭘 하려는거죠? 절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아, 물론. 살려줄거란다. 이 칼은 널 죽이기 위해 쓰는게 아냐."

계속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스크가 너무 걸리적 거렸다. 칼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마스크를 잡아 끌어내렸다. 지희의 눈 앞, 아마 그녀는 내 얼굴을 지켜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그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익명으로 남는 것은 포기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마법소녀야. 그리고 내 능력은, 사람을 치료하는거지. 내가 대학에서 의학을 배운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냐. 사람이 죽지 않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알고 싶었던 것 뿐이지."

칼을 꺼내, 지희의 배에 가져다댔다. 지희는 차가운 금속의 촉감에 움찔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어머, 움직이지 마렴. 괜히 움직였다가 이상한 내장이 다치면 안되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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