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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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4월 때와 같은 날씨였다. 봄이면서도 여름이었다. 두 계절 사이에 걸터 앉아 갈까 말까 망설이며 마침내 결심하여 일어나려다 담배 한 대 피고 일어나야지 하고 다시 앉으며 불을 붙인 것만 같은 날씨였다. 긴 소매 옷을 입고 나서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다지 덥진 않구나 하고 빠르게 걷다 스며오는 땀에 소매를 걷어 붙이는 날씨였다. 나뭇가지들만 고요히 쉬고 싶음에도 바람 불어와 손 흔들게 됨에 부산스러울 뿐이었다. 머그잔에 타놓은 커피는 오질나게 달았다. 커피 생각이 나 퇴사 선물로 받아놓은 포트에 물을 받아 끓여 믹스를 세 개 넣고 저었던 것이다. 커피를 한창 마실 때 쓰던 컵이 어디론가 사라져 다른 컵에 양을 대충 넣어 저었던 것이었기에 그 단맛의 진함은 내 불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려 해도 오질나게 달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여름처럼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꿈결같이 느껴지듯 단맛도 그러했다.

오랜만에 글이 쓰고 싶어져 서재를 뒤져 CD를 찾아내 이리저리 파일을 찾았다. 제프 백. 스콜피온즈. 사이먼 앤 가펑클. 에릭 클랩튼. 산지 얼마 안되었을 때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것들인데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한 구석에 처박아놓고 듣지 않게 되었던 것들이었다. 현실과 유흥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 애매모호해졌을 때는 듣는 귀조차 달라지는 모양이다. 봄날에 듣는 옛 노래는 가을에 듣는 것과는 사뭇 맛이 다름에 또 담배에 불을 지폈다. 이 갑에 든 것을 다 피우고 나면 더 이상 남아있는 연초가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정해진 그 데드라인이 참 좋았다. 담배가 남아있을 때 최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항상 안일한 자세로 일관하며 오늘이라는 단어는 잊고 내일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던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편집장도 그걸 잘 알고 있었는지 내게 들어오던 담뱃값을 몇 주 전에 끊었던 것일테다. 자의로는 절대 쓰지 못하는 나를 위해 타의로라도 작문을 강제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를 받아들고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여느 때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또 이렇게 중얼대리라. 소설을 쓰라고 했지 또 수필을 끄적여놨네. 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편집을 하고 다듬고 내게 연락을 하며 담뱃값을 보내리라. 그 담뱃값이 끊길 때서야 비로소 난 또 소설이라는 탈을 쓴 수필을 적어 보내리라. 다음 담뱃값이 떨어질 때는 계절이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알 수 없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갑을 열어 제낀 순간 몇 개피 남아있지 않은 담배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다섯 개피 남았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쉬고 싶다고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아니면 바람을 타며 비로소 움직이게 되었음에 기뻐하는 것인지 모를 나뭇가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소재가 필요했다. 소재는 많았다. 내가 다만 정 붙이지 못할 따름이었다. 여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정을 붙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여자를 등장시킴에 있어 그 여자에게 집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떨어져 거리를 두고 바라봄에 나와 독자의 시선을 똑같은 거리로 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의 바로 뒤 또는 옆. 혹은 코 앞에서 바라보며 그 여자를 일일이 뜯어보고 그 여자의 기분이 되어보고 그 여자를 가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 만을 쓰고 있는 어찌 보면 안 될 글쟁이임에도 내 글은 어느정도 팔려 나갔다. 인세는 목공 딱풀로 돌아와 내 입에 칠을 해주었다. 그 끈적끈적함이 나는 좋았다. 몇 번 입술을 붙였다 떼면 사라지는 끈적함의 정도가 나는 좋았다. 항상 끈적끈적하면 신경쓰일 것이었다. 벽에 기대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손 끝에 만져지는 튀어나온 나사못을 이리저리 손으로 굴려보는 그런 잠깐의 어린 장난처럼 한 순간이 좋았다. 그 한 순간에 머물러 있고 영속을 추구하지 못하기에 내 글 또한 그 단발성을 따랐다. 그럼에도 사 읽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이런 글이 뭐가 좋다고 사읽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담배가 끊어지는 순간 이 몹쓸 몸은 손을 떨 것이고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원고를 써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담뱃진에 쩐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바뀌며 고동치고 있음에도 나 자신은 정지한 채 그저 들어오는 담배 연기에만 움찔대며 천천히 맥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글을 팔아먹을 수 있을까. 담배를 물었다. 세 개피 남았다. 서점에서 책을 집고선 카운터로 다가가 얹은 다음 열 지갑의 대상은 언제라도 나 말고 다른 누군가로 변할 수 있었다. 그 초조함이 좋았다. 타의로부터 발한 그 죄여옴의 느낌이 좋았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CD는 반대로 돌기 시작했다. 제시 쿡의 플라멩코 기타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지 않으며 바람에 춤추는 나뭇가지의 움직임 모양새를 보는 것은 항상 기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나뭇가지를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 아니라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이라는 착각은 내가 앉아 있는 세상을 꿈결처럼 느끼게 했다. 항상 약에 취해 사는 것처럼 나를 몽롱하게 만들었고 그 몽롱함의 비영속성에 나는 또 전율하며 웃었다. 하루살이의 세상에 예술과 담배가 있다면 그들도 이렇게 살 것인가 하는 상상을 했다.

