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휘에게
잘 지내고 있니? 군대 온 지 넉 달 쯤 지났을 테니 이제 막 일병 달았을 테고, 아마 네 후임도 생겼다면 선임 말 들으랴, 후임 챙기랴, 할 일 하랴... 눈물나게 바쁠 시기일 텐데 이제야 편지 보내는 것부터 사과할게. 나도 공연 끝나고 나서 웬 여자 분 하나가 네 팬이였다고 다가오면서 오빠가 내 편지를 받고 싶어할 거라 하면서 자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게 건네준 뒤에야 네가 군대에 갔다는 사실을 알아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러고 나니, 네가 얼마나 빨리 잊혀졌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졌는지 실감이 가더라고.
사실 처음에 주소를 받고 나서도 이 편지를 쓸까 말까 망설였어. 아직 너에 대한 악감정이 완전히 정리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잘못하면 내가 미처 아물지 못한 네 상처를 헤집는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고. 결국 난 수십 번의 고민 끝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기로 했어. 지난 1년 동안 너를 지켜보면서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꽤 많았거든. 혹시라도 이 편지를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나도 그런 느낌을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길 바라.
난 아직도 지난 3월이 생생하게 떠올라. 우리 클럽 앞 싸구려 고기뷔페, 평소처럼 공연 뒤풀이하다 네 입에서 나온 폭탄발언. '난 더 이상 여기서 음악 못 하겠어요. 좀 더 큰 물에서 놀고 싶어요'. 그러면서 가리킨 TV에서 나오던 오디션 프로. 뭐, 그 땐 너는 조그마한 클럽에서 푼돈 받으며 썩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와 단칼에 연을 끊으려고 했던 거겠지. 그래서 그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널 반쯤 죽이려고 들었던 민수랑 현우, 그리고 끝까지 널 잡으려 했던 나를 뒤로 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자취방에서 기타랑 짐만 들고 훌쩍 사라져 버렸을 테고.
얼마 안 있어 오디션 프로에 나온 널 보고 다른 얘들은 '저러다 떨어지기나 하겠지' 라며 비아냥거리기만 했지만, 나는 네가 합격하길 바랐어. 그러면 내가 네게 해 줬던 말들을 몸소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결국 내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건지, 넌 합격해서 곧바로 '인디밴드에서 다년간의 무대 경험을 가진 실력파 신예' 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유명 기획사에 스카우트된 스타가 되었지. 그러자 얼마 안 있어 네가 만든 노래는 온갖 음악프로와 전국의 길거리에 줄기차게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우리 밴드 얘들은 그런 널 보고 화를 냈어. 민수랑 현우는 네 음악을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고, 도망간 너 대신에 메인 보컬이 된 유빈이도 네가 우리 밴드 이름은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더라고. 하지만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어. 그 동안 너처럼 메이저에 발을 들여놨다가 쓴 잔만 마시고 돌아간 사람들을 여럿 봐 왔거든. 그래서 난 우리 얘들이 화 낼 때마다 이렇게 말했어. '두 달만 기다려라. 두 달 지나면 광휘 노래는 한물 간 노래가 될 거다.' 그리고 두 달 뒤, 내 말은 사실이 되었지.
물론 너도 네 소속사도 네 인기가 두 달 만에 끝나는 것을 원하진 않았을 테니 그 뒤에도 끊임없이 두 달 단위로 후속곡이 나오곤 했지. 인기는 처음만 못하긴 했지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문제는 그게 아니었어. 네가 유명해진 만큼 넌 지윤이를 만나기 힘들어 했고, 그러다 보니 넌 지윤이에게 관심을 끊어 버렸지. 거기다가 네 인기에 자신감이 생겨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네가 그 걸그룹 막내와 사귄다는 기사가 뜨기 시작하더라고. 그 때쯤에 지윤이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막 따졌지.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어떻게 제대로 된 이별 통보 하나 없이 날 버릴 수 있냐고. 전화번호는 왜 바꾼 거냐고. 나랑 연락하기 싫어서 바꾼 거 아니냐고. 3년 넘게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게 다 거짓말이었냐고. 난 광휘 오빠에게 속았다고. 하면서 전화가 끊기고 나니까 내 속이 다 타더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지윤이는 너 때문에 거의 세 달 동안 폐인처럼 살았고, 그 걸그룹 얘도 우연히 네가 지윤이랑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어디 클럽에서 너랑 대판 싸웠고 그 뒤로 너는 차였지. 클럽에서 네가 그 걸그룹 얘랑 대판 싸운 건 이내 훌륭한 가십거리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그 걸그룹 얘가 기자에게 대놓고 네가 널 버렸다고 해 버린 바람에 넌 순식간에 실력파 가수에서 조강지처를 버린 나쁜 놈으로 전락해 버렸지.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너에 대해 잊어갈 때 쯤 넌 군대로 도망갔겠지. 그 때 나에게 주소 준 그 여자 분이 사람들은 오빠 이름을 현광휘가 아닌 프라나로 알고 있을 테니 본명 대면 누군지도 잘 모를 거고, 렌즈 대신 안경 끼고 머리 빡빡 깎으면 의외로 알아볼 사람이 얼마 없을 거라고 귀띔을 해 주더라고.
