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릿츠 크리그

작가의집 4 2,983


Blitzkrieg



"신사숙녀 여러분! 피가 멎을 날이 없는 이곳, '블릿츠 크리그'에 잘 오셨습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형 격투장을 왕왕 울렸다.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의 함성소리가 뒤이어 격투장을 메웠다.

-울버린! 울버린! 울버린!
-나이트! 나이트! 나이트!

팔각형의 격투장 양 끝 입구에서 곧 있을 싸움을 준비하는 선수들의 이름이 관객들의 입에서 오르내려졌다. 큰 함성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격투장의 한쪽 끝 진입로가 크게 흔들렸다. 안에 있는 선수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들겨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굵은 통나무로 만든 5m가량 높이의 큰 문이 박살날 기세로 두드려대는 그 박력에 관객들은 더욱 흥분해 그 입구 안쪽에 있는 선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울버린! 울버린!

사회자는 내심 자신도 못 참겠다는 것 마냥 온몸을 비틀며 사회를 계속했다.

"선수들의 피가 끓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옵니다! 바로 선수 소개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죠?!"

긍정의 함성소리가 객석을 흔들었다.

"좌코너! 긍지의 파이터, 어떤 공격도 날 뚫을 수는 없다! 걸어다니는 철옹성! 나-이트!"

링의 좌측 문이 열리자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철갑옷과 큰지막한 랜스를 치켜든 4m 신장의 형체가 걸어나왔다. 나이트라 불린 선수는 랜스를 머리위로 치켜들더니 관객들의 발구름 소리에 맞춰 허공을 향해 랜스를 찔렀다.

"우코너! 야생에서 온 진짜 야만전사! 언제나 분노에 찬 격노 그 자체! 울-버-린!"

아까부터 심하게 두들겨지던 우코너의 문이 기어이 조각조각 박살나며 울버린이라 불린 선수가 달려나왔다. 하지만 상대선수를 향한 광기어린 그 움직임은몸에 묶인 쇠사슬이 막고있었다. 울버린은 나이트보다 조금 작은 3.5m 정도 되는 신장에 양손에 살벌하게 생긴 세갈래 강철 클로를 찬 모습이었다. 방어구는 대충 걸친 얼기설기 엮어진 가죽옷이 전부였다.

"오오, 울버린. 아직 경기가 시작도 안했다구요! 언제부터 시작하느냐면- 바로 지금!"

땡 하고 경쾌하게 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울버린을 묶어두던 쇠사슬이 풀리고, 울버린이 나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이트는 기다렸다는 듯 랜스를 앞으로 세워 탄탄하게 방어자세를 잡았다. 격돌을 몇 초 앞둔 두 선수의 입에서 사람의 것이 아님이 자명한 괴성소리가 울려퍼졌다.

"생존과 죽음을 건 두 트롤의 격투! 이제- 시작됩니다!!!"

클로에 찢겨지고, 랜스에 꿰뚫린 두 선수의 몸에서 거무튀튀한 녹색 피가 팍 터져나왔다.

그 두 선수는 사람이 아닌 트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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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울버린이 나이트의 두 다리를 모두 참혹하게 찢어 떼어버린 뒤에 마무리되었다 . 거대한 들것을 든 트롤 두명이 나이트를 들것에 태워 경기장 진입로 안쪽으로 들어가고, 울버린은 진행요원들이 던진 수많은 쇠사슬에 구속된 채 가까스로 뜯어먹던 나이트의 오른다리를 내려놓고 링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나이트의 뜯겨진 두 다리도 진행요원 두 서넛이 붙어 링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오늘의 승리자는 울버린입니다! 객석의 여러분들은 질서정연하게 나가주세요. 울버린에게 돈을 거신 분은 표찰을 가지고 매표소로 가서 판돈을 받으시면 되겠습니다."

사회자가 탄성소리 가득한 객석을 통제하며 말했다. 10연승을 앞둔 나이트의 패배에 불만인 관객이 많았기에 진행요원들이 애를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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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격투장 뒤쪽에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침상에 뉘여진 나이트의 철갑옷을 벗겨내며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으으으으윽.....

나이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자, 흰옷입은 사람 중 여성 한 명이 나이트의 거대한 얼굴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 뺨을 어루만져주며 조곤조곤히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이트. 엄마가 옆에 있어줄게. 전에는 이것보다 더 심한 상처도 잘 이겨냈잖아? 조금만 참아..."

여성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나이트의 눈가를 자신의 옷으로 슥슥 닦아주고 상처를 살폈다.

트롤이 역시 트롤인지라, 나이트의 잘린 두 다리 단면은 눈에 띄일 정도로 움질움질거리며 새 살이 덮이고 있었다. 여자는 주변의 인원들에게 소리질렀다.

"너희들 이 앨 지금 못걷게 하려는거지?! 시보나! 당장 칼 가져와서 회복된 곳 다시 째 내! 로난!? 나이트 다리 안가져오고 뭐하는데?!!"

갑작스레 꾸중을 받은 인원들이 허둥대자, 여성은 직접 가져온 카을 들고 나이트의 잘린 다리 단면의 새 살을 과감하게 째냈다.

"미안, 미안해, 나이트. 굉장히 아플거야."
-끄어어어억!!!

나이트가 듣기싫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다리도 붙이지 못한 상태에서 상처가 아물어버리면 후에 나이트가 걸을 수 없을 수도 있기에 여성은 상처를 계속해서 째내었다. 곧이어 나이트의 잘린 다리가 도착했다. 다리를 들고 온 장정 셋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깨끗한 흰 천 위에 큼지막한 다리를 내려놓았다. 나이트의 치료를 지휘하던 여성은 그녀 옆사람에게 말했다.

