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바이킹 - 1

작가의집 0 3,084


"할아버지,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 해주세요."

아직 애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 새털 베게를 안아들고 그의 할아버지의 서재로 쳐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존, 시간이 많이 늦었단다. 이야기는 나중에..."
"아아, 할아버지! 그냥 해주시면 안돼요? 잠이 안온다구요!"

손자의 집요한 요구에 노인은 곤란한 듯 웃으며 쓰고있던 깃펜을 펜꽂이에 꽂았다. 노인이 투박하고 큼지막한 손가락과 작은 깃펜이 자못 대조적이었다. 노인은 왠만한 장정의 허리통만큼 두꺼운 근육질의 다리를 움직여 책상의자에서 일어나 침상에 걸터앉았다. 노인은 손자를 자신의 옆에 앉히고 코끝에 걸치듯 쓴 동그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오늘은 무슨 이야길 해줄까..."

손자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모험이야기! 모험이야기 해주세요!"

노인은 눈웃음지었다.

"누가 이 할애비 손자 아니랄까봐. 그래, 할애비 모험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 다른 모험 이야기를 해주마. 너에겐 좀 무서울지도 모르겠는데, 괜찮겠니?"
"예전엔 할아버지보다 두배는 큰 트롤 목을 단번에 쳐죽인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술술 말씀해주셨잖아요. 그 정도면 괜찮아요."

노인은 흠칫하며 식은 땀을 한방울 삐질 흘렸다.

"그...그래, 존. 혹시 동 대륙 동부산맥 너머의 해안에서 살았다고 하는 깃털 홍인들에 대해서 알고 있니?"

소년은 할아버지의 물음에 우쭐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삼스 산맥 동쪽 산등성이 쪽에 문명을 이루고 살던 붉은 피부의 사람들 말씀하시는거죠? 머리에 머리카락 말고 정말 깃털이 나던 사람들이었다던데, 아아아아주 옛날에 동부 대양인 시피캡 대양에서 왔다던 정체불명의 약탈자들에게 멸망당했잖아요?"

노인은 기특한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똑똑하기도 해라. 큰 대학에 다니는 사람이 배울법한 내용인데."
"할아버지도 참, 전 역사학자가 되서 대륙의 역사를 모조리 다룬 역사책을 쓰는게 꿈이라고 몇번을 말씀드려요? 그 정돈 기본이죠!"

노인은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할애비가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구나."
"그리고 할아버지가 직접 시피캡 대양을 떠나서 대륙 서부로 돌아 들어오시면서 거대 문명 하나를 멸망시킬 만한 약탈자들이 있을 법한 큰 땅이나 민족은 없었다고 증언한 것 때문에 그 약탈자들의 정체가 더 오리무중이 되었고요."

노인은 이 말엔 흠칫 놀랐다. 그의 시피캡 대양 일주 항해 모험을 아는 사람은 그 모험을 원조한 미가스 마법학회 관련인들정도였기 때문이었다.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베게를 끌어안았다. 노인은 놀란 표정을 거두고 큼큼 목을 풀었다.

"이러다 또 이 할애비 이야기만 하겠구나. 지금부터 이야기해줄것은 그 홍인들에 대한 이야기란다. 다만, 네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일게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라는 말에 소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

고향땅이 있는 북해를 떠나 색슨족의 섬을 거쳐 섬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먼 대서양으로 들어선 흰늑대 부족의 일원들은 족장인 흰늑대 벨니크의 지휘에 따라 호기롭게 시작한 여정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대서양의 차가운 밤공기를 가죽모포 몇 장으로 버텨내며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는 부족 일원들을 보며 부족장의 아들 순록뿔 로바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명 이상이 탑승하고 있는 대형 롱보트만 스물 여섯 척. 흰늑대 부족은 북해와 북유럽 국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던 사상 최악의 바이킹이란 긍지높은 이름도 버리고 부족장의 말만 따라 거의 전 부족원들이 이 기약없는 여행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리고 로바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족장에게 불만을 품어가는 부족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심감하고 있었다.

