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지는 어둠 속

작가의집 0 2,932

옛날에 쓴 내용에 살 더 붙이고 뒤에 이야기를 더 붙여 길게 만들어 봤습니다.

작가의집 이고깽 판타지는 쓴게 많긴 한데 옮겨적기 귀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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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지는 어둠 속



어두운 갱도 깊은 곳으로부터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로가 깔려있는 갱도를 다라 뛰어나오는 뚱뚱한 체구의 광부, 그로즈니는 들고 있던 곡괭이도 뒤로 집어던진 채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소릴 질렀다.


"알렉세이! 세묘노프! 광차 가동시켜, 여기서 어서 빠져나가야 해!"

보호화를 신은 둔중한 발을 홱홱 놀릴 때마다 광부 옷 상의에서 삐져나온 그로즈니의 두툼한 뱃살이 출렁거렸다. 그로즈니는 까마득한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뒤를 힐끗 쳐다보다가 그 쪽에서 쩌적쩌적 하고 무언가 바스러지는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이내 다시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순간 머릿기름에 떡진 산발의 머리터럭이 앞을 가리자 그로즈니는 기겁하며 더러운 손으로 얼굴을 훅 훑어냈다. 그러자 그로즈니의 찡그린 얼굴에 검댕이 묻어 기묘한 마블링을 만들어냈다.

"알렉세이? 세모뇨프? 이봐?!"

드디어 앞에 보이기 시작한 갱도 중간역의 불빛을 보고 그로즈니는 다시 소리 질렀지만 아까처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즈니가 도망치고 있는 어둠속의 쩌적거리는 섬뜩한 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으와아아아악!!!"

그로즈니는 백열등 불빛이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중간 역에 들어서기 직전 자신을 쫒는 그 무언가가 뒷덜미를 척 잡아채려 하는 것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엎어지듯 날리며 철로에 퍽석 넘어졌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것이 혹여 발목을 잡을 까 하는 무서운 상상에 새된 비명을 꽥꽥 질러대며 철로를 잡고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곧이어 손에 석탄을 옮기는 광차를 움직이는 증기 보일러의 본체가 만져지자, 그로즈니는 허겁지겁 보일러를 안아들고 부들부들 떨며 흐느꼈다.

"로마노바... 으흑...흑..."

보일러에 아주 미약하게 남아있는 온기가 극도로 공포에 질린 그로즈니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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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즈니는 중간 역에 마련된 다 부서져가는 벤치에 걸터앉아 일전에 그의 동료광부 알렉세이가 관리관 사무실에서 몰래 꽁쳤다며 자랑하던 캐비어 통조림을 툭 뜯었다. 그리고 티스푼만한 숟갈로 캐비어를 한술 떠 주먹만 한 검은 빵에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캐비어의 짭짤한 맛과 검은 빵에 들어있는 잘 갈리지 않은 호밀이 오득 씹히는 맛이 났다. 지금 먹고 있는 검은 빵은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그로즈니의 여동생인 로마노바가 챙겨준 점심거리였다. 빵 굽는게 아직 미숙한지라 만드는 빵마다 딱딱하고 거칠었지만 그로즈니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 만들어주는 음식이기에 맛 없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로즈니는 캐비어까지 얹어먹는 조금은 사치스런 점심을 먹으며 중간 역 역사 안을 슥 훑어보았다. 말이 '역' 이지 사실상 광부들의 쉼터 목적이 더 강한 곳이었다. 있는 광차라곤 석탄을 내가는 작은 광차 하나가 전부였다. 그로즈니가 살펴 본 결과 그마저도 부품 몇 개가 나갔는지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았으므로, 이곳을 탈출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고장 난 광차보다 그로즈니를 더 실망시키게 만든 것은 역 내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밖에서 끌어들어오는 전기로 작동되는 백열전구 몇 알만이 이곳을 비출 뿐, 그의 동료인 알렉세이나 세묘노프, 심지어 꼴 뵈기 싫은 말라깽이 관리관 드라고비치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많던 백열전구는 통로 쪽 것들이 전부 다 파손이 됐는지 단선이 됐는지 역 안쪽 것들만 빛나고 있다는 점도 실망감에 한 몫 했다. 고로, 역에서 갱도로 내려가는 통로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통로나 모두 다 칠흑같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로즈니는 한숨을 푹 내쉬며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려 했다.

그러나 짧은 여유도 거기까지, 역 내부의 불이 갑자기 꺼지고 말핬다.

