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파 시리즈] 존재증명 ②

로크네스 4 3,180
1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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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날이 됐어. 샤워기는 아직 수리되지 않았고 덕분에 몸을 씻는 게 두 배는 더 지루해졌어. 결국 시간 계산은 어긋났고 비엔나 봉봉이랑 만나기로 한 기숙사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약속시간이 이십 분이나 지나 있었지. 그리고 여기서 조금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약속장소에 비엔나 봉봉이 안 나와 있었던 거야.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란 적어도 내게는 굉장히 좋은 징조거든. 어쩌면 오늘 하루가 별로 지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그래서 거의 폴짝폴짝 뛰면서 비엔나 봉봉의 기숙사로 향했지. 문을 한 번, 두 번, 지루함의 경계선인 세 번 눌렀을 때에서야 드디어 반응이 오더라고. 문틈으로 빼꼼 내민 비엔나 봉봉의 얼굴은 완전 눈물범벅이었어.
“무슨 일이야?”
그렇게 물어봤는데 처음에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는 대답이 돌아왔고, 몇 번 더 물어본 다음에야 겨우 정황을 파악할 수가 있게 됐어.
“걔, 걔 있잖아, 어제 바뇌에서……,”
“하프? 어제 바뇌인지 어딘지에 성지 구경하러 갔었지. 그런데 무슨 일 있대?”
이렇게 묻는 내 얼굴에는 스스로도 느낄 수 있는 묘한 들뜸이 떠올라 있었겠지만, 비엔나 봉봉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아. 엉엉 울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 걸까. 어쨌든 비엔나 봉봉은 더듬더듬 말을 계속했고, 내용은 대략 이랬어.
“그, 어젯밤에 바뇌에서, 여자 몇 명이 실종됐다고 뉴스에 떠서, 혹시 몰라서 전화를 걸어보니까……,”
“안 받았어?”
“그래!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 거야! 어쩜 좋아! 막 어제 뉴스 보니까 길가에 차만 덩그러니 서 있고 운전하던 사람은 납치당했다는데, 누가 그런 건지도 모르고 그런다는 거야!”
“그래?”
“그렇다니까!”
“와아, 그거 굉장하네.”
이건 참, 말하고 나니까 실언이었지 뭐야. 감정을 너무 드러내면 안 됐는데. 어쨌든 그 말을 듣자마자 비엔나 봉봉의 얼굴이 엄청 무섭게 변하지 뭐야.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악마라도 보는 것처럼.
“굉장해? 이게 굉장하니, 푸파? 애가 납치당했어! 다른 사람들도 납치당했다고! 범죄자란 말이야! 죽을 지도 모르는데 넌 굉장하단 소리가 나와?”
글쎄, 이 이야기를 듣는 나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어. 부주의하게 말을 내뱉은 건 내 실수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정말로 굉장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그렇게 느끼고 싶어서 느낀 게 아닌데 그걸 가지고 왜 나한테 화를 내냐고.
“내가 이런 거 알고 있잖아, 비엔나 봉봉. 그것 때문에 치료도 받는데.”
“병 핑계 대지 마! 친구가 없어졌는데 걱정도 안 하는 건, 굉장하다고 하는 건, 병을 넘어서 그냥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이야!”
그러니까 그게 증상인데 어떡하라고! 나처럼 끔찍한 지루함 속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색색깔 세계에서 살아 온 사람이, 자기처럼 생각하지 못한다고 나를 욕하는 건 불공평해! 비합리적이야! 결국 날 이해해 줄 의지는 전혀 없다는 거네! 그래, 그렇게 문이나 쾅 닫고 들어가시지! 나에 대해서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낙제생한테 내가 신경이나 쓸 줄 알고!
ㅡ그러니까 결국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도 나쁜 징조였던 거야. 나는 납치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지루할 것 같고, 살아 돌아와도 지루할 거고, 돌아오지 못해도 지루하겠지. 지금은 그 무엇도 나를 즐겁게 해줄 수가 없어. 비엔나 봉봉이 저런 상태인데다가 싸우기까지 했으니 이젠 주말 내내 뭘 하면서 보낸담. 방이나 부술까. 젠장, 젠장, 정말 지루해. 정말 싫어.
 
