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무는 악마

작가의집 6 2,915

기존에 쓰던 '작가의집 이고깽 판타지'시리즈와는 별갭니다.


-----

발을 무는 악마

"자... 이제 완성이다."

몸을 숙인 채 한참 붉은 게 잔뜩 채워져있는 바가지에 손을 넣엇다 빼었다를 반복하던 교복차림의 소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며 손바닥을 짝 부딪혔다. 해가 이미 져 어둑어둑한 공터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소녀의 발치 앞엔 지름 1m정도로 그려진 붉은 원이 보였다. 붉은 원 속은 육망성이며 라틴어며 히브리어며 그 밖에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여기 치워놓고."

소녀는 아까까지 계속 손에 담갔다 뺐다 하던 바가지였지만 왠지 내용물을 보며 내심 불쾌한 기분이 들어 바가지를 원 바깥으로 치웠다. 바가지 속에 담겨 있던것은 아까 잡은 닭에서 나온 뜨끈한 피였다. 물수건으로 손의 피를 싹 지워버린 소녀는 입고 있던 교복 가디건에서 손바닥보다 살짝 더 큰 책자를 꺼내 펼쳤다. 책의 겉 표지엔 원 안에 쓰여진 문자마냥 알아들 을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물론 책 내용도 마찬가지. 소녀는 원 앞에 서서 책을 보며 찬찬히 또박또박하게 낭독을 시작했다.

"테켈리-리 테켈리-리 아르뻬게 알라 마직 완드-"

뭔가 알아먹을 듯 하면서도 의미를 못알아먹을 주문이 이어졌다. 소녀는 중간 중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낭독을 계속했다. 주문이 중간 쯤 이르자, 붉은 원이 보라빛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와. 진짜...?! 아차, 멈추면 안되지..."

소녀는 자신이 그린 소환진인지 마법진인가가 정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놀람과 감격에 겨운 나머지 낭독을 멈추고 말았다. 보라색 광채는 다시 잦아들었다. 소녀는 불확신에서 확신으로 바뀐 기쁜 기분으로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아브라- 카다브라- 아베세떼-"

잠깐, 뭔가 이건 알아먹을 것 같은데. 아니아니, 이런 말 하면 안되지. 흠흠. 다시 들어보아도 여전히 알아들을 듯 말 듯 한 주문이었다. 원에서 빛나는 보라색 기운은 점차 더 밝게 빛나더니 짙은 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문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시-에라, 양-키이 줄-루"

주문이 음성기호였냐?! 엉?!! 아아. 흠흠. 끝...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끝나자, 원 속에서는 무엇인가의 형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소녀는 방방 뛰며 기뻐했다.

"성공이다! 악마 소환이 진짜 된다고!!"

이윽고 원 속에서 솟아오르던 무엇인가는 딱 하고 형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짙은 안개속을 헤치며 찬찬히 걸어 나온 것은-

"응...?"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객님. 정성을 다 하는 퍼거토리 영혼 거래소 소속 상담 악마 '아시푸트 스토파페스 카키-포디 피에데발' 입니다."

양 팔엔 슬리브 가터까지 제대로 찬 깔끔하게 다려진 영국 스타일 양복, 그리고 광나는 구두를 신고 키는 소녀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붉은 피부의 14살 정도 먹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 그러니까..."

소녀는 예상하던 비주얼에서 적어도 지구 한 바퀴 반은 벗어난 악마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양복바지 뒤꽁무니에서 휙휙 흔들고 있는 끝이 마치 스페이드 같은 붉고 긴 꼬리와 섀기한 깜장머리 사이에서 새초름하게 솟아나온 짧은 악마 뿔 정도였다. 소녀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꼬마-처럼보이는-를 바라보고 있자, 꼬마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일 뿐이었다. 뱀의 눈 마냥 세로로 찢어진 모양의 눈동자에 스멀스멀 의문이 피어올랐다.

악마를 불러놓고 정작 소환한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악마 쪽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정적을 깨려는 듯 악마는 양복 안주머니에 잘 관리한 것처럼 보이는 매끈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넣어 연보라색 명함을 꺼내 소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에- 상담 일 말고 저주 및 영혼 매매 알선도 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후에 추가로 연락을 해주셔도..."