쩌저적 하는 갈라지는 소리와 우드득 하며 벽 뚫리는 괴상하고 다분히 위협적인 소리가 깜깜한 눈앞에서 점점 그로즈니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로즈니는 먹던 빵도 놓치고 그아악 소리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앉아있던 벤치도 무너져버리며 그로즈니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섬뜩한 소리는 아직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를 내는 근원이 그로즈니의 웅크린 몸까지 닿았다. 뾰족하고 거친 악마의 손가락같은 그것들이 그로즈니의 몸을 긁으려 했지만 그로즈니는 새된 비명을 질러대며 무기력하게 발버둥 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무슨 조화인지 역내의 백열전구가 다시 켜졌다. 악마의 손길들은 키이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어두운 통로 밖으로 후퇴해 나갔다. 그리고 그로즈니는 용기 내어 뜬 눈을 통해 검은 나무뿌리처럼 생긴 그 악마의 손길들을 목격했다. 갱도의 막장에서 일하던 그로즈니의 동료들을 찌르고 목졸라 죽이던 그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아까의 고장 때문인지 전구 몇 알이 완전히 꺼져 한 층 어두워진 역내를 바라보며 그로즈니는 깨달았다. 저 악마들은 빛 아래서 그 혐오스런 손길을 뻗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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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즈니는 갱도 깊은 곳의 발파작업에나 쓰이는 두터운 보호복을 껴입고 안전모의 턱끈을 꽉 조여맸다. 살진 턱살이 보기 않좋게 툭툭 튀어나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 내부에 비치된 전동드릴을 움직이는 증기 배관을 분해해 그 앞에 개폐기가 달린 어댑터를 끼웠다. 이제 어댑터의 손잡이를 당길 때마다 개폐기가 열리며 발화점 이상의 뜨거운 증기가 고압으로 뿜어져 나올 것이었다. 방어구에, 즉석 제작한 살벌한 무기에, 이렇게 그로즈니가 준비하는 이유는 광차에 달린 보일러의 수리 때문이었다.

그로즈니는 석탄을 가득 채운 양동이에 불을 붙인 뒤 갱도로 내려가는 통로에 불붙은 석탄들을 흩뿌렸다. 석탄의 새파란 불길로 밝혀지는 통로 안에서 괴기스런 나무뿌리들이 불빛을 피해 특유의 쩌적소리를 내며 좌우로 물러섰다. 그리고 불길의 끝엔 손바닥만 한 황동 톱니바퀴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광차의 보일러 수리에 필요한 마지막 부품이었다. 그로즈니는 타오르는 석탄을 한 차례 더 통로에 쏟아부었다.

"이야아아아..!!!"

그로즈니는 괴성을 지르며 통로 안으로 쇄도해들어갔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톱니바퀴를 향해 달려가는 그로즈니를 보고 악마들이 불빛을 뚫으며 용감하게 그 손길을 뻗쳐왔지만 그로즈니가 배관에서 뿜어대는 지옥불보다 뜨거운 증기에 다시 어둠속으로 도망갈 뿐이었다. 그로즈니는 숨을 헐떡이며 황동 톱니바퀴를 주워들고 다시 역 내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석탄의 불길들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고, 그로즈니가 역 내에 막 들어설 쯤엔 불길은 아예 싹 꺼져버리고 말았다. 그로즈니는 왁왁 욕설을 내뱉으며 사방으로 증기를 뿜어낸 끝에 역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의 가호와 같은 백열전구의 빛 아래로 들어온 그로즈니는 배관을 던져버리고 광차의 내부를 확 열어젖히며 수리를 시작했다. 여동생 로마노바의 얼굴을 꼭 다시 보겠다는 일념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의 의도를 악마들도 알아챘는지 역 내부의 전구들은 갑자기 심각한 수준으로 깜빡깜빡 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의 정전도 이것들의 소행이었을 터였다. 꺼졌다 켜졌다를 빠르게 반복하는 불빛 아래 빠른 손놀림으로 수리를 하고 있는 그로즈니의 모습이 마치 스톱모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점멸을 거둡하는 전구 아래 악마의 손길들도 가만있지 않고 어둠속에서 빛 속으로 분주하게 움직임을 반복하며 그로즈니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수리를 끝낸 그로즈니는 재빨리 보일러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보일러를 완전히 예열시키려면 아직 수 분을 기다려야 했기에, 그로즈니는 아까 던져둔 증기배관을 도로 집어들고 갱도 안쪽과 출구 쪽 어둠을 향해 증기를 마구 뿜어댔다. 분노 섞인 욕설과 고함은 덤이었다.

"뒈져버려! 뒈져버려, 이 버러지 새끼들아!"

검은 뿌리들이 증기를 맞고 주춤대던 사이, 광차의 보일러는 예열을 완료하며 기계에 달린 작은 종을 땡 하고 울렸다. 맹렬하게 증기가 뿜어지는 소리에, 악마들이 움직이는 특유의 소리에, 자신이 내뱉는 욕설과 고함소리에 웅웅거리는 갱도 속에서  그로즈니는 용케 그 소리를 듣고 증기배관의 어댑터를 확 잡아 빼 던지며 광차를 향해 뛰었다. 배관에서 마구잡이로 분사되는 증기들이 악마들에게서 도망치는 그로즈니를 엄호했다.

그로즈니는 광차에 올라타 출발 레버를 힘껏 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역 내의 백열전구들도 악마들에게 함락당해 그 역할을 다 하고 점등되어버렸다. 광차의 바퀴가 고속회전하며 철로를 긁어 무수한 불똥을 튀겼다. 곧이어 광차는 광차안의 그로즈니를 노리고 달려드는 혐오스런 뿌리들을 모조리 박살내버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로즈니는 광차 안에 콕 틀어박혀 몸을 웅크리곤 고속이동하는 광차가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을 박살내는 소릴 잠자코 듣고 있었다. 광차에 올라서며 무심결에 집어든 삽자루는 품에 꼭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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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이 지났을까, 광차 위로 보이는 천장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암흑에서 어슴푸레한 검은 색으로 바귀자 그로즈니는 용기를 내어 광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철로의 끝에 하얀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광산 막장에서 악마들에게 쫓기기 시작한 이래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미소가 그로즈니의 입가에 번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야, 오빠. 잘 알잖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동생이 평소에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하던 말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생각났던 것이었다. 그로즈니는 그 이상한 낌새 때문에 찝찝해 하며 광차가 질주하는 철로를 눈을 찌푸리며 자세히 보았다. 출구의 빛과 자신이 탄 광차의 사이에 놓여진 철로에서 무언가가 움질움질 올라오고 있었다. 그로즈니의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철로 및 땅에서 올라오는 저것은 분명 자신을 쫓던 악마의 뿌리가 분명했다.

