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 마끼아또, 3만원 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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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니는 C대학 뒤편의 골목길은 음습하다. 대학의 정문이 반대편으로 옮겨가면서 한 때의 영광이 촉 떨어진 전구처럼 깜빡거리는 이 골목길에서는 모든 것이 낡아갔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비가 내릴 때면 특히 빠르게 늙어가던 이 골목길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치거나, 때론 받쳐들지 않고 찾아가곤 했다. 손님이 다 끊기고 개 짖는 소리마저도 멈춰버린 이 골목길에선 소나기만이 플라스틱 합판을 톡톡 두드리며 나에게 들어와도 되냐고 묻는 듯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끔찍하게 권태로웠기에 이 뒷골목은 점차 나의 정원이 되어갔다. 처음엔 대학교 내의 조그마한 벤치에 터를 잡고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그 벤치엔 내가 남몰래 붙여 놓은 껌과 껌종이, 그 껌종이에 깨알같이 적어 놓은 의미 없는 문구들이 있었다.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길 바랍니다’. ‘제 나이가 너무 어색하게만 느껴집니다. 전 늘 그것보단 어리거나, 더 늙은 것만 같습니다’. 이런 유희는 괜찮은 놀이였음에도 곧 시들해졌다. 내 주변 사람들의 끝없는 권태에선 더 이상 경이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대학생들만큼 비참하리만치 권태로운 사람을 보지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가끔 쓸쓸한 낭만이 와 닿을 즈음이면 이들은 바쁘게 스마트폰을 열고 친구에게 연락한다. 커피를 마시고 재잘거리며 자신의 울적함이 커피 향에 날아감을 웃음으로 부채질한다. 그리고 다시 외로움을 느낄 새조차 없이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면서도 자신 주변에 어떤 풀잎이 있는지, 벤치에 어떤 장난질이 되어 있는지 관심 주지 않는다. 술과 오락실, 노래방과 게임 이야기에 치이느라 자기 어깨에 새겨진 무게가 단지 책가방과 책임감의 무게인 줄만 안다. 더 깊이 박힌 권태를 직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난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사는가. 생각하면 뜻 모를 자부심이 솟구치곤 한다. 나는 나만의 외로운 풍경을 갖고 있고 삭은 보도블럭 사이에 둥근 구식 맨홀 밑으로 흐르는 하수 소리를 음악으로 느낀다. 그 곳에 조그마한 돌맹이 몇 개를 떨어뜨린다. 퐁당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울적함에 새겨지는 파문의 아름다움을 안다. 마름모 꼴 보도블럭의 금을 밟지 않고 걸으며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 아버지가 되다 꼬마 아이가 되었다가, 마침내 마음 속에서 뻗쳐나오는 상쾌한 기지개를 펴는 것이다.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찾아간 벤치는 껌과 껌종이가 제거된 채였고 은근히 기대하던 경고장 하나 없이 깔끔해서, 난 더 이 낡은 골목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골목길에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두 장소가 있다. 하나는 시를 좋아하는 노인이 운영하는 헌책방이다. 장사가 안 돼서 복사나 인쇄 등도 하는 모양이지만, 누구라도 이 노인과 조금만 말을 트면 인쇄기 옆 상자들 사이에 묻힌 낡은 문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낡은 문 너머에는 낡은 시집들이 누런 전구촉 불빛과 함께 머물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 시집의 낱장과 낱장 사이에서 흘러간, 모래 파도와 같은 노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지만, 우선은 다음 기회에 하자.
 
 두 번째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찻집이다. ‘동그란 다락방’이라는 간판은 녹색 페인트를 적당히 칠한 나무 판자떼기였다. 동그란 다락방에서 파는 건 보통의 아메리카노와 카페모카, 카라멜 향 짙은 마끼아또이다. 내가 지금까지 데려온 어떤 친구들도 이 곳을 카페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런 세련됨은 이 다락방에 너무나 황송했다. 둥근 탁자에 낡아 군데군데 올이 드러난 소파는 차라리 다방이나 찻집에 어울렸다.
 
 동그란 다락방은 장사도 안 되는 주제에 나같은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하고, 매일 음악도 틀고, 아낌없이 책을 구입하곤 했다. 점장은 매일 아침 싸구려 원두 향기를 맡느라 바빠 금고 열쇠를 나에게 맡길 지경이었다. 난 그 무책임한 신뢰가 마음에 들었다. 늘 십 원 단위까지 세세하게 기록했고, 백 원 짜리 동전조차 넘치거나 모자름없이 유지하는 걸 즐기며 그의 신뢰에 보답하려 했다. 나태로운 내가 이렇게 진지하고 성실해지기까지 된 까닭은 점장의 무책임함이 큰 역할을 했다. 어느 날인가 피곤한 나머지 청소를 안 하고 돌아갔었다. 다음 날 두려워하며 출근했지만 점장은 아무 말 없이 혼자 낡은 소파를 닦으며 나에게 그저 커피 한 잔 끓여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이 가게에서 처음 끓여본 커피였다.
 
