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미래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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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초중고를 졸업한데다 대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선 증명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정말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중상위나 상위권을 노려볼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이외에도 다른 어머니들이 말씀하시는, 우리 애가 원래 머리는 좋은데ㅡ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머리의 좋고 나쁨은 여기서 하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건 자율과 타율이라는 부제로도 달 수 있는 흥미와 무관심이다.
 시험기간 때 나는 시험이라는 과정이 주는 팽팽함, 긴장 따위가 무척 싫었다. 수업시간 때 공부했으면 좋은 점수가 나올 거라는 선생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예습 복습안 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수업 시간에는 우리 반의 모범생보다 더 집중해서 수업을 듣지만 성적은 형편없는 이상한 녀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였다. 시키는대로 공부를 하면,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공부하다보면ㅡ 나를 구성하는 직선과 곡선, 선들이 이루는 모들이 깎이고 없어져, 결국 나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변하여 다른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불안함, 불안함이다. 그 불안함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제도나 우등생을 바라는 사람들의 의지 따위가 나랑 맞았다면, 어쩌면 나는 성적이 굉장히 우수한 아이이지 않았을까. 또 이런 생각도 한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모호한 범주가 일찍이 좀 더 구체적이었다면, 나는 그 범주라는 추상적이며 확실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 재기를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스스로 구분하지 못한,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을 환멸하며 살았다. 과거의 내 재능을 말해보라면, 환멸이라고 속으로 항상 대답한다. 제 재능은 환멸입니다.
 신입생 때 기억남는 건 학교에 대한 첫인상이나 다른 신입생들에게서 보이는 풋풋함들ㅡ 좋게 말해 풋풋하고 실은 어딘가 미성숙하고 유치한 모습들이다. 그리고 그 유치함들을 한곳에 모아 끊임없이 되뇌게 하던 구호. 교내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신입생 OT때도 그랬고, 강의란 걸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꿈이네 비전이네 하는 것들. 아마 경쟁력을 위한 혼신의 부림 같았지만, 환멸 섞인 판단 이전에 그 구호들에게서 신비스러움을 느꼈다. 마치 주문처럼 머릿속에서 돌았다. 거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말했는데, 어떤 교수는 덕담처럼 넌지시 말하고 지났고, 어떤 교수는 강의 첫 시간을 꿈, 비전, 열정 따위에 할애했다. 동영상도 기억난다. 박칼린과 데니스홍, 서경덕이 나왔었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학교 콘서트홀이었나, 꿈이 무척 소중한 교수의 첫 시간이었던가. 이제는 햇수조차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동기에게 물어볼까. 그럼 그 녀석도 기억이 담긴 서랍을 한참을 뒤져보고 얘기하겠지. 그리고선 시큰둥하게 물어볼 것이다. 근데 그런 건 왜?
 글쎄, 졸업반이 되고나서 과거를 반추한달까. 생각해보면 나도 어느 새 그 구호들에 젖어들었고, 지금도 꿈이라는 물기를 완전히 말리거나 털어내지 못했다. 그 구호들을 보며 나도 어떤 꿈을 꾸었던 듯 싶다. 막연하며 가끔은 위대했던 꿈들. 대학교의 질이나 내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는 크게 염두하지 않은 채 내게 남은 시간을 가능성에 비례해 미래를 점쳐보았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사람들에게 한 두 마디씩 덧붙여야 간신히 아는 척을 해주는 대학에 다녔고, 나 역시 여기에 오려고 대단한 노력을 한것도 아녔다. 노력이라는 말은 너무 황송하다. 나는 학교 시간을 따라가며, 꼬마애들 호기심보다 못한 흥미로 이 학교, 여기 과에 온 것이다.
 4학년, 졸업반이 되고나니 더 이상 학교 다니기가 송구하다. 꿈이네 비전이네 하는 구호들은 취직이나 진로, 대기업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던가, 대기업의 꿈, 취직을 위한 비전과 같은 수식으로 사용되었다. 그 동안의 나는 그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어느 새 의무가 된 꿈 내지 꿈찾기를 하지 않아 죄책감이 생겼을 뿐이다. 4학년이 되니 어렴풋 짐작만 하던 가능성의 양이 시간과 함께 줄어들어 세밀하게 잴 수 있을 정도였다. 줄어들어 그 양을 재기 쉬워진 가능서을 박칼린이나 서경덕에 대어보니 그들은 너무 멀었다. 이제 학교에서 보여주는 위인들은 내 또래의 신입사원, 대기업에 들어간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이라고 하니 부끄럽다. 감히 내가, 하는 마음의 낯섦이, 묵직함이 그들과 나의 신분적인 거리를 둔다. 그 사람들은 내 나이 또래의 열정적인 전사들이자 살아있는 영웅들이었다. 대기업 면접에서 기발하게 대답하여 성공한 사례는 하나의 무용담이었다. 그런 무용담들은 공기업이나 외국계라는 배경으로 바뀌기도 했다.
