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스포일러] 스펙 옵스: 더 라인

넬리카란 5 7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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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서사의 가능성

'두바이'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높디높은 고층빌딩? 부르즈 할리파? 사막? 아랍 에미리트? 어떤 게임 속 세계에서는 정체불명의 모래폭풍을 맞아 방사능 낙진 대신 모래가 잔뜩 깔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도시를 구하고자 미군이 도시로 들어가게 되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두바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게 됩니다. 바로 그 때, 두바이에 들어간 미군 부대의 사령관으로부터 무전이 오고, 미군은 그 무전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 델타 포스 대원 3명을 두바이로 보내게 됩니다. 이게 오늘 다룰 게임, 스펙 옵스: 더 라인의 개략적인 스토리입니다.

 게임의 분위기 연출은 매우 훌륭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틱한 분위기를 잘 살려주는 모래에 파묻힌 건물들과 차량, 말라비틀어진 시체, 모래폭풍이 불어올 때의 효과 등.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호러'연출 또한 인상적이죠. 그리고 이 광기를 한껏 더 살려주는 유명한 락 음악들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게임 자체는 그렇게 뛰어난 점이나 떨어지는 점이 없는 평범한 슈팅 게임이지만, 이 게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스토리'입니다.
 
 스펙 옵스: 더 라인(이하 스펙 옵스)는 상당히 이질적인 게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발매되어왔던 '영웅주의'적 FPS 와는 지향점부터가 다르다고 할수 있겠네요. (이 리뷰는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다고 평가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저도 후자의 작품들을 꽤 즐겼거든요.) 요즘엔 좀 경향이 달라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게임의 주인공들은- 특히 1인칭 시점의- 플레이어들의 몰입을 쉽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가 없거나 생김새가 없었죠. 플레이에 빠져들게 되면 게임 속 주인공이 곧 플레이어 자신이란 느낌을 받으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펙 옵스는 TPS, 3인칭 슈팅 장르입니다. 당연히 게임의 주인공이자 플레이어인 마틴 워커 대위는 게임 내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자신의 모습을 플레이어들에게 공개하고 있지요. 오, 혹시 그러면 게임에 몰입하기가 더 어려워지는걸까요? 그건 아니겠죠. 당연히 스펙 옵스의 플레이어들 또한 플레이 과정에서 점점 주인공인 워커 대위와 자신들을 동일시해나가게 됩니다. 다만 그 방향이 조금 달라지기는 하지만요.

 위에서 언급했던 '영웅주의'적 FPS 작품들이, 게임 속 주인공과 플레이어의 일치된 시점으로 게임 내의 여러 과정들을 겪으면서 -일반적으로는 악당을 쳐부수고 세계를 구하는- 승리의 짜릿함과 뿌듯함과 만족감을 통해서 게임에 대한 몰입을 추구한다면 스펙 옵스는 플레이어들에게 죄책감을 주는 것에 좀 더 주력하고 있습니다. 슈팅게임에서 죄책감이라니, 들고있는 라이플이 멋져보여서 쓱싹한 적군이 사실은 부모형제가 있고 먹여살릴 부인과 자식들이 있었는데 플레이어가 그를 죽임으로써 다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면서 귀에 대놓고 소리를 지르는 걸수도 있겠지만 스펙 옵스는 그것보다 좀 더 교활합니다. 

 때마침 그 '죄책감'을 투사할 악당이 짠하고 등장하거든요. 게임이, 플레이어들에게 모래로 쌓은 탑같은 명분을 계속 제공하는 겁니다. "내가 나쁜 짓을 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거죠. 일반적인 '슈팅 게임'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에 찝찝함을 느끼는 플레이어가 일단 게임이 제공하는 그 미끼를 덥썩 문 순간부터, 플레이어들은 눈 앞에 3인칭으로 보이는 워커 대위와 자신을 더 이상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게임이란 기분좋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자신의 '선택'으로 즐기는 여흥거리지 않습니까. 게임 속의 워커 대위가 무너지면, 현실의 플레이어들도 무너... 지지는 않겠지만 뭐 씹은 듯한 기분이나 망치로 머리를 후려친 듯한 충격을 곱씹게 되기 때문이죠. 기분 나쁘자고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설마 없겠죠?

 점점 게임이 진행되가면서 게임의 분위기는 딥다크스러워지고, 유머 넘치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모래폭풍에 실려서 저 너머로 날아가버린지 오래입니다. 슬슬 게임의 로딩창에서도 플레이어를 대놓고 비웃기 시작하지요. "Do you feel like a hero yet?" 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놓겠다면서 아득바득 결말부에 도착한 플레이어와 워커 대위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는 영화 홍보 프로그램스럽지만 여기까지 다루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게임의 백미중의 백미거든요.