그러나 소녀는 아직도 입을 헤 벌리고 소년이 내민 명함과 매끈거리는 뾰족한 손톱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저기요? 고객님!"

소년의 인내심은 한계를 맞고 있었고, 답답한 속내를 토해내듯 소릴 약간 높여 소녀를 불렀다. 소녀는 그제야 머리를 휘휘 저으며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엔 앞에 서있는 악마를 소환한 원에 적힌 이상한 문자들이 빼곡했지만, 받아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함의 글자는 소녀가 알아 볼 수 있는 가타카나로 스멀스멀 바뀌었다.

"퍼거토리 영혼거래소 상담원 ''아시푸트 스토파페스 카키-포디 피에데발'?'

"네에, 고객님. 아까 소개해 드렸죠?"

소녀는 나긋나긋한 소년의 대답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지만, 내가 부른 건 무저갱의 지배자이자 이 세상을 멸망시킬 대 악마-"

"닭 피로 대충 그린 소환진으로 그 아저씨를 부르시겠다구요?"

소녀의 말을 끉어먹은 소년의 말투가 왠지 모르게 아까와 달리 건방져졌다. 소년의 얼굴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점점 짜게 식어가고 있었다.

"역시 똥 밟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애초에 닭 피같은데에 불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관리관 이 짠돌이 같은 여자... 이런 건 꼭 날 시켜먹고..!"

별안간 소년의 신세한탄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소녀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을 슬슬 깨닫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악마 소환' 같은걸 한다고 해서 잔-뜩 들뜬 사람들한테 약관 설명부터 다음 계약까지 귀찮은 절차를 요목조목 알려 주는건 말단 상담원인 내 몫이지. 암. 암."

소년은 불만스러운 태도로 팔짱을 팍 끼고는 혼자 고갤 끄덕이며 신세한탄을 계속했다. 소녀는 이대로 있기는 좀 곤란하다 싶어 소년의 한탄을 잠시 막았다.

"어.. 그러니까 아시푸.. 뭐였더라?"

"아시푸트라고 부르세요. 예, 고객님. 왜 그러시죠?"

공손도가 아까와 비교해 90%는 빠진 국어책 읽기로 소년은 대답했다.

"그럼, 너 말고 원래 내가 불러내려던 무저갱의 대 악마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소년은 이마에 손바닥을 척 부딪치면서 푸념하듯 대답했다.

"악마는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안 해 드리는 것 아시죠? 대 악마 아저씨를 부르는 거나, 절 지금 부르신 거나, 지금 그 질문에 답해드리는 거나."

"뭐?! 널 불러낸 것도 대가를 줘야 한다고? 내가 원하던 악마가 나온 것도 아닌데 너무하잖아!"

"대가는 대가죠. 회전초밥 집에서 모르고 막 집어먹었다고 했다 해서 돈 안내나요."

소년은 왠지 설득력 없는 예시를 들며 소녀에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그런고로, 일단 절 불러낸 값부터 받아야겠네요."

소녀의 머릿속에 '악마 소환의 대가' 에 대한 정보가 뒤섞여서 천둥치기 시작했다. 소녀는 스슥 뒷걸음쳐대며 자신의 몸을 급하게 감싸 안았다.

"그럼 내 영혼이나 정조를-"

"고작 약관 설명 때문에 불려나온 주제에 그런 걸 막 취하면 저 돌아가서 두세 번은 죽을 정도로 맞거든요?!"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소녀는 지옥에 사는 악마니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해 그냥 납득했다.

"그럼 뭘 원하는 건데?"

꼬마는 짧게 한숨을 툭 쉬었다.

"신발 벗으세요."

"뭐?"

"신발 좀 벗어주실래요, 고객님?"

몸에 딱 맞는 멋진 양복에 흙 묻는 건 신경도 안 쓰는지 소년은 땅바닥에 양반다리로 털썩 주저앉으며 손가락으로 소녀의 단화를 가리켰다. 소녀는 뜬금없는 신발 탈착 요구에 일단은 따르기로 했다. 계속 왜 왜 거리며 이유를 물어대면 가뜩이나 불만 쌓인 이 소년 악마가 그냥 사라져버려도 이상할 게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녀는 발뒤축을 비벼 단화를 벗고 검은 스타킹인 채로 흙바닥에 올라섰다.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 전체로 느껴져 왔다. 소녀는 스타킹에 흙이 묻는 것이 신경 쓰여 엄지발가락을 옴지락댔다.