"좋아, 뼈도 슬슬 새 뼈가 붙고있을 테니 톱으로 깨끗하게 단면 정리한 다음에 다리를 붙여. 길이는  양 다리가 정확히 일치하게 잘라내고. 봉합에 필요한 살은 이녀석 엉덩이나 겨드랑이에서 조금 떼내다가 쓰면 될거야."

여자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만일 전처럼 아이 무릎뼈가 다리밖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이 벌어지면 너부터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옆에 있던 사람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여성은 상대의 눈을 노려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링 반대편에 마련된 다른 선수 대기실 쪽으로 뛰어갔다. 울버린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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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버린은 외상이 심각하지 않아 그냥 놔두면 알아서 다 회복될 수준이었지만 그 정신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울버린은 자신의 머리를 바닥에 계속해서 찧어대며 미친듯 소릴 질렀다. 울버린의 이마에서 튀긴 녹색 피가 어느새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울버린? 울비, 울비! 엄마가 여기 왔어. 엄마라구!"

울버린은 머리찧기를 그만두고 여성을 바라봤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서 무슨 약에 취한 듯 심하게 풀려버린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여성은 놀람에 벌어지는 자신의 입을 두손으로 가리며 울버린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울버린의 큰 얼굴을 안아주며 말했다. 

"세상에나, 울비. 세상에. 괜찮은거니? 제발 괜찮았으면 좋을텐데.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 짓을.."

여성이 얼마간 울버린의 얼굴을 안고 토닥여주자, 풀린 울버린의 눈이 슬슬 제자리를 찾았다. 정신을 차린 울버린 자신의 얼굴을 안은 여성의 몸통을 손 하나로 살짝 감싸고는 자신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괜찮아, 울비. 나이트를 그렇게 만든건 네가 아니였어. 절대로 네가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마.."

그들이 서로 위로하며 흐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인! 우리 두 선수들 상태는 어떠한가?"

제인이라 불린 여성이 울버린의 얼굴에서 떨어져 뒤를 돌자, 이 세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검은 양복 정장 차림에 시가까지 문 뚱뚱한 사내가 거한 둘을 뒤에 거느리고 다가서고 있었다. 제인은 빠른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따귀를 때렸다. 거한 둘이 말릴 틈도 없었다. 사내는 몸을 추스리고 입에서 떨어진 시가를 다시 주워들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허허허, 이 년 손 매운것 좀 보시게."
"앨런 재거! 당신 또 울버린에게 광분제를 먹인거야? 어쩌면 그렇게 아이들에게 잔인하게 대할 수 있어?"

앨런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시가연기를 빨더니 이죽대며 말했다.

"아이들은 무슨, 괴물새끼들을 괴물새끼처럼 다룬게 뭐 잘못인가?"
"이...!"

제인이 재차 따귀를 때리려 손을 치켜들자, 앨런의 뒤에 서있던 거한이 재빨리 제인의 손을 붙잡아 꺾었다. 제인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앨런은 가래침을 바닥에 탁 뱉고선 제인을 보고 쏘아붙였다.

"이런 개년, 트롤들 틈바구니서 이끼나 긁어먹고 살던 걸 건져다가 먹이고 재워줫더니 은인인  나한테 손찌검을 해? 한번만 더 그랬담 봐. 투기장 옆 사창가로 던져줄테니까. 동전 몇 개만 던져주면 동네 개새끼도 널 따먹을 수 있게 말이야!" 

앨런이 돌아서서 왔던길로 돌아가자, 거한은 제인의 손을 놓고 그 뒤를 따랐다. 앨런은 뒤따른 거한의 턱에 물고있던 시가를 쑤셔박았다. 살이 타는 고통에 거한이 비명지르며 물러나자, 앨런은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부턴 더 빠르게 움직여라."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까부터 가만히만 있던 다른 거한에게 말했다.

"그리고 넌 오늘부터 남창이다."
"예?"

앨런이 손짓했다.

"이 새끼 사창가로 끌고가. 가격은 동화 한닢이다!"

다른 거한들이 어디선가 달려와 지목받은 남자를 끌고갔다. 안타까운 비명소리가 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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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도착한 앨런은 의자에 풀썩 앉으며 비서에게 말했다.

"오늘 수익은?"

비서는 수기하던 서류를 보며 대답했다.

"울버린의 승리로 승부를 조정한 덕에 나이트에 배팅한 사람들 돈은 모두 이쪽으로 들어왔습니다. 불만이야 좀 있겠지만 다음에도 또 찾아올 사람이 아쉬워봤자 어쩌겠습니까."

비서가 키득거렸다.

"블러디메리의 매출현황은?"

앨런도 덩달아 키득대며 되물어왔다. "언제나 하던대로입니다. 다시 찾으러 오는 사람에겐 값을 두배로. 알려주신대로 한 덕에 수요니 매출이니 모두 늘어서 공급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비서는 말을 마치려다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아, 공급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블러디 메리 생산에 쓰일 대마와 크랙 약초를 재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던 실리아의 주세페씨와 연락이 묘연해졌습니다."

앨런은 그 말을 듣고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눌러 끄며 말했다.

"젠장. 이래서 이탈리아놈은 믿으면 안되는거야. 전쟁부터 농사까지 제대로 하는게 없거든."