"아, 이런 빌어먹으을!!!"

그로즈니는 광차의 간이 브레이크 레버를 당기려 손을 뻗었지만 뿌리는 무자비하게 철로를 박살내버리며 올라왔다. 부서진 철로에 다다를 때까지 감속하지 못한 광차가 철로를 이탈하며 넘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로즈니는 구르는 광차에서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왔다.

그로즈니는 어슴푸레한 허공을 붕 날려가다가 차가운 돌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곧 이어 안 아픈 곳이 없는 몸을 이곳저곳 부여잡으며 일으킨 그로즈니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빛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다 탈출해놓고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었다. 그로즈니는 세차게 발을 내딛었지만 방금 철로를 박살낸 뿌리줄기는 빠르게 뻗쳐 와 그로즈니의 발목을 휘어잡아 넘어뜨렸다. 마치 일전에 역에 들어설 때 처럼 고꾸라진 그로즈니는 다른 쪽 발로 잡힌 발목의 뿌리를 퍽퍽 밟으며 소리질렀다. 다행히도 뿌리는 잡은 발목을 놓아주는가 싶었지만 그로즈니도 잘 알고 있듯 뿌리는 악마였다. 뿌리는 발목을 놓자마자 그로즈니의 목덜미로 그 뾰족한 끝을 향했다.

거친 악마의 손길이 그로즈니의 목을 졸라왔다. 그로즈니는 폐 속으로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숨을 들이쉬려 꺽꺽 애쓰며 검은 뿌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뿌리의 힘은 너무 셌다. 살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몇 분- 아니, 몇 초 안되어 목이 꺾여죽던가 숨막혀 죽을것이 자명했다. 그로즈니는 출구까지 도달해서 이 꼴이 난 자신과 밖에서 자신을 기다릴 여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솟구쳤다.

"끄윽... 미..미안... 끄으윽,.."

그대로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넘어가기 직전, 그로즈니는 자기 발치에 놓인 무언가를 인식했다. 광차에 올라탈 때 집어들었던 삽이었다. 그로즈니의 빨갛게 충혈된 동공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여동생이 말한 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그로즈니는 되새기며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발등으로 삽자루를 차올렸다. 절모하게 삽자루가 손에 닿자, 그로즈니는 두 손으로 삽을 잡고 이제 곧 터져버릴 듯 빨개진 눈으로 조준하여 자신의 목을 조르는 뿌리를 향해 삽날을 거세게 내리쳤다. 죽어도 풀 수 없다고 느낄 정도의 힘으로 목을 졸라대던 뿌리는 어이없게도 삽날에 무참히 부서졌고, 그로즈니는 그제서야 석탄가루 섞인 광산의 공기를 맘껏 들이킬 수 있었다. 전직 군인이던 동료 세모노프가 언젠가 말 했듯 삽은 훌륭한 벌목도구였다. 그로즈니는 반 토막 나 꿈틀대는 나무뿌리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크게 휘두른 삽날로 수차례 뿌리를 내리쳐 아주 아작을 내버렸다.

"헤... 헤헤헤... 드디어 밖이야..."

그로즈니의 입에서 절로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드디어 출구가 지척이었다. 환한 빛줄기가 눈이 시릴정도로 쪼여왔다. 그 빛을 받고 있자니 광차에서 나가떨어져 다친 몸이나 아까 꽉 졸려 시퍼렇게 멍이 든 목이나 그 밖의 상처들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로즈니는 그대로 빛을 향해 뛰었다. 분명 집에서 여동생이 그로즈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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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 입구 앞에서 귀를 기울이며 경계하고 있던 진녹색군복의 중년 상사 한명이 안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떴다. 한참 점화장치 앞에서 허둥대던 신병에게 윽박지르고 있던 사람에게 다다간 상사가 보고했다.

"뭔가 나오고 있습니다. 관리관 나리."
"이런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한시라도 빨리 저 입구를 막아야 한다는 상부의 명령을 잊은거냐?!- 아, 유리. 뭔가?"

유리라고 불린 상사는 큼큼 목을 풀더니 다시 보고했다.

"안쪽에서 뭔가 나오고 있습니다. 관리관 나리."

관리관이라고 불린 빼빼마르고 구부정한 등허리를 지닌 남자는 유리의 보고에 눈을 크게 뜨더니 장교모자를 고쳐 쓰며 가래 끓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격준비!"

그러자 광산 이곳저곳에서 갱도 입구를 주시하던 수 많은 군인들이 저마다 소총의 장전손잡이를 힘껏 당기고는 기다란 총신을 입구를 향해 겨눳다. 관리관도 허리춤의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사격개시 명령만 기다리며 초조하게 있는 시간이 1분, 2분, 그리고 3분으로 늘어났다. 관리관의 표정이 점점 떨떠름하게 변하더니 보고를 한 유리에게 물었다.