"아예 자리에 앉으시고 스타킹까지 벗으세요."

"저기, 그러면... "

땅바닥에 앉아서 그런 행동을 하면 치마 속이 훤히 보일게 뻔했기에 소녀는 멈칫했다.

"신경 안 씁니다. 치마 속에 뭐가 있든 전 스타킹 속에 들어있는거에만 신경 쓴다구요."

잠시 '스타킹 속에 뭐?' 라고 의문이 들었지만 소녀는 아까 치워둔 바가지를 엎어 그 위에 앉고는 허벅지까지 오는 스타킹을 벗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자로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려, 소년이 치마 속을 보지 못하게 몸을 돌려 벗었다.

"아, 예 예. 맘대로 하세요."

소년은 피식 웃고는 긴 꼬리를 흔들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스타킹을 한 쪽에 가지런히 놔두고 소년 쪽으로 다시 돌아앉았다. 꽉 잡은 교복치마폭은 집요하게 허벅지 안쪽을 가리고 있었다.

"그 쪽은 정말 신경 안 쓴다니까요..."

"다 했어."

"발 이리 내세요."

소년이 손을 내밀며 하는 말에 소녀의 얼굴에 다시금 의문이 띄워졌다. 왠 발?

"발 이리 내세요. 감정 좀 할게요."

"발가지고 무슨 감정을...하는 거야?

소녀는 반신반의하며 흰 맨발을 꼬마에게 뻗었다. 소년은 조심스레 발을 받아들고는 두 손으로 그것을 슥슥 매만지며 이리저리 살폈다.

"발가락이 가지런하게 정련된 모양새지만 로만 풋(Roman foot). 나쁘진 않지만- 아쉽네. 발 볼 상태하고 족저근막과 발꿈치, 발목의 각질상태를 보아 여태 높은 굽은 신어보지도 못했구만. 양호. 양호. 높은 굽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까. 발목 라인. 운동을 좀 한 건가? 라인은 투박해서 별로네."

소년이 발을 살피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니, 소녀는 슬슬 불안해졌다.

"얘, 그러다가 갑자기 대가라고 하면서 막 발을 잘라간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

"그랬다간 돌아가서 세 번은 더 찢어죽게 되겠죠?"

소녀를 보지도 않고 발 감정을 계속하며 말하는 소년은 발톱을 손가락으로 쓸며 확인하다가 발바닥을 세워 자신의 코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거친 코의 숨결에 소녀는 발을 슬금슬금 빼려 했지만 소년의 붉은 손이 내빼려는 발을 세게 붙잡았다.

"아- 아야!"

"감정중인데 막 빼는 거 아닙니다. 고객님."

짜증난 듯 한 소년의 얼굴에 소녀는 발에서 힘을 뺐다. 소년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계속해서 코를 발바닥을 거쳐 발가락, 발등으로 옮기며 계속 킁킁댔다.

"피부 결이 굳은살 없이 매끈하길래 타고난 줄 알았더니 최근에 발 관리 받으셨나봐요? 오일냄새하고 풋 크림 냄새가 나."

일주일도 넘게 지난 일을 정확히 짚어내자, 소녀는 움찔했다.

"하긴, 난 발 관리 받는 손님이 좋으니까. 채취를 봐선 아포크린샘도 그닥 발달되지 않은 것 같고... 사춘기 때의 나이실텐데 의외네요."

소년은 혼잣말을 계속했다. 발 하나만 살피는데도 벌써 십 분이 넘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오케이. 양호. 양호."

소년은 자신의 무릎위에 소녀의 발을 살며시 내려놓더니 갓 소환될 때에 취하던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 퍼거토리 영혼거래소에서 관장하는 악마소환과 저주, 영혼거래 등등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그리고 고객님 같은 초심자들을 위해 약관 설명과 기타등등 귀찮은 설명을 위해서 저 같은 말단들이 존재하죠."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자길 가리킨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대가'가 대충 어느 것인지 조...오금 어거지이긴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저 같은 말단에 대한 소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잘 알 수 있게 설명해드립니다."