비서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앨런에게 물어왔다.

"사장님이 살던곳은 어찌 생겼을지 참 궁금합니다."
"어찌 생겼는지는 하나도 안중요해! 내가 얼마나 거기서 잘 날라다녔는지가 중요하지. 그래, 내가 멋대가리 없는 내 성씨를 예거에서 재거로 갈아치웠을 때 쯤 말이야-"

본격적으로 자신의 무용담을 풀어놓으려던 앨런의 입을 사무실에 들어온 사무실 문지기가 막고 말았다.

"사장님, 손님이 와 계십니다."
"타이밍 참 개같군. 누군데?"
"이름을 밝히질 않아서-"

앨런은 책상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를 휙 던졌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이름부터 밝히라고 해!"

벽에 맞아 산산조각나는 재떨이를 가까스로 피한 문지기는 재빨리 덧붙였다.

"깜장로브입니다. 수호자들일게 뻔합니다!"
"그럼 먼저 그렇게 말하던가! 수호자들이라. 나 못지않게 깽판치고 다니는 놈들 같던데."

앨런은 살찐 턱을 잠시 매만지더니 비서에게 말했다.

"일단 크랙 섞은 차부터 한잔 대접해드려라. 곧 갈테니까."

비서는 앨런이 한 말의 악독한 중의성을 알아채고 키득거리며 손님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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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와는 달리 나이트의 다리는 깨끗하게 이어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울버린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차츰 정신이 멀쩡해지고 있었다. 제인은 혹여나 다른 아이들에게도 광분제나 크랙을 썼는지 트롤 우리를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지만 다행이도 별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제인은 잠든 울버린의 머릴 다독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이 떠올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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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먼? ..대니?! 다들 어디있어요? 이봐요!"

제인은 갑자기 맹그로브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열대우림에서 썩어빠진 나무등치 몇개만이 보이는 바위투성이 산간으로 바뀌어버린 주변 식생에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게다가 로랜드 고릴라 연구취재를 위해 같이 오고 있던 디스커버리 채널의 수행원들과 카메라맨들도 싹 사라져버렸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제인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야속한 해는 뉘엿뉘엿 지고있었다. 

제인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이런 바위산에 가만히 있어봤자 좋을것이 없다 판단하고 일단 은신처부터 찾기로 했다. 같이 동행하던 수행원 중 하나이자 생존 전문가였던 에드워드가 강조했던 것 처럼 조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건 '식량, 물, 은신처'였다. 제인은 잠시 에드워드가 과장된 제스처로 그걸 설명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제인은 바위산을 좀 돌아다니다가 마침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크기의 바위틈새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말라죽은 나뭇가지와 바위 이끼를 모은 곳에 에드워드가 선물한 파이어 스타터를 싹 긁었다. 차디찬 산바람에 바짝 마른 땔감은 쉽게 불이 붙었고, 바위틈은 차츰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찼다. 제인은 주저앉아서 자신의 무릎을 안으며 지금 상황이 어찌된 일인지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열대우림이 바위투성이 민둥산으로 변하는 상황을 쉬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땔감을 불에 더 던져넣으며 생각하던 제인의 몸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쿵- 쿵- 하고 땅을 울리는 진동이 점점 커지자, 제인은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며 바위틈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러자 제인의 엉덩이를 무언가가 쿡 찔렀다. 제인이 불붙은 장작하나를 들어 불을 비춰봤다. 제인의 등 뒤엔 사람의 백골이 그득하니 쌓여있었다.

제인은 놀라 비명지르며 바위틈을 벗어났다. 정신없이 뛰던 그녀는 자신의 몸이 잠시 휙 띄워질 정도의 큰 진동에 멈춰섰다. 제인의 앞엔 4m는 훌쩍 넘어보이는 배불뚝이 거인 두명이 나무줄기를 그대로 뽑아낸 듯한 모양의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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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제인이 나이트와 울버린을 만난 첫 날이었다. 물론 지금같이 서로 보듬는 각별한 관계는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제인이 잡아먹히지 않게 도망다니는 처지였지만 제인은 영역을 침범한 사람을 죽일 듯 경계하는 비비에게 접근하는 것 처럼 트롤을 조금 크고 난폭한 고릴라 내지 비비로 생각하며 그들에게 서서히, 그리고 죽지 않을 정도만 익숙해져갔다. 몇주간의 그런 노력을 거쳐 트롤들도 점차 제인을 눈에 띄어도 없는 존재마냥 치부하고 해치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 트롤들과 동물학자의 사이를 각별하게 만든것은 다름아닌 앨런 재거의 트롤 사냥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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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저 새끼들은 어차피 살 붙는 속도도 쩔어주니까 갈고리 던질 때 힘 아끼지 마!"

중무장한 용병들 사이에 호위받고 있는 앨런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트롤들에게 쇠갈고리를 던지는 부하들을 보며 윽박질렀다.

"잘 던져서 쓰러뜨려! 크랙 연기 좀 맡게 하면 알아서 곯아떨어질거다."

트롤 하나가 여러개의 갈고리에 꿰여 엎어지자, 뒤이어 마스크를 쓰고 작은 풀무를 든 인원이 뛰어가 트롤의 얼굴에 연기를 뿌려댔다. 엎어진 트롤은 무력하게 괴성을 몇 번 지르더니 곧이어 눈이 풀려 완전히 잠들고 말았다. 나이트와 울버린도 같은 방식으로 땅바닥에 엎어지자, 그걸 지켜보던 제인이 바위틈에서 튀어나왔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시체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는 짓이 영락없는 아프리카의 밀렵꾼들이 하던 짓이니 동물학자인 그녀로선 참을 수가 없었다.