그래도 희망은 잃지 않았어. 납치 사건이 지루하긴 해도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 이왕 약속도 취소된 김에 방에 틀어박혀서 노트북으로 사건 관련 정보나 검색해보면 맛집 투어 이상으로 재미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교수는 내가 범죄에 대해서 알아보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겠지만 그것까지 간섭할 방법은 없을 거고. 네덜란드어로 된 인터넷 신문은 내가 읽기에는 조금 까다로워서, 인터넷 사전의 도움을 조금 받았더니 어떻게든 내용은 이해할 수 있게 됐어. 그리고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납치 사건은 의외로 흥미로운 이벤트였지.
확인된 피해자는 하프를 포함해서 총 다섯 명. 어젯밤에 바뇌의 서로 다른 곳에서 실종됐는데, 텅 빈 차가 도로변에 버려져 있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대. 아마 범인은 차가 고장났으니까 고쳐 달라는 식으로 속여서 피해자의 차를 멈추게 한 뒤에 기습했을 거야. 현장에 남은 흔적을 보면 희생자들은 죽은 건 아니고, 아마 기절한 채로 범인의 차에 실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 문제는 도대체 목적이 뭔지가 불분명하다는 거. 한 번에 다섯 명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납치한다는 위험한 행위를 벌여서 얻는 이득이 뭘까? 인신매매나 성폭행이 목적이라면 한 명씩 납치하는 게 안전할 텐데 말이야. 성모발현 성지로만 유명했던 바뇌에 지금은 경찰이 쭉 깔렸지만, 근처가 온통 전나무 숲 아니면 인적 없는 들판이라서 주변 수색부터가 난제라는 것 같아. 글쎄, 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걸 찾는 동안은 아주 지루하지는 않았어. 오랜만의 진짜 즐거움에 식사까지 거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즐거움은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검색을 마치자마자 우울감이 다시 나를 덮쳤어. 그래, 비엔나 봉봉 때문이야. 아무도 날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납치당했는데, 걱정은커녕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지켜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이해해주겠어? 지금까지 딱 한 명이 전부였어. 딱 한 명. 그리고 그 사람은 너무 멀리 있어.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니까. 혼자 방에 있다가는 이 비참함에 짓눌려 죽을 것 같았고, 결국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 그나마 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늦은 밤에 방문해도 나를 내치지 않을 사람.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르투아 교수님.”
연구자란 참 고달픈 직업인 것 같아, 그렇지?
 
교수는 연구 열정이 너무 대단해서 아예 학교 안에서 살고 있는데, 덕분에 상담하고 싶을 때나 괴롭히고 싶을 때마다 언제든지 찾아갈 수가 있어. 특히나 교수에게 있어서 나는 굉장히 중요한 연구 대상이니까 내 방문을 거절할 이유가 없지. 물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긴 하지만, 그거야 학문 하는 사람의 숙명 아니겠어?
“이번 사건 때문에 온 건가요?”
역시 전문가야. 눈치가 빠르지. 나는 비엔나 봉봉하고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고, 교수는 딱 내가 예상했던 대답을 들려주었어. 너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니,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적응해가는 게 지금의 너에게는 중요하단다, 물론 약도 꾸준히 챙겨 먹고, 혹시라도 지루해서 견딜 수 없게 되거나 충동을 못 참게 되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뭐 그런 것들. 진부하고 지긋지긋하고 식상한 얘기지만, 결국 그게 내가 듣고 싶었던 얘기야. 교수랑 얘기하다 보면 내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고, 그러면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 들거든. 그래, 그 사람 이외의 다른 멍청이들한테서 이해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져서, 교수 냉장고에서 멋대로 스트링치즈 하나를 꺼내 씹으면서 멋대로 TV를 틀었어. 뉴스가 좀 궁금했거든.
“그런데 아직도 뉴스는 잘 못 알아들어요, 교수님.”
그러니까 멀뚱히 보고 있지 말고 통역이나 해 달란 말이야. 근데 교수의 표정이 좀 이상했어. 뭔가 끔찍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혼자 그런 표정 지으면 소외감 느껴지잖아요. 아니면 설마 너무 무시무시해서 나 같은 범죄적인 인간한테는 말할 수가 없나?”
아, 방금 고개 끄덕이려다 말았다. 이럴 땐 강하게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지. 조금 닦달했더니 교수는 뉴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줬어. 납치당한 사람 중 하나의 시체가 발견됐다나 봐. 하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시체가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발견됐다는 게 중요하지.
“이상한 모습이요?”
“심하게 훼손돼서 나무에 걸려 있었다는군요.”
“정확히 어떻게 훼손됐는데요?”
말 해, 말 하라고. 이런 거 좀 듣는다고 나빠지겠어? 이미 내 영혼은 엉망진창인데.
“십자가에 매단 것처럼 못으로 나무에 박혀서, 배에도 칼에 찔린 자국이 있다고…….”
 
어라?
 