 사실 스펙 옵스의 스토리는 그 동안 여러 매체에서 많이 다루어져 온 그런 방식의 스토리입니다. 게임 자체 또한 <지옥의 묵시록>에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스펙 옵스가 플레이어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후벼팔수 있는 이유는 바로 게임이라는 장르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나 책과 같은 일방향 매체와 달리 게임은 자신의 조작이, 선택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쌍방향 매체입니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에서 초반부 공항 학살 미션이 그렇게 큰 파장을 몰고 온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컷씬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 내 세계에 간섭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을 쏴죽이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여기에 제기할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제로  펑츄에이션'에서 다룬 것처럼, 슈팅 게임에서 이런 전쟁의 참상을 논하는건 위선적인 것일까요? 게임이 플레이어들한테 총을 쥐어주고 쏘라고 하고서는, "이 악당!"하고 울부짖는 것으로 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나요?(선택으로 넘어갈수 있는 부분도 몇 있지만 대부분은 강제 진행 구간입니다.) 사실 저도 이 문제는 해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스펙 옵스는 훌륭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서사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보여 주었죠. 버킷 리스트에 빈 공간이 있으시다면 스펙 옵스를 써 넣으셔도 괜찮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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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 넬리카란  3
308 (30.8%)

게으름뱅이가 세상을 구한다.

5 Comments
Mr.A  
- 극-강 스포일러 -

마지막 반전은 괜찮았고 스토리도 좋았지만 게임으로서의 재미는 확실히 좀 미묘했어요. 명령 시스템이라든가, 엄폐 시스템이라든가. 고증이나 디테일 면에서 거슬리는 부분도 없잖아 있고. ~~CPR 하는 거 봐라.~~

스토리도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더군요. 어차피 다 강제 진행인데. 47명의 민간인 사상자 발생, 루고의 죽음 같은 걸 이용하려 했다면, 반대의 길도 제시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Linear한 진행을 하게 해봤자 플레이어가 전쟁의 참혹함을 얼마나 느낄까 하고 생각해요. 백린탄에 불탄 민간인의 시체를 보고? 목이 매달려 발버둥치는 루고를 보고? Bullshit. 이건 어차피 모니터 - 혹은 TV 내의 가공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걸 플레이어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오롯이 플레이어의 선택으로 모든 게 정해지도록 했어야지. 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자유도는 코딱지만한 주제에,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랍시고 다 니가 한 짓이야~ 요러고 앉았으니.

심지어 백린탄 사용 구간은 적이 무한리젠에 험비를 처리할 방법이 없다지요? 루고야 뭐 스크립트대로 진행되는 거니 당연한 거고. 백린탄을 쓰되 마지막 험비는 처리를 못하고 넘기던가 아님 맨몸으로 때우든가 하면 민간인이 살게 했더라면. 뭐 IF에 불과한 이야기이긴 하죠.

그리고 솔직히 별 감흥도 멘붕도 없었어요. 백린탄에 실수로 타죽은 민간인 47명. 현실에선 그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 일어나니까. 이런 걸로 멘붕했을 거라면 진작에 멘붕하고도 남았죠. ~~하지만 수어사이들의 난이도는 날 멘붕시키기에 충분했지.~~

덤. 지금 한글 패치 제거했드니 안돼서 재설치중입니다. 스팀 클라우드 때문에 도전과제 처음부터 다시 해야한다는 말도 있든데… 해봐야 알겠죠.
넬리카란  
무슨 발버둥을 치든 스토리가 고정인게 좀 안타까웠죠. 백린탄 시퀀스는 역시 큰 파장을 불러왔던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의 건쉽미션의 안티테제가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이 게임의 스토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현실보다 더 끔찍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게임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전쟁의 끔찍한 이면에 대해서 아주 대놓고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직선 구성이란게 못내 아쉽긴 해요.
Mr.A  
~~그래서 부제가 The Line인가 봅니다.~~
Tongireth  
저도 이 게임에 대한 인상이, 아니 난 게임에서 하란 대로 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정도의 느낌밖에는 못 받았습니다. 이 게임의 의의는 그냥 이런 것도 있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넬리카란  
얏지 왈 "계속 튀어나오는 미군 탈영병들을 학살하지 않으면 진행하지 못하게 만든 건 너잖아, 스펙 옵스!"
강제진행이 많다는게 아쉬웠습니다. 정말로 선택에 따라 내용이 휙휙 바뀌웠으면 지금보다 더 깊게 공감할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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