소녀는 설명이 뭔가 앞뒤가 잘 안 맞는 느낌이 들어 머리 속이 복잡했지만, 거기에 대해 생각하기보단 지금 당장 내야 할 대가가 뭔지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소환 대가가 뭔데?"

그 질문을 듣자마자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대가라는 게 각각의 악마마다 달라서요. 어떤 놈은 헌혈센터도 아니고, 전혈 400ml를 달라는 놈들도, 장기자랑을 보려는 놈들도, 초콜렛을달라는 놈들도, 나중에 집에 잠시 들리게 해달라는 놈들 등등 가지가지죠."

소녀로썬 지금 상황에서 당최 무슨 소환 대가가 튀어나올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설명 중에 계속해서 소녀의 새끼발가락을 만지작대던 소년은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아니, 그래서. 네 소환 대가는 뭔데?"

소년은 만지던 발을 내려놓고 두 손바닥을 쫙 펴 소녀 앞에 들이밀었다.

"10분. 10분동안 고객님의 발을 물고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는 소년 악마를 보며 소녀는 '역시 악마는 악마구나' 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경멸어린 시선을 날렸다. 소년은 그 경멸어린 시선이 기분 좋다는 듯 더욱 활짝 웃었다.

-----

"알았어..."

소녀는 혹시나 자신의 발에 끼쳐질 해악을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해보기도 하고, 시뮬레이션도 해보며 미심쩍고 찝찝한 기분으로 몇 분을 진땀흘리며 고민했다. 그러나 끝내 마지 못하는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일단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지 않는가. 지금 이런 변태 같은 일이라도 받아들어야 체납으로 인해 혹시라도 올지 모를 더 큰 해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채업자나 전당포도 아닌 진짜 악마가 아닌가. 장기나 압류 수준이 아니라 영혼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야. 잘 생각 하셨어요."

소년은 만지작거리던 소녀의 발을 두 손으로 지그시 잡아 얼굴 앞으로 들더니 한껏 뱀 같이 노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러던 와중 소년은 손가락 하나를 싹 들어올렸다.

"아, 중간에 불쾌감이 드시거나 좀 싫은 기분이 드신다면"

말 하던 도중에 음흉한 웃음이 섞이고 있었다.

"언제든지 반대쪽 발로 절 걷어차세요. 그러면 더 열성으로 물고 핥아드릴 테니까... 전 발로 차이면서 이걸 하는 게 더 좋거든요!"

이건 분명 도중에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암묵의 발언임을 소녀는 어렴풋이 실감했다.

애초에 이 변태 악마가 얼굴 앞으로 자신의 발을 올려 그 뜨거운 콧김이 닿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녀석을 격하게 걷어 차 떼어내고 싶어지는 충동이 왕왕 일기도 했고, 그 충동이 그대로 얼굴의 경멸어린 표정으로 드러내지고 있었지만 소녀는 애써 발길질이 나가는 걸 참고 있었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한껏 입맛을 크게 다신 후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변태..."

소년은 역으로 소녀의 반응이 맘에 드는지 낄낄대며 웃을 뿐이었다. 곧이어 웃음과 함께 올라갔던 입 꼬리가 쩍 벌려졌다. 변태 소년의 얼굴에 맞는 조막만한 입이 아닌 마치 하마가 입을 벌리는 듯 큰 입이 쩌억. 비정상적으로 크게 변하고 벌려진 입 속엔 발 하나는 커녕 스무 개는 들어갈 법 했고, 그 입 속엔 뭐라 명명하지 못할 길고 보라색을 띄며 돌기가 우둘투둘 박힌 끈적거리는 것들이 가득히 꿈틀대고 있었다.

소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그 더럽고 끔찍한 광경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잡히지 않은 왼쪽 발로 거세게 소년의 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크게 벌려진 입 위쪽에서 아주 살짝 보이고 있는 악마의 눈길이 가늘게 찢어지며 눈웃음 지었다.

"에구구, 벌써요? 이거 가지고 비주얼 쇼크를 먹으시다니."

악마의 뺨 부근에서 말하기에 알맞은 입이 별도로 하나 더 생겨나더니 입술을 뻐금거리며 소녀를 조롱했다.

"꺄아아악!! 이건 아니야! 안 돼! 안 됀다구!!"

