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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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本格 第二次 世界大戰史>
만월의 밤.


#1
유럽 전역을 불태웠던 1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의 잠깐동안의 평화. 1921년 발효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1930년 발효된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전 세계의 다섯 대양을 지배하던 미합중국 해군, 대영제국 왕립해군, 일본 제국 해군은 전 세계 해군 역사상 유래없는 대규모 군비 축소 경쟁에 의해 대량의 주력함과 노후함을 폐기당하고 신함 건조에 엄청난 제약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국이었고 일본 제국을 억압한다는 명분을 가진 미합중국이나 대영제국에 비해, 자원이나 군사력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열세적이었던 일본 제국은 일단 조약을 받아들이는 한편 뒤로는 강대한 연합 함대 건조를 위해 여러가지 궁리를 도모했다.


그런데 조약의 효력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자 일본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워싱턴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에 진수한 미국의 콜로라도 급 전함 2번함 '메릴랜드(BB-46 Maryland)'와 일본의 나가토 급 전함 1번함 '나가토(長門)'는 조약에 준한 함정으로 인정되었으나, 나가토의 자매함인 2번함 '무츠(陸奧)'는 의장 공사만을 남겨둔 완공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열강은 조약상 무츠가 미완성 상태라고 판단하고 무츠의 폐함을 요구했다. 당연히 일본 제국은 무츠의 폐함 요구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매함이 최소한 1척 이상은 있어야 나가토 급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고 동시에 연합 함대의 전력이 보존된다고 판단했다.


이에따라 일본 해군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무츠에 수병들을 승함시킨뒤 억지로 취역시키며 제대로 활동하는 전함이니 폐함 처분은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했고 일본 해군과 한동안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미국 해군과 영국 해군은 한 발 물러서서 무츠를 인정하는 대가로 신형 전함 4척-콜로라도 급 2척, 넬슨 급 2척-의 건조 권한을 요구했다. 결국 일본 제국은 이 신형 전함 4척의 건조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간신히 무츠의 존재를 인정 받았으며 이런 행동의 밑바탕에는 열강은 설계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지만 자신들은 나가토 급 2척을 바로 작전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잠시나마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우위를 좇은 이 결정은 후에 일본 제국의 패퇴를 앞당기게 되었다.


더불어 조약상 표면적으로는 경순양함으로 건조하면서 함체 자체는 중순양함 급으로 설계하여 주포만 교체하면 바로 중순양함으로 활동할 수 있는 모가미(最上) 급 중순양함을 건조하거나, 부여받은 항공모함용 배수량을 개장 항공모함 아카기(赤城)와 카가(加賀)의 건조에 사용하고는 배수량 10,000톤 이하의 함정은 모두 보조함으로 취급한다는 워싱턴 조약의 허점을 이용해 배수량을 9,700톤급으로 맞춘 경항공모함 류조(龍驤) 급을 건조하는등 조약의 함대 전체 배수량 제한과 허점 하에서 온갖 편법을 써가면서까지 어떻게든 타국 열강과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수상함대를 건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가했다.


열강도 물론 일본의 이런 편법을 눈치 채지 못한건 아니기 때문에 열강은 모가미급 중순양함을 형식상의 경순양함이 아닌 본래 체급인 중순양함으로 취급했고, 류조급 항공모함 역시 런던 조약이 발효되면서부터 배수량 10,000톤 급 이하도 항공모함으로 취급하여 조약을 적용시켰기 때문에 워싱턴 조약에 맞춰 건조되었던 류조는 다시금 런던 조약에 맞춰 대대적인 개장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한편 본래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2번함으로 건조중이던 아카기는 워싱턴 조약이 발효되며 자매함 아마기와 함께 폐함 처분을 당해야 했지만 미국의 렉싱턴 급을 선례 삼아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고 본래 카가급 전함으로 건조중이던 카가 역시 해체 하는 대신  관동대지진으로 수복 불가능하게 파손된 아마기의 개장 재료를 사용하여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다.


이렇게 일본 제국 해군의 팽창을 염려해 어떻게든 묶어두려 했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은 조약의 효과가 말소되는 1936년을 단 2년 앞둔 1934년에 일본 제국이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끝을 맺게 되었다. 더 이상 함대의 팽창을 막을게 없어진 일본 제국은 1937년부터 자국민들에게조차 기밀 엄수를 강요하며 비밀리에 최신형 전함의 건조에 착수하게 되었고 제국 해군의 팽창을 염려한 미국 해군과 영국 해군은 이미 붕괴되어버린 조약을 끝까지 준수하며 '16인치급 주포를 탑재한 배수량 45,000톤 이내의 전함' 건조에 동의, 대영제국은 킹 조지 5세(King George V) 급, 미합중국은 아이오와(Iowa) 급 전함의 설계에 각기 착수한다.


#2
1938년부터 일본 제국은 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갖기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에따라 일본 제국 해군의 활동 반경은 점차 남태평양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일본 제국의 팽창을 염려한 미국 해군은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ANZAC)의 지원과 태평양 지역의 보호를 위해 남태평양의 낙도 이곳저곳에 전선기지를 세우고 그곳을 기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두 세력은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 등지에서 소규모 국지전을 벌이긴 했으나 대부분은 단순한 무력 충돌 수준으로 쌍방 모두 불필요한 전투는 피했기 때문에 아직 대규모 난전 상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을 경계하던 일본 제국 해군은 미국을 태평양에서 몰아내기위해 극비리에 비밀 작전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3
1941년 7월 14일. 오전 03:47.
크리스마스 제도 근해.
제 6 함대 기함 나가토(長門).


