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로봇대전의 피해자 - 기동전함 나데시코 편
슈퍼로봇대전은 일본 거대로봇물에 큰 영향을 미친 2차 작품입니다. 기존에 존재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구입하여 만든 콜라보레이션으로 과거 거대로봇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원작이 가지고 있던 스토리들을 크로스오버하여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내기에 이르지요.
특히나 슈퍼로봇대전을 통해 소개된 원작 스토리들이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면서 거대로봇물에 영향을 많이 끼치게 되었습니다. 가령 씨앗건담의 사례를 보면 "설정은 상당히 탄탄하였으나 감독과 각본가를 잘못 만나(?) 불우하게 전개된 작품"으로 평가가 엄청나게 격상된 경우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식으로 참전작에 대한 호감을 높여주는 부분도 있었기에 건프라 판매에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제 동생은 건프라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슈퍼로봇대전 W에서 레드 프레임과 블루 프레임에 반한 나머지 저에게 칭얼댄 게 원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알아서 건담을 찾아보다가 00에 꽂히면서 제가 사준 00건프라가 진열장을 꽉 채우고 있네요. 마이스터 4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라함이 탔던 기체는 다 모을 기세입니다. 여기에 가오가이거도 조립프라모델이 있었다면 아마 저에게 칭얼댔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용자동네는 조립프라가 없어서 더 큰 지출은 막을 수 있었던 아찔한 기억이 납니다.
어쨌거나 현재 거대로봇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슈퍼로봇대전이 끼친 영향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위의 씨앗건담의 사례처럼 긍정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사례도 분명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슈퍼로봇대전의 피해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번엔 슈퍼로봇대전(이하 슈로대)을 통해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작품들을 한번 다뤄볼까 합니다. 그리고 그 첫 스타트는 나데시코 입니다.
1. 엄청나게 약화된 메카닉
슈로대에 참전하면 언제나 게이머들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성능"입니다. 그리고 나데시코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나데시코의 첫 참전은 임팩트였는데... 여기에서 나데시코의 성능은 처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원작에선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생산하고 저장하는 상전이엔진이지만 슈로대의 상전이엔진은 백만스물두번을 자랑하는 에너X이X는 고사하고 로X트 밧데리보다 더 처참한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디스토션 필드가 잡아먹는 에너지량이 어마어마해서 떡밥으로 던졌다가는 바로 방전되어 장갑이 해제됩니다.
원작 기준의 나데시코는 초기형 기준으로 상전이엔진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에너지를 통해 디스토션 필드를 펼치고, 이 디스토션 필드를 깨기 위해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실탄병기나 같은 중력파를 이용한 그래비티 블래스트로 공격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실탄을 제외하고 중력을 왜곡시키지 못하는 빔병기는 디스토션 필드 자체를 아예 뚫을 수가 없지요. 이런 압도적인 위용 덕분에 나데시코 크루는 화성에 도착할 때 까지 "게임을 즐기면서"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도 않고 갑니다. 공격이 없었냐면 그건 또 아닙니다. 모 웹사이트의 어머니가 게임 패드를 가지고 놀 때 목성도마뱀들이 쏘아댄 빔이 수없이 많았지만 "괜찮아 튕겨냈다"면서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이쯤되면 역대 건담시리즈의 전함들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인데 어찌된게 나데시코의 성능은 자붕글에 나오는 아이언기어만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데시코 세계관은 건담세계관에서는 꿈도 못꿀 관성제어와 중력제어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정도 과학력이면 은하영웅전설에 필적하는 수준입니다.
나데시코 뿐만 아니라 에스테바리스도 눈물이 나올 지경인데 에스테바리스가 강캐였던 슈로대는 지금까지 단 한편도 없습니다. J때는 그래도 전함대전이라는 별명처럼 시스템의 혜택을 많이 받아 명함을 내밀 수준이라도 되었지만 에스테바리스는 그런거 없습니다. 합체기가 없으면 도무지 못 쓸 물건으로까지 격하되었던게 바로 에스테바리스였지요. 그러나 에스테바리스도 디스토션 필드를 전개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중력파가 아니라면 손상을 주는 것도 어렵고, 또 후대로 넘어가면 상전이엔진을 소형화시키는데 성공하기에 그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말하자면 씨앗건담의 하이퍼듀트리온 엔진보다 더욱 괴악한 성능을 지닌게 상전이엔진인데 에스테바리스가 스트라이크 프리덤이나 레전드 건담보다 강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덕택에 에스테바리스는 "팬심이 아니면 키울 수 없는" 물건이 되었지요.
