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주의와 미국의 선민주의

호무라 14 2226

미국의 시작은 퓨리턴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것으로 대게 이야기하고, 퓨리턴이란 앵글로색슨 인종의 칼뱅교도들이죠. 지금도 WASP는 미국의 주류고요. 당연히 미국에는 개신교, 그 중에서도 칼뱅주의 사상이 뿌리깊습니다. 대통령이 성경에 맹세를 하는 것은 단적인 예죠. 그 전에 미국 대통령 종교를 살펴보면 개신교가 압도적이죠.

칼벵은 예정설을 주장했습니다. 예정설은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이 구원할 사람은 스스로 구원될 사람임을 입증하리라는 건데, 그 입증하는 방법은 바로 우월한 능력을 보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할 거라는 거죠. 그건 달리 말하면 사회의 패배자는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가치가 없음을 증명한 것과 같다 봐도 무방하고요. 그러니 오바마케어같은 복지 정책에 대해 왜 내가 사회의 실패자들에게 돈을 줘야 하는가, 스스로 해결해야지 이렇게 나오는거죠. 기본적으로 자신은 우월하다는 것을 깔고 들어가는 거죠.

외국 정책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은 외부의 것, 특히 자기 입장에 있어 해롭거나 이질적이거나 아니면 위협적인 경우 거기에 경기를 일으키고 그것이 퍼지는 걸 막으려 하죠. 마치 전염병 환자가 나오면 그 환자를 격리시키듯 말이죠. 공산주의는 이들의 가치관에서 보면 전염병과 같고, 그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사탄이었기에, 미국이 편 정책은 바로 봉쇄 정책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와 테러리스트도 마찬가지라서 지금 펴는 정책은 일종의 봉쇄 정책이죠. 미국이 지금 IS에게 하는 것이 바로 IS를 봉쇄하고 타격하여 죽이려는 거죠. 중국도 이제 타겟에 들어가고 있고.

그 외에도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상도 미국을 지배하고 있죠. 이러한 사상들이 융합해 지금의 미국정치문명의 뿌리가 되는 거고요. 그걸 감안하지 않으면 미국은 한 입으로 두 말하고 자기 한 말을 자기가 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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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분명 바꿀 수 있어.

14 Comments
윌버포스  
사학과에서 그렇게 배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기독교, 특히 칼뱅의 신학과 사상에 대하여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의 패배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가치가 없음'이라는 말은 상당히 반기독교적인 주장이고, 칼뱅의 입장과도 거리가 멀며, 칼뱅주의 교회에서 고백하는 신앙과도 정반대입니다. 일단은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사회의 패배자들을 위한 종교라 봐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 중심의 종교로 출발을 했고(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안드로메다로 날아갔지만), 칼뱅의 저서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칼뱅의 대표작인 기독교 강요를 보면 제 20부(맨 끝부분입니다)에서 기본적으로 정부를 향해서 공평과 정의를 행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공평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특히 권력자와 부자들)을 적절하게 처벌하는 것이고 정의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칼뱅은 자신의 십계명 강해서에서 권력을 휘둘러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도둑질이자 살인이라고 역설을 했습니다. 칼뱅은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여러 권의 저술에서 강조를 했고, 실제로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 지도자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거지만...

칼뱅의 노선을 계승한 존 녹스는 더 급진적이어서 아예 스코틀랜드 자체를 칼뱅주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으며, 무려 16세기에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무상 의무교육을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즉 칼뱅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철저하게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죄악시합니다. 후대에 와서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의 신학자들은 영역주권론을 내세우며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정치 영역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진짜로 자기가 네덜란드 총리를 역임하기까지 했죠.