 꿈과 비전이 불러오는 원대한 심상과 진로, 취직 등이 주는 팍팍함의 괴리를 한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가능성을 점쳐보는 행위는 어느 새 나를 속여 내가 마음먹으면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헛된 각오를 일으켰다. 과정이나 노력의 양을 제대로 설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원대한 심상과 노력 없는 내 태도의 괴리도 힘들었다. 가능성에 거품을 불어넣은 학교나 교수들을 기만이라는 죄목으로 따져 묻고 싶었다. 아직까지 꿈이 없다면요? 전 벌써 4학년이에요, 꼭 뭔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삶은 멋있지도 아름답지도 않겠죠? 그래서 싫나요?
 여러 괴리 속에서 혼란스러울 때, 나는 문득 그 구호들이 하나였음을 깨달았다. 대학에서 말한 꿈과 비전들은 실은 취직과 진로였다. 집단을 만들거나 재편할 수 있는 원대함은 내 착각이었다. 조직이나 집단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니 오히려 더 분했고, 더 분해 있을 때는 너무 늦은 때였다. 그래도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었나 했지만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일찌감치 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영어공부랑 비슷했다. 5학년 때였나, 영어 수업에서 말하는 동사가 명사가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중2가 돼서야 나는 동사와 명사가 무엇인지 알았다. 영어 시간이 아니라 국어 시간에 알았다. 결국 화풀이같은 투정, 투정같은 화풀이. 끝까지 막연한 분노. 머리에 들이부으면 철저하게 발끝으로 빠져나가버리는 대학 공부. 짧아진 가능성의 자를 나 자신에게 들이대보니 나는 내세울 것 없는 한 명의 대학생, 보통 사람도 못되는 녀석이었다.
 내게 남은 건, 또 아는 건 나와 사귀어주는 너 뿐이다. 너가 수학능력시험 문제라면 난 연고대에도 갈 수 있다. 틀린 문제는 너가 소중하게 생각하며 너 자신도 모르는 작은 부분들이다. 하지만 그 부분도 세심하게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맞출 수 있다.
 164의 키. 중학교 2학년 때의 키가 지금 키이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밤색 머리. 염색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전엔 약간 푸석했던 검은 머리. 인생의 숙제를 두고 고민하느라 신경쓰지 못한 고3때의 머리길이를 너는 지금까지 유지했다. 아기 적부터 건강했던 너. 우량아 대회같은 곳에서 3등을 했다고 말해주었으며, 안방 네 부모님이 사용하시는 서랍 구석에 그 때 사진이 있다. 단상 위에서도 땅을 집덮 네 발 동물일 적 너의 모습이 마치 내가 직접 보았던 일인 것같다.
 너의 속쌍꺼풀. 어쩌면 어머니 뱃속에서 최초의 세포분열 때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웃을 때 양쪽 입꼬리 끝에 잔잔하게 퍼지는 주름 세 개. 그 웃음은 특히 술자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너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마시기를 실어하지만 분위기는 좋아해서 마치 적당히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처럼.
 나는 대학 동기인 친구와 있었고, 너도 항상 붙어다니던 동아리 친구와 있었다. 내 친구는 네 친구의 선배였다. 내 친구는 네 친구를 발견하고는 합석을 제의했고, 너와 나까지 술자리에 휘말렸다.
 지리멸렬한 이야기에도 너그러워지는 자리였다. 친구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네 친구가 열렬한 호응을 보냈으며 너와 나는 이 술자리극의 유쾌한 관객이었다. 그러다 내가 술집 티비에 나오는 열 시 드라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음악도시 할 시간이네.
 반응을 염두하지 않은 혼잣말이었으나 너가 대답했다.
 라디오요? 성시경?
 네, 그거.
 나는 조금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너가 물었다.
 음도 들으세요?
 음도 시민이죠.
 저도 그거 들어요. 그 말부터 대화의 물꼬가 틔였다. 친구는 술자리의 새로운 조류에 동참하려고 했지만 관심이 달라 끼어들지 못하고 이내 후배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너와 나는 세상에 오직 두 사람 뿐인 것처럼, 옆자리의 친구나 후배, 다른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높이 달린 액정 티비 따위가 전부 다 우리를 위한 소품인 양 굴며 대화했다.
 성시경은 1박 2일에선 재미 없어요.
 맞아, 별로야.
 음도에서는 솔직하잖아요.
 재밌어요.
 그래, 솔직한 게 재밌지. 자기 생각을 거리낌없이 말하잖아요.
 아 맞아요.
 가끔 잘난 척 할 때는 좀 재수가 없지만서도.
 너는 웃었다.
 뭐 근데 잘난 척 해도 되니까요. 그렇게 밉지도 않고, 노래도 좋고.
 저도 성시경 노래 좋아하는데.
 너의 그 말 이후로 나는 노래방에 갈 때마다 성시경을 불렀다.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음도에서 시작해 음도에서 나온 사연, 사연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친구로 넘어갔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잡기 위해 이벤트 업체를 불렀다는 사연이었다.
 사연의 주인공은 업체에 250만원을 냈다고 했다. 헤어진 여자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연의 주인공은 아직도 250만원을 할부로 갚는다고 했다.