로바즈는 선수상이 있는 갑판 앞쪽에서 자고있는 부족민들을 조심스레 피해가면서 아버지가 있는 작은 선실에 다가섰다. 선실 바깥으로 부족장이자 천둥의 신 토르의 신관이기도 한 아버지의 기도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로바즈는 자신의 텁수룩한 수염을 가다듬으며 기도가 끝나길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웅얼거리는 소리가 멈추자, 로바즈는 조용히 문에 대고 말했다.

"순록뿔 로바즈가 신관님을 뵙습니다."
"들어오거라 아들아."

낮고 심지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실로 들어서자, 흰 늑대가죽을 몸에 두르고 의식용 뿔투구를 쓴 아버지가 제단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족장 벨니크는 아들에게 짧게 물어왔다. 로바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여정을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십니까?"
"토르께서 서쪽으로 계속 가라며 말하고 계신다."
"부족민들이 지쳐가고 있습니다. 불만을 품은 자들도 적지만 생기고 있고요. 아무리 토르님의 뜻이라지만-"
"닥치거라! 네 녀석은 토르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정처없이 떠도는 길로 치부할 셈이냐?"

벨니크는 노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그 천둥같은 목소리에 선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로바즈는 조금 주춤했지만 자기가 할 말은 하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이제 전장을 누비며 적들의 피로 목욕재개를 하던 흰 늑대가 아니라 그저 제사에 정신팔린 늙은이로밖에 보지 않습니다."
"닥치라고 말 하였다!"

노인의 목울대가 움틀댔다. 로바즈는 더 이상 이야기 해 봤자 얻을게 없다 생각하고 고개숙여 예를 표하며 선실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숨을 크게 쉬며 선수쪽으로 다시 향했다. 로바즈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긴 싫었지만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최근들으 주변 부족이나 도시의 약탈보다 토르에게 제사를 하는것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족원 몇몇에게 "저러다 침대위에서 누워있다가 헬의 인도를 받겠다"같은 소리를 듣기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로바즈는 그 이야길 듣자마자 이야길 한 사람의 머리통을 거침없이 도끼로 찍어버려 자신의 아버질 모독한 값을 치르게 했지만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로바즈는 기괴하고 무서운 모양새를 한 용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선수상을 붙잡고 바람을 타며 순항중인 다른 롱보트들을 바라봤다. 건너편 선박에서 로바즈의 절친한 친구인 얀센이 긴 세갈래 작살로 움직이는 배에서 용케도 굵은 생선들을 낚아내고 있었다. 얀센이 로바즈를 인식하고 활짝 웃으며 고기가 꽂힌 작살을 흔들자, 로바즈도 웃으며 그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얀센이 작살에서 고기를 빼내며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수평선 가까이에 있는 구름에서 우릉우릉 하고 천둥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생겨난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저 곳이다."

로바즈의 뒤에서 별안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니크였다.

"저 곳으로 우릴 부르고 계신다."

배를 폭풍우 속으로 몰고 가라고 지시하는 아버지의 말에 뭐라 반박을 하려 했던 로바즈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눈빛을 발하는 다부진 체격의 노인을 보고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돛을 올려라! 이제부터 노로만 항행한다!"