"멈춰! 이 후레자식들아! 거인들에게 무슨짓을 하는거야?!"

제인이 불쑥 튀어들어와 갈고리를 던지는 사람들을 가로막으며 소리치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앨런 재거였다.

"...영어? 야, 저 년 잡아!"

제인은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달려들자 쓰러진 울버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세렝게티에서 새끼 치타를 안아든 자신을 구타하던 밀렵꾼들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 눈앞에서 자신을 감싸않고 몰매를 맞는 제인을 보며 트롤 울버린은 난생 처음 울컥하는 기분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트롤을 난생 처음 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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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보스. 협상을 위해 파견왔던 카탈리나가 사창가 거리 입구에서 다 벗겨진채로 '은화 한닢에 일회'란 챗말 앞에 늘어져 있었습니다. -네 -네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보스."

검은 로브의 사내는 모포에 싸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는 여성을 옆에 둔 채로 엄지손가락을 귀에, 새끼손가락을 입에 댄 채로 전화하 듯 말하고 있었다. 얼핏 통화같아 보이는 행위를 끝낸 사내는 옆에 앉아있는 여성의 모포를 살짝 들춰 안을 들여다 본 다음 혀를 츳츳 찼다. 발견당시 동전통에 있던 은화의 갯수며, 몸 상태까지 직접 확인해보니 카탈리나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당했는지 상상이 갔다.  더욱이, 약에도 취하나 상태였는지 카탈리나는 아까까지 계속 그를 보며 "저 잘해요." 만 읇조리고 있었다. 사내는 카탈리나를 훌쩍 들쳐업고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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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은 지하 트롤격투장이 위차한 자가르거스 시내를 등대 최상층의 창가를 통해 보며 히죽거렸다. 그가 이곳 해변가에 코카인과 대마종자가 든 캐리어 가방과 함께 쓸려왔을 적엔 자가르거스는 밤에 불빛 한점 보이지 않던 그저 평범한 어촌이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이곳은 붉은 홍등과 블러디메리의 연기가 충만한 밤을 가진 번화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물론 이곳의 낮이 이전보다 더 암흑에 찌들어버린 것은 가볍게 무시하고서 하는 '번화' 였지만 말이다.

먼저 도시의 몰지각한 영주부터 코카인에 중독시키며 시작했던 그의 사업은 대마종자의 재배 성공과 지방 야산에 자생하던 약초덕에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자가르거스 주민들은 약초의 진통, 진정효과를 그냥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나 썼던 모양이었지만 앨런의 마약을 보는 비상한 눈은 약초를 괴악한 중독성의 환각제로 바꾸고 말았고, 대마와 약초를 섞은 담배는 앨런도 한번 피워보고 다신 건들지 않고 싶을 정도로 효과가 좋은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최근 대륙의 상류층에 유행하고 있는 마약 '블러디 메리'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자가르거스가 어둠에 찌들며 번성할 때 쯤 앨런이 여흥거리로 생각해냈던것이 몬스터 투기장이었다. 투기장설립 추진을 위해 제일 먼저 시작한 곳이 마침 자가르거스 인근의 트롤들의 서식지 였었기에 그곳에 떨어져 살고 있던 제인도 덤으로 발견하게 되었고, 몬스터 투기장이 트롤격투장으로 바뀐 이유는 제인의 말을 썩 잘 알아듣던 트롤들의 행동이 큰 요인이었다.

앨런은 시가커터로 피우던 시가를 자르고 뒤돌아 등대를 나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거한 두명이 뒤따랐다. 잠들기 전에 자신의 상권 영역을 죄다 한번씩 답사하는게 앨런의 버릇이었다. 

등대 계단을 내려가 거한이 열어 준 문을 열고 나가자, 등대부터 자가르거스 시내까지 이어지는 둑길에 누군가 한명 버티듯 서있는것이 앨런의 눈에 띄었다. 앨런을 잠시 뒤로 물린 거한이 앞으로 나서서 확인해보니 그 사람은 검은로브 차림이었다. 앨런은 그 사람의 행색을 인식하자, 피식 웃었다.

"밤중에 그 차림으로 다녀도 누가 도선생으로 오인하지 않나? 수호자씨."

검은 로브의 인물은 말없이 앨런 일행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거한들은 허리춤에 찬 단검을 일제히 뽑고는 앨런을 보호했다.

"애새끼가 사람이 말을 하는데 씹기는... 가라."

거한 둘이 검은로브의 인물에게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도달한 거한이 검을 크게 휘둘러 베었지만 상대는 몸만 살짝 비틀어 검을 피하고는 로브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 거한의 목을 매끄럽게 그어버렸다. 후속해서 오는 거한이 놀라 주춤대자, 검은로브의 인물은 거한에게 빠르게 접근해 팔을 밖으로 꺾어버린 뒤 손목의 동맥을 보이지도 않는 손놀림으로 여러차례 난도질해버렸다. 거한은 손목에서 피를 뿜으며 비명을 지르다 이내 쓰러져버렸다.

"어... 이런 씨발..."

앨런은 뒷걸음질 치며 움찔대었다. 그러다가 양복상의를 벗어던지고 몸을 낮춰 신고있던 구두를 고쳐신었다.

"이봐, 이봐, 나 도말칠 수 있는 기회라도 좀 줘보라고. 어치피 난 보는것처럼 느려터져서 얼마 도망도 못갈거야. 응?"