"여보게, 유리. 제대로 들은 것 맞나?"

유리는 관리관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확한 앉아 쏴 자세를 미동없이 유지하며 대답했다.

"제 귀는 제 목숨을 수백 번은 살려준 놈입니다. 드라고비치 관리관님."
"그래, 그거야 3년도 더 된 이야기 아닌가."

관리관 드라고비치는 겨누던 권총을 잠시 거두고 총을 들고 있던 깡마른 팔을 주물렀다. 그 모습에 군인들도 관리관과 유리의 눈치만 보며 어물대고 있었다. 유리는 웅성대기 시작하는 휘하 군인들에게 버럭 소리질렀다.

"사격자세 똑바로 잡아!"

다수의 군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사격자세를 바로잡았지만 그 중 신병이었던 한 명은 그 고함소리에 심하게 놀란 나머지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말았다. 이어 신병의 발사에 놀란 몇몇 군기 빠진 인원들도 덩달아 사격을 시작했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갱도 입구에 총탄이 날아가 애꿎은 돌조각과 불꽃이 튀었다.

"이런 등신같은 새끼!"

유리는 벌떡 일어나 자기 뒤에서 제일 처음 총을 쏜 신병을 귀신같이 알아내고 그 병사의 머리통을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훈련을 제대로 안 받으니 이 꼴이지..."

유리가 징집 신병 훈련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여놓으려던 찰나, 유리의 귀에 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전원 정숙!"

동료가 개머리판에 맞아 묵사발 나는 꼴을 질겁하며 지켜보던 군인들은 유리가 오른손을 휙 들며 하는 말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 쏘지 마십쇼! 제발!

희미하지만 확실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유리는 권총은 어느 새 집어넣었는지 뒷짐을 지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 상황을 지켜보던 관리관에게 마랳ㅆ다.

"사람이 나옵니다."

관리관이 고개를 갱도 입구에 돌림과 동시에 어둠속에서 거구의 광부 하나가 들고 있던 삽을 앞으로 내던지고 손을 번쩍 쳐들며 나오고 있었다.

"그로즈니?"

관리관 드라고비치가 아는 얼굴이 갱도에서 나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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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살아있으니 다행이구만, 그로즈니."

관리관은 광부 식당에서 미친 듯 물을 들이키는 그로즈니의 등을 선심 쓰듯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보호복에 가려져 잘 뵈진 않았지만 그로즈니의 드러난 맨살부분엔 멍이 들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저, 관리관 나리."
"왜?"

그로즈니가 기침을 쿨럭쿨럭 하더니 물어왔다.

"혹시 알렉세이와 세묘노프는...?"
"모르네, 거기서 나온 건 두어시간 전에 반쯤 미쳐서 나온 심부름꾼 꼬마가 마지막이었어. 그다음은 자네였지."

그로즈니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잇는 관리관의 태도에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 때, 식당의 유리창이 쩍 갈라질 정도의 큰 폭음이 들려왔다. 그로즈니는 아직도 악마가 뒤통수에 있는 것 마냥 비명지르며 테이블에 코를 박고 엎어졌다. 관리관 드라고비치는 태연하게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능한 놈 같으니, 이제야 터트리는구만."

뒤이어 유리가 경례하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갱도 폐쇄를 완료했습니다."

관리관은 아직도 테이블에 코를 박고 부들부들 떠는 그로즈니를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인생 막장이었겠군, 그로즈니. 암. 인생은 타이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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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발... 타이밍 한번 개 좆같네!"

걸쭉한 욕설이 세묘노프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알렉세이가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세묘노프는 아까 전 까지 그들이 뛰어나오던 갱도 안쪽을 바라봤다. 안전모에 달린 헤드라이트가 통로를 비추자, 분주하게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일련의 뿌리다발들이 우수수 물러났다. 세묘노프는 자리에 주저앉아 헤드라이트를 계속해서 안쪽으로 비추며 말했다.

"어떤 엿 같은 새끼인지 몰라도 갱도 입구를 폭탄으로 날려버렸고, 저 엿 같은 악마새끼들은 눈앞에 몇 분 후면 먹을 수 있는 뷔페가 놓여져있고, 나는 나갈 출구가 없어져서 기분이 엿 같고, 너는 폭탄 때문에 무너지는 엿 같은 돌더미에 깔려서 상체만 남아있고, 우린 엿 되디 엿 된 인생 막상인 상황이야."
"아... 그렇구나..."

허리께 아래로는 돌덩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알렉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몽롱한 눈빛으로 세묘노프를 보며 재차 물었다.

"그로즈니는 살아있을까?"
"몰라 임마. 갱도 막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놈인데다 그 둔탱이 덩치 새끼가 살아 있을 성 싶냐?"

말을 마치고 세묘노프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중간역에 고장 난 광차 한 놈이 사라져 있긴 했는데, 혹시..."

그러나 기운 고개에 헤드라이트의 빛줄기가 제껴지자, 앞쪽의 악마들이 쩌적소릴 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묘노프는 기겁하며 다시 통로를 바라봤다.

"알았어! 알았어! 니들이 나 사랑하는 거 다 아니까 나도 니들만 바라볼게! .....젠장!"

세묘노프가 부들부들 떨고 있자, 알렉세이가 다시 말을 걸었다.

"세묘노프.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어..."

