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에서 수작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

양양 12 1768

제가 바라보는 "현대물"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대물은 사회 시스템과 인식이 현실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물건이라고 보고,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명백히 대중이 초능력의 존재를 인지함은 물론이거니와 사회가 이에 발맞춰 대응하고 있는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물건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물에서는 사회가 인지하지 못한 초능력을 아주 극히 일부의 인원만이 이용합니다. 이 때문에 주인공을 포함하여 사회의 시스템이 주는 제약을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습니다. 존재의 유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데 여기에 대응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지요. 말하자면 남 몰래 쓰는 치트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물들은 치트를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가지요.
이처럼 치트를 이용하여 쓴 물건이 제대로 된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냐면 당연히 아닐 겁니다. 껏해봐야 문장을 조금 다듬은 투명드래곤 정도면 다행입니다. 게다가 사회의 시스템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권리는 챙길대로 다 챙기고 의무는 거의 다 회피하는 식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철저하게 대리만족만을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1. 현대물의 태생적인 한계 - 핍진성 부여에 대한 제약
현대물은 어찌되었든 주인공이 있는 배경은 반드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를게 없습니다. 때문에 작품의 핍진성과 개연성은 반드시 우리의 현실에서 따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역사를 포함하여 사회의 인식, 그리고 이에 발맞춰 인류가 구축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지혜를 갖춘데다가 높은 수준의 글쓰기 실력까지 골고루 갖춘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드물것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가령 어떤 주인공이 초능력을 이용하여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고자 한다면 최소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물론이거니와 "전자금융거래법" 운운할 만큼의 지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식수준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어떤 소설인지 기억이 애매한데 주가가 10%이상 하락했음에도 서킷브레이커는 고사하고 사이드카가 발동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주식시장이 돌아가는 묘사가 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개념들이 상식선의 문제라는 걸 생각하면 비판이 충분히 될 수 밖에 없지요. 세계관의 핍진성의 근간이 현실인데, 현실의 상식을 무시했으니까 이건 필연입니다.
현대물에서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없이 쓰게되면 이렇게 막장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적으로 판타지나 무협의 경우는 핍진성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재창조 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은 오롯이 작가의 구상으로 탄생하였기에 작가는 독자들과 암묵적 합의하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떤 판타지 세계에선 인류를 단 한방에 멸망시킬 수 있는 10서클 마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비평을 할 때 이 부분을 "핍진성의 부재"라 깔 수 없습니다. 작가가 설정집을 내거나 작품 내에서 설명이 동반되면 그것을 독자가 보고 판단하여 세계관의 완성도를 결정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의 부분들은 설명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을 하면 충분하지요. 드래곤볼의 주인공들이 그 연약한(?) 야무치조차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 누구도 드래곤볼의 이야기가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또한 아무도 대통령이 개(...)라고 조산명에게 항의하지도 않고요. 엄밀히 말하자면 드래곤볼의 세계관도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핍진성의 대부분을 현실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현대물은 현실과 명백히 다르게 가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뿐더러 설득력이 부족한 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뢰가 될 가능성이 높지요. "현대"물 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이미 아웃인 겁니다. M16으로 총을 박격포처럼 쏴 포트리스 빽샷같은 궤도로 암살하는 밀리터리물과 비교할 수 있을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2. 조폭물과 연계된 상황
판타지나 무협에 기반한 소설들은 주인공의 무력을 뽐내는 장면이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무력을 가진 조직이 가진 불의에 맞서 싸우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판타지, 무협에 비해 현대사회에서 국가를 제외한 조직이 물리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영화 시카리오가 보여주듯이 멕시코, 콜롬비아 등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치안이 안정되어 있으며 일정 이상의 힘을 갖고 행사하는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행사한다면 이건 소말리아나 북두의 권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무력을 행사하는 단체는 껏해봐야 조폭 정도입니다. 조폭은 당연히 인간 말종들인데다가 의리고 나발이고 없는, 그야말로 사회에 필요가 없는(사필없) 존재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적은 늘 조폭이거나 조폭과 연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잘 알다시피 현실의 조폭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매직 미사일을 기관총처럼 쓰고, 총알을 피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미사일이 날아와도 쉴드로 막는 주인공에게 조폭은 그리 대단한 벽이 아닙니다. 조폭 1000명이 모두 무기를 든 UFC선수들이라고 가정해도 게임이 안 될 판국인데 이렇게 양학하는 내용 가지고는 딱히 재미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제대로 된 설정 없이 조폭이 주인공에게 위협을 가하는 건 또 현실반영이 제대로 안 되기에 비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조폭이 UFC선수를 넘어 개개인이 무림문파의 고수라고 설정하면 이건 다른 이유로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래나저래나 난감할 따름입니다.