검은로브는 앨런이 뭐라 말하든 게의치 않고 계속해서 다가섰다. 단검을 든 검은로브가 앨런의 바로 코앞까지 도달하자, 앨런의 비굴해진 얼굴이 달빛에 비춰져 보였다.

"이봐, 다시 한번 생각해봐. 난 존나 재력가야. 수호자들인지 뭔지가 날 죽이려고 보냈든 내가 그놈들이 주는 월급보다 더 많은걸 지불해줄 수 있다고. 이를테면-"

앨런은 오른신발을 고쳐신던 왼손을 바짓자락에 집어넣더니 그대로 튀어오르듯 일어서며 바짓자락속에 넣었던 왼손을 흩뿌리듯 검은 로브에게 휘둘렀다.

"-이런거지!"

그의 왼손엔 면도날 수준으로 날이 갈린 잭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검은로브의 인물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로브는 다리춤부터 후드까지 깔끔하게 일직선을 그리며 잘려버렸다. 검은로브는 예리하게 베여버린 얼굴에 흐르는 피를 훔쳐닦고는 곧바로 앨런에게 달려들었다. 앨런은 나이프를 고쳐잡고 히죽 웃었다.

"내가 전국구를 대상으로 약장사하면서 살아있을 수 있던 이유?"

앨런은 상대가 휘두르는 단검을 잭나이프로 빗겨 받아치며 오른손으로 상대가 무기를 잡은 팔을 잡아챘다. 검은로브는 부들부들 떨며 뿌리치려했지만 앨런의 악력은 예상외로 억셌다.

"너같이 방심하는 새끼들 덕분이야!"

앨런은 이마팍으로 상대의 얼굴을 거세게 받아버리고는 복부에 나이프를 쑤셔박아 가로로 죽 그어버렸다. 검은로브는 비명지를 여유조차 나지 않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앨런은 단검을 놓친 검으로브의 열린 복부안으로 거침않이 손을 집어넣더니 내용물을 잡아 빼 나이프로 잘라버렸다. 검은 로브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앨런은 더러워진 손을 기분 나쁜 듯 쳐다보더니 그대로 그 자리를 떴다.

"나한테 칼질로 덤빈게 잘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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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검은 로브의 사내는 긴 생각을 마쳤다. 그는 산등성이의 풀숲에서 등대 둑길을 따라 도시로 향하는 앨런과 거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방법, 여러 장소로 시뮬레이션 해봤지만 마지막번째 생각처럼 앨런은 생각보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상대였다.

"암살은 무리겠는데."

사내는 직접 해치우는 방법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짓곤 다른 방법을 간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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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헐크' 와 '호건'의 경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는 나이트의 곁으로 다가셨다. 헐크와 호건은 둘 모두 무기 없이 격투하는 컨셉트인지라 뼈가 부러진 것만 잘 조치하면 되었기에 걱정은 별로 없었다. 제인은 나이트의 몸을 한번 주욱 훑었다. 군더더기 살 없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제인이 처음 트롤들을 봤을 때는 배불뚝이의 영락없는 괴물이었지만 영양상태가 양호해지고 앨런의 지시로써 반 강제로 운동을 시키니 훌륭한 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제인은 바닥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민둥산에서 살던 트롤들은 가뭄에 콩나듯 그곳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나 동물을 잡아먹으며 연명하던 상태였기에 아프리카의 난민 어린이 마냥 배에 가스에 차 배만 나온 영양실조 기아 상태였었다. 앨런에게 잡혀와 이곳에 오고 나서야 제대로 먹고 관리받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서로 죽일듯 싸우는 매일매일이 과연 트롤들에게 이로운 일인지 걱정되었다. 실제로도 이미 이곳으로 끌려온 트롤 12마리중 5마리는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5마리 모두 앨런의 뒷공작에 광분제를 먹고 미친듯 싸우다 서로 죽어갔었다.

- 우우...

나이트가 잠에서 깨어 자기 옆에 앉은 제인을 보고 손을 뻗었다. 제인은 자기 얼굴만한 손가락 마디를 안아주었다.

"응, 그래, 엄마야."

나이트는 헤 하고 웃어보였다. 제인이 콩고에서 보던 로랜드 고릴라의 웃음과 비슷했다.

"제인 구달 씨?"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제인은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검은로브의 인물이 그녀를 보고 서있었다.

-----

"트롤 격투장을 운영한지 얼마나 됬었지?"
"2년 조금 넘어갑니다 사장님."

앨런의 갑작스런 물음에 비서는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뜯다가 대답했다.

"여흥으로 시작했었는데, 이젠 질렸어. 제인 그년도 너무 기어오르고."

비더는 페이퍼 나이프를 세우며 맞장구쳤다.

"사실, 사장님이 재미로 하시는거라 별 상관은 안하고 있었지만 수익도 제대로 안납니다.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요."

-----

"놈들은 당신과 당신의 자식같은 트롤들의 단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냥 갖고놀다 질리면 버리는 장난감 취급이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잘 먹이고 관리하도록 도와줬는걸요...?"
"벌써 5명이나 죽었습니다. 더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는거 잘 아시잖습니까?"

-----

"내일 경기하는 트롤놈들에게 광분제를 2배로 먹여. 그럼 알아서 더 열심히 싸우다가 뒈지겠지."
"피도 2배로 튈테니 관람료나 배팅액도 두 배로 올려야겠죠?"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앨런이 킬킬 웃으며 시가로 비서를 가리키자 비서도 덩달아 킬킬 웃었다.