 점장은 올해로 37세지만 나이보다 조금 젊어보였다. 서른에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은 점장은, 몇 대째 물려왔다는 가보 도자기를 미련 없이 팔고 몇 년 동안 커피 맛을 찾아다니는 순례 여행을 벌였다. 명품이라고 부르는 커피 맛조차 다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여행 끝에 그는 가장 좋아하는 향을 찾았는데, 그건 고향에서 맛본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 향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망조가 들기 시작했던 이 골목길 후미진 곳에 다락방을 차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나 흙장난을 치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야. 게다가 내 나이가 되면 헌 두꺼비집에 더 정이 가기 마련이라고.”
 
 나는 이 다락방에 음악이 필요없을 만큼 어떤 울림이 있다고 느꼈다. 낡은 공기와 이 빠진 커피잔에 고즈넉하게 담긴 커피 향기는 하나의 음차처럼 내 음조의 기준이 되었다. 누군가 이곳이 후줄근하다고 하면 그는 내 친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홀짝이다가 가는 사람들은 이내 단골이 되곤 했다. 이런 단골들은 심심할 땐 제 집처럼 찾아와 어딘가 먼 곳을 가만히 쳐다보거나,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 못 견뎌하는 울적함을 달래곤 했다. 난 그들의 이름을 모두 알게 되었다.
 
 다락방에서 3년을 성실하게 일한 덕에 난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아무 때나 와서 일을 거들고 가는 특권을 누렸다. 장사도 안 되는 가게에 붙박이로 알바생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점장은 정말 가끔 찾아오는 바쁜 때나 대청소 때에 나를 불렀고, 때론 그렇다고 속여서 불러냈다. 그리고는 시간을 넉넉히 재서 내 시급을 챙겨주곤 했다.
 
 “안녕하세요.”
 
 “일요일 오전, 여느 날처럼 점장의 호출을 받고 다락방에 온 나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점장은 남은 빵을 적당히 썰어 입에 넣으려는 찰나였다. 상 위엔 계산서 하나 없이 점장이 좋아하는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만이 있었다. 점장은 입 안에 든 빵을 빠르게 씹더니 2층을 가리키며
 
 “네 누나랑 친구 와 있다.”
 
 고 말했다.
 
 “언제부터요?”
 
 “삼십 분쯤 전부터. 가서 놀아.”
 
 “그래도 돼요? 그치만….”
 
 “청소도 빵 정리도 이미 했으니 네 일은 거의 없어. 나도 오랜만에 가게나 좀 봐야겠다. 정산은 곧 하마.”
 
 점장은 시원스레 “아직 입 안 댔어” 라며 자기 몫의 카라멜 마끼아또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쟁반에 쿠키도 조금 담아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님 오면 그래도 예의상 내려오고, 적당히 상대해주면 나랑도 좀 놀아줘.”
 
 “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점원이라고 생각하며 올라갔다.
 
 동그란 다락방은 도시의 세련보다는 후미진 골목의 고즈넉함을 선택했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1층보다 시간이 정지한 2층이 더욱 그랬다. 2층이야말로 다락방이란 이름에 걸맞았다. 차양이 빼꼼히 난 2층은 전부 원목인데, 대부분 점장이 직접 골라온 편백나무와 향나무였다. 차양이 무색할 정도로 주위 건물들이 폐허된 신전의 원주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건물 사이로 조각난 하늘을 바라봄은 점장이 무척 좋아하는 일이었다. 회전하는 빨래통을 보는 어머니처럼 점장은 넋을 잃곤 했다. 다각형의 액자 사이로 지나가는 구름은 아쿠아리움의 물고기처럼 유동적인 구석이 있었다. 하늘과 그늘은 좋은 대조를 이루었는데, 아무리 맑은 날도 골목이 잡고 놓아주지 않아 더욱 선명하고 짙은 하늘색으로 빛났다. 그림자는 간혹, 다녀가는 손님들이 구석에 써놓은 낙서까지 스몄다. 다녀가요, 우리 사랑 영원히 따위의 낙서들은 소심한 범법처럼 수줍은 어조였다. 그림자 역시 이제는 2층의 일부여서, 햇빛이 아무리 따사롭게 내리쬐어도 빠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친구는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공부하기에 바빴다. 책은 영어 지문이 빼곡했다. 그는 권태롭지 않은 대학생이지만, 벤치의 장난에 관심을 두는 녀석도 아니었다.
 