담뱃재가 트렁크 팬티 위로 떨어졌다. 입에 문 채 두들기다보면 코로 역류해오는 연기가 좋았다. 이따금 세게 기침을 했다. 그 기침이 좋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어두컴컴하지는 않지만 밝지도 않은 방 안이 좋았다.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가 매번 불규칙하게 어디론가 향하다 이내 눈으로 볼 수 없는 정도로 흩어져 퍼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제시 쿡이 좋았다. 제프 백이 좋았다. 개리 무어가 좋았다. 다방에 앉아 몇 갑이고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이따금 돈 없는 음악가가 커피 값 대신 통기타를 두들기던 때가 좋았다. 테이블 위에는 꽁초가 솔방울처럼 꽂힌 재떨이가 있었고 글씨가 뭉게질 때마다 연필을 깎은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담배를 문 채 소파에서 허리를 굽혀 원고지 위에 아무렇게나 글을 쓰고 있으면 옆에 다가와 앉아 관심 어린 눈빛으로 나와 원고지를 번갈아 바라보던 다방 아가씨의 그 표정이 좋았다. 사장은 벚꽃 구경을 하러 가 어수룩한 손짓으로 레코드를 갈아 끼우며 다방 안에 흐르는 고요를 길게 끌어주는 사장 아들의 난감한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어쩌다 비지스를 틀어줄 때는 담배를 입에 문 채 그에게 엄지를 들어 보여줄 때의 그 보람에 찬 듯 웃는 표정도 좋았다. 재떨이에 꽂힌 꽁초는 모두 필터가 자근자근 씹혀 거의 뭉게져 있었다. 나와 같이 필터를 씹으며 담배를 태우길 좋아하던 미스 최가 좋았다. 하룻밤 같이 보내고서 다방에서 매일 같이 앉아 날아드는 날벌레에도 웃으며 즐기던 미스 최는 한 달이 지난 후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 사장 아들은 쌍화탕을 내올 때 꼬깃꼬깃 구겨진 쪽지 하나를 내게 건네주며 계란을 깨트려 타주었다. 쪽지 안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쪽지를 받고 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연락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녀도 연락을 바라고 쪽지를 남긴 것은 아니리라. 나를 너무도 잘 알던 여자였다. 나를 잘 아는 여자는 나와의 이별에도 대부분 묵묵히 그저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달라는 식으로 연락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미스 최, 미스 박, 그리고 어느 불문과 여대생까지 세 명의 여자를 그 다방에서 만났고 이별했다. 만남과 이별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여전히 묵묵히 다방에 가 삼 번 자리에 앉아 원고지를 만지며 연필을 깎고 커피를 마셨다. 그런 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방에 가던 날에 나는 원고지를 챙기지 않고 그저 소파에 허리를 묻은 채 커피를 마시며 앨런 파슨스의 올드 앤 와이즈를 들었다. 소파에 그렇게 푹 기대어 커피를 마신 것은 거의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억한다. 사장 아들은 그 새 노련한 다방 주인이 다 되어 있었다. 단골 하나가 이제부터 오지 않으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내 옆에 조금 멀찍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년간 마주치며 말 없이도 대강 서로를 알았던 사장은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다. 나는 지갑을 열고 바로 옆 꽃집에서 비싼 꽃은 살 수 없지만 그래도 화분은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사장 아들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사양하지 않고 그 돈을 받았다. 그러고나서 듣고 싶은 음악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딱히 마땅한 음악이 생각나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다 딱 한 번만 올드 앤 와이즈를 반복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레코드 플레이어 앞으로 갔다. 그렇게 올드 앤 와이즈가 다시 흘러나왔다. 항상 꽁초가 수북히 쌓여 처량해보였던 양철 재떨이도 이별했지만서도 그들이 앉던 자리는 항상 비워두었던 미스 최와 미스 박 그리고 그 여대생과의 기억도 이별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받침대에 잔을 내려놓은 다음, 올드 앤 와이즈를 끝까지 듣고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 아들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잠시 쳐다보는 것에 손을 들어 인사를 할까 했으나 그냥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느 음악 소리가 내 안을 티스푼을 넣어 커피를 휘저을 때의 맴도는 것처럼 휘돌았다. 올라갈 때마다 그 소리는 선명해졌고, 거의 다 올라가 햇빛이 보일 즈음에야 그 노래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앞 맞은 편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러브였다. 나는 잠시 다방 밖에 걸터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곤 그저 멀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등 뒤에서부터 내리쬐고 있는 태양이 움직이며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담배를 태웠다. 음악은 진작에 바뀌었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존 레넌의 러브를 듣고 있었다.

반 갑쯤 들어 있던 담배를 다 태웠을 때, 적어도 미스 최한테는 연락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 존 레넌을 좋아했었던 것이 비로소 생각났다.


2015 05 04 17 24

생각이 나면 더 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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