2. 파일럿도 평가절하
메카닉만 피해를 본게 아니라 파일럿도 피해를 많이 본 작품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능"은 메카닉의 성능뿐만 아니라 파일럿은 능력도 포함됩니다. 백년간 지구에 이를 갈며 전투만을 준비해온 목성 도마뱀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스 파일럿들이 료코 3인방에 의해 죽습니다. 그것도 몇년동안 은퇴했다가 잠깐 훈련에 복귀한 상태에서 말이죠. 설정상으로는 에스테 3인방은 목련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괴물입니다. 목련 최강의 파일럿이라고 하는 겐이치로 정도가 아니면 아예 상대가 안되는 수준이지요. 화성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에서는 적들을 웃으면서 잡아먹는 모습을 보이며 역샤에서 샤아의 ~~명언~~ "아무로가 없는 전장이 이렇게 쉬웠었나"와 비견할 만한 포스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들이 슈퍼로봇대전에서 샤아에 준하는 능력을 보이냐면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능력을 보면 안문호나 곽달호를 넘어 웃소횽에 비견해야 할 수준이어도 될 이들의 능력치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지요. 시대를 대표하는 파일럿에 대한 대우가 이 정도입니다. 애시당초 나데시코 크루가 되기 위한 조건 자체가 "정신상태가 어떻든지간에 각 분야의 최고만을 크루로 태운다"는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은 주인공인 아키토 한명 뿐이었고요. 나머지는 어딘가에 결함이 있어도 각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바타케는 최고의 공학자이고, 이네스는 최고의 과학자, 유리카는 불패의 함장, 쥰은 유리카에 이은 랭킹 2위, 에스테 3인방은 최강의 파일럿, 호메이는 최고의 요리사, 루리는 ~~모 싸이트의 어머니~~ 전자의 요정 등등 지구권 최고의 인재들로만 꾸린게 나데시코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한번에 묶을 만한 지구권 최고의 재력과 정치력은 물론이고 에스테3인방에 준하는 파일럿이기도 한 네르갈의 총수 아카츠키 나가레까지... 면면을 봐도 론드벨 저리가라 할 지경인데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가히 브라만과 수드라만큼 대우의 격차가 있지요. 덕택에 나데시코를 안 본 세대는 슈로대의 기준만을 생각하여 나데시코의 기술력이 엄청 후진 줄 압니다. 실제로는 건담 세계관, 특히 우주세기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미지만 슈로대의 대우가 안 좋다보니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3. 설정왜곡
1번에서 설명했듯이 디스토션 필드는 중력을 왜곡하여 메카닉을 감싸는 방어막인데 단순한 중력왜곡을 넘어 보호대상에게 날아오는 빔 에너지의 방향을 왜곡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런 효과 때문에 나데시코 1화에서 후쿠베 제독이 이끄는 지구연합우주군의 빔 선제공격이 무효로 돌아갔고, 결과적으론 목성 도마뱀군을 제대로 막지 못해 아키토가 살고 있는 화성에 지옥도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연합은 당시 상황을 검토하면서 목성 도마뱀이 화성의 기술을 이용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디스토션 필드는 평범한 빔 병기로는 유효타를 먹일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화성의 유산을 통해 그래비티 블래스터만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방법으로 결론짓습니다. 이런 사실은 네르갈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목련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나데시코 시리즈에 그래비티 블래스터를 탑재하게 됩니다. 여기에 디스토션 필드를 근거리에서 뚫을 병기로 "소형 게키강 플레어"로 볼 수 있는 필드 랜서가 추가 개발될 정도로 나데시코 세계관에서 디스토션 필드에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디스토션 필드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사도의 AT필드를 뚫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에바의 AT필드인 것과 같습니다. AT필드의 대항마는 AT필드이듯이 "화성의 유산에 대항할 가장 효율적인 대책은 화성의 유산"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슈퍼로봇대전에서는 이상하게도 디스토션 필드가 그래비티 병기에 강하고, 일반적인 빔 병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이상한 설정으로 나온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적어도 제가 해본 슈퍼로봇대전에서 디스토션 필드는 빔보다 그래비티 병기에 더 방어력이 뛰어납니다. 완벽한 설정왜곡이지요. 중력을 왜곡시키는 그래비티 병기가 하라는 중력왜곡은 안 하고 설정을 왜곡하는 상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