너 지금 돌에 깔려서 죽어간다니까?!"
"아... 그랬었지."

세묘노프는 자꾸 실없는 소릴 하는 알렉세이에게 빽빽 소리질렀다. 허나 시선은 절대 통로쪽에서 돌리지 않았다.

"너 자꾸 개념 없는 소리 하면 확 불 꺼버린다? 같이 죽어버리게! 야, 내 말 듣고 있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그저 꺾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돌덩이를 이불삼아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세묘노프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뜩이나 아껴 켜던 헤드라이트가 수명을 다해가는지 껌뻑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헤드라이트도 알렉세이와 같은 길을 가버렸다.

"어...엄마..."

세묘노프가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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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인도로 집에 무사히 돌아온 그로즈니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이동생을 물렀다.

"로마노바!"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사춘기가 막 되었을 무렵으로 보이는 통통한 여자아이가 뛰어나왔다.

"오빠!"

퉁퉁한 광부와 동글동글하게 생긴 아이가 부둥켜 안고 기뻐하는 모습에 인솔하던 군인들의 얼굴이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우린 가보지, 몸조리 잘 하게."
"아, 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로즈니는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로마노바를 잠시 떼어내고 집까지 그를 인솔해준 군인들에게 인사했다. 로마노바도 고개를 숙이며 군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후 한참 군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로마노바는 군인들이 거리 사이로 사라지자, 그대로 그로즈니의 품에 다시 꽉 안겨선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로즈니도 마찬가지로 동생을 그러안으며 꺽꺽 울었다. 생사를 알 수 없던 혈육을 다시 보게 된 기쁨과 드디어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였다.

허나 그들을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눈길은 공허했다. 마을 사람 태반이 광산에서 일하던 실정이었기에 오늘 갱도속의 악마들에게 아버지와 아들들을 모조리 잃은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노바, 이제 들어가자. 응?"

로마노바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즈니는 여동생과 같이 있다는 이 시간에 너무 감사하여 더 울고 싶기도 했지만 일단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리저리 다쳐 다리까지 절뚝대는 그로즈니를 넘어지지 않게 부축하던 로마노바는 그로즈니의 닳아빠진 바짓자락 사이에서 콩만 한 검은색의 무언가가 떨어지는 걸 보았지만 그로즈니의 발목에 보이던 피멍이 더 눈에 띄어 빨리 오빠의 상처를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로즈니의 발목에서 떨어진 검은 물체는 땅에 떨어져 굴러가다가 길가의 하수도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하수구 구멍 속은 빛줄기 하나 들지 않는 마치 갱도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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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먀, 저 꼬마 조심해, 완전 돌아버려서 발작해대면 말릴 수도 없으니까. 아까 마갈로프도 말리다 못해 개머리판으로 후려치려다가 역으로 지가 선빵 쳐 맞고 의무실로 실려갔다니까. 그리고 내가 그나마 잠잠해진 요 놈을 감시하고 있는거지. 야야. 미하일, 듣고 있는거냐?"
"엉- 알겠으니까 안심하고 가보세요."

쭈욱 담배연기를 빨아들인 미하일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함께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심하라니까..."
"빨랑 나가기나 해 짜샤. 나 꿀 좀 빨게 제발 내비 둬."

미하일에게 설명을 계속하던 군인은 탐탁치 않은 듯 혀를 차더니 그대로 방을 나갔다. 미하일은 담배연기를 뱉어내고 방 한가운데 의자에 앉아있는 사내아이를 힐끗 쳐다봤다. 저 꼬마는 광부 한 사람이 갱도를 폭파시키기 전 유일하게 거기서 탈출해 나온 사람이었다. 물론 어둠인지 괴물인지에 반쯤 미쳐서 말이었다.

꼬마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잔뜩 확대된 동공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막만한 손은 어쩔 줄 몰라하는 손가락들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다 피운 담배를 대충 방구석에 던지고 문 앞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앉아 꼬마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야야,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꼬마는 미하일이 말을 걸자 창밖을 응시하던 시선을 홱 돌려 미하일을 바라봤다. 크게 뜬 눈과 창백해진 안색이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듯 했다.

"빛이 져요."
"응? 그게 이름이야? 아, 아니지."

미하일은 창 밖으로 뵈는 산등성이 가려져 반 밖에 몸을 드러내지 않은 해를 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해가 지고 있지. 곧 밤이니까. 그래서 네 이름이 뭐냐니까?"
"...빛이 져요!!!"

소년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송장이 눈 뜬 것 같은 눈빛으로 미하일을 매섭게 노려보며 와악 소리질렀다. 미하일은 화들짝 놀라 자기도 의자에서 덩달아 일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곁에 있던 총을 집어들고 대충 겨누는 척 했다.

"꼬꼬마야. 이건 총이라는건데... 너도 알겠지만 맞으면 매우매우 아파. 그러니까... 암튼 진정좀 해줄래?"

고마는 미하일의 경고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이해할 수 없는 괴성을 계속해서 지르며 발작했다.

"아오 씨이바..."

미하일은 꿀은 커녕 똥만 빨 것 같은 기운이 풍기는 이 상황에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미하일은 니코틴이 섞인 침을 우물대다가 바닥에 탁 뱉었다.

"빛이 져요! 빛이 져요! 빛이 져요!"
"조용히 해!"