-----

"내일 7명의 트롤들은 격투장 안에서 모두 죽습니다. 남은 일곱녀석 모두 다요. 그것도 약에 취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제인은 검은 로브의 남자가 말하는 에렌의 계획에 경악했다. 광분제를 두배로 쓴다면 싸우다 죽기는 커녕 쓴 즉시 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제인은 잠시 고심하더니 결의에 찬 눈으로 검은 로브의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제가 계획한게 있습니다. 내일 그대로 따라주시면 됩니다."

제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뭔가 궁금하다는 식의 눈빛으로 되물어왔다.

"당신 말투가 왠지모르게 굉장히 영국 말씨같네요."
"아...영국이 뭐죠?"
"아뇨. 아무것도 아녜요."

제인은 다른 세계 사람에게 괜한 말을 했다는 투로 손을 저었다. 검은로브의 사내는 무심결에 "아, 브리스틀 출신입니다." 라고 대답하려다가 얼버무린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

격투장 직원이 크랙 약초를 정제한 가루와 블러디 메리 한개를 부숴 같이 반죽한 일가루 반죽덕어리를 들고 울버린 앞에 와 섰다. 그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제인이 말하던 소위 '광분제'였다.

"자, 울버린. 입 벌려. 약 먹을 시간이다."

울버린은 시키는대로 입을 쩍 벌렸다. 

"그래. 오늘이면 끝이지만 오늘따라 착하-"

울버린은 벌린 입으로 직원의 머리통을 덥썩 물어뜯었다. 직원의 반쪽만 남은 상체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더니 곧이어 잠시 살아있던 신경으로 버티고 서있던 하체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트롤 7마리의 동시 격투! 이제 곧 시작합니다!"

신명나는 목소리로 외치는 사회자의 옆에는 앨런도 같이 끼어 앉아있었다. 앨런은 자신의 여흘거리가 클라이맥스를 맞는 순간을 관객들보다도 더 기다리고 있었다.

"자, 자, 경기는 곧 시작- 뭔데 그래?"

사회자는 뒤에서 칼을 들고 급히 달려온 직원에게 무어라 말을 듣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사회자는 그대로 앨런에게 붙어 말을 전했다.

"앨런 사장님. 지금 트롤들이..."
"준비가 다 안끝나기라도 했나?"

사회자가 말을 이으려 하는 동시에 경기장의 양쪽 문이 산산조각나며 '헐크'와 '호건'이 튀어나와 괴성질렀다.

"이런 썅..."

사회자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동시에 관객석에서 트롤 대기소로 향하는 문 네 곳이 박살나며 클로를 끼고 노란 마스크를 낀 '울버린' 큰 나무줄기를 통째로 든 '치프', 거대한 철퇴를 꼬나든 '피그', 큼지막한 도살장 칼을 든 '붓쳐'가 객석 가운데 등장했다. 헐크와 호건이 등장할 때만 해도 함성을 지르던 관객들은 자기 자리옆에 트롤이 나타나자 일순 침묵했다. 곧이어 헐크가 부수고 나온 좌코너 입구에서 철갑을 두르고 랜스를 든 나이트가 어깨에 제인을 태우고 등장했다. 제인은 나이트가 경기장 가운데에 이르자, 사회자석 옆에 앉아있는 앨런을 가리키며 힘껏 소리쳤다.

"없에버려!"

일곱마리의 트롤들이 신호에 따라 일제히 고함지르며 무기를 휘두르자, 그제서야 관객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소리지르며 격투장에서 도망쳐 나가기 시작했다. 정작 트롤들은 겁만주려 소리지르고 발을 구를 뿐이었지만 관객들끼리 엎치고 덮쳐 밟혀죽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 어서 피하셔야... 에이 씨발, 난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하쇼!"

분노에 절은 듯한 표정으로 피우던 시가를 이빨로 짓뭉개고 있기만 하는 앨런을 뒤로하고 사회자는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못가 치프가 휘두른 거대한 나무 둥치에 맞고 날아가 사회자석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물론 몰골은 전과 같지 않았다. 앨런은 피떡이 된 사회자를 밟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깨지는 듯한 음색으로 소리질렀다.

"N--------ein!!!!!!"

그리고 이어서 또 소리질렀다.

"이런 저능아 새끼들, 빨리 튀어나와서 막지 못해?!"

그와 동시에 경기장 이곳저곳에서 무장한 용병들이 달려나와 트롤들을 막아섰다. 몇몇 용병은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들고 나왔다. 앨런의 부하들이 트롤들을 잡을 때 쓰던 그 도구들이었다. 제인은 나이트의 어깨에 올라탄 상태로 용병들과 트롤들이 사투를 바라봤다. 야생에 살던 때도 아니고, 무장도 하고있었기에 용병들은 전처럼 쉽게 트롤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제인은 사회자석에서 호위하에 도망치는 앨런의 모습을 보고 외쳤다.

"헐크! 호건! 나이트! 가자, 저 놈을 놓치면 않돼!"

-----

지하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복도를 뛰어가던 앨런과 용병들을 호건이 막아섰다. 그리고 그 뒤엔 헐크가 뛰어오고 있었다. 앞 뒤를 막힌 용병들이 어찌 할 줄 몰라 머뭇거리자, 앨런은 양복상의를 휙 벗어던지고 옆에 선 용병의 칼을 빼들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용병들이 채 말리지도 못한 속도였다.