난 너에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어. 너는 인기에 눈이 멀었고, 인기를 얻고 나서도 경솔한 행동을 해서 네 신세를 망쳐 버렸어. 물론 네 실력은 우리 같은 마이너 뿐 아니라 메이저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큼 뛰어났고, 가끔 나도 네 실력에 질투가 날 때도 있었어. 하지만 넌 네 실력만 믿고 덤볐다가 내가 매번 입이 아프도록 했던 말을 잊어버렸어. ‘진심을 담은, 누군가의 마음에 남을 음악을 만들어라.’ 가끔 사생활이 너와는 비교가 안 되게 더러운데도 그 사람 음악은 계속해서 듣게 되는 가수가 있잖아?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곡 쓸 때 내가 말했던 것들을 생각하면서 써. 하지만 넌 그저 사람들에게 잘 먹힐 노래만 생각하고 또 써 왔지. 그래서 그 노래들은 두 달 동안 짧게 짧게 소비되다가 네 이미지 개판 되니까 다들 그 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하잖아. 생각해 봐. 왜 우리가 너 같은 인재를 두고서 너랑 같이 메이저로 나서지 않았는지. 그건 우리가 그 ‘누군가의 마음에 남을 음악’이라는 목표에 완전히 닿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만약 우리가 그런 음악을 완성한다면 굳이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너스레를 떨지 않아도 매번 클럽에서 우리 공연을 봐 주는 분들이 우리의 노래를 알릴 것이고, 그렇게 퍼진 우리 노래는 한 두 달로 그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길거리에 울려 퍼질 거라고 생각해.
지금 네가 네 결정을 후회하고 있을지, 아니면 사람들이 네 실수를 잊을 때에 다시 돌아와 인기를 얻고 싶어할지는 나도 모르겠어. 네 성격상 후자일 것 같긴 하지만. 네가 제대 후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순전히 네 선택이야. 하지만 이것만 알아 둬. 우리 밴드는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어. 민수랑 현우도 널 용서했고, 유빈이도 네가 메인 보컬로 돌아오면 기꺼이 세컨드 기타로 물러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만약 네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널 받아 주고 나서 그냥 하룻 밤 어디 다녀온 것처럼 익숙하게 대해 줄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너에게 해 줄 말이 있어. 한 달 전에, 지윤이가 우리 밴드에 들어왔어. 원래 키보드 말고 있던 기찬이가 다른 밴드로 옮겨가면서 빈 자리라서 우리도 흔쾌히 지윤이를 받아들였어. 그렇게 지윤이랑 첫 공연 하고 네가 폭탄발언 날렸던 그 고기뷔페에서 뒷풀이 할 때 지윤이가 이러더라. 처음엔 광휘 네가 꼴도 보기 싫었고, 다시는 남자에게 속지 말자며 자신을 가뒀지만 결국 외로워서 남자들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광휘가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처음엔 우리도 그 말 듣고 놀라서 술 너무 많이 한 거 아니냐고 했지만 걘 끝까지 진심이라고 했었어. 진짜, 너 이런 얘 안 잡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우리와 다시 음악을 할 건지, 아니면 다시 한 번 네가 갔던 길을 갈지 한 번 잘 생각해 주길 바라. 그리고 결정 나면 편지든 페북이든 트윗이든 소식도 전할 겸 우리에게 얘기해 줘. 그럼, 좋은 대답 기다리며 이만 줄일게.
세준이 형 씀.
ps. 주소도 알았겠다, 언제 우리 얘들 다 데리고 면회 한 번 올게. 지윤이도 온댔어.
-------------------------------------------------------------------------------------------------------------------------------------------
단편 참 오랜만이군요. 렌없입니다.
http://ntxq.ehehe.net/gb4/bbs/board.php?bo_table=free&wr_id=35119&sca=&sfl=mb_id%2C1&stx=alswnstlr333&sop=and
저번에 TV에서 나오는 가요들은 길거리에 한 두달 정도 흘러내리다 사라지겠지만, 그 중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 곡은 얼마나 될까 하고 탄식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마음을 담아서 요즘 가요에 대한 제 생각,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진정 좋은 음악인지 무엇인지 이 짧은 글에 담아 보았습니다. 물론 길거리를 한 두 달 동안 메우다 사라지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전에 서간체 형식은 처음 써 보는데, 이거 단편에 딱 맞는 형식이네요.
부족한 글,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