 “카라멜 마끼아또.”
 
 나는 쟁반을 내려놓았다.
 
 “아니, 사양할래.”
 
 “누나는?”
 
 “왔다 바로 갔어.”
 
 나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내 앞으로 가져다놓았다.
 
 “점장이 너랑 놀아달라는데.”
 
 “그래?”
 
 그는 책을 덮었다. 공부에 열심인 학생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영어 자습서였다.
 
 “놀아줄 건 없어. 공부하러 온 거니까.”
 
 “공부는 잘 돼가?”
 
 “공부가 잘 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 안 되거나, 더 안 되거나지.”
 
 “그렇담 차라리 도서관에 가지.”
 
 “도서관이야 말로 진정한 애완동물 가게야. 알잖아? 조금만 건드려도 물거나 할퀴려고 드는 거. 그래서 난 여기가 좋아. 여기를 사버렸으면 좋겠어. 점장이 임대하려거든 빨리 연락하라구.”
 
 “꼭 그럴게.”
 
 “놀아줄 건 없는 데 말야.”
 
 그는 젠체하며 머리 뒤로 손을 맞잡았다.
 
 “책을 덮으란 얘기는 안 했어. 단지 점장의 배려이지.”
 
 그는 웃어버렸고, 쿠키를 집어들었다.
 
 “난 여기가 좋아. 여기에 너가 있는 것도 좋고. 하지만 언제까지 있을 셈이야?”
 
 “글세.”
 
 “바리스타라도 되려구?”
 
 “글세.”
 
 “이봐.” 그는 어른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나는 우리 나이에 걸맞는 태도를 알지 못했기에, 그의 태도가 어색했다.
 
 “흔히 군대를 다녀오면 시각이 변한다고 말하지. 맞는 말이야. 2년 동안 있다보면 조직이라는 계획적인 시스템에 놀라게 되지. 세상이라는 건 그렇게 돌아가. 다른 곳도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은 곳이 없지. 세상은 허술하지 않다구.”
 
 “좋아, 맞는 말이야.”
 
 “언젠간 이 골목도 변하고, 너도 졸업을 할 거야. 점장도 언제까지 이 다락방을 운영할거라는 보장이 없어. 너가 좋아하는 소소한 유희들도 계속될 수 없다구.”
 
 “알아.”
 
 “안다구?”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고, 실제로 대수롭지 않았다. 그는 나 때문에 진지한 맥을 놓아버렸다.
 
 “나는 너의 감상적인 태도를 좋아하지만, 때론 걱정돼. 네가 한 커피는 맛있지만.”
 
 “그리고 다락방의 하늘도 예쁘고.”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어. 하늘도 예쁘고.”
 
 “그리고 이 골목을 사랑하고.”
 
 “그래, 사랑한다구.”
 
 “그거면 됐잖아. 난 이 거리를 수호할 수는 없지만 최후의 생존자 정도는 될 수 있어.”
 
 “너를 위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군.”
 
 “사실은 너도 이곳을 좋아하지.”
 
 “젠장.”
 
 우리는 낡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더 낡은 공기를 뱉었다. 카라멜 마끼아또는 더딘 박자로 분절된 새로운 질서의 향이었다. 그 때 갑자기 카운터의 벨소리가 울렸다. 1층 손님의 주문이다. 아마 점장이 할 테지만, 나는 이 그늘과 편백나무로 만든 질서, 그리고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손님은 없었고, 점장은 난처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혹시 3만원이 비는데 출처를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을 리 없다. 나도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점장을 바라보았다. 점장은 이내 3만원의 행방에 대해 포기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카운터를 보다 그런 것 같은데.”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 “무슨 얘길 하다 온건가?”
 
 “친구가 이 가게를 사고싶다구요.”
 
 “이런. 쿠데타인가?”
 
 “아뇨, 혁명이죠.”
 
 “그래서 자네는 혁명 후에 무엇을 맡기로 한 건가?”
 
 “아르바이트생입니다.”
 
 “못된 친구로군.”
 
 점장과 나는 웃었다.
 
 “그럼 3만원 뺀 걸로 정산은 다 했으니 오늘은 마감까지 부탁하고 싶은데. 닫을 때 내가 올 건데 행여 못 오면 시간 맞춰서 닫아주고.”
 
 “알겠습니다.”
 
 “주말에 미안하네. 부탁해.”
 
 그러고 점장은 가디건을 걸치고는 나갔다.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포스에 연결된 CCTV를 되감았다.
 

 3만원은 나를 꼼꼼한 녀석으로 만들던 10원, 100원 단위의 돈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거기다 무책임에 대한 책임감, 마지막 한 조각이 크게 보이는 퍼즐을 향한 완벽성, 질서를 위한 균형감각이 CCTV를 돌려보게 했다.
 