 돈이 아까워요.
 그래요? 만약 잘 됐으면요?
 그래도 아까워요. 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떠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너의 태도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
 그래도 좋아했잖아요. 그만큼. 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의 경우도 얘기했다.
 제 친구는 업체에 신청한 건 아니지만 헤어진 여자친구를 잡으려고 엄청 고생했죠.
 어떻게 됐는데요?
 실패했어요.
 거봐요, 안 된다니까요.
 그래도 그 친구는 훌훌 털어버린 눈치던데.
 다 자기만족이죠. 그러면서 너는 탕에 있던 지라를 집어 먹었다.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나는 너를 읽지 않는 척 티비를 보며 반 잔 남은 소주를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많이 물었어야 했다. 너를 두 번째 만나고 세 번째, 네 번째 만날 수록 묻기가 점점 힘들었다. 사귄 뒤에는, 너를 만나면 하려던 말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물론 그건 중요하지 않았으나, 내가 너를 생각할 때 그 부분을 떠올리면 기름칠 하지 않은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우리는 두 번째 만남에 말을 놓았다. 예고 없는 간단한 만남이었다. 연락처를 받고 가끔씩 카톡 프로필과 전화번호를 구경하다 대전에 갈 일이 생기자 문득 네게 전화했다. 봐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 없는.
 좋아요.
 너는 말했다. 우리는 둔산에서 영화와 밥을 해결했다. 내가 내려고 했지만 너는 반대했다.
 밥값은 내가 낼게요.
 '제'를 '내'로 바꿔 말하는 강력한 주장. 밥과 차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에서, 너는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지출로만 치면 너가 나보다 많이 낸 셈이었다. 너는 간혹 말대신 행동으로 얘기했고, 나도 너의 행동으로 너를 이해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성평을 나누었던 우리. 그 때 너는 촌스러운 딸랑이가 달린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고, 후드로 그 머리를 뒤집어 썼다. 너는 가끔 후드 안에 손을 집어넣어 머리를 만졌다. 식사가 나오기 전부터 차가 반 잔 남을 때까지. 너는 한 번씩 머리를 만졌고, 생각이 너무 많거나 너무 없는 표정으로 어떤 풍경에 시선을 걸터놓았다.
 열 세 번에서 열 네 번. 열 다섯?
 뭐가요?
 머리 만진 거요.
 아. 너는 당황할 일이 아님에도 당황했다.
 머리… 너는 말했다. 잘 못 말리고 나와서요.
 알아요. 그럴 수도 있죠.
 안다구요? 너의 표정이 묻길래,
 영화관에서 후드 벗었잖아요. 바로 옆자리니까.
 아. 너는 또 당황. 내가 말했다. 상관 없는데, 별로.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쓰일 수도 있는 거고. 신경 쓰이면 당연히 자꾸 손이 가니까. 그리구요.
 내가 다시 말했다.
 아까 그 표정. 창 밖을 볼 때.
 표정이 왜요?
 꼭 그거 같았어요. 그러니까. 마지막 성냥이 꺼진 성냥팔이 소녀 표정.
 너는 웃었다. 크게 웃었다. 웃길 의도는 없었지만 나도 웃어버렸다. 웃은 뒤 너가 내게 말했다.
 말 놓으세요 편하게.
 그래. 나는 한 모금 홀짝이고 말했다.
 네 번째 만남에 너는 말했다. 오빠는 간혹 이상한 비유를 해. 알아. 나는 말했다. 그러자 너는 그 이상한 비유가 좋다고 했다. 다섯 번째 만남. 이제는 데이트라고 서로가 느낄 때. 집에 가야 할 시간. 멀리 사는 나는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야 했다. 너는 터미널까지 배웅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떼를 쓰다 시피 너를 자취방으로 바래다주었다. 술집과 식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너의 집. 또래오래 궁동점에서 두 번을 꺾어 들어간 골목에서,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차 아래에서 우리를 빤히 보았다. 나는 고양이를 보며 재잘거렸다.
 실은 말이지, 고양이는 샘에서 솟아나는 거야. 고양이 샘.
 고양이 샘?
 그래, 고양이들이 펑펑 솟아나는 샘이 있는 거지. 거길 지키고 관리하는 여왕 고양이가 있고, 여왕 고양이를 시중드는 고양이들이 수없이 많아. 고양이 샘에서 새끼 고양
이가 나오면 여왕 고양이가 지시를 하는 거지. 이 고양이는 충대 자연관으로 보내라. 이 고양이는 충남 아산시 온천2동 시영아파트 102동 302호로 보내라, 이런 식으로.
 되게 구체적으로 보내네?
 그럼, 당연하지.
 우리 집에도 고양이 한 마리 있는데.
 그래?
 이름은, 미래야.
 미래라는 이름에서 나는 어떤 것을 예감했던가. 나는 너의 집 앞에서 사귀자고 고백했다. 너는 생각해보겠다며 돌아섰고, 여섯 번째 만남, 헤어질 때 장난스럽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이미 사귀는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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