소녀는 잡힌 발을 빼내려고 애쓰며 소리쳤다. 발길질도 멈추지 않음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소녀의 발버둥 아닌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기어이 그 혐오스런 입으로 소녀의 발을 집어삼키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발 끝 부터 시작해 발목 언저리까지 발의 주름 한켠 한켠마다 느껴지는 그 더러움과 공포감과 수치심이 뒤섞인 그 기분은 마치 분뇨구덩이에 온 몸을 던진 기분마저 들게 했다. 게다가 그 감촉은 숫제 지네와 같은 버러지들이 분뇨구덩이속에 가득 찬 것 마냥 불쾌함을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제 엉엉 울면서 헛발질을 날려대는 소녀는 '발이 강간당한다'는 감정이 가장 근접한 묘사였을 거라고 훗날 생각했다.

"에이, 고객님. 벌써 울어버리시면 전 흥이 안나서 어떻게 하나요? 아직 1분도 안 지났답니다. 제 간지르르한 입 속을 그냥 좀 더 만끽해보시던가... 아니면 더 분노에 차서 절 걷어차 보시는 건 어때요?"

다시 뺨에 돋은 입에서 나오는 조롱 섞인 권유에 소녀는 비명 지르느라 잔뜩 쉰 목소리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카랑카랑 질러대며 악마의 얼굴을 더욱 세게 찼다.

"그래요! 이거! 이거! 에헤헤헤헤!"

악마의 얼굴에 일말의 만족감이 배어나왔다.

그리고 지금 행하고 있는 소위 '말단 소환 대가'는 막 분침 하나를 넘기던 참이었다.

-----

소녀는 약속한 10분이 지나 악마가 정확히 입을 염과 동시에 발을 잡아 빼고 제대로 일어 선 다음 육상으로 단련된 다리로 변태 악마의 안면에 제대로 사커킥을 먹였다. 광소와 함께 흙바닥에 나뒹구는 악마의 양복이 한껏 더러워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뼛속까지 저리게 느끼던 모멸감과 수치심이 다시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기억나와 소녀는 손발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정작 물린 발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역시나 이건 정신적인 고통 문제였다.

악마는 혐오스런 큰 입을 다시 거두고 원래의 천친한 소년의 얼굴로 돌아가더니 입술을 쭈욱 혀로 할짝이고선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어휴, 정말이지 물고 있던 발보다 저를 차는 발이 더 맘에 든건 오랜만이네요."

"시끄러워, 이 변태 악마새끼야!"

소녀의 분노가 어린 목소리가 자못 위협적이었지만 악마 아시푸트는 뭐가 좋은지 계속해서 쿡쿡 웃어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신기하게도 전혀 구김살 없는 서류를 한매 쑥 빼내더니 양복에 어울리는 반테 안경도 앞주머니에서 꺼내어 썼다.

"큼큼. 고객님이 원하시던 건 분명 무저갱의 지배자를 현세에 불러오는 거였죠? 이건 서비습니다. 그 대가를 알려드릴게요. 일단-"

소년은 서류에 적힌 것들을 줄줄이 읊어냈다. 소환 대가로써 주어진 것들이 하나같이 학생 신분의 소녀로썬 죽었다 깨어나도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며, 비윤리적인 조건들이 가득했다.

"-궁을 각각 머리에 뒤집어 쓴 처녀들이 준비되었으면, 마지막으로 네크로노미콘의 원본 중 정확히 214번째 페이지가 필요합니다. 만족 하셨어요?"

소녀는 아시푸트를 소환하고 난 직후처럼 벙찐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족 못하셔도 상관없죠. 서비스니까. 그럼, 다음에 또 한 번 불러주세요. 고객님의 발이라면 대가를 아주 비싸게 쳐드릴수도..."

소녀는 다시 발 이야기를 주절대는 악마의 안면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고, 정강이는 정확히 그 얼굴에 꽂혀 들어갔다. 아시푸트는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져 데굴데굴 구르다가 소환진 속에 들어갔고, 그곳에선 일전 그가 나올 때 뿜어내던 보라색 기운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시푸트는 진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며 외쳤다.

"또 봐요 고객니임~!"

그리곤 터미네이터마냥 추켜세운 엄지손가락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고객님 약지 발가락 맛이 아주 최고랍니다!"