이거 어쩐지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다섯 살 때 여동생한테 했던 짓하고 이상하게 비슷하지 않아? 물론 이번에는 불은 안 질렀지만, 전나무 숲을 다 태우면 자기도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야. 어라, 설마. 설마 범인도 나랑 비슷한 환상을 가지고 있나? 나랑 비슷한 부류일까?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어.
아까는 교수가 진짜 범죄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범죄자는 내가 전부니까.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이해받을 수가 없고, 고독하고, 지루하고, 비참하고 영원히 고통 받는 거지. 그런데 만일 나와 비슷한 정신상태를 가진 범죄자라면? 어쩌면 그런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나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교수는 말했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라고. 맞는 말이었어.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었던 거야. 그만 가 볼게요, 교수님. 그리고 언제나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네는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에 있었고, 이미 한참 늦은 밤에다가 흉흉한 분위기였지만 숙소 잡기는 쉬웠어. 동네 여관에 짐을 풀고, 마음 같아서는 바로 뛰어나가 범인을 찾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서두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물론 서두르지 않으면 경찰에게 범인을 빼앗길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순발력이 아니라 경찰보다 먼저 범인의 위치를 추리하는 능력이잖아? 추리, 그래, 추리. 잠깐 다른 말을 하자면 ‘추리’란 내게는 정말 그리운 단어야.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소중하고도 사랑스러운 내 영혼의 구원자, 나의 사랑스러운 피구리스 테르미눔, 그 애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추리능력 덕분이거든. 정말로 그리운 단어야.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그리운 일을 해야만 해. 여기 어디 있을지 모르는 다른 영혼의 구원자를 찾기 위해서. 영혼의 구원자가 말해 준 추리의 기본은 정보 수집이고, 나는 그에 충실하게 여관 주인을 통해서 정보를 조금 얻어낼 수 있었어.
납치 사건에 대해 캐묻는 꼬마 동양인 여자애치고는 가능한 한 수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다섯 건의 납치 모두 길가에서 이루어졌어. 범인이 차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일 거라고 여관 주인은 그러더라고.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어. 여기는 천주교 성지잖아? 성모 마리아가 직접 모습을 나타낸 곳이잖아? 그리고 피해자들은 전부 길가에서 납치됐잖아? 비교종교학 시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서 뭘 배웠더라?
아퀴나스는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하나고,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어. 자신의 책 『신학대전』에는 그러한 증명 중 다섯 가지가 실려 있지. 아퀴나스는 그 다섯 증명을 ‘다섯 가지 길’이라고 불렀어. 신의 존재라는 명백한 진실에 이르는 다섯 가지 길. 그리고 바뇌는 성모 마리아가 직접 모습을 보여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곳이고……, 그리고 그 전 수업! 엘리아데는 뭐라고 말했지?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의 중심에서 거주하고 싶어 한다! 집 중앙의 기둥이나 도시 중앙의 종교적 건축물처럼! 만일 범인도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사는 곳을 성스러운 공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성지에 있는 ‘다섯 가지 길’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마자 여관에 비치된 팸플릿의 지도를 펼쳐서, 여관 주인에게 정확한 납치 장소를 표시해 달라고 했어. 만일 내 추리가 맞았다면, 다섯 곳의 납치 장소를 따라 오각형을 그리면 그 중앙에 범인이 사는 곳이 있을 거야.
글쎄,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렸더라고.
다섯 납치 지점이 거의 정오각형을 그리고 있는 건 의미심장했지만, 그 중앙에 있는 건 바뇌 성지였어.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곳. 범인이 거기 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무래도 나는 내 사랑스러운 파니스 안젤리쿠스만큼 추리를 잘 하지는 못하나봐.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은 오만이니 지루하더라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수밖에. 세상에, 내가 ‘지루하더라도’라는 말을 쓰다니. 영혼의 구원자가 정말 필요하긴 필요한가봐. 안 그래?
 