로바즈가 큰 소리로 외치자, 뒤에 있던 고수가 독특한 박자로 북을 쳤다. 그리고 뒤를 따르는 스물 다섯 척의 배들도 같은 박자로 북을 치기 시작했다. 곧 이어 모든 배가 돛을 접어 오리고 노를 빼들었다. 스물 여섯의 롱보트 선단은 극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해역에 스스로 들어섰다. 높은 파도가 몰아치며 갑판에 버티고 서있는 고수와 선수상에 한팔로 버티고 서 있는 로바즈를 흠뻑 젖게 했다. 로바즈는 거친 빗발에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지만 절묘하게도 앞에서 몰려오는 살인적인 파도 무리를 이리저리 피하도록 선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허나 그 폭풍은 바다에서 먹고 자며 싸우던 바이킹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를 가진 물건이었기에 로바즈의 지휘가 마냥 완벽할 수는 없었다. 삼각 모양으로 선단을 이뤄 파도를 뚫던 롱보트 무리의 끄트머리에 있던 선박이 파도에 재대로 한 대 얻어맞고는 용골이 박살 나 폭풍속으로 사라졌다. 백 이십명 가량이 비명을 지르며 칠흑같은 바닷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비명소리는 천둥소리와 비바람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고수의 거센 북소리만이 옆 선박을 통해 들려올 뿐이었다. 

폭풍속에서 사투를 벌인지 수 시간, 선박 2채를 추가로 잃고 부족민 2백여명을 바다에 쓸려보낸 흰 늑대 부족에게 저 멀리서 밝은 하늘이 가까워지는것이 눈에 띄었다. 로바즈는 환호성을 지르며 선단을 폭풍밖을 향해 가도록 유도했다. 그의 아버지 벨니크는 그런 아들을 말리지 않고 지그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구름의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온 롱보트 선단에 선선한 선풍이 불어왔다. 접어진 돛을 펴기위해 돛대위로 기어올라간 한 소년은 돛줄을 펴다가 말고 수평선 부근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만세하듯 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육지다!!!"

-----

몇 주간의 항해 끝에 롱보트들은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톱에 배의 용골을 댈 수 있었다. 육지에 처음으로 발을 내린 부족장 벨니크는 모래톱 앞에 깎아지르듯 분포되어있는 절벽과 그 뒤에 보이는 높은 산맥들을 보며 그것들을 다 안을 듯 양 손을 펼치며 부족민들에게 말했다.

"토르께서 우릴 이곳으로 이끄셨다."

부족민들은 그 순간만큼 부족장에 대한 불신을 모두 잊고 마치 천상의 아스가르드를 보는 듯한 풍경에 감탄했다. 그러나, 환호성을 지르며 육지로 내리는 흰 늑대부족들은 절벽 위 덤불속에서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새의 형상은 바다 너머에서 온 이방인들을 잠시 지켜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대추같이 붉은 피부와 오색으로 알록달록 무늬 새겨진 천옷이 드러났다. 그 형상은 분명 사람이었지만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곳에 새의 흰 깃털이 아름답게 등으로 물결치듯 자라고 있었다. 새 깃털머리를 한 사람은 급히 산맥 방향으로 뛰어갔다. 맨발로 돌밭을 도약하는 듯 뛰는 모양새가 마치 타조를 연상케 했다.

부족원 모두가 땅을 밟으며 기뻐하는 와중 딴짓을 하며 절벽위를 보던 얀센은 뭔가 튀어나가는 것을 보고 잠깐 의구심을 가졌지만 살짝 보인 깃털 때문에 바다새겠거니 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

"대전사여, 대전사여, 뵙기를 청합니다."

등허리까지 풍만하게 기른 윤기나는 흰 깃털을 알록달록한 실로 장식한 머릴 한 새 인간이 거대한 천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요청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어오라. 동쪽 바다의 빛."

천막 안에서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쪽 바다의 빛' 이라 불린 흰 깃털의 새 인간은 조심스레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매캐한 연초냄새가 훅 풍겨왔다. 중앙 곤로 안에서 자작자작 타고 있는 숯불 주위로 세 사람의 새 인간이 앉아 긴 곰방대에 채워진 약초를 피우고 있었다. 동쪽 바다의 빛이 들어서서 꿇어앉고 고개를 숙이자, 그 중 중앙에 앉아있던 늙은 여자가 말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이라."

