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W-Proto.]마지막 비행
노숙까마귀
0
2,615
2015.07.04 20:46
949년 12월 31일
매플란드 자치령, 카딘레이크 주
"마젠타 편대장이 편대에. 제군들, 1시 방향에서 적 폭격기 편대가 접근 중이다. 약 36대, 호위기가 포함되어있다. 화이트 편대와 함께 놈들을 요격한다. 조우까지 약 2분 30초 남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엔진 소리 사이로 무전이 들린다. 우린 고립당했다. 컬럼비아는 우리보다 강했다. 바다 건너 본국이 지원 병력을 보냈지만 적들을 막을 순 없었다. 6개월 만에 우리는 주요 도시를 대부분 잃고 얼음 벌판으로 내몰렸다.
"……니미랄."
"마젠타6, 무슨 문제 있나?"
편대장이 무전을 해온다. 무전을 켜 뒀던 모양이다. 마음을 다잡고 태연하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정신 바짝 차려라. 적과 조우했다. 지금 우리 밑에 있다. 지금 간다."
"라저."
블러드서커 Mk.IId 전투기를 적 대열 한가운데로 급강하시킨다. 폭격기 기관총좌에서 쏴갈기는 총탄은 마치 그물같았다. 수평을 맞춰 폭격기 한대에 헤드온 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내 전투기가 가볍게 흔들리는게 느껴진다. 폭격기의 조종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대한 불길이 치솟는다. 떨어지는 불덩어리를 제치고 다음 목표를 찾는다. 그 순간 총알이 내 날개를 스친다.
"마젠타6! 네 뒤에 애스터로이드가 붙었다!"
E-42 애스터로이드, 컬럼비아놈들의 주력 전투기다. 최고속도 708㎞/h에 무장은 12㎜ 중기관총 8정. 끔찍하게 빠르고, 끔찍하게 강하다. 그런 녀석이 지금 내 등 뒤를 노리고 있다.
"우라질! 참 빨리도 알려준다! 마젠타3, 처리해 줄 수 있나?"
"시도 중이다. 잠시만 버티고 있어라."
이 상황이 되어봐야 그딴 소리가 안 나오지,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침과 함께 그냥 삼켜버렸다. 지금 투덜거린다고 총알을 막을 수 있는게 아니다. 왼쪽으로 롤해 급선회한다. 잠시 동안 눈 앞이 캄캄해졌다. 잠시 동안 발 끝이 무거워졌다. 후방거울을 보니 애스터로이드는 아직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녀석이 거리를 좁히며 기관총을 쏴갈기고 있다. 12㎜ 총알이 얼굴 옆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마젠타3! 뭐하고 있냐! 얼마 못 버티겠다!"
소리를 지르는 순간 후방거울에 비친 애스터로이드가 오른쪽으로 롤하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녀석이 포기했나?
"마젠타6, 녀석을 격추했다. 제대로 맞췄다."
아군기가 후방거울 왼쪽에서 나타나 그대로 사라졌다. 애스터로이드의 측면에서 녀석을 공격해 격추시킨거다.
"잘했다, 마젠타3! 정말 잘했다!"
"과찬이다, 마젠타6. 이상."
목숨을 구했으니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아군 전투기의 꼬리를 잡기위해 노력하는 또다른 애스터로이드의 뒤로 날아가 총포탄을 쏟아붙는다. 녀석은 18㎜ 기관포에 맞았는지 공중분해된다. 조종사는 탈출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으스러졌을거다.
"여긴 화이트11. 구해줘서 고맙다!"
아군의 감사를 뒤로 하고 또다른 B-36의 뒤에 달라붙어 다시 총포를 난사한다. 엔진 하나가 검은 연기를 내며 불을 내뿜었다. 엔진 하나를 잃은 폭격기는 크게 기울어지더니 뒤따라오던 다른 폭격기와 충돌했다. 기장의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나보다. 내 기억상 엔진 세개가 날아가도 버티던 놈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뒤에서 총알이 날아온다. 좌석 뒤 방탄판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후방거울을 올려다본다, 또다시 뒤에 애스터로이드가 붙었다.