 
 오전이어서 사람은 더욱 없었다. 점장과 친구인 불한당이 오전 일찍 다녀갔고, 내 또래의 사내 하나가 텀블러에 커피를 받아갔다. 친구와 누나가 함께 들어왔다. 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누나가 나갔다.
 

 그리고 익숙한 여자가 들어와 가게 안을 한참 두리번거리더니 포스에서 돈을 빼갔다.
 

 헌책방 노인에 대해 얘기해보자. 여기, 이 골목에 있는 사람들 모두 헌책방 노인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노인은 누구보다 앞서 이 골목에서 자리잡았고, 오는 사람을 반겼고 가는 사람을 아쉬워했다. 누구도 이 노인의 젊을 때를 보지 못했으니, 노인은 과거에도 노인이었고 미래에도 노인일 것이었다. 그렇게 이 골목의 비루한 영광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헌책방에 이질적인 한 명, 거리에서 돋보이다 못해 스스로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 한 명이 있으니, 바로 노인의 손녀였다.
 

 노인이 노인일 것처럼, 손녀도 손녀일 것만 같았다. 그 독보적인 미모와 함께 말이다. 손녀는 빛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리의 음습함에 주눅들지 않았으며 생기를 뿜어내진 않았으나 병자처럼 섬뜩하게 희번득하지도 않았다. 예컨데 이런 것이다. 손녀 역시 자신만의 음차를 만들어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방법으로 거리의 건반을 두드리는 정교한 음악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예외. 손녀는 이곳에서 홀짝이다 가는 아주 모범적인 손님이지만 내 친구가 될 순 없었다. 본질적으로 손녀는 이 거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질적이었고, 정교한 음악은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한 큰 소리가 나는 이어폰에 불과했다. 때문에 결국 나와 친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혹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이 손녀가 구석에서 창밖으로 거리에 슨 녹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톰슨 가젤 같은 매끈한 여리여리함에 가게의 손님이나 가게 밖의 행인들이 포복한 것처럼 조심스레 접근하곤 했다. 같이 드실래요? 따위의 수작을 걸면 혼자 마실게요, 이국의 도도한 공주처럼 단박에 외면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쩌렁쩌렁한 빙벽을 넘으려는 용감한 기사가 있나니. 이런 사람들에겐 용기의 시범조교로써 훌륭한 본을 보이기 때문에 훈장을 줘야한다. 당돌하게 맞은편에 앉아 전 여기가 좋아요. 어떠세요? 말을 걸으려니 이 손녀는 마시던 커피를 냅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동그란 다락방을 나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남자는 사력을 다해 뒤따라나갔고 이윽고 두 사람이 다락방 밖에서 나눈 몇 마디 말. 그리고 경쾌하게 올려붙인 손녀의 뺨따귀. 소리를 듣지 못해도 찰싹 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그 광경을 점장과 나는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그렇게 가게는 단골 한 명을 잃었다. 놀랍게도 그러한 사건은 서너 번 더 있었고, 그만큼 가게는 손님을 잃었다.
 

 점장은 말했다.
 

 "이 거리에선 통속극이 오히려 귀해지지. 잘 봐두라구."
 
 
 라며 이죽였다.
 

 그리고 그 손녀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다락방에서 3만원을 가져간 것이다.
 

 그 때 친구가 2층에서 내려왔다.
 

 "누나가 오기로 했는데 안 오는군."
 

 "무슨 일이 있어?"
 

 "사실 말다툼을 잠깐 했는데."
 
 
 "그래?" 나는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으나 그만 두고 절도 얘기를 꺼냈다. "방금 가게에 있던 3만원이 사라졌어."
 

 "3만원이 사라지다니. 왜?"
 

 "헌책방 할아버지 손녀가 가져갔더군."
 

 헌책방 노인의 손녀라는 말에 친구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왜그랬지." 그러고선 친구가 내게 물었다. "어떡할 셈인데?"
 

 "내 돈으로 메꿀 거야. 그 다음에 찾아가야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아."
 

 "잘 말해두라구.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러고서는 친구는 누가 때문인지 침울한 기색을 드러내며 누나를 찾기 위해 카페에서 나갔다. 일이 잘 된다면 극적인 만남을 한 뒤 진솔하게 화해하고 함께 식당이든 도서관이든 가리라.
 

 나는 손녀의 범행을 파일로 담아두고, 복사본을 만들어 따로 저장한 뒤 비는 3만원을 내 돈으로 채웠다. 놀라운 일이지만 점장은 CCTV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애초에 신경도 안 썼거니와, 지나간 일은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점장은 드라마 재방송도 보지 않았다. 그에게 극은 타인이고, 재방송은 과거에 대한 관음이었다. 점장은 단지 기억할 뿐이었다.
 