만월이 뜬 칠흑의 밤바다. 별하늘은 그대로 바다에 비쳐 은하수를 연상시키는듯 했다. 마치 보름달의 이끌림에 따라가듯 아른거리는 물안개를 가르며 유유히 항진하는 군함이 있었다. 일본 제국 해군 제 6 함대의 기함이자 일본 제국 연합함대 전체의 기함이기도한 나가토였다. 야간 식별 저하를 위해 필요 최소한도의 조명만 킨 채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나가토는 초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위용을 뽐내며 밤바다를 위풍당당하게 내달렸다. 당직사관 몇명이 야간 점호중인 전함의 전방 갑판에 누군가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제 6 함대의 사령관 오카모토 노구치(桜本野口)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나가토의 함수를 한시간째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관 한명이 종이를 들고 다가왔다.


"잠수함 이-607(伊-607)로부터 입전(*)입니다. 사령관님."
(* 入電, 전보나 전화등이 들어옴을 뜻하는 한자어.)


"좋네. 읽어보게."


"'오전 05시 06분을 기해 아타메 환초에서 적 미국 해군 함대 발견. 현재 본 함은 적에게 포착되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며 적 함대를 추격중.'"


오카모토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가증스런 미국 해군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 망할 푸른 눈 코쟁이들에게 한방 먹여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일단 오카모토는 부관과 함께 함교로 돌아간뒤 남태평양의 지도를 펼치고 아군 함대의 위치를 파악했다. 지도에는 진한 적색 바탕의 육각형에 금색 국화 문양으로 기함이라 표시된 나가토와 진녹색 육각형으로 표시된 후소(扶桑)급 전함 2번함 야마시로(山城)를 필두로 황색 삼각형으로 표시된 타카오(高雄)급 중순양함 1번함 타카오, 2번함 아타고(愛宕)가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고 그 뒤로는 주황색 삼각형으로 표시된 모가미급 중순양함 2번함 미쿠마(三隈)와 4번함 쿠마노(熊野)가 각기 대열을 유지한채 항진중이라는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를 유심히 본 오카모토는 항모가 없는 것이 신경쓰여 부관에게 함대 구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현재 작전에 동원 가능한 함정 수는 몇종 몇척인가?"


"본함과 더불어 후소급 전함 1척, 타카오, 모가미급 중순양함 각 2척, 후부키급 구축함 6척, 쇼카쿠급 공모(*) 2척으로 총합 13척 입니다."
(* 空母, 항공모함의 일본식 준말.)


"쇼카쿠급이? 이 근처에?"


"네. 제 5 항공모함 전대 소속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모두 현재 마니와니 환초 근처에서 대기중입니다."


부관은 대답한 김에 실례라면서 이번에는 지도의 마니와니 환초 근처에 청색 사각형으로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위치를 표시해두었다. 새벽이기도 하고 정찰기를 띄우기도 여의치 않아서 아직은 적의 함대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공모가 따라붙는다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거라 오카모토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카모토는 일단 마케난 제도 근처에 함대를 집결시켜 날이 밝는대로 미해군을 치기로 결심하고 우선 적 함대의 구성을 파악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공모에 연락해 날이 밝는데로 정찰기를 띄우라고 전하게. 그리고 함대는 이제부터 마케난 제도로 향한다."


"알겠습니다."


나가토의 8만마력 기관이 보일러의 출력상승과 동시에 포효하며 나가토는 26노트(약 48km/h)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칠흑의 밤바다에 나가토가 그려내는 항적이 햐얗게 부서지면서 함미로 길게 늘어졌다.


#4
오전 05:28.
마니와니 제도.
제 3 함대, 제 5 항공모함 전대 소속 항공모함 즈이카쿠.


함교의 사령관실에는 군함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소녀가 태연하게 밝은 크림색 코트가 걸쳐진 안락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십대 중반처럼 보이는 외모에, 세일러복이라는 나이에 걸맞는 복장을 입은 소녀였다. 그녀는 창문을 넘어 사령관실로 비쳐들어오는 아침놀을 바라보며 오늘은 어떻게 시간을 때울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자니 부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다소 피곤한듯한 목소리는 격무에 지친 탓이었다. 신속히 사령관실의 문이 열리며 A4 사이즈의 종이를 손에 쥔 부관이 나타났다. 소녀는 사령관의 전령일 거라 생각하는 종이를 흘끗 바라보고는 용무를 물었다.


"오카모토 사령관의 기함 '나가토'로부터 입전입니다."


"읽어보세요."


소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다. 자신의 시간을 깬 것이 못마땅한 점도 없잖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 자신의 사고방식이 다소 냉소적인 탓도 있지만 오카모토가 보낸 전령이라는 소식에 소녀는 절로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현시간부로 전 함대는 작전에 돌입한다. 전 함, 마케난 제도로 집결하도록. 또한 공모는 정찰기를 발진시켜 적 함대의 동향을 살필 것', 이상입니다."


"후우... 오카모토 그 사람은 우리가 뭐 맨날 놀고먹는줄 알아요.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바쁜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신속히 준비해주세요."


"넷."


부관이 나가자 소녀는 한숨을 쉬면서 벽에 붙여둔 남태평양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즈이카쿠의 최대속도는 34노트 였지만, 현재는 기관고장으로 수리중이었기에 16노트(약 29.6km/h) 가까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는 마케난 제도까지 아무리 빨리 항진하더라도 최소한 2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소녀는 나가토에게 기관 고장때문에 꽤 늦을것 같다는 입전을 보낸뒤 함대와 발을 맞추기위해 기관 수리를 병행하며 조속히 출항 준비를 하기로 했다. 소녀에게 오늘은 조금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항모 즈이카쿠의 함장인 이 소녀야말로 이번 전쟁의 전황을 바꿀수도 있는 중요한 인물, 와지마 레이코(和島 零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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