동쪽 바다의 빛이 고개를 들고 오색실로 땋은 깃털을 얼굴 앞에서 거두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인의 오른쪽 눈은 다른쪽의 검은 눈동자와 다르게 청명한 푸른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동쪽 바다의 빛이 얼굴을 보임과 동시에 오른쪽에 앉은 금색빛 깃털이 짧게 머리에서 자라고 있는 소년이 말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찾은 이유를 말하라."

동쪽 바다의 빛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쪽 큰 바다를 넘어 전에 보지 못한 이방인들이 이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수가 완연한 청년의 머리 깃털보다 많았습니다."

소년이 다시물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생김새를 상세히 고하라."
"대부분의 이방인들의 눈이 저와 같이 푸르렀고, 머리칼은 서쪽의 큰 만 너머에서 오는 인간들처럼 생겼으며, 동물가죽과 철갑옷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방인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들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호전적인 자들로-"

제법 멀리서 봤음에도 굉장히 소상한 묘사였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 왼쪽에 앉은 공작처럼 오색의 빛을 발하는 깃털을 온몸에 두른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젊은 사람이 말을 끉어버렸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본 것으로 처음 본 것을 정의치 말라."

목소리조차 여자인지 남자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동쪽 바다의 빛은 고개를 숙였다.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대전사여."

중앙의 늙은 여자가 이어 말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고개를 들라."

소년이 뒤이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대같은 훌륭한 척후병을 책망하겠는가."

성별이 애매한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일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그릇을 가늠해보면 될 것이다."

늙은 여자가 마무리지었다.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만 물러가보아라."

동쪽 바다의 빛은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로 천막을 나섰다. 매캐한 약초연기에 잠긴 목을 큼큼 푸는 동쪽 바다의 빛의 뒤로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서더니 그녀의 귀 옆에 대고 크게 말했다.

"야, 짝눈아!"

동쪽 바다의 빛이 흐에에 하고 비명지르고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어깨 높이까지 불타는 듯한 붉고 짧은 깃털을 기른 말괄량이 인상의 여성이 고소하다는 듯 킥킥대고 잇었다.

"붉은 수수밭, 너였구나."

동쪽바다의 빛이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수수밭은 동쪽 바다의 빛의 보옹긋한 가슴과 자신의 추수 끝난 밭 마냥 판판한 가슴을 한번씩 휙휙 보더니 뭔가 아니꼬운 듯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듣자하니, 이방인들이 왔었다고?"
"응. 동쪽 큰 바다 너머에서 왔어. 이런 적은 처음인데."

붉은 수수밭은 왼손에 들고 있던 큼지막한 한손 전투망치를 어깨에 휙 들쳐 들었다

"움... 나도 직접 보고픈데."
"대전사님이 내일 사람들을 보내서 어떨지 가늠을 해보신다던데, 같이 가지그래?"

붉은 수수밭은 그 말에 표정을 심통난것 처럼 바꾸더니 망치를 가뿐히 어깨에서 내려 동쪽 바다의 빛의 가슴팍을 톡톡 두들겼다. 망치를 든 왼팔과 어깨에 발끈 솟아오르는 잔근육들이 도드라졌다.

"얘, 짝눈아. 넌 내 처지를 알고서 그러는거지? 일부러 약 오르라고?"

동쪽 바다의 빛은 그제서야 그녀가 무슨 소릴 하는지 깨닫고 미안하다는 듯 손짓했다. 붉은 수수밭은 대전사를 지키는 수호 여전사였다. 고로, 그녀가 대전사의 거처인 이곳에서 다른곳으로 방문하는 것은 일년에도 한 손에 꼽힐 만큼 빈도가 적었다.

"잘 다녀오고, 이야기나 재밌게 해줘. 알았지?"

붉은 수수밭이 망치를 치우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데도 못 가는 처지인 붉은 수수밭에게 동쪽 바다의 빛은 그녀의 유일하다시피 한 친구였다.