 꼼짝없이 마감까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점장이 들어왔다. 여름이 오려나봐, 하며 손부채질을 하는 점장에게 나는 얼음물을 대접했다.
 

 "서랍에 3만원이 끼어 있었는데 이게 그 돈 맞나요?"
 

 "그게 왜 거기 있지? 아무튼 찾아서 다행이군."
 

 그러면서 점장은 수고했다며 점심값까지 챙겨주었다.
 

 나는 가게의 책 한 권을 빌린 뒤 나섰다. 떨어진 벚꽃잎이 자취를 감추는 중이었고, 골목의 냄새는 항구에서 전해오는 짠내와 상한 비린내가 섞여 골목의 풍화를 재촉했다.
 

 할아버지. 손녀. 할아버지. 손녀. 중세의 연금술사처럼 어떤 혼합물을 들여다보듯 시의 언어를 좇는. 그리고 제자라고 하기에는 건방지고 삭은 책장들의 거친 표면에는 무관심한. 유대가 부족한 어느 마법사와 도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나는 헌책방으로 향했다.
 

 때는 점심시간이었고 해는 수직으로 내리쬐었다. 빛과 차양 아래 그림자가 만든 극명한 명암의 대조는 헌책방의 모습을 기술 좋은 사진처럼 인위적으로 보이게 했다. 낮에는 거의 간 적이 없는 헌책방이었고, 몇 번의 방문마저 점장의 심부름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것이었다. 난데 없이 무슨 책을 사와, 라고 말하면 그 책은 분명히 헌책방에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큰 책방에서도 팔지 않는 유행 지난 책, 혹은 원서를 주문하는 점장도 그랬고 그 책들을 다 가지고 있는 헌책방도 그랬다. 알고 계셨던 건가요? 물었을 때 점장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거기 있을 테니까. 점장은 마치 어제가 지나면 오늘이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라는 식으로 상식적인 투였다. 점장의 논리에 따르면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걸작, 앎을 외면하여 시간의 모래에 파묻힌 시대의 고전들은 그곳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나도 어느 새 점장과 같은 생각이었다. 헌책방에 있고 없고는 책의 기준이 되었다.
 

 활자의 파수는 손녀와 함께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자장면은 귀족음식이었던가? 나는 두 사람의 식사 모습을 보며 잠시 착각했다. 노인은 나를 보고 반겼다.
 

 "한 그릇 더 시킬테니 먹을텐가."
 

 노인이 물었다. 그는 항상 근엄했고, 심지어 자장이 입술에 묻어도 근엄했다. 자장마저 엄숙할 지경이었다. 손녀는 면을 입에 문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무슨 책이 필요한가?"
 

 "이번엔 책이 아니구요." 나는 손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 쪽에 볼 일이 있어서."
 

 노인이 껄껄 웃었다. "자네, 용감하군. 자네라면 괜찮지. 손녀딸이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말야. 앉았다 가게."
 

 나는 남은 의자에 앉았다. 노인과 손녀와 내가 꼭지점을 이루어 정삼각형의 구도였다. 손녀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무심하게 자장면을 먹었다.
 
 
 "무슨 일인가? 내 손녀딸에게."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주 중요해서 비밀입니다."
 

 노인은 손녀의 기색을 살폈다. "자네에게만 비밀인가보군."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듣게 되면 도저히 떨쳐낼 수 없겠죠."
 

 "그런가?" 노인은 손녀와 나를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보았다. 마치 우리의 젊음이 노인에게 쏠린 듯한 번뜩이는 생기였다. 나는 수수께끼로 가는 이 대화를 즐겼다. "우리 손녀는 쉽지 않네. 아주 단단한 아이지."
 

 "자네는," 노인이 다시 물었다. 노인은 갑자기 손녀의 아버지처럼 굴었다. "자네는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는 대답했다.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허." 노인은 웃어버렸다. 나는 손녀가 나를 신경쓰는지 알 수 없었다. 상관 없었다. 나는 추상적인 대화를 그만 두고 들어가기로 했다.
 

 "안에서 책 구경이나 하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다. 책의 동굴, 뚝뚝 떨어지는 단어의 방울이 식도와 기도 사이에 젖어들 때 인기척을 느꼈다. 손녀였다.
 

 "무슨 일이지 나한테."
 

 손녀의 음성은 메아리는 커녕 여운도 없었다. 항상 그림자가 드리운 이 말들의 숲에서 손녀의 말은 쉽사리 바스렀다.
 

 "까페에 왔다 갔었지요."
 

 "그런데?"
 

 "커피라도 시키시는 줄 알았지요."
 

 "3만원 때문에 그런 거지."
 