창 밖의 해는 이제 산 밑으로 거의 다 사라지고 있었다.

"조용히 안하면 진짜 총 맞을 줄 알아? 조용히 하라고, 이 쥐똥만한 녀석아!"

미하일은 꼬마의 괴성에 덩달아 큰 목소리의 위협으로 맞받아치다가 아까 전번 근무자가 인수인계한 사항이 번뜩 생각났다. 꼬꼬마가 발작하면 총이고 뭐고 쳐맞고는 의무실로 실려갈 수 도 있다는 그 말. 미하일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계속해서 위협했다. 그러나 꼬마는 겁먹은 기색을 보이긴 커녕 갑자기 미하일을 향해 달려들어 소총의 총열을 휘어잡았다. 미하일은 뜨악하며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급히 빼냈다. 아무리 꼬마가 미친놈이고 자기가 의무대에 맞아 실려가는 한이 있어도 어린애를 정말 쏘고 싶지는 않았다.

"놔! 놓으라고! 뭔 꼬마가 힘이 이렇게 세?!"

순간순간 든 잡생각과 꼬마의 미칠듯한 완력에 미하일은 어찌 해볼 틈도 없이 총을 꼬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어어, 옌장..."

꼬마는 빼앗은 총을 들고 등 뒤의 창문을 뒤돌아봤다. 창 밖은 어두웠다. 산등성이 너머에서 여명만이 은은한 빛을 발할 뿐, 어둠만이 있었다. 이제 발작이나 몸을 떠는 증상은 많이 가라앉은 듯 싶은 꼬마는 미하일을 보며 말했다. 

"빛이 졌어요."
"그래? 너는 이겼으니까 그 총 내려놓을래? 이 아저씨 부탁이다... 응? 뭐하는... 야...야!!"

꼬마는 미하일을 응시함과 동시에 총구를 자신의 턱 밑에 갖다 붙이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총성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리고 그 총성을 따라 꼬마의 머리가 소총탄에 맞아 터져 나갔다. 뚫려버린 뒷버리로 나온 뇌수들도 흉측하게 벽에 튀었다. 미하일은 비명지르며 뒤로 자빠졌고, 발버둥치며 필사적으로 방문을 향해 기어가며 소리질렀다.

"끄아아아악!! 누가 좀 살려줘! 씨이..발!!!"

총성과 비명소리를 들은 아래층의 군인들이 방안으로 뛰어올라왔다. 미하일은 발 소리를 듣고 얼른 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군인들이 한 수 빨랐기에 미하일은 걷어차여진 문에 맞고 피투성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죽을상을 하고 바닥에 엎어진 미하일의 꼴과 소총에 턱이 아직 걸려있어 꿇어앉은 것 처럼 죽어있는 소년의 부릅뜬 눈이 군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미아일 이 꼴초새끼! 무슨 짓을 한거야?!"

군인 중 한 명은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방안의 풍경을 애써 외면하며 미하일의 멱살을 올려붙였다.

"난 몰라! 저 애새끼가 총을 뺏아다가 자살했다고!"
"꼬마한테 총 뺏긴게 자랑이다, 이 등신새끼야! 꼬마가 갑자기 자살은 왜 하는데!"

미하일은 상당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몰라... 모른다고... 해가진다 뭐다 지랄병을 하다가 죽어버렸어!"

미하일의 멱살을 잡은 군인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려 애쓰며 창밖을 내다봤다. 방안에 켜져있던 미세한 촛불만이 어두운 창문에 반사되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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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이제 괜찮은 거지?"
"응응, 그래. 아픈 곳도 우리 로마노바가 다 돌바줬잖아? 그러니까 이제 내려가봐도 돼."

그로즈니는 침대위에 누워 미소 지으며 방 문간에 서 있는 로마노바에게 손짓했다.

"알았어 오빠. 그럼 잘 자."

로마노바는 방안을 비추던 등불을 훅 불어 끄려 했다. 그러나 그로즈니가 그 행동을 보고 저지했다.

"잠깐, 로마노바."
"응?"
"불은 켜 두고 가."

로마노바가 그로즈니의 말에 입을 가리고 킥킥 웃어댔다.

"우리 오빠 겁쟁이 다 됬네? 응 놔두고 갈게. 잘 자."

로마노바는 등을 그대로 둔 채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뒤이었다.

"....."

그로즈니는 오늘 겪은 갱도에서의 일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잠들긴 싫었다. 적어도 잠들기 전 까지만. 어차피 등불의 기름은 반만 차 있었기에 잠들기까지 켜두기엔 적당했다. 그로즈니는 갱도에서의 일을 가능한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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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그리고 그로즈니는 째지는 비명소리에 번뜩 잠에서 깨어버렸다. 무의식중에 확인한 등불은 기름이 거의 다 되어 꺼지지 직전이었다.

"로마노바!"

그로즈니는 아픈 몸을 빠르게 일으켜 등불을 집어들고 방을 뛰쳐나와 층계 밑으로 뛰어내려갔다. 그러자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쩌적쩌적소리. 빠지직거리는 소리. 잠든 내내 잊고싶던 소리들이었다. 그로즈니는 덜컥 겁이 나 층꼐를 내려오다 말고 멈춰서고 말았다.

"오빠!!"

