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의 심장

작가의집 0 3,223
작가의집 이고깽 판타지
 

--- ---

증기의 심장
 
 

매섭게 날이 선 무기들을 들고 터널 안쪽으로 쇄도해들어가는 검은 로브의 무리들 뒤에서 눈에 띄는 거구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 처럼 검은 로브를 갖춰입은 남자는그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 지원을 해주신 네신 공작님에게 감사인사 전해주십시요."
"별말씀을. 같은 수호자들의 일원으로써 당연한 일입니다, 퀸튼씨."

퀸튼이라 불린 거구의 남자는 인사치레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정식적인 일원도 아냐, 이 얼치기야.' 퀸튼은 속으로 빈정댔다.

'수호자들' 이라는 명칭을 자신의 이름 접두사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수호자들을 돕는 귀족들은 대륙 내에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수호자들의 정식 멤버로만으론 전 대륙을 감시하에 둘 수는 없기에 상부에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퀸튼은 영 못마땅했다. 퀸튼은 뒤쪽에서 시끄럽게 구둣발 소리를 내며 더 들어오기 시작하는 아군들을 보고는 로브 소매자락에서 미스릴로 만든 브레스 너클을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거치적거리는 후드를 뒤로 젖혔다. 척 봐도 압도적인 인상의 흑인 남자가 드러났다.

"자, 이제 놀아볼까."

-----

북부왕조에서 그 시설에 배치해둔 병력은 적었다. 애초에 그 터널과 안쪽의 시설이 철저히 북부왕조 장인그룹들의 비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귀족들의 대규모 사병들이 들이닥치자 순식간에 경비가 돌파되는 것은 물보듯 뻔했다.

퀸튼은 자신의 앞을 호기롭게 막아서며 시설 집입을 막는 병사의 안면을 주먹질 한방으로 시원하게 박살내버렸다. 미스릴 너클에 핏물이 잔뜩 묻었지만 퀸튼은 손을 한번 털고 그냥 안쪽을 향할 뿐이었다. 터널을 지나 시설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내부구조가 드러났다. 마치 격납고의 모습을 보듯 사각형으로 깊고 넓게 만들어진 시설 속엔 황동으로 만들어진 여러 기계들이 증기를 푹푹 뿜어내며 작동중이었다. 입구에서 들이닥치는 검은로브의 괴한들을 보자, 안에서 각자 작업에 착수중이던 다양한 인종의 기술자와 장인들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검은로브들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고 허둥대는 그들을 닥치는대로 살육했고, 보이는 기계란 기계는 모조리 때려부숴버렸다. 퀸튼의 눈에 무력한 장인들 속 렌치를 휘두르며 저항하는 드워프 장인 한 사람이 띄었다. 퀸튼은 달려가 렌치를 가볍게 막아내고 장인의 복부를 로우킥으로 강타해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리며 물었다.

"자, 네놈들 수장은 어디있지?"

드워프는 쿨럭쿨럭하며 기침을 몇차례 하더니 퀸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차라리 날 죽이시지."

퀸튼은 소매자락으로 대충 침을 닦고 활짝 웃었다.

"원하시는대로."

드워프를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친 퀸튼은 그 위에 올라타 무자비하게 파운딩을 시작했다. 주먹 한방에 두개골을 박살내고 얼굴을 함몰시켜버리는 그였다. 몇 대 때리지 않았음에도 드워프 장인은 곧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하고 말았다. 뇌수가 낀 주먹을 탈탈 털며 일어나는 퀸튼의 귀에 쿵쿵거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그의 앞에서 증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무언가가 검은로브의 병사들을 바닥까지 수십미터는 될 난간 밖으로 휙휙 던져버리며 다가오고 잇었다. 퀸튼의 눈에도 그 존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황동으로 만든 영장류를 보는 듯한 기계였다. 증기를 여기저기서 뿜어내는 키가 2m는 족히 넘음직한 기계의 가슴팍 안쪽에선 또 다른 분노에 찬 드워프 장인이 조종간을 이리저리 당기고 밀며 조종중이었다. 퀸튼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웃더니 앞에서서 창칼을 겨누던 무리를 자신 뒤로 치워놓고는 그 황동거인에게 들려들어갔다. 거인의 몸 앞에 순식간에 접근한 퀸튼은 크게 긴 팔을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해오는 기계의 일격을 더킹으로 가볍게 넘겨버린 뒤 달려오던 속도를 담아 기계의 무릎에 라이트 훅을 날렸다. 미스릴에 부딛힌 황동 무릎은 그냥 바스라지듯 박살나버렸고, 거인은 중심을 잃은 채 비틀거리다가 난간 밖으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퀸튼은 재빨리 거인의 가슴팍에 손을 뻗어 조종하던 드워프를 잡아빼버렸다. 퀸튼은 심연속으로 떨어져가는 황동괴수를 잠깐 지켜보다가 자신의 손에 다릴 잡혀 난간밖에 대롱대롱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드워프 장인에게 물어봤다.