"응. 어엄청 실감나게 이야기해줄게."

동쪽 바다의 빛이 손을 흔들며 돌아가자, 붉은 수수밭은 들고있던 망치를 절벽 너머 허공에 세게 던졌다. 망치는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더니, 이내 다시 돌아와 붉은 수수밭의 손에 잡혔다. 붉은 수수밭은 만족스러운 듯 휘파람을 불며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근육박힌 탄력적인 하체가 걸을 때마다 매혹적으로 실룩댔다.

-----

다음 날, 바이킹들이 모래톱 근처 언덕에 임시로 마련한 야영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야영지 앞에 나타난 기괴한 모습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새 깃털 모야으로 만든 철 비늘이 박힌 비늘갑옷에 전에 본 적 없는 생소한 모야의 무기를 들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머리엔 머리카락이 아니라 마치 머리 장식품같은 새 깃털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피부색도 굉장히 붉었다.

서로 무기를 겨눈 두 무리사이에 적막만이 감돌자, 야영지에서 흰 늑대가죽을 두른 사람이 그들 한가운데로 나섰다. 벨니크였다.

"우린 위대한 천둥의 신 토르님의 부름에 답해 이 땅에 도착한 흰 늑대 부족들이고, 나는 이들의 인도자 흰 늑대 벨니크다. 그대들은 이곳의 선주민인가?"

벨니크는 듣도보도 못한 그들의 인상에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최대한 제스쳐를 소상하고 크게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 적어도 '우리는 누구다, 나는 이들의 지도자, 너희들은 누구인가?' 정도의 의사전달은 될 것이었다. 곧이어 새 인간들 사이에서도 한 사람이 벨니크 앞으로 나섰다. 길게 늘여뜨려 길러 색실로 땋은 흰 깃털, 오른쪽만 파란색인 눈, 아름다운 용모. 동쪽 바다의 빛이었다. 동쪽 바다의 빛은 벨니크가 한 것처럼 제스쳐를 크게 취하며 말했다.

"우리는 이 대륙의 동쪽 산맥을 지키며 대전사님의 말씀을 따르는 '오트리치'들 입니다. 당신들은 분명 끝이없는 큰 바다를 건너 오셨을테니 많이 지치셨을테지요. 괜찮다면 우리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쉬며 바다를 건너실 때 이야기를 해주심이 어떠신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동쪽 바다의 빛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천천히, 위협적이지 않게 뽑고는 자신의 머리깃털 중 땋은 부분을 잘라내어 미소와 함께 벨니크에게 건넸다. 윤기나고 부드러운, 그리고 예쁜 깃털 묶음을 받아든 벨니크는 늑대가죽 안쪽에 손을 넣어 바다사자 엄니를 갈아 만든 의식용 뼈 칼을 조심스레 빼고는 칼날쪽을 잡은 채 동쪽 바다의 빛에게 건네줬다. 룬 문자가 빼곡히 파여있는 기백 넘치는 칼을 받은 동쪽 바다의 빛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벨니크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두 무리의 전사들은 그제서야 서로를 겨누던 무기를 거둬들였다. 이방인들을 수 없이 대해본 자들과 이방인의 입장이 수 없이 되어본 자들의 첫 대면은 그렇게 평화적으로 마무리지어졌다.

-----

"아버지, 저들이 사는 곳으로 정말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우린 저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가야지. 토르께서 인도하신 땅에 사는 주민들이다. 친해져서 나쁠 것 없잖느냐?"

로바즈는 고래를 휘휘 젓더니 말했다.

"그럼 저도 아버지와 같이 가겠습니다. 그리고 여차할 때를 대비해서 전사들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 않으마. 이곳은 얀센에게 맡기면 되겠구나."

로바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뿔피리도 하나 가져가서 유사시에 얀센과 나머지 부족원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러거라. 너의 그 용의주도함이 지금까지 우리 부족에게 해가된 적은 없으니까."