"여긴 마젠타6, 뒤를 잡혔다. 도와달라!"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인거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조종간을 잡는다. 어떻게 활로를 뚫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기체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엔진이 맞았다. 엔진에서 검은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게 조종석에서도 보인다. 또다시 당했다. 아직 풋내기였던 6개월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그때만큼 운이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두가지 뿐이다. 캐노피를 열고 뛰어내리는 것. 캐노피에 있는 힘껏 몸을 부딫혀 본다. 다행히도 캐노피는 쉽게 열렸다. 이제 조종석 밖으로 몸을 빼낸다. 한숨을 한번 쉬고 뛰어내렸다. 몸이 수직으로 떨어는게 느껴진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비틀거리는 전투기가 멀어져간다. 낙하산이 펴지지 않을까봐 무서웠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친다. 온몸에 가벼운 충격이 온다. 낙하산이 펴진거다. 이제 떨어져 죽을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불 붙은 애스터로이드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될 수 있는한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애스터로이드는 나를 스쳐지나가 저 밑으로 사라져간다. 내가 부대로 복귀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떨어졌다.
눈밭 한가운데 떨어졌다. 10분 넘게 낙하산과 씨름을 벌여 겨우 벗어냈다. 허리춤에서 12㎜ 리볼버를 꺼내 코킹하고 사방을 겨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없다. 다시 리볼버를 허리에 꽃고 고글과 헬멧을 벗어던졌다. 주변 마을이라도 찾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착지하면서 뭔가 잘못되었는지 왼쪽 발목이 아파왔다. 쌍소리를 하며 걷다 보니 도로가 나왔다. 도로를 따라 걷기로 결심한 순간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자동차가 한대 오고있었다. 이 지역이라면 빅토리아군이다. 얻어 타고 부대로 복귀할 수도 있다. 가만히 서서 차량이 오기를 기다린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차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스컬럼비아 M37 경트럭에 접시같은 헬멧을 쓴 군인 4명이 타고있다. 컬럼비아군이다. 적군이다.
"니미 씨발!"
바로 뒤돌아 도망갔다.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숨이 찼다. 총소리와 피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넘어졌다. 총에는 맞지 않은 것 같지만 다리가 엉켜서 쓰러진거다. 바보같은 일이다. 얼굴이 그대로 눈밭에 부딫혔다. 눈이 차가웠다. 난 도망치는걸 포기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졌다.
"맞지도 않았구만. 사격훈련 더 해야겠어."
한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내 옆구리를 걷어찬다.
"야, 일어나!"
여자의 말에 엉거주춤하며 일어났다.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가 내게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말 없이 두 손을 들었다. 여자가 자신의 허리춤을 가리킨다.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뽑아 눈 밭에 떨어뜨렸다. 여자가 허리를 숙여 권총을 챙긴다. 보물이라도 얻은 듯이 싱글벙글거리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묶어."
남자가 내 오금을 차 무릎 꿇린 후 양손을 뒤로 모으게 시킨다. 내 손목에서 시계를 벗겨가는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강도놈들. 다 털어가라."
"전리품이지. 그래서 이름하고 계급이 뭐야?"
여자가 내 권총으로 나를 겨누며 물어본다. 양 손목에 감기는 쇠사슬이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알리스 에브퀘. 왕립 빅토리아 공군 대위다."
여자가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누군지 아는걸까. 알고 있다면 나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있는걸까..
"병장님, 이 녀석 그거 아닙니까? 티리언을 죽인 년 같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나는 컬럼비아인들에게 그렇게 알려져있어나보다.
"진짜? 소위님이 진짜 좋아하겠는데? 티리언 좋아한다며."
기분나쁘게 낄낄거리는 그녀를 보자 얼굴에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쇠사슬에 묶여있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이끌려 차로 걸어간다. 여자가 내 옆구리를 권총으로 찌르며 말했다.
"오늘은 월척이구만. 안 그래, 대위님?"
949년 12월 31일. 알리스 에브퀘는 컬럼비아 육군 순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버렸다. 매플란드 자치령은 그후로도 한달간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항복, 컬럼비아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나는 격추되기 전까지 6개월 간 153대의 적기를 격추했다. 하지만 나는 전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조종사 하나가 전쟁의 판도를 뒤엎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