 "네 맞습니다."
 

 손녀는 태연했다.
 

 "신고해도 좋아. 통보해주러 여기까지 오다니."
 

 나는 말했다.
 

 "신고는 안 했습니다. 점장은 몰라요. 그냥 제 돈으로 메웠습니다."
 

 손녀는 나를 빤히 보았다. 의도를 파악하려 분투하며, 또 한편으로는 궁리했다. 나는 적의를 드러내지도 위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언제나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는 모든 유형의 싸움에서 단지 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동시에 나와 연령이 비슷하거나 더 어린 손녀에 대한, 주도권을 가진 자의 거의 무가치하다고도 할 수 있는 아량이었다.
 

 "뭘 바라는 거지."
 

 "이야기입니다." 내가 말했다. "돈을 받으면 좋겠죠. 신고를 해도 전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제 돈으로 메워도 상관 없구요. 그쪽에서 내쫓은 단골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지만, 뭐 괜찮습니다. 이유를 들려주세요. 결정은 내가 합니다."
 

 우리 사이엔 왈칵 터져나올 것 같은 팽팽한 표면장력이 드리웠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손녀가 시선을 피했다. 낀 팔짱에 얼굴을 묻을 것처럼 숙였다. 내가 정확히 파악했다면, 손녀는 상처받은 태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리운 상처가 새어나오는 태도, 동시에 상처를 꽁꽁 틀어막으려는 포즈였다. 그리고는 다시 포즈를 바꿨다. 손녀는 나를 보았다.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손녀와 나는 가까워졌다. 숨결이 끼쳤다. 위험한 거리였다. 손녀의 눈을 보며 나는 예전에 읽은 공주와 마녀를 떠올렸다.
 

 "돈이 없었어요." 손녀는 말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방금 먹은 자장 냄새는 온데간데 없이 화한 박하향이 끼쳐왔다. 손녀의 눈을 보며 나는 예전에 읽은 공주와 마녀를 떠올렸다. 옛날에 눈이 아주 예쁜 공주가 살았다. 각국에서 칭송받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공주는 악의를 가진 마녀에게 저주받았다. 마녀가 죽은 뒤엔 공주가 마녀가 되리라는 저주였고 끝내 공주는 마녀가 되고 말았다. 공주는 늙고 추해졌지만 눈만은 아름답게 남았다. 이제 공주는 자신의 아름다운 눈으로 저주를 걸었다. 공주와 눈이 마주치면 아름다운 눈을 가진 마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손녀의 눈은 동화 속 공주의 눈처럼 심연 저편처럼 맑고 영롱했다. 공주는 저주의 대속을 바랐던가? "돈이 없는데도 이유가 필요한가요. 헌책방도 할아버지도 단지 좋은 일이고 좋은 분일 뿐이죠. 좋은 사람보다는 돈이 더 소중해질 때가 있어요. 그런 때는 많죠. 3만원은 다시 드리려고 했어요. 그 돈으로 카라멜 마끼아또를 사먹으려고 했으니, 다시 드린다는 말은 맞지 않군요."
 

 나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됐습니다, 이젠. 제가 샀다고 생각해주시죠. 이걸로 된겁니다. 가보겠어요."
 

 "아뇨." 손녀는 나를 붙잡았다. "갚을 거에요." 그러고는 한 발짝 내게 다시 다가왔다. 손녀는 내 손을 어루만졌다. "무엇으로도요. 그쪽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군요. 뺨을 때리고 싶은 사람을 보았지만… 뺨을… 이토록……." 손녀는 손등으로 내 뺨을 슬어내리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제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쪽은 이제 특별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손녀는 말했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할테지만, 곧 그렇게 될 거에요. 내가 그렇게 만들테니까요. 그럴 수 있으니까요, 나는."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지요. 수작이죠, 전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편합니다. 차라리 뺨을 때리세요."
 
 
 "이 골목에서 괜찮은 사람을 볼 줄은 몰랐는데."
 

 나는 말했다. "제가 이 골목의 최후의 생존자가 될 예정이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가버리면 무엇을 보고 괜찮을지 알 수 없죠. 그러니까 그 전에 미리 괜찮은 녀석 흉내를 내는 셈입니다."
 
 
 "모델이 있나요."
 

 "글쎄요." 나는 손녀에게 떨어지며 말했다. "가보겠습니다."
 

 "오후 일곱 시에 백조 앞으로 오세요, 3만원 드릴테니!"
 

 손녀는 내 뒤통수에 외쳤다.
 

 나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나왔다. 표정을 보니 안의 상황이 어땠는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면 노인이 짐작할 법한 애정이나 밀담과도 연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위험할 뿐이었다.
 