"싸움은 등치로 하는게 아냐, 이 초록괴물새끼야!"

그도 만만찮은 뚱보인 앨런이 말하니 설득력은 좀 떨어졌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앨런은 호건이 휘두르는 억센 손바닥을 슬라이딩 해 피한 뒤 그대로 호건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칼로 호건의 아킬레스를 잘라버렸다. 호건이 괴성을 지르며 한족으로 넘어지자, 앨런은 몸을 일으켜 호건의 머리로 달려든 뒤 그 뒷덜미에 칼을 푹 꽂아넣엇다. 호건은 단발마의 비명을지르며 그대로 축 늘어져버렸다. 뒤쪽에선 트롤 사냥꾼으로 구성된 용병들이 달려든 헐크를 차츰차츰 제압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돈값은 하네."

앨런은 조금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출입구를 향했다. 출입구까지 몇 걸음 안 남았을 때, 강철 랜스가 앨런의 발 앞에 꽃혔다.

"그래. 이걸 까먹고 있었구만 그래. 제인-!"

그의 앞길을 막아선 것은 나이트와 제이이었다. 

"앨런, 당신을 여기서 가가게 하진 않을거야. 죽어간 내 자식들을 위해서."
"거 아직도 저 괴물새끼들을 자식들이라 부르는구만? 오그라들어 죽겠어."

앨런은 슬슬 상황이 즐거워지려 했다. 비록 원하던 방향은 아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이 그를 흥분시켰기 때문이었다. 앨런은 호건의 피가 묻은 칼을 싹 털더니 그대로 나이트를 겨누며 말했다.

"덤벼, 이 버러지같은것들아."

제인은 가증스럽게 힐힐대는 앨런의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가자. 나이트!"

나이트가 괴성을 지르며 앨런을 향해 랜스를 찔러오자, 앨런은 기다렸다는 듯 뒤로 훌쩍 뛰어 랜스를 피했다. 랜스는 땅에 그대로 박혔고, 앨런은 그 랜스에 올라타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미처 제인이나 나이트가 피하기 전에 나이트의 어깨위에 올라타있는 제인의 가슴팍에 무릎을 찍어버렸다. 일개 동물학자인 제인의 몸은 싸움꾼인 앨런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고, 나이트의 어깨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나이트는 허둥대며 제인을 살피기 위해 뒤돌아섰다. 돌아선 나이트의 눈에 출입구를 등지고 제인의 목에 칼을 들이댄 앨런의 모습이 보였다. 

"야, 생각해봐라. 아무리 나라지만 철갑을 덕지덕지 싸매고 있는 괴물새끼를 어떻게 이겨? 아무튼 너네 엄마 목에 생채기 나는게 싫음 가만히 있어."

제인은 아직 기절한 상태였다. 나이트가 다가서려 하자, 앨런은 다시한번 경고하기 위해 제인의 목에 칼끝을 살짝 찔러넣었다.

- 노..으으으...

나이트는 어찌할 줄 모르고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앨런은 제인을 잡은 채로 거대한 출입문을 등으로 밀며 나갔다 문이 열리고, 밖의 풍경이 나이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발리스타를 장전해두고 각자 석궁을 조준한 채 트롤격투장 입구를 포위중인 자가르거스 경비병들이 서슬퍼런 눈빛으로 입구에서 나오는 두 명과 트롤을 노리고 있었다. 앨런은 심상찮은 기세를 눈치채고 외쳤다.

"이봐, 이봐! 쏘지 마! 나 앨런 재거야!"

그 말을 신호로 하듯, 경비병들은 사격을 시작했다.

"Ficken..."

앨런은 무수한 볼트에 고슴도치 꼴이 되어 그대로 엎어졌다. 얄궂게도 앨런이 안고 있던 제인은 그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트는 아직도 빗발치고 있는 석궁들과 같이 발사된 발리스타의 창에 몸이 관통되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이트?"

그제서야 정신이 든 제인은 나이트가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목도하고 볼트와 창이 박히고 있는 나이트의 앞으로 달려갔다. 나이트가 황급히 손으로 제인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제인은 가망없을 수준으로 화살촉에 꿰여버렸다. 무릎꿇려진 나이트의 품에 쓰러지듯 안긴 제인은 꺼져가는 의식중에 나지막이 읊조렸다.

"찰리, 이젠 괜찮아. 밀렵꾼들은 이제 다..."

찰리는 제인이 일전 지구에 있을 적 밀렵꾼들에게서 지켜낸 로랜드 고릴라의 이름이었다. 제인은 말을 미처 다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아더어어어어!!!! 노오오오!!!!

알아들을 수 없는, 하지만 분명한 '언어'로 나이트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그런것에 동요하지 않았다. 창은 재차 발사되었고, 날아든 창끝은 나이트의 그대로 목숨을 끉어버렸다.

경비병들의 대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검은 로브의 남자와 자가르거스 경비대장은 서로 상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검은 로브의 남자가 경악어린 표정을 한 것만 빼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별 이상 없이 끝나서 다행이다.' 하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돼었지? 앙? 이제 당신이 죽이려던 쟈거인재 재거인지 새끼는 없는거어야. 그러니 당장 이 마을에서 꺼어져버려."

경비대장은 벌개진 코를 하고선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 혀 꼬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검은로브의 남자는 경비대들을 끌어들이는 조건으로 앨런 재거가 가지고 있던 남은 약들을 모두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수호자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몸. 경비대장은 일이 끝나자마자 검은로브의 남자를 애물단지 취급하기 시작했다.

