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 여행기
2015년 8월 20일 목요일, 저는 전주로 갔습니다. 전주는 예전부터 가고 싶다고 벼르던 곳 중 하나였죠. 신병주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거기의 한옥마을과 음식을 듣고,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을 듣고 가려고 벼르다가 드디어 가게 되었습니다. 단 이틀 이상 머무를 여력이 없어서 단기간으로 끝내기로 했죠.
그래서 전날 밤을 세고 용산역으로 갔습니다.
용산역에서 표를 잃어버려서 부랴부랴 역 직원에게 제 카드번호를 이용해 재발급 받는 해프닝, 그리고 바나나 자판기를 뽑는데 바나나가 운좋게 두개 뽑혀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원 내고 바나나 두개를 먹어 아침으로 때웠죠.
용산역에서 전주역까지는 대략 1시간 40분 정도 걸립니다. ktx 기준이죠.
전주역이 맞이합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건축물입니다. 조선 왕조의 뿌리, 최소 천년은 넘은 도시의 전통을 잘 담았어요.
전주역에서 나오자마자 관광안내소가 보입니다. 저는 한옥마을로 갑니다. 한옥마을로 가기 위해 저는 72번 버스를 탔죠.
한 30분 정도 달리니 도착.
전동성당이 멀리 보이고,
옆에는 풍남문도 있군요.
일단 전동성당으로 갑니다.
가는 길에 파는 전주 모주. 막걸리에 대추, 계피 등을 함께 끓인 음료수입니다, 알콜은 한 1프로 정도 들어서 차를 탈 게 아니면 음료수로 마셔도 무방할 정도죠. 작은 건 3000원.
전동성당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위키에서 퍼옵니다.
다음은 경기전으로
가기 전에 유명한 맛집 중 하나인 촌놈의 손맛에서 경단꼬치를 먹고
들어갑니다.
조선을 세운 영웅이자 최고의 명장 다운 모습은 그림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군요.
경기전에 대한 설명도 위키에서 퍼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 경기전을 제외한 네곳은 모두 소실되고 정유재란때 이 경기전마저 소실되었다. 그 후 광해군때 경기전만 복원했다.
이 절묘한 위치선정은 두 건물 사이를 지나는 태조로가 조선시대까지는 전주부의 남쪽 성벽 자리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천주교 선교가 자유화되어, 전주지역 신자들이 점차 산골에서 내려오고 수도 늘어나면서 전주부내에 성당을 짓기 위해 성벽에 붙어있는 구례 영저리[1] 저택을 사들여 임시 성당 겸 성당 신축 부지로 삼았는데, 착공 직전인 1908년 통감부가 전주성을 헐어버리면서 성당 부지와 경기전이 장애물 없이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이제 한옥마을 투어 시작.
한옥마을은 먹거리의 천국입니다.
이 곳은 이른 아침인데도 가게는 사람들로 꽉 찼네요. 왜 그런가 해서 먹어보니 알겠습니다. 속이 실하게 차있어요. 그리고 속칭 창렬하다같이 뭔가 사기나 꼼수를 쓰지 않고 실하고 기본기를 지킨 만두라서 맛있어요. 엄청.
꽈배기. 사실 특별할 건 없는데 역시 속임수 없이 정직하게 좋은 재료로 만들어서 맛있습니다.
중간에 600년된 은행나무 보러 가는길에 있는 정자.
명물 중 하나죠. 600년 된 은행나무.
이제는 오목대로 올라가 봅니다.
올라가는 길은 힘들수 있지만 이 한옥마을 풍경을 공중에서 볼 수 있으니 올라갈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내려가서 이제는 풍남문 쪽으로 내려갑니다.
슬슬 비가 오는군요.
벗어나기 전에 한옥마을 설명 올리죠.
을사조약(1905년)이후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풍남문입니다.
풍남문 근처는 남부시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