 나는 숨이 턱턱 막혔고, 넥타이를 풀듯 상의 앞목 부분을 잡아당겼다. 손녀가 진심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었다. 가지고 놀다가 결국 박살나버리는 장난감이 될 뻔했다. 바늘 끝에 달린 독이 방울을 머금어 떨어지기 전에 피한 셈이었다. 주고받은 말장난도 쉽게 유언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서투른 탐정이나 영웅 흉내를 내려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손녀는 돈이 없었고, 카라멜 마끼아또가 먹고 싶었다. 주문하러 갔지만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돈만이 손녀를 기다렸다. 왜 3만원인지, 왜 카라멜 마끼아또인지는 손녀의 취향과 양심으로 설명하자. 모든 이해는 끝났고, 뉘우칠지는 모르지만 재범은 없을 것이다.
 

 "돈은 받지 않아도 상관 없어."
 

 "네가 받지 않으면 내가 받지."
 

 "왜?"
 

 "왜? 왜라니, 널 기다리고, 그것도 돈을 주기 위해 기다린다는데 가지 않겠다고?"
 
 
 "난 그 애가 싫어. 이젠 슬슬 무서워."
 

 "하지만 돈이 싫진 않겠지. 좋아, 그렇다면 그 돈으로 차라리 점장님을 사드려. 내가 얻어먹은 공짜 커피값으로 말야."
 

 친구는 나를 설득했다. 친구는 오후 내내 누나를 찾기 위해 옆 시까지 다녀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늦으면 아버지가 찾을 테니."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친구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겠다며 다시 누나를 찾기 위해 떠났다. 누나는 손녀와는 정반대였다. 손녀가 자신을 보기 위해 벼랑을 오르는 사람을 막으려고 벼랑에 대못과 가시를 박았다면, 누나는 벼랑에 오른 사람에게 부채질과 시원한 음료를 준 뒤 다시 떨어뜨리는 유형이었다. 말하자면 누나가 더 악랄했고, 그 악랄이 자신의 미모를 깨달은 여섯 살 아주 어릴적부터라는 점에서 죄질이 더욱 무거웠다.
 

 누나를 누구보다 가까이 봐온 입장에서 친구는 누나에게 선택받은 용사였다. 누나는 그 전까지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고, 그런 비슷한 모습의 남자가 있더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친구는 몇 번이고 벼랑을 기어올라와, 그간 다듬어진 원망 없는 순정과 진심으로 누나의 허락을 받았다. 4년 간의 노력, 군대를 포함한 대학생활 절반의 헌신이었다. 누나가 무려 부모님에게 공표할 정도였다. 소련 붕괴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누나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친구에 대한 마음만은 진지하게 변했으나 나처럼 가까이서 오랜 세월 한 발짝 떨어져 보아야 알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친구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누나는 언제나 정조가 위험한 소중한 딸이었다. 누나의 페로몬은 성직자도 성범죄를 일으킬 최음제 쯤으로 여겼다. 친구도 비슷한 견해이기 때문에, 친구와 아버지는 뜻은 비슷하나 사이가 좋지 않은 동맹 혹은 이웃이었다. 그러나 넘을 듯 넘을 듯 결국 넘지 않는 누나의 행실을 알기에 나는 누나 걱정을 하지 않았다. 손녀와 손녀가 주기로 한 3만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저녁 골목은 지는 해의 포효를 지나 그림자의 이슬을 머금었다. 가로등이 들어왔고, 토사물마저 슬슬 아련하게 보였다.
 

 백조는 소극장 이름이었다. 내가 이 골목으로 오기 전부터 존속이 위태로운 상태로 현재까지 있다고 한다. 골목 끝에 위치했으며, 상가 3, 4, 5층을 차지했다. 1층은 파마를 하다 자칫 파스타를 만들어버릴 것같은 악명높은 미용실, 속옷인지 수영복인지를 걸어놓고 여성의류 전문이라고 쓴 옷가게였고, 2층은 단지 쉬기에만 적합하다는 쉴만한 물가라는 경양식집이었다. 나는 이쪽까지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백조 극장 건너 골목이 풍기는 음침함 때문이었다. 욕설과 고함, 돈을 잃은 사람들과 돈을 빼앗는 기계들. 비틀거리는 술꾼과 술꾼을 상대로한 협잡, 성인 안마나 키스방이라고 쓰인 천박한 간판에 있는 천박한 몸짓의 천박한 여자들. 항구에서 오는 바닷내들이 이 골목으로만 오면 쉽게 썩었다.
 
 나는 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백조로 갔다. 하지만 손녀는 나보다 먼저 백조 앞에 있었다. 어떤 건달과 함께 말이다.
 