"자, 네놈들의 수장, 나카무라 타쿠미는 어디에 있는거지?"

난간밖으로 떨어져 죽은 입 가벼운 드워프의 정보로 수호자들의 일행은 시설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가는 길목길목마다 저항하는 사람과 기계는 퀸튼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박살난것은 당연지사였다. 마침내 시설의 심장부라고 불릴 격납고 안쪽까지 들어가자, 퀸튼과 뒤의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안쪽의 광경에 넋을 놓고 말았다. 몇몇 사람은 들고있던 무기도 떨어뜨렸다.

20m는 족히 될만한 거대한 기계 거인의 형상이 그들의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룡(對龍)급 건돔의 가동은 아직 이릅니다! 이건 아직 테스트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요! 아니, 테스트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 아직 미완성이잖습니까?!"

만류하는 수석 장인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장인그룹의 수장, 나카무라 타쿠미는 늙은 몸을 이끌어 '건돔'이라 불린 거대 기계거인의 조종석에 올라탔다. 나카무라는 밑에서 쏟아져나오는 검은로브 일당들을 보며 수석장인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이런식의 학살은 더 이상 안돼!"

수석장인은 갑자기 튀어나온 일본어에 얼떨떨하여 끝부분인 "-모 야메룽다!"밖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카무라는 조종석 문을 세차게 닫고 거인의 시동을 걸었다. 수많은 피스톤과 실린더로 이뤄진 거인의 심장이 증기로 달궈지기 시작했다. 증기기관 기술의 극인 '나카무라 기관'을 이용해 만든 대룡(Anti-dragon)급 건돔, '자코'의 첫 기동이었다.

-----

퀸튼은 거인이 보이는 심상찮은 모습에 뭔진 몰라도 일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막고자 위쪽으로 병력을 투입시킨것이 헛수고임을 깨달았다. 이미 거인은 점점 열을 내고 증기를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인은 육중한 발을 움직여 한창 철제 계단을 타오르던 수호자들의 병력을 모조리 계단째로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퀸튼이 서있는 자리 주위로 사람들이 떨어져 뼈 박살내는 섬뜩한 소릴 내며 죽어갔다. 자코는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마치 벌레를 밟아죽이듯 수호자들을 지근지근 으깨고 있었다. 어찌어찌 대항해보려 망치등을 들고 거인의 발치에 달려드는 사람은 거인의 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온의 열에 심한 화상을 입고 나동그라져, 후속해서 오는 발길질에 무력하게 으깨질 뿐이었다. 퀸튼은 이대로는 안돼겠다 싶어 격납고 주변의 방들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뭔가 두꺼워보이는 잠긴 문을 보곤 주저없이 주먹질을 날렸다. 육중한 자물쇠도 미스릴 너클로 때려대는 충격을 오래버티진 못했다. 퀸튼은 열린 문 안쪽을 보며 미소지었다.

"자, 빙고로군."

나카무라는 수석 장인이 우려한대로 자코에겐 아직 문제가 수도없이 많다는걸 깨달았다. 아직 하체밖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데다, 기관이 불안정한것인지 앞으로 수 시간밖에 움직일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밑의 검은로브 일당들을 해치우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나카무라가 타고 있는 조종석 부분에 표면이 우그러지는 것이 안에서 보일정도로 큰 충격이 가해졌다. 노인이 멍멍해진 귀를 부여잡으며 주위를 살피자, 검은 로브를 입은 거구의 사내가 뒤에서 증기를 세차게 뿜어내는 기계를 등에 메고 황동색 전투망치를 치켜든 채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카무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가 자신의 발명품인 증기 기동장치와 증기추진 워해머를 가지고 자신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발명품에 당하는 발명가는 모욕감을 심하게 받는것이 당연지사였다.

기상천외한 물건을 갖추고 나카무라의 자코를 공격하는 퀸튼은 재차 조종석을 곡겨하기 위해 워해머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해머 뒷부분에서 고압의 증기가 방출되며 목표물을 향해 해머를 격돌시켰다. 퀸튼은 조종석을 집요하게 공략해댔다. 그 안에서 나카무라는 증기기관 기계의 고질적 문제인 고열을 온몸으로 그냥 버텨내며 조종석의 조정간과 레버, 페달들을 마구 밟고 당겨댔다. 역시 미완성은 미완성이었을까.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사이, 조종석은 이제 입구가 너덜너덜해져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퀸튼이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거인의 몸체와 머리를 피해 조종석에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 나카무라는 이를 부드득 갈며 조종석 아래의 붉은 레버를 앞으로 힘껏 당겼다.