"알았- 알았다고. 이 마약 중독자야. 그래도 일이 다 정확히 끝났는지는 아직 더 살펴봐야 한다고."

검은로브의 남자는 알고있었다. 방금 철갑을 두른 트롤이 죽기전에 외친것이 "mother, no."란 사실을.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트롤 앞에 쓰러진 여성의 시체를 보고 중얼거렸다.

"뭐, 원래 죽일 생각이긴 했지만 이용만 하다 죽인 것 같아서 미안하군. 그렇다고 모두 다 되돌려 놓고 싶진 않지만. 아무튼, 저 사람을 다시 보면 내가 뭐라고 할 거 같아? '미안해'라고 할꺼야. 진심으로. 미안해."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혼잣말이었다.

-----

검은로브의 남자는 뒷처리를 마치는 중인 자가르거스 경비병들 가운데서 손을 다시 수화기처럼 만들고 이야기 했다.

"보..보스, 앨런 재거는 제거해버렸습니다. 그걸로 된 것 아니었습니까?"
"이런 머저리같은 놈, 앨런 재거는 애초에 영입대상이었어! 카탈리나가 어떻게 됬었든 영입할 의사부터 밝혔어야지! 그리고 블러디 메리는 어떻게 한거야?"

남자는 손가락을 잠시 거두고 울상을 한 채로 앨런 재거의 거처를 바라봤다. 경비병들은 희번득하게 신난 표정으로 앨런 재거의 거처에서 시가 상자들을 빼내어 달려나가고 있었다.

"앨런 재거를 사살하는 조건으로 경비병들에게 배포했습니...다만.."

귀에 댄 엄지손가락에서 다른 사람이 들릴정도로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휘틀리, 이 멍청아! 저능아새끼 같으니! 네가 수호자들 틈바구니에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블러디 메리는 모두 다 수거하라고 설명했었잖아?!"

검은 로브의 남자 휘틀리는 보스의 입에서 '멍청이', '저능아' 소리가 나오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맞받아쳐 고함질렀다.

"I AM NOT A MORON! I AM-"
"또 시작이군, 통신은 끝이다! 돌아오면 네놈을 당장에 강등시켜주지!
"I AM NOT A MORON! I AM NOT A MORON!I AM NOT A MORON!"

휘틀리는 더 이상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손가락에 고함을 질러댔다.

"어어, 저게 뭐-"
"트롤이 남아있다! 성벽 밖으로 향하고 있어!"
"냅둬! 어차피 알아서 나가겠지, 상자나 더 챙겨!"

경비병들의 움직임은 그대로였다. 휘틀리는 트롤들이 남아있다는 말에 아까 고함지르던 철갑옷 트롤이 생각났다.

-Mother!!! Noooooo!!!

"잠깐, 그렇다면..."

그때, 도시 북쪽의 종탑을 타고 오르는 거대한 트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손에 낀 갈퀴를 보아하니 제인의 트롤중 하나였던 울버린이었다. 종탑에 올라간 울버린은 이걸 들으라는 듯 괴성을 질렀다.

- Wolverine, SLASH!!!!

휘틀리의 표정이 아까 전의 경악어린 표정으로 되돌아 갔다. 이제 휘틀리는 확신했다. 이성따윈 없던 트롤이 말을 하기 시작한것이었다. 그것도 영어로. 휘틀리는 블러디 메리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경비병들을 붙잡으려 애쓰며 소리쳤다.

"이 바보같은 놈들아! 경비병들이면 당장 가서 트롤들을 잡아! 잡으라고오오!!!"

그러나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경비병은 없었고, 남은 트롤 3마리는 성벽을 넘어 민둥산 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울상이 된 휘틀리가 홀로 민둥산으로 달려가 몇날 며칠을 찾아 헤멨지만, 그 트롤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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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vated by -  UFC, 진격의 거인, Psycho-Pass(애니메이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헐크vs울버린(애니메이션), 포탈 2, 자카르타(도시), 라스베이거스(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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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버린 말고 2마리의 트롤은 누굴거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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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타메를란
재밌게 읽었습니다. ~~트롤은 고릴라가 아니지만요 트럴츄럴...~~
전 타우렌 치프틴보단 헐크 호건이 더 좋으므로 헐크와 호건이 살았다고 믿...
작가의집
호건은 이미 거인- 아니, 트롤백정 앨런 예거- 아니, 재거가 뒷목을 분질러서 죽여버린터라 살아있기는 좀 곤란하겠네요-(퍽)
넬리카란
오 한 작품이 더 올라와 있었네요. 볼 때마다 느끼는건데 정말 상상력이 좋으신 것 같아요.
작가의집
헤, 과찬이세요. 전부 다 밑에 부록으로 딸린 모티브에서 나온것들이라서요. 일단 단편 연작으로 계속 쓸 예정이라 작품은 계속 나올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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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XI-2. 꽃다발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4.28 1849
383 XI-1. Snowball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3.16 1850
382 Prologue-XI. 백면단도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3.16 1858
381 외전 15. 겐소사마 전설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3.02 1948
380 외전 14. 저주받은 단도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3.01 1799
379 X-8. 인생의 가치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2.14 1845
378 X-7. 집착이 가져온 업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2.03 1829
377 X-6. 무지가 일으킨 파란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01.1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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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X-5. Loop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11.25 2027
374 외전 12. After theie life_the black ticket 허니버터뚠뚜니라이츄 11.11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