다음날 여관에서 일어났더니 상황은 더 재미있어져 있었어. 그러니까 내 말은, 시체가 한 구 더 발견됐거든. 전나무에 못 박힌 채 배가 갈려서 내장이 파헤쳐져 있었대. 성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 때문에 온통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나는 그게 대단히 즐거웠지만,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만나고 싶었어. 얇은 흰색 외투를 흩날리면서 하루 종일 마을을 돌아다녔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성지에도 가 봤지. 12세 소녀 마리에트 베코가 성모 마리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곳. 나는 그 이야기를 믿지는 않지만 어쨌든 병을 치유한다는 샘물을 좀 마셔보긴 했어. 글쎄, 성모님의 기적은 지루함에는 아무 효과도 없더라.
엘리아데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내 추리는 무너졌지만, 어쨌든 이론 자체는 맞는 이야기 같았어. 여기 사람들은 성스러운 공간의 중심, 성모가 발현한 바로 그 곳에 산다는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 신앙심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나는 그런 게 굉장히 불편하고 지루했지만, 뭐 어쩌겠어. 남의 신앙은 존중해야지. 결국 하루 종일 돌아다닌 소득이라고는 굉장한 지루함과 효과 없는 축복뿐이지만 어쩌면 그것도 신의 뜻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밤이 깊었고, 나는 경찰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전나무 숲 근처를 돌아다니는 중이었어. 전나무에 매달린 이상한 열매 같은 걸 봤을 때.
“이거다!”
세 번째 시체! 보통 사람들은 시체를 보고 이렇게 반응하지 않겠지? 그것도 젊은 여자 시체를? 하지만 난 그렇게 해. 왜냐면 이건 그나마 재밌거든! 양 손에 못이 박힌 채 나무에 매달려서, 배가 갈라져 있고, 아니, 이건 갈라진 상처가 아니야. 찢어진 상처지! 게다가 다른 상처들도 그래. 주먹으로 맞은 게 분명한 멍이며 발길질에 의한 발자국도 있었고, 한쪽 허벅지에는 잇자국이 두 개가 나 있었는데 각기 다른 거였어. 목을 조른 손자국과 팔다리에 난 손자국도 확실히 구분 가능했고.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범인이 여러 명인 걸까? 아니면, 설마, 그래! 범인은 피해자들이 서로를 죽이게 만든 거야! 서로 다른 두 개의 잇자국은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 두 명이 낸 거라고! 경찰이 오기 전에 시체에서 몸을 피해야 했지만 내 가슴은 계속 뛰고 있었어. 이 사건은 정말이지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내 추리가 성공할 것 같았으니까.
 
지금까지 시체가 발견된 장소를 팸플릿에 표시했어. 총 세 군데지. 점이 세 개가 있으면 오각형을 그릴 수 있다는 건 상식이고. 왜 오각형을 그리느냐고? 그야 처음 했던 내 추리가 생각보다 많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범인은 아퀴나스의 신 존재증명, ‘다섯 가지 길’에 사로잡혀 있어. 그래서 서로 다른 다섯 군데의 길에서 사람을 납치했지. 그 다섯 군데는 무작위로 정한 게 아니라, 바뇌 성지를 중심으로 한 오각형 위에 있는 길이었어. 이로서 바뇌 성지는 범인에게 있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지. 다섯 가지의 존재증명을 통해서 실제로 신의 존재가 나타났던 성지로 이르게 되는 셈이니까.
피해자들의 시체를 전나무에 못 박아 둔 것은 분명한 기독교적 상징이지만, 범인의 상징 놀이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야. 범인은 아마 희생자들의 시체로 오각형을 그리려고 하고 있을 테니까. 희생자들이 납치된 다섯 지점이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길’을 의미한다면, 그 시체가 버려지는 다섯 지점은 범인 자신만의 ‘다섯 가지 길’인 거야. 첫 번째 오각형의 중심이 성지이듯이 두 번째 오각형의 중심도 성지가 되는 거지. 그리고 엘리아데가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성스러운 공간의 중심에서 거주하려고 해. 범인이 있는 곳을 알았어. 그리고 경찰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어.
전나무 사이를 달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시체의 이미지가 떠올랐어. 두려웠냐고? 전혀! 범인이 희생자들로 하여금 서로를 죽이게 만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고 있었지. 내가 보기엔 이것도 ‘다섯 가지 길’과 관련이 있어. 아퀴나스의 증명 중 첫째는 이런 내용이거든. 모든 사물은 운동한다, 그 운동은 운동을 하게 만드는 자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운동을 하게 만드는 자 역시 다른 무언가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소급해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모든 운동을 시작시키지만 그 자신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 ‘최초의 운동자’가 나온다, 이 존재가 신이다. 만일 범인이 자신을 성스러운 공간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명령을 통해 희생자들이 서로를 죽이게 하면서 ‘최초의 운동자’ 흉내를 내려고 한 거라면? 다시 말해서 이 모든 범행이 사실은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ㅡ그래, 사실은 조금 실망스러워. 단순히 망상에 빠진 정신병자였잖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고,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리는 게 시간을 덜 낭비하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혼자서 전나무 숲을 달리면서 범인의 은신처를 찾고 있는 건, 재밌어. 차라리 덜 지루해. 조금이나마. 그리고 또 하나, 아까 발견한 시체가 하프가 아니었거든. 하프는 재미없는 녀석이지만, 만일 내가 아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목표인 치료에 조금 더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빨리 치료를 끝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그러니까 전나무 숲 한복판에서 지하로 통하는 문을 발견했을 땐, 지체 없이 열어젖히는 게 좋겠지.
 