순간 거인의 몸 전체에서 발화점 이상의 온도를 가진 수증기가 팍 하고 뿜어져 나왔다. 거인 주변에서 깔짝대던 사람들은 싸그리 얼굴과 기도가 녹아내려 새된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퀸튼은 증기 기동장치로 재빨리 회피기동을 한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타보는 기구인지라, 완벽하게 땅에 안착하지는 못했고 불시착이라고 하면 봐줄만한 모습으로 땅에 나뒹굴고 말았다. 퀸튼이 지끈거리는 등허리를 펴며 일어서 ㄹ때, 콕핏에서 또 다른 증기 기동장치를 등에 멘 나카무라가 격납고 반대편 상층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퀸튼은 끙 소릴 내며 떨어진 증기 워해머를 들고 주변 병력들에게 소릴 질렀다.

"뭐하냐, 이 버러지들아, 당장 쫒아가지 않고?!"

그러나 나카무라가 날아 도망친 곳은 격납고 상층이었고, 계단은 아까부터 거인의 발길질에 박살난 지 오래였다. 퀸튼은 머뭇거리며 자기 눈치만 살피는 부하들을 보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직 등 뒤에 메인 증기 기동장치를 작동시키며 퀸튼이 일행들에게 툭 쏘아붙였다.

"너희들은 다시 되돌아가서 입구로 올라가라. 여기서부턴 혼자가보지. 무능한 것들..."

증기 기동장치는 격납고 상층으로 가까스로 올라갔을 때 박살나버렸다. 아까 공중에서 떨어졌을 때의 여파였다. 퀸튼은 덩달아 아래로 놓쳐버린 워해머를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동굴 내부벽을 깎아만든 듯한 통로를 지나 해치처럼 생긴 문을 열고 나갔다.

-----

차가운 바람과 눈이 얼굴앞으로 훅 불어왔다. 문에서 나가보니 아까 보초를 박살내고 들어갔던 동굴 입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곳이 입그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까 올라오라고 시킨 검은로브의 인원 몇몇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일본놈은 어딜 간거야?"

퀸튼이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그의 등 뒤에 쌓여있던 눈 무더기가 박살나며 굉음을 내는 물체가 덮쳐왔다. 퀸튼은 물체가 자신을 밟아 으깨기 일보 직전에 몸을 날려 피했다. 그 물체는 궤도가 달린 트랙터였다. 아니, 트랙터라고 하기엔 좀 심하게 빠른 탈것이었다. 퀸튼과 검은로브 일행들은 나카무라임이 자명한 인물이 트랙터인지 스포츠카인지 뭔지 모를 차량을 타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달려서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속도였기 때문이었다. 입구에 서있던 수호자들의 정식 멤버중 하나가 퀸튼에게 다가셨다.

"퀸튼, 보통 경차가 저 속도로 갈 수 있던가? 운전해본 지 너무 오래됬어..."

퀸튼은 손가락을 뚜둑거리고 풀며 대답했다.

"저건 심지어 증기기관이야, 에밀리아넨코. 기름이 아니라 물로 가는거라고."
"제길, 이런생각 할 때가 아닌데, 저 방향이면 남쪽이야."

퀸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신공작에게 빌린 저 버러지 놈들은 다시 들여보내서 저 시설을 그냥 가루만 남도록 파괴하게 시켜, 그리고 본부에선 너 말고 몇이나 왔었지?"
"둘 더 붙여왔었지. 알도와 생 피에르."
"두 놈만 데리고 나카무라를 쫒겠어. 뒤를 부탁한다."

에밀리아넨코는 퀸튼의 말에 뒤쪽 일행에게 이리오라 손짓 한 뒤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쓰며 말했다.

"수호의 의무를 다하기를."

퀸튼은 그에게 다가오는 알도와 생 피에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남쪽으로 가장 근처면 몰토스군. 거기서 잡으면 되겠어."

퀸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 다시 만나기만 하면 배에다가 제대로 한방 꽂아주지 노땅."
 

--- ---
 
우헿헿. 백업이다 백업. 모조리 백업이다!
 

Motivated by - 지금까지 본 스팀펑크 매체물, 진격의 거인, UFC, 퀸튼 잭슨(영화배우, UFC 선수), 기동전사 건담, 짤방 '이런싸움은 모 야메룽다!', 하노마크, 보그바드 4호

* 위 글은 이상한 석궁수와 모험왕, 공분주의자 선언, 죽은자들의 밤, 피와 명예의 파스타와 같은 세계관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행해서 저 작품들을 보시면 맥락 없는 이 글의 이해가 그나마 잘 갈 수 있습니다.
* 위 글은 '죽은자들의 밤'의 프리퀄이랄까, 전 이야기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카무라가 왜 몰토스에 도착하는지 여기서 나오지요.
* 피드백과 질문, 짜잘한 사소한 질문 모두 환영합니다. 이게 다 힘이 되거든요. 언제 답글 달지는 모르겠지만요. 허헣.
* 필사로 적은 글을 싸지방에서 옮기는 첫 글입니다... 암튼 피드백 많이 많이 해주세요!

Author

Lv.1 작가의집  2
0 (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