 

3. 미인은 어째 죄다 연예계 종사
주인공은 어째서인지 연예계와 늘 엮입니다. 아름답다고 해서 죄다 연예계에서 종사하는 건 아닐텐데요(...). 물론 연예인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상당 부분이 연예계에서 종사하는 히로인은 꼭 있습니다. 마치 무협에서 히로인이 꼭 무림문파의 후기지수인 것 처럼요(...). 그렇다고 연예계에 대한 이해가 따르냐고 묻는다면... 과연 그럴진 좀 의문입니다. 거기에 연예계를 다루면 반드시 위의 조폭들과 연계하여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게 진짜로 현 21세기의 연예계를 반영하는 건지는 좀 의문입니다. 오히려 90년대 노루표 쌈마이 소설들(ex: 人시리즈)처럼 유명 술집 마담과의 썸이 더 현실성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저 90년대 쌈마이 소설도 지나친 조폭의 미화와 더불어 현실성 없다고 까였던 마당에 대체로 연예계와의 지나친 연계는 더 저질이라는 이야기지요.

 

4. 전국에서 순위권에 드는 금수저와 전국 싸움신의 공생
주인공이 고등학생인 경우, 그 학교는 반드시 쾌산고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럭키짱의 무대 말이지요. 전국에서 잘 사는 학생이 꼭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모의수능결과에서 전국 순위권에 드는 학생, 그리고 조폭과도 닿아있는 명지관같은 놈이 꼭 나옵니다. 이 정도 배경설명 했으면 눈치채셨겠지만... 이쯤되면 사이오닉 스톰 쓰는 강건마가 연예인 여자친구 만나 조폭과 싸우는 럭키짱 소설이 됩니다. 지금 네이버 평점을 보시면 알겠지만 럭키짱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처참함을 감히 말로 표현 못할 정돕니다. 이걸 소설로 만들었으니 내용이 껏해봐야 럭키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주 막장으로 가면 드라군까지 출동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설정이라 평할 수 있을 겁니다. 고위기사의 사이오닉 스톰과 맞먹는 마법은 물론이고 암흑기사의 공격력을 갖춘 주인공도 있는데 드라군 출동하는 것 쯤이야... 이런 물건이 지뢰가 아닐 가능성은 김치워리어가 슈렉을 누를 확률과 엇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나름의 핍진성을 부여하겠답시고 별별 설정을 내려하지만,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무협이나 판타지와는 달리 현대물의 역사는 상당히 짧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되어 온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위에서 설명했지만 핍진성을 현실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한계를 깨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DxD라든가 갓오하 같은 물건을 낸다면 이건 이미 현대물이 아닙니다. 위에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지만 이건 능력자 배틀물 같은 물건이 되는 겁니다. 현대물이 아닌 물건을 "좋은 현대물"로 포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결론을 내리자면 현대물은 재미와 평가에 있어서 그리 좋지 않은 장르라고 여겨집니다. 이건... 그야말로 답이 없습니다. 캐리어 가도 안될 물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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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paro1923  
애초에 세간에는 전자가 범람하고 있어서 다 같이 '현대 판타지'란 카테고리로 묶여 있지만요...

