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책상머리에서 아무런 영양가 없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거나, 새로운 세계가 갑자기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떡하니 보인다거나 하는 상상을 하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실제로 겪는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갑자기 원하지도 않았던 장소에 떨어져서, 원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만나고, 원하지도 않았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뜻밖의 행운을 건지기도 한다. 내가 그런 케이스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난 무엇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만났으니까.
엔시드, 에반, 잔, 데리온, 버밀리온, 루치아, 엔펠리즈, 아리안느. 이제는 오래된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그들이 이미 한줌의 흙으로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지금도 생생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존재, 자신의 빛으로 항상 사람들을 이끌던 엔시드. 이 이야기는 그 친구와 나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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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여전히 어렵다니까.”
청년은 이마의 땀을 슥 닦곤 주저앉았다. 멋대로 빠져나갔던 양 한 마리도 어느새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스레 풀을 뜯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될 듯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훌륭한 도우미도 있으니 당장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양들이 또다시 어디로 빠져나가지 않을까 도우미가 이리저리 뛰며 발뒤꿈치를 노리는 모습을 보는 청년의 입가에선 절로 웃음이 피어나왔다.
이렇게 일을 잠시 도우미에게 맡기고 쉬고 있으면 집을 등지고 있는 산맥의 골짜기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은 청년이 앉은 곳을 부드럽게 쓸어주고선 그의 머리칼을 흩뜨려놓았다. 혹시나 모자가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재빨리 머리 위로 한 팔을 올려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맘때쯤 불어오는 바람은 변덕스런 어린아이처럼 산들산들 불다가도 갑자기 돌풍이 되어 몰아치곤 했다. 청년은 바람에게 들으라는 듯 새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난은 좋은데 모자까지 뺏어가진 말아달라고.”
밀짚모자 아래로 보이는 청년의 얼굴은 사실 청년으로 보기엔 앳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어려보이는 것도 아닌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연한 하늘색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검푸른 눈동자는 크고 깊으면서도 맑았고, 반짝거렸다. 눈매 끝이 약간 올라갔지만 영리하게 보일망정 사나운 느낌을 주진 않았다. 콧날은 오뚝했고 입술은 조금 얇았지만 맵시가 있었다. 약간의 볼 살이 조각을 깎아 만든 듯한 턱에 부드러운 선을 주었다. 일을 많이 한 거친 손과는 달리 피부는 매끄러웠다. 한 번 보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다시 돌아보게 될, 그런 굉장한 미모였다. 항상 모자로 가리고 다니지 않았다면 눈에 더 띄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얼핏 봐서는 소년으로밖에 안 보이는 청년의 나이가 실제로는 30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양들이 배를 채운 것을 확인한 후,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먼저 알아챈 코기(corgi) 품종의 도우미가 양들의 뒤꿈치를 물기 시작했다. 양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청년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먼발치서 올라오는 사람 형체가 보였다. 고개를 약간 들어 살피니 청년이 예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씨익 웃으며 청년은 상대를 반겼다.
“잔 아냐? 수업은 벌써 끝난 거야?”
“그래.”
짤막하게 대답하는 잔의 말투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아는 청년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검은 복면을 쓰고 있어 눈만 드러나 있지만 그 눈만으로도 미형의 얼굴을 상상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반쯤 묶은 검고 긴 머리칼, 시꺼먼 망토와 전체적으로 새카만 복장이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가까이하기엔 어려운 인상을 풍겼다. 잔은 눈대중으로만 봐도 청년보다 10cm는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언제나처럼 무리한 어깨동무를 시도했다. 다행히 잔이 약간 굽혀준 덕에 얼추 높이가 비슷하게 맞춰졌다.
“나 만나러 굳이 안 올라와도 되는데.”
“식사나 준비해. 밥 시간 지났다. 엔시드.”
“우와. 내가 네 하인이냐? 사람 부리는 것좀 봐라.”
“……네가 부리는 거겠지.”
잔이 엔시드의 농담을 한 마디로 일축했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말수도 적고 뭘 생각하는지 모를, 첫인상 그대로의 사람이지만 그 안에 자신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십 년 넘게 같이 사는 동안 잔은 엔시드를 마중나가는 것을 빼 먹은 적이 없었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부산한 거 보니 그 여자가 또 오는 모양이군.”
“왜? 부럽냐?”
이죽대는 엔시드를 뒤로하고 잔은 말없이 집안을 치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내 둘이 사는 집이란 청소도 자주 하지 않고 빨래도 아무데나 던져 놓다 보니 퀴퀴한 냄새가 풍기기 쉬운 곳이기 때문에 일찍 환기를 시켜서 냄새를 빼고 청소를 해 두는 편이 좋았다. 사실 청년 쪽은 집안일을 꽤 잘하는 편이었지만 같이 사는 사람은 그다지 깔끔한 성격은 못 되었다. 양떼에게 풀을 먹이느라 멀리 다녀올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항상 집안이 어지럽혀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항상 그녀가 올 때가 되면 이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축사의 분뇨도 밭에다 처리하고 그 위로 흙을 잘 덮어서 최대한 냄새가 나가지 않도록 했더니 그럭저럭 안이든 바깥이든 깔끔해진 집이 보였다. 지붕은 최근에 손을 봤던 터라 바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메에- 축사에서 우는 양들의 여물통에 건초를 집어 주어 달래고선 청년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럼 청소는 다 됐고, 이제 파티 준비만 하면 되겠지? 어느 녀석을 잡을까?”
“아가씨! 안 됩니다요! 주인어른이 아시면 경을 치십니다요!”
시얀 지방에서 가장 큰 성, 가문의 이름을 딴 성인 글로스티어 성에서 한 마부와 말에 탄 여성이 실랑이 중이었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성의 옷은 아무리 봐도 귀족가의 하녀가 입을 법한 복장이었지만 옷을 입은 여성의 얼굴에선 옷만으로 감출 수 없는 귀티가 흐른다는 점이었다. 모자로 가려져 있지만 새하얀 피부에선 고생의 흔적이 엿보이지 않았다. 거기다가 끝이 제멋대로 말린 머리칼은 일반적인 그 나이 대의 여성과 달리 목 언저리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의 밝은 금발이 햇빛에 생기 있게 반짝였다.
“괜찮아. 잠깐이면 된다니까? 어차피 아버님과 오라버니는 사냥 나가셨는걸. 저녁 먹기 전에 오시지도 않을 걸?”
“그렇지만 이렇게 매번 그러시다 들키면…….”
“하여간,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한숨을 내쉬고 여성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마부가 앗, 하는 사이 말과 여성은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에 인 흙먼지만 방금 전에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부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성주의 단 하나뿐인 외동딸, 아스티라 글로스티어는 그 나이 대의 귀족 여성들과 달랐다. 학문이랑은 담을 쌓고, 사교계에서 좋은 신랑감을 만나 결혼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으며, 취미로는 집 안에서 그저 자수나 놓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일반적인 귀족 영애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아스티라는 다른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만 가꾸고 있을 시간에 책을 더 읽었고, 말을 탔다. 특히 말 타는 솜씨는 웬만한 남성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치마를 살짝 걷어올리고 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말 좀 탔다고 하는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
“꼭 말과 한 몸이 된 것 같구먼.”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스티라는 빙긋 웃기만 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배운 승마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유용한 기술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이가 기다린다. 아마 지금쯤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아스티라가 평소보다 말 옆구리를 더 세게 걷어찬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은 얼마나 즐거운 하루가 될까? 아스티라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가 사는 언덕이 눈 앞에 들어왔다.
장르는 판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