허나 로마노바의 절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로즈니는 이를 악물고 로마노바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그로즈니의 눈에 믿기 싫은 광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창밖에서 창문을 깨고 들어온 검은 뿌리 한 줄기가 로마노바의 발목을 억세게 감고 끌어당기는 모습. 그리고 바닥에서 공포에 어린 표정으로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방바닥을 긁으며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로마노바의 모습.

"이야아아아!!!"

그로즈니는 그대로 눈이 뒤집혀 등불을 떨어뜨리고 옆에 있던 기다란 옷걸이를 꼬나들어 검은 뿌리를 내리쳐댔다. 그러나 옷걸이는 삽날이 아니었다. 뿌리는 그로즈니의 공격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로마노바를 창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그로즈니는 옷걸이를 던져버리고 주위를 빠르게 돌아봤다. 뿌리의 혐오스런 쩌적소리와 여동생의 비명이 방안에 울리는 가운데 정신이 나갈것만 같았지만 그로즈니는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마침내 그로즈니의 눈에 띈 것은 아까 떨어뜨린 등불이었다. 미약하나마 아직 기름이 남아있어 빛을 내고 있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그로즈니는 등불을 집어 들어 검은 뿌리에 냅다 휘갈겼다. 등불이 깨지고 안에 있던 기름에 불이 붙어 뿌리를 휘감았다. 뿌리는 그제야 로마노바를 놓아주고 꼬리밟힌 뱀 마냥 허우적거리며 불탔다. 로마노바는 발목이 풀려나자 그대로 일어서서 오빠에게로 가려 했다.

"로마노바! 아직 움직이지 마!"
"...어?"

번뜩 위험을 알아 챈 그로즈니가 소리질렀지만 이미 로마노바는 몸을 일으켰고, 그대로 허우적대는 뿌리의 몸통에 맞아 방 한구석에 날아가 부딪혔다.

"로마노바!!"

그로즈니는 뿌리가 한바탕 홰를 치고 창밖으로 도망가자, 바로 뛰어가 로마노바를 안아들었다. 세게 맞았지만 잠시 기절했을 뿐 숨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발목 쪽은 보는 사람이 더 아플 정도로 부러져 검붉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로즈니는 집 근처에 있는 동네의사 세몽의 집을 생각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

그로즈니는 현관을 나가기 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이 악몽이 아닌 이상 저 괴수들이 폭파된 갱도에서 나올 수 있을 리 없었다. 갱도 안에서 싸울 때, 놈들이 튀어나오던 곳은 항상 연한 자강부분이나 흙 부분이었고. 바윗돌로 숫제 막힌 부분에서 뚫고 나오지는 않았다.

".....!"

그로즈니는 현관문이 반 쯤 열렸을 때,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소리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이다. 더군다나 총소리에 비명소리라니.

".....?!"

그로즈니는 구름에 가린 달빛만이 미세하게 비춰지는 거리의 풍경을 보며 경악했다. 로마노바가 기절해 있어 이 광경을 보지 못하는게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죽어어어어어!!!!"

군인 한명이 그에게 다가오는 뿌리다발에 기관단총을 난사하다가 거대한 뿌리에게 몸통 째로 잡혀 쥐어짜져 피떡이 되고 있었다. 그 뒤에선 주민 몇몇이 집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집안에서 따라 나온 검은 무리들에게 붙들려 다시 집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쇳소리 나는 비명도 뒤이었다. 그로즈니는 이 상황에 질린 나머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걸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갱도에서 겪었던 것 보다 더 한 악몽이 지금 눈 앞에 진행중이었다.

그리고 그로즈니와 로마노바를 노리는 검은 뿌리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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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발치는 기관총탄이 무전실 입구를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전실 밖에선 그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는 검은 뿌리들이 탄환에 맞고 박살나고 있었다. 상사 유리는 기관총좌를 잡은 채 옆에서 덜덜 떨며 자리를 지키는 부사수에게 외쳤다.

"총열 교환 준비해라! 우리에게 총탄은 넉넉해! 버틸 수 있다!"
"으으으... 아..알겠습니다!"

잠시 무리들의 공격이 주춤하자, 유리가 신호했다.

"교체!"
"교...교체!"

부사수는 떨리는 손으로 기관총의 총열을 잡아 빼고 새 것을 갈려 시도했지만 그 틈을 타 무전실 입구로 쇄도해 들어온 한줄기 뿌리에게 잡혀 무전실 밖으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복도에서 부사수의 비명과 팔다리가 뜯어져 나가는 흉측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유리는 이를 바득 갈며 부사수가 잡혀가며 떨군 예비총열을 단번에 기관총에 결합한 뒤 입구를 향해 신중하게 점사하기 시작했다. 부사수가 사라진 이상 아까처럼 쏴 갈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는 뿌리 몇 놈을 박살낸 유리는 등 뒤를 향해 외쳤다.

"드라고비치 관리관님!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난 언제나 안전했어. 전쟁터에서나 갱도에서나. 항상 빨리 움직여서 그 자릴 피했기 때문이었지."

드라고비치는 무전장비 앞에 앉아서는 그냥 푸념만 늘어놓고 있었다. 유리는 격분했다.

"드라고비치! 그렇게 뒈지기 싫으면 당장 상부에 지원을 요청해!!"
"항상 빨리 그 자릴 피해서..."