-----

"동쪽 바다의 빛아. 너도 이제 이방인 대하는 법을 잘 알게되었구나."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삼촌. 대전사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를 뿐인데요. 대전사께서 말씀하시길, 싸울 뜻이 없는 이방인들은 잘 먹이고 선물을 안겨 보내라. 기본이죠."

몸집이 산만하고 어깨에 자기 몸집만한 새조각상토템을 들쳐멘 사내가 동쪽 바다의 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쪽 바다의 빛이 배시시 웃고있는 와중에 야영지에서 벨니크와 로바즈, 그리고 한 무리의 전사들이 나왔다. 벨니크가 새 인간들 앞에 서서 말했다.

"앞장 서시오, 따라가겠으니."

-----

대전사의 거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초대형 천막 안에서 작은 북소리와 떠들썩한 웃음소리,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배어나왔다. 상석엔 새 인간 오트리치들의 추장인 '일어선 황소'와 흰 늑대 바이킹들의 수장인 벨네크가 앉아있었고,그 아래 연회석엔 바이킹들과 오트리치들이 어울려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있었다. 오트리치들이 차려오는 생소해 보이는 음식들을 보고 바이킹들은 좀 머뭇거렸지만, 부족에서 먹성이 가장 좋던 양날도끼 올라프가 거대한 괴조 통구이의 뒷 다리를 확 뜯어 우악스레 베어물자, 그것을 신호로 하듯 모두 식탁을 거덜 낼 듯이 요리에 달려들었다.

실제로 오트리치들이 술을 내오기 전까지 연회석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음식대접이 내오기 무섭게 비워지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기도 했었다. 원체 먹성좋은 그들이지만서도, 오랜 항해에 제대로 된 따뜻한 음식이 그리웠던 것도 한 몫 했던 것이었다.

메인 테이블이 치워지고, 술상이 차려지자 달달하면서도 시큼한 술냄새가 천막에 훅 풍겨왔다. 산맥에 중턱에 자생하는 알코올을 품을 산딸기즙과 야생 하피의 젖을 짜내어 섞어 발효시킨 오트리치들의 전통 술이었다. 상석의 일어선 황소와 벨니크가 건배하며 나무잔과 뿔잔을 비움과 동시에, 연회석에서도 나무잔과 뿔잔들이 부딪혔고 전사들이 잔을 단숨에 비우기 시작했다.

"울란! 울란! 여기서 우리가 얻어먹을수만은 없지?"

롱보트의 고수중 하나인 재간꾼 우르프가 옆에 앉아있는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우르프가 부르는 친구인 애꾸눈 울란은 얼근하게 취한 얼굴로 씨익 웃으며 챙겨온 작은 북을 꺼내들었다.

"물논."

혀 꼬인 발음이 왠지 모르게 이국적이었다.

-----

"으아아아아! 앙대! 내 묠니르릉 써리거인들에게 빼악겨버리다니! 이럼 나는 햄보칼 수 업써어어!"

울란이 서리거인들에게 망치 묠니르를 빼앗긴 토르를 열정적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애꾸눈인 울란이 오딘을 연기하지 않고 토르를 연기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바이킹들은 울란의 재대로 혀 꼬인 발음에, 오트리치들은 과장된 몸짓과 웃긴 표정 때문에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한창 고수들과 울란의 연극이 진행중인 와중, 연회시작 때 가장 먼저 음식에 손을 댄 양날도끼 올라프가 거구의 몸을 자리에서 일으켜 건너건너편 자리로 훌쩍 넘어간 뒤 자리에 앉아있던 바이킹 한 명을 짐짝들 듯 번쩍들어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앉은 올라프는 식탁에 오른 팔꿈치를 쾅 내려쳐 꽂고, 손가락을 앞뒤로 까딱대며 도발했다. 도발하는 상대는 올라프 못지않은 거구의 오트리치, 아까 동쪽 바다의 빛과 같이 야영지에 왔던 동쪽 바다의 빛의 삼촌이었다. 올라프는 그에게 팔씨름을 요청하고 있었다. 주위의 바이킹들은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는걸 보고 뿔잔으로 식탁을 퉁퉁퉁 두드려댔다. 머리에 난 검은 깃털이 짧아 얼핏보면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동쪽 바다의 빛의 삼촌 '까마귀의 눈'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껄껄 웃으며 남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올라프가 내민 손을 억세게 붙잡았다. 나무잔과 뿔잔이 식탁에 부딛히는 소리와 함께 팔씨름이 시작되었다.둘의 팔에 근육과 핏줄이 투둑투둑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럼, 요태까지 여장을 했떤고야?"
"물논!"