 둘의 사이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건달은 억지로 손녀의 턱을 붙잡고 입을 맞추려고 했다. 손녀는 애써 떨쳐내려고 애를 썼지만 우악스런 힘에 밀렸다. 손녀에게 드리운 공포와 패배감을 느꼈다.
 

 나는 그 둘에게 다가갔다. 단지 다가갔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건달은 산통깼다는 듯 분노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이 새끼 뭐야, 안 꺼져?"
 

 손녀는 잽싸게 내 뒤로 도망쳤다.
 

 "이런 씨발, 너 누구야. 뭐하는 새끼야."
 
 
 "커피집 알바생입니다."
 

 건달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거리를 가늠했다.
 

 누구나 선천적으로 비열함을 가지고 태어난다. 표현의 부재는 비열함을 낳는다. 갓난아이의 웃음에도 비열함이 도사린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울게 되는 그 순간, 그 이후, 웃음과 울음 두 개의 표현으로 스스로를 기만하고 상대방을 종속시킨다.
 

 나는 다시 비열해졌다. 건달이 다가오자 주먹으로 명치를 내질렀다. 꼼짝 못하는 건달의 급소를 무릎으로 찧은 뒤, 고통에 헐떡여 허리를 굽힌 채 옴짝달싹 못하는 건달에게 조인트를 깠다. 바닥에 엎드려버린 건달의 얼굴을 찼다. 건달의 손을 밟고 꾹꾹 비비자 건달이 소리를 질렀다.
 

 "신고합시다, 신고. 간첩도 신고하고 부정부패도 신고해서 좋은 사회 만들어야죠. 저기 남부청에 어느 형사님이 내 아버지신데 공명정대하게 처리할겁니다. 물론 너도 나랑 같이 가야지. 안 그래?"
 

 손을 비빈 발로 몸을 툭 치자 건달은 기다 뛰다를 반복해서 도망갔다. 나는 낄낄거렸다.
 

 손녀는 아연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래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신이 돈을 훔칠 상황이었듯이. 잘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손녀는 3만원을 꺼내 내게 건냈다. 나는 거절했다.
 

 "됐어요, 당신 쓰세요.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던 저런 남자랑 데이트를 하던."
 

 "오해 말아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오해도 이해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부른 이유를 모르겠는데. 전혀 모르겠어. 그리고 받고 싶지도 않고. 친구의 권유가 없었다면 안 왔을겁니다.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괜한 걸 봤고 괜한 짓을 해버렸으니."
 

 손녀는 생기를 잃고 시들었다. 고개숙였으며, 3만원을 집은 손이 축 쳐졌다. 손녀를 구성하던 얼음이 눈물처럼 녹아내렸다.
 

 "저 남자가 협박했어요. 내가 일하는…… 내가 일하는…… 안마방의 단골이죠. 그래요, 나는 저 골목, 더럽고 역겨운 골목에서 일해요. 그러다 손님이 왔죠. 까페에서 뺨을 맞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소문을 냈죠, 헌책방집 손녀라고. 갓 들어온 데스크 직원이 협박했어요. 말하겠다고…… 할아버지게에게. 등록금을 갚느라 돈이 없었어요. 헌 책방이 어디서 돈이 나겠어요? 용돈 주기에도 버거운데 말이죠. 나도… 나도 내가 잘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손녀는 나를 보았다.
 

 "남자 혐오가 인간 혐오로 발전하기는 쉽죠. 하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래서 그 쪽을 믿고 싶었어요. 나는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이 골목과 다락방을 보던 사랑스러운 눈길을. 이해는 무리였나요? 그건…… 어려운 일이었나요?"
 

  나는 손녀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손녀를 서서히 이해했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도 책임이 필요한 이 시대에, 나는 손녀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손녀의 노래를 너무 늦게서야 들었다. 손녀가 골목을 즐기던 순수한 방식, 하수구를 흰 건반 삼고 하수구 구멍을 검은 건반 삼아 연주한 고요한 비창을, 시간과 이해를 거쳐 너무 늦게 들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결국 3만원을 받았다. 손녀는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어디선가 소문을 들은 노인이 손녀와 함께 무너져 울었다고 했다. 점장은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다독이며 손녀를 알바생으로 채용했지만 과거를 바꾸지는 못했다.
 

 누나를 찾지 못한 친구에게 모든 정황을 얘기해주었다. 친구는 멀리서 손녀와 노인, 헌책방을 위로해주었다.
 

 나는 카라멜 마끼아또 두 잔을 시켜 한 잔을 친구에게 주었다.
 

 "손녀가 돌려준 돈으로 산건가?"
 

 "응."
 

 "비싼 커피군." 친구가 말했다. "손녀를 위하여. 카라멜 마끼아또, 3만원 어치."
 

 그러나 나는 마시지 못했다. 카라멜 마끼아또 향이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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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속작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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