드라고비치는 권총집에서 권총을 빼내더니 망설임 없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은 기관총 발사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멍한 표정의 시체를 등 뒤에 두고 유리는 삽시간에 무전실에 자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리고 장전된 탄띠는 이제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젠장!"

유리는 새 탄띠를 미리 잡고 있다가 쏘고 있던 것이 다 소모되자, 재빠른 손독작으로 삽시간에 재장전을 마쳤다. 다시 사격을 시작하기까지 검은 뿌리들이 방 안으로 얼마 들어오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이 상황만 보면 유리 혼자 하룻밤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유리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총열 교환할 때가 오면 아까 부사수처럼 자기도 꼼짝없이 잡혀서 인수분해 당하게 될 것이라는 걸.

유리는 잠시 고심하다가 곁에 두던 두꺼운 방열 모장갑을 끼고 거치된 기관총 총열쪽을 잡아 들어올려 사격과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무전기기까지 다가간 유리는 관리관의 시체를 대충 발로 차 치워버리고 기관총을 대충 의자체 걸쳐 한 손으론 사격, 한 손으론 무전기를 잡았다. 다행히도 통신이 연결되어 있어서 상부의 통신병이 아까부터 통신재개를 요하고 있었다. 유리는 무전기를 잡고 소리쳤다.

"여기는 스타니슬라프의 주임상사 유리다! 관리관을 대리하여 교신한다!"

유리는 그 새 방안으로 들어온 뿌리 한줄기를 점사로 내쫒아버린 뒤 다시 교신했다.

"...우리를 파괴하라! 반복한다. 우리를 파괴하라! 네이팜이든 백린탄이든 다 쏟아부어서 우리를 불살라버려라!"

유리는 그 교신을 끝내자 기관총의 총열이 과열되었음을 인식했다. 유리는 쓴웃음을 픽 지으며 총열을 붙잡아 뺄 준비를 했다.

"내 운을 한번 시험해보지."

사격이 멎었다. 검은 뿌리들이 무전실로 뻗어들어오고, 총열이 기관총에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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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번호 C3-47... 좋아, 문 열어보게."

수수한 색의 간호사복을 입은 청년이 의사의 말에 철문의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림자 하나 없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찬, 그리고 자해를 할 수 없도록 뾰족한 모서리 하나 없이 푹신푹신한 재질로 된 것들만 잔뜩 있는 방안엔 살가죽과 뼈밖에 안 보이는 피골이 상접한 사람 하나가 구속복이 입혀진 채 앉아있었다.

의사는 방안으로 들어가 환자의 눈에 플래시를 비추는 등 몇 가지 검사를 했다. 환자는 검사 도중 계속해서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의사는 반응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끝낸 뒤 곧 방에서 나왔다. 의사는 차트에 있는 체크리스트에 브이자를 몇 번 긋더니 간호사에게 물었다.

"스타니슬라프에서 왔다지?"
"예, 마을 전체가 폭격으로 불살라졌는데 그 한가운데서 발견됬답니다. 다 타버린 시신 하나를 안고 있던 채로요."
"건강상태는? 뭐, 물어보는게 민망한 수준 같지만 말이네."

의사는 철문 안 쪽을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간호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안 먹으려 듭니다. 영양제 투여로 간신히 살아있기만 하는데. 실려 올 때 몸무게가 105kg이었던 사람이 45kg으로 줄었어요. 지금 쯤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업는 상황이죠."

간호사는 말을 마치고 기지개를 쭉 펴다가 실수로 문 옆의 스위치를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환자의 방 안에서 그림자 하나 없도록 사방에서 비추던 전등 하나가 꺼져버려 한 구석에 그림자가 생겼다.  환자는 기겁하며 째지게 비명을 질러댔다.  급기야 구속복을 입은 채로 쿵쿵 뛰어 문 앞으로 바짝 붙어 머리를 벽에 박으려 애쓰며 소리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푹신푹신한 벽의 재질덕에 피해는 전혀 가지 않았다. 간호사는 급히 불을 다시 켰다.  다시 불이 켜졌지만 환자는 안정될 줄을 몰랐다.

"아, 이런 젠장...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환자가 어두운 것만 보면 아주 미치려고 들어요. 저대로 내버려두면 알아서 잠잠해집니다."

간호사와 의사가 자리를 뜨려하자 환자는 머릴 벽에 박다 말고 문의 유리창에 최대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문 때문에 들리지 않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로마노바, 로마노바, 빛이 지고 있어."

의사도 덩달아 중얼거렸다.

"예?"
"아까 진찰 할 때 계속해서 저 말만 하더군. 지금도 입모양을 보아하니 그 말만 계속하고 있고. 로마노바가 누군가?"

간호사는 머릴 긁적였다.

"모릅니다. 사실 저 환자 이름이 뭔지도 모르죠.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서 혼자 발견 된 사람이니 누군지 캐낼 수도 없잖습니까? 사실 지금 영양제 처치를 계속 하는 이유도 상부에서 일단 살려두라고 해서 하는거니까요."
"C3-48 환자로 넘어가지."

간호사와 의사는 문 앞에서 애처로운 모습으로 중얼대는 환자를 놔두고 옆 방으로 건너갔다.

"로마노바. 로마노바. 빛이 지고 있어."

환자번호 C3-47. 아니, 그로즈니의 말라빠지고 주름진 눈가에 공허한 동공에서 흐른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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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밝은 엔딩으로 만드려면 어떻게 만드는게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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