울란의 연극은 거인들의 축제자리에 여장을 하고 잠입해 묠니를를 찾던 토르가 결국 상석에 놓인 묠니르를 다시 빼앗는 장면에 이르렀다. 묠니르 대신 거대한 괴조의 뒷다리뼈를 하늘로 치켜든 울란은 크게 외쳤다.

"내가 바로 쩐둥의 신 또오르- 읍!"

갑자기 울란의 속이 심상치 않았다.

-----

"이야, 이거 얼마만에 먹어보는 괴조야?"

붉은 수수밭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기얼굴보다 큰 괴조 날개살을 들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육즙이 흐르는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번졌다.

"으이구, 겨우 이 주전이네요. 그것도 네가 한마릴 몽땅 해치우는 바람에 난 뼈만 빨아먹었고!"

괴조 가슴살을 칼로 한점 베어먹으며 동쪽 바다의 빛이 톡 쏘아붙였다. 두 여성은 동쪽 바다의 빛이 연회장에서 챙겨온 괴조를 나눠먹고 있었다. 붉은 수수밭이 대전사를 지키는 자리에서 나올 수 없었기에 동쪽 바다의 빛이 배려한것이었다.

"그나저나 짝눈아. 이방인들은 어때보여?"
"음... 여지껏 산 밑에서 오던 사람들이나 오크들하곤 달랐어. 머리도 노란빛들이 많고, 눈동자가 내 오른쪽 눈 처럼 파란 사람들이 많았지."

붉은 수수밭은 벌써 날개 하나를 해치우고 괴조 갈비를 뜯어먹으며 물어왔다.

"싸움은 잘해보이디?"
"음. 그건 확실히 잘 해보인다고 할 수 있지. 우리가 야영지에 다가서니까 여자며 애들이며 노인이며 남자며 죄다 무기를 빼들고 죽일듯이 노려보던데?"

붉은 수수밭은 고기를 다 뜯은 갈비뼈 사이를 혀로 싹싹 훑으며 중얼거렸다.

"움... 한판 붙어보고싶다."

동쪽 바다의 빛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댔다. 그 때, 붉은 수수밭이 갈비뼈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맞다! 술! 술 왜 안챙겨왔어?!"
"바보야. 넌 여기 있으면 술도 마시면 안되잖아."

붉은 수수밭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몰라아아! 손님들한테 내놓는 술이 얼마나 맛난데에!! 나 이 일 때려칠래! 이제부터 네가 해!"

바닥에 누워 귀여운 맨발을 발버둥치며 앙탈부리는 붉은 수수밭의 모습이 자못 애처로웠다.

-아아아아악!!!

산맥 계곡을 웅웅 울리는 비명소리가 초대형 천막에서 터져나왔다. 뒤이어 깨지는 소리, 박살나는 소리도 시끄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릴 듣자마자 붉은 수수밭은 뉘인 몸을 훌쩍 띄워 일어서더니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전투망치가 날아와 손에 안착했다. 앙탈부리던 모습이 싹 사라진 진지한 얼굴을 한 붉은 수수밭이 동쪽 바다의 빛에게 말했다.