혐오스런 뒷마무리까지. 소녀는 피 바가지를 진 안으로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지만 애꿎은 핏방울만 튈 뿐, 진에서 나오는 기운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소녀는 아직도 뭔지 모를 끈적이는 타액이 묻어있는 오른발을 꼼지락댔다. 타액 묻은 발가락끼리 비벼지며 느껴지는 그 더러운 느낌에 발을 내려다 본 소녀의 눈에 오른발 약지 발가락이 눈에 띄었다. 옴질대는 자신의 발가락을 지그시 바라보던 소녀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세차게 저어댔다.

소녀는 벗어둔 스타킹과 단화를 서둘러 집어 들고 맨발로 공터를 나서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다시는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했담봐라..."

-----

"업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아시푸트는 다분히 펑크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사무실이라는 느낌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방에 조심스레 들어서며 말했다.

"어서 와요, 아시."

교태와 농염함이 청각적으로 넘치다 못해 범람하는 듯 한 목소리가 아시푸트를 반겼다.

"예에, 관리관님. 그런데 어디 계시는지...?"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휙휙 돌리던 아시푸트의 얼굴이 푹 하며 크고 부드러운 것 사이에 파묻혔다.

"어머나~ 이젠 알아서 안겨주네요? 아이, 귀염둥이."

아시푸트의 얼굴만 한 큰 손이 아시푸트가 품속에서 재빨리 벗어나려는 것을 막으며 풍만하디 풍만한 가슴팍에 더 묻어댔다. 아시푸트는 호흡곤란이 일어날 수준의 그 힘에 어푸 거리며 버둥댔지만 관리관은 아랑곳 않고 아시푸트를 더 끌어안았다.

"자... 장난 그만-읍 치시-우욱!"

결국 관리관의 베어허그는 아시푸트가 최초 질식사 어치브먼트를 따기 직전에야 멈췄고, 아시푸트는 질색하며 관리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뒷걸음치며 벽 쪽에 착 달라붙은 아시푸트의 눈에 큰 가슴 두덩에 검은 란제리를 말 그대로 걸치고만 있고, 그 위에 오피스 정장 상의를 말 그대로 걸치고만 있는 고혹적이디 못해 퇴폐스럽기 까지 한 모습의 여성이 서 있었다. 윤기나는 긴 스트레이트 은발머리 위엔 긴 외뿔 하나가 솟아 있었다.

"으흥- 기분 좋았으면서. 빼지 말고 이리로..."

"됐습니다! 이번 고객님도 단순 약관설명으로 그쳤습니다. 특이사항 없구요! 이상!"

아시푸트는 그대로 사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려 했으나, 문을 반 쯤 열었을까. 뒤에서 관리관의 의심 섞인 말이 날아왔다.

"서두르는걸 보니까... 설마, 아시 군. 또 그걸..."

아시푸트는 관리관이 뭐라 말을 더 잇기 전에 왁 소리쳤다.

"저 이제 안 그럽니다! 제가 왜 제 앞길을 막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대로 아시푸트는 문을 확 닫고 나가버렸다.

"어머... 성내는 것도 참 귀여워. 근데 참 이상해. 나만 보면 까칠하게 저런다니까."

관리관은 란제리 아래 훠언히 드러난 자신의 매끈한 허리를 손으로 쓰윽 훑으며 한숨을 툭 쉬었다. 그대로 한참 입맛을 다시며 아시푸트가 사라진 사무실 문을 바라보던 관리관은 하던 일이나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무실 중앙의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책상으로 향하는 관리관의 발걸음에서 뚜걱뚜걱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하이힐 소리나 구두 소리가 아닌 좀 더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가. 관리관의 다리는 두 갈래 발굽에 양모가 무성한 염소의 다리였다.

-----

"어흐. 어흐으... 저 징그러운 여자같으니!"

아시푸트는 닫힌 문에 등을 붙이고는 관리관의 끔찍한 하체를, 특히나 발굽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아시푸트의 미의식에서 백만 광년은 떠난 그 공포스런 하체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한 동안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휘젓고 있자, 누군가 다가와 아시푸트의 어깨를 탁 치며 인사했다. 여! 아시푸트 스토파페스 카키-포디 피에데발. 간만이야. 아아, 이게 아니지.

"여! 아시푸트 스토파페스 카키-포디 피에데발. 간만이야."