문 너머의 나무 계단은 꽤 깊이까지 이어졌어. 예전에는 목수들 작업장이나 휴게실로 쓰이던 곳인 모양이야. 그리고 막 깨달은 건데, 나 지금 흉악범의 은신처에 무기 하나도 없이 들어왔어. 몸이 조금 떨리면서 지루함이 조금 사라졌어. 좋은 징조야.
“거기 누구야!”
이건 좋은 징조이려나?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은데. 걸걸한 목소리와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져왔어.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건, 딱 봐도 불결하고 불안정해 보이지만 어쨌든 꼬맹이인 내가 격투로 이길 수는 없는 그런 남자. 자아, 이제 어떻게 한담. 상황이 재밌어졌는데, 이대로 죽어서 내 사랑을 보지 못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저 남자는 왜 표정이 저렇게 멍하고, 왜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지?
아하! 그야 저 사람이 광신도고 여기가 바뇌니까 그렇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먹히는 몇 안 되는 장소니까!
“도미네 데우스 렉스 첼레스티스, 데우스 빠테르 옴니포텐스.”
이 문장을 외워두길 잘 했어. 비엔나 봉봉이 들려준 무슨 클래식 미사곡 가사였거든. 하늘의 왕이신 주 하느님이여,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여. 마침 내가 하얀 외투를 걸치고 있어서, 저 불안정한 범인께서는 내가 성모 마리아의 현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 더 기대에 부응해줘야지. 아까 성지에서 분명히 성모가 말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나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왔습니다. 나를 믿으면 나 또한 당신을 믿을 것입니다.”
범인이 완전히 땅바닥에 엎어져서 엉엉 울기 시작했어. 좋아, 완전히 먹혀들었어. 얼마나 먹혀들었냐면, 내가 외투를 벗어주면서 이걸로 네 팔다리를 묶으라고 했더니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역시 신의 힘은 굉장한 것 같아. 안 그래?
 
뭐, 그렇게 됐어. 재밌는 얘긴 끝났어.
나는 근처를 지나가는 경찰을 불렀고(경찰한테는 산책 중이었다고 둘러댔어), 경찰에 의해서 하프는 무사히 구조됐어. 그렇게 무사히는 아니었지. 희생자 중 세 명을 자기 손으로 상처 입히고, 경찰이 발견했을 땐 맛이 가서 네 번째 희생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거든. 그래도 신체적인 피해는 없었어.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면을 볼 줄 알아야 해.
그리고 대학에 돌아왔더니 비엔나 봉봉이, 글쎄 비엔나 봉봉이 막 울면서 나한테 안기는 거 있지? 미안해 죽겠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바보같이 화만 내고, 아무것도 못 해 주면서, 어쩌고 저쩌고. 솔직히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기분은 조금 좋더라. 나는 사람이 우는 걸 보는 게 좋거든.
결국 이번에도 나를 이해해 준 사람은 없었어. 내가 단지 즐거움을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었거든. 교수 정도나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챘을까. 결국 나는 외롭고 우울할 운명이지. 사이코 범죄자도, 오래도록 같이 지낸 유학생도, 나를 연구하는 교수도 결국에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번 일을 계기로 아주 작은 희망은 하나쯤 품을 수 있게 됐어. 그게 뭔지 알아?
 
남이 저지르는 범죄를 뒤쫓는 것도 생각보다 훨씬 덜 지루할 수 있다는 거.
 
아마 앞으로도 계속 하게 되지 않을까, 조금 중독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이것보다 재미있는 건 당분간은 없을 거 같거든. 이 잿빛 시간과 잿빛 공간에서 나는 내게 가장 성스러웠던 시간으로, 내 사랑이 있는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심심풀이 거리는 열심히 찾아다녀야 되지 않겠어? 안 그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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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의 이론은 흥미로웠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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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레나
재밌어요. 그나저나 왠지 푸파랑 김말이는 함께 오래 있지는 못할 운명일것같네요
로크네스
푸파가 그 말을 들으면 화낼 겁니다. 과연 어떻게 될까? 그건 저도 모르죠.
이나바히메코
으음......조금 빽빽해서 보기가 힘들지만, 재미있군요!
로크네스
인터넷에 올려두면 좀 빽빽해지더라고요. 사이트 좌우가 넓은 편이라서 더 그런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