현대가 배경이라서 생긴 문제라기보단, 다른 장르에서도 으레 그렇듯이 창작하는 사람의 수준미달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자기 인식이 좁으니 그 창작하는 내용도 천편일률이고, 덤으로 더 낫게 그려내려는 노력도 없이 말초적인 대리만족만 찍어내는 게 원래 그런 작품의 목적이다 보니...
양양  
기실 어떤 장르든 많은 작가들의 참여로 다듬어져야 괜찮은 장르로써 정립이 가능한데... 이쪽에선 많은 작가가 참여한다손 치더라도 수준이하의 작가들이 압도적인 다수인데다가 선구자로 칭할 만큼 뛰어난 소수도 없다보니 그저그런 장르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위와 같은 문제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 바닥의 선구자가 허영만이 아니라 김화백인데다가 그 이후에 나오는 작가들도 김화백을 따라가는 느낌이라고 해야할지...
음...그래도 오리지널 럭키짱은 돌럭에 비하면 평이  좋지않았나요...(뭐, 그래봤자 그럭저럭한 학원폭력물이란건 부정못하겠지만요...) 그리고 생각해봤을때 이런물관련으로 핍진성이니 현실성같은걸 독자나 작가에게 얘기해봤자 답은 한가지일거 같군요 '소설에 뭐그리 진지한거에요! 빼애애액' 뭐, 생각해보면 태양의후예나 아니면 천편일륜적인 아침드라마에도 비슷한 비판을 적용할수있을거 같군요(...)
양양  
사실 그건 답이라고 말하기 좀 그렇습니다. 소설에 뭐 그리 진지한 거냐고 묻는거 자체가 사실 비평의 한계를 극단적으로 정해버리는 어리석은 일이거든요.
초창기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을 보면 제가 바라본 시각을 기준으로 분류했을 때 전자에 속하는 물건인 경우였지만, 여러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마블을 더 깊게 파보면 아예 완전히 사회가 여기에 발맞춰 행동하는 평행세계까지 고려하면서 현대물은 물론이고 현대 판타지까지 다양한 운신의 폭을 넓히는데 성공했지요.
게다가 주 독자층이 어리다고 이런걸 기대하지 말라는 의견도 상당히 무책임한게... 동화만 봐도 어린이들이 읽는 거지만 비평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더러 판타지보다 더 깊은 고찰을 통해 까입니다. 제가 보는 시각으로 장르문학이 발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 비평의 자유와 인식에 대해 덜 발달했다는 사실을 꼽고 싶네요.
Lester  
저같은 경우엔 말씀하신 현실물 중 전자(초능력 없는 현대물)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 쓰고 있기는 한데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써야 할 지 모를 지경이네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배경을 '미국'으로 잡아뒀기 때문입니다. 흔히 글을 쓰면 대부분 익숙한 우리나라나 아시아계 국가를 배경으로 쓰기 마련인데, 말씀하셨듯이 대부분 치안이 좋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고가 터지기 힘들죠(또 사고가 터졌다 해도 후폭풍이 상당하고). 반면 미국은 GTA부터 시작해서 오만가지 사건이 발생해도 '미국이니까'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습니다. 또 인종의 용광로라 불릴 만큼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어도 큰 무리가 생기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고요.

그렇기에 저는 현대물을 쓰면 거의 항상 배경을 미국으로 잡습니다. 뭐 필요하다면 가끔 아시아나 다른 국가도 다뤄보겠지만, 짤막하게 다루고 끝날 것 같네요. 여러가지 의미로 '재미가 없으니까'요.

설정위키가 개통되면 여러가지 썰을 풀어볼 생각입니다.
양양  
한국 독자에게 미국의 경우를 그린다면 어쩌면 투란도트 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전 아직 미국이란 나라를 잘 알지 못해서 제 개인적인 시각으로 볼 때 "뭔가 그럴듯해 보이면" 받아들여 질 수 있을만한 물건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초창기 슈퍼맨이 나오던 DC처럼요.
[美製]筋肉馬車  
근데 사실 미국도 별거 없습니다.
[美製]筋肉馬車  
근데 사실 미국도 별거 없습니다.
XOBcuzesurio  
~~중요하니까 두번 말씀하신 건가요~~
양양  
미국은 콩 생산 세계 1위 국가지요. 압니다.
함장  
사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쓰면 일종의 '호러물'이 되버려요.
양양  
그렇기 때문에 장르와 독자사이에 그나마 허용이 가능한 합의점을 찾는게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런 장르의 합의점을 찾기위한 노력을 위해서는 선구자적인 사람의 등장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현대물에서의 선구자는 없다고 봐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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