아시푸트는 들려오는 저음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직접 자기 용모를 묘사하기 좀 뭣 하지만 일단 아시푸트보다 머리 두세 개는 큰 키에 롱코트, 턱밑에 짧게 수염을 기르고 헌팅캡을 눌러쓴 남성이 실실 웃고 있었다.

"내레이터 씨."

아시푸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목례했다. 꼴을 보니 관리관 그 아저씨가 또 널 따- 아아, 이게 아닌데. 왜 자꾸 이런데.

"꼴을 보니 관리관 그 작자가 또 널 따먹으려-"

"아..아녜요!"

가뜩이나 붉은 톤의 얼굴이 격앙으로 더욱 더 붉어졌다. 아시푸트는 그 끔직한 발굽이 다시 기억 나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레이터는 아시푸트의 머릴 짓누르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이거 감촉 괜찮은데. 으으, 이게 아니고.

"알았어, 그게 아니면 또 네 '소환대가 사기'친 게 걸릴 뻔 했겠지."

둘 모두 낄낄대며 웃었다. 아시푸트는 뾰족한 혀끝으로 윗입술을 쓰윽 훑었다.

"맛만 좋으면 장땡이죠. 괜히 악마인가요."

"물논."

아시푸트는 내레이터에게 길을 비켜주고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내레이터는 손가락으로 권총질을 해대며 거기에 응했다.

----

"그래서 저 말단 녀석도 이제 실적도 좀 쌓았으니 진급시켜주려고. 매번 상담만 하면 질리잖아? 진급 좀 시켜주면 날 좀 더 좋아해주기도 하겠지. 으흥."

내레이터는 의자 위에서 염소다리를 한껏 매혹적으로 꼬며 말하는 관리관의 발굽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아아니... 아마 평생 좋아할 일 없을 거야..."

"뭐?"

"아니, 혼잣말."

내레이터는 책상 앞의 서류철을 펜으로 끼적이며 주머니에서 꺼낸 뿔테한경을 썼다.

"진급하면 이명도 받아야 할 텐데. 뭐, 애초에 내가 주는 거지만."

관리관은 '이명' 소릴 듣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은발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그 제도 맘에 안 들어."

"왜, 음란마귀 사티레스가 뭐 어때서?"

"안 닥쳐?"

관리관 '음란마귀' 사티레스는 내레이터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눈을 치켜뜨며 머리카락을 꼬던 손을 갑자기 확 뻗어 내레이터가 쓰고 있는 서류철 옆에 쾅 하고 내리쳤다. 내레이터는 으헉 하고 화들짝 놀라더니 손을 번쩍 들어 항복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관리관은 진정할 줄 몰랐다.

"네놈 새끼가 이름을 그렇게 짓지만 않았어도...!"

"미안! 미안하다니까!"

"남의 인생 다 망쳐놓고 미안하다면 다냐?!"

"네 '인'생은 옛날 옛적에 끝난 지 오래면서 뭔 소릴 그렇게 하시나!"

관리관과 내레이터의 티격태격은 그 후로 몇 분간 지속되다가 점차 사그라졌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나려고?! 누구 맘대로?"

관리관과 내레이터의 티격태격은 점차 사그라졌다. 사그라졌다니까.

".....젠장"

관리관이 노여움을 거두자, 내레이터는 본론으로 다시 돌아갔다.

"쨌든 얘는 이명 짓기가 쉽겠네."

"뭐로 지을 건데?"

내레이터는 서류를 끼적거리던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서 안경을 도로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제목 봐."

내레이터는 '뭔 개소리야' 라고 말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관리관에게 방긋 웃어주며 사무실을 나섰다. 내레이터의 손에 들린 진급자 신상서류의 '이명' 칸엔 '제목 보라니까요. 어딜 보세요.' 라고 쓰여 있었다.

-----

글의 초점은 제 성욕과 메리 수, 제4의 벽



Author

Lv.1 작가의집  2
0 (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Comments

앙그라마이뉴
오랜만에 가슴을 울리는 뜨거운 글이었습니다.
작가의집
야설은 아니지만 애초애 제 성욕에서 나왔으니까요. -콜라
타메를란
제목이 작가를 말해주는 소설이군요. 다음 화도 있나요(뭐)
작가의집
있는데 옮기기 귀찮...(...)
다움
장난 아니군요.
작가의집
수위를 높일까요. -맛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