"짝눈아! 빨리가서 무슨일인지 알아봐! 난 대전사님께 가볼께!"

동쪽 바다의 빛은 걱정스러운 눈치로 고개를 끄덕이곤 천막쪽으로 달려갔다.

-----

"우...우웨에에에엑!!!"

한창 연기에 몰입하던 울란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구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신호로 하듯 바이킹 전사들 대부분이 배를 부여잡으며 먹은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상석에 앉아있던 벨니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순한 과음으로 인한 구토가 아니었다. 모두가 구토해낸 내용물엔 피가 섞여있었다. 오트리치 전사 까마귀의 눈과 팔씨름을 하던 올라프도 씨름하던 팔을 놓치고 배를 부여잡으며 뒹굴더니 피섞인 내용물을 토해냈다. 그 후로도 배가 찢어질 듯한 격통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회석이 갑자기 피투성이 토사물과 비명으로 엉망이 되버리자, 상을 차린 오트리치측에선 얼떨떨해져 멍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오트리치들은 그들이 간과한 사실을 평생 생각해도 알아낼 수 없을것이었다. 바이킹들이 다른 대륙이나 섬도 아닌 아예 다른 세계에서 왔고, 그들의 위장은 자신들의 위장과 상이하다는 사실을. 술에 들어있었던 하피의 젖엔 이 세계 사람이 아닌 사람의 위벽이 견뎌낼 수 없는 유산균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적응 못한 사람이 하피 젖을 먹으면 위벽이 녹아내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극심한 위궤양을 일으키고 말게된다. 수 세대동안 자신들도, 이방인들에게도 하피 젖 전통주를 잘 먹이며 살던 오트리치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상석에서 엎어져 피를 토해내는 흰 늑대 벨니크를 그의 아들 순록뿔 로바즈가 급히 달려와 부축했다. 벨니크가 구토를 멈추고 극심한 복통을 신음흘리며 견디고 있자, 로바즈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어 오트리치들을 바라보았다. 분노. 아니 격노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로바즈와 로바즈가 선택한 전사 몇몇은 애초에 연회석에서 먹는 시늉만 했을 뿐이지 차려진 음식 중 먹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로 그들은 이 난리판에서 멀쩡할 수 있었다. 로바즈는 울부짖듯 외쳤다.

"간악하기가 로키같은것들!!!"

오트리치들의 수장인 일어선 황소는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오해를 풀기위해 벨니크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족장은 몇 걸음도 못가 아버지의 부상에 분노하는 아들에게 다가서는 짓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걸 깨닫고 말았다. 로바즈가 품속에 숨겨들어온 투척용 도끼로 다가오는 족장의 목을 반토막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일어선 황소는 덜렁거리는 목과 함께 연회장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그와 동시에 오트리치 전사들의 얼굴엔 경악이 서렸고, 또 그와 동시에 무기를 숨겨온 바이킹 전사들이 그들의 경악한 얼굴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피를 토하고 바닥에 뒹굴던 전사 몇몇도 고통을 추스리고 들고있던 뿔잔이며 괴조 다리뼈며 뾰족한 식기들로 맞은편에 앉은 오트리지 전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트리치들의 전사들도 대다수 모인 자리였지만 그들은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피를 뿜어내며 맞아죽을 뿐이었고, 반면 상대인 바이킹들은 흥겨운 술판을 유혈낭자한 싸움판으로 바꾸는데에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방금까지도 서로 술잔을 맞대며 웃고 떠들던 두 무리가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을 벌이는 가운데, 로바즈는 도끼를 휘둘러 길을 만들고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큼지막한 뿔피리를 들어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빠아아아아아아암

부는 사람도 귀청이 터질듯한 큰 소리가 산맥의 계곡을 타고 울려퍼졌다.

----

Author

Lv.1 작가의집  2
0 (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