물론 칼뱅이 청부론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와 명예를 못 누리고 사회 속에서 실패한 것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매도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주장을 철저하게 배격을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부와 명예는 물론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부와 명예를 누리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주장을 했다면, 칼뱅은 자신 스스로 그렇게 권위를 강조한 성경을 통으로 부정한 것이 될 겁니다. 제가 구약학을 공부하면서 구약성경 본문을 쭉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과 모종의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서 철저하게 그들을 위하여 공평과 정의를 행하신다는 이야기가 거의 이말년 만화의 '와장창' 이상으로 심심하면 나오거든요. 회본좌와 김근주 목사님을 비롯하여 구약학 하시는 분들도 진짜 입만 열었다 하면 하는 이야기가 그겁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인데 그 공평과 정의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옹호하고 신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회의 실패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명제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주장이거니와(굳이 성경 본문을 인용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 다 반증이 됩니다.) 칼뱅이 그렇게 주장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칼뱅의 저서들을 읽어 보면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칼뱅이 취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기독교라는 종교의 정체성부터가 가난하고 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하고서는 성립할 수가 없거든요. 칼뱅의 예정론은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그래서 무조건 다 구원을 받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일단 칼뱅과 그 직계 후계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으며, 오늘날도 칼뱅의 노선을 계승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신학자들을 이렇게 살펴보면 회본좌나 김근주 목사님이야 칼 바르트 신정통주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쳐도, 정통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이승구 교수님이나 김형원 목사님도 절대로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변질된 것은 일단은 청교도 후계자들 가운데 칼뱅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곡해한 케이스가 있기 때문이고, 2차적으로는 칼뱅주의에 기반한 청교도 신앙이 18세기에 등장한 인본주의적 계몽사상과 짬뽕이 되면서부터입니다. 겉으로는 청교도 신앙을 표방하나 내면적으로는 인본주의적 계몽사상을 따르는 일련의 정치세력이 미국 독립혁명을 주도했고 이로 말미암아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면서 실질적으로는 인본주의적 계몽사상에 입각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청교도 사상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그 둘이 구분이 안 되어 버린 겁니다.

그리고 예정설에 대해 정말 아주아주 심각하게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그렇게도 예정설을 강조합니다만 예정설의 내용 가운데 그 어디에도 '구원할 사람은 스스로 구원될 사람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등등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런 내용은 없어요. 일단은 그런 발상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발상이기도 하거니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쿼크가 되도록 깠던 행위구원론이 되는 것이니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칼뱅파든 루터파든 개신교에서 구원은 현재형입니다. 죽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구원을 받고, 살아가면서 구원받은 사람에 걸맞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개신교적 구원관입니다. 다만 칼뱅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직한 방법으로 부와 명예를 허락하시는데, 그것이 또 모든 구원받은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것도 또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에게는 부와 명예를 허락을 하시는데,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올바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많이 벌었으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정계에서 성공했으면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정치를 하라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부와 명예를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칼뱅의 사회 사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즉 사학계에서 칼뱅의 예정설에 대해 그렇게 진술하는 것은 완전히 오해이며, 칼뱅이 그렇게 주장한 것도 아니고, 예정설의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칼뱅의 노선을 이어받은 영국 청교도들 가운데 그런 식의 기복주의적 신앙에 잘못 빠져들어 칼뱅의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몇몇 사람들과, 그 뒤에 미국으로 넘어가서 청교도 신앙에 인본주의적 계몽사상을 짬뽕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 독립혁명을 주도한 세력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왜곡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미국 정신은 순수한 칼뱅주의, 청교도 정신이 아니라 껍데기만 청교도 사상이고 그 뚜껑을 열어 보면 인본주의적 계몽사상, 자유지상주의 사상, 배금주의(맘몬주의), 제국주의, 패권주의 등등 온갖 비기독교적 내지는 반기독교적인 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 짬뽕탕입니다. 미국 정신이 꼭 칼뱅주의 탓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정말정말 위험합니다. 순수한 칼뱅주의는 스코틀랜드나 네덜란드 이야기(물론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아닙니다)고 미국은 청교도 사상에다가 온갖 비기독교적 내지는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을 다 짬뽕을 시켜 놓았습니다.
윌버포스  
칼뱅주의와 예정설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아니면 사학계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중학교 때 세계사를 배우면서 들은 바에 따르면 사학계에서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칼뱅주의와 예정설에 대한 본문의 진술은 실제로 칼뱅주의 교회를 다니고 있는 청년인 제 입장에서 보면 진짜 칼뱅주의와 예정설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칼뱅의 원래 입장과도 거리가 안드로메다급입니다. 당장 제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만 해도 물질적 번영과 풍요만을 추구하며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그런 신앙은 성경 가르침에서 멀리 이탈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잘못된 신앙이라며 쿼크가 되도록 까십니다(...)

칼뱅주의와 예정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신앙고백서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어디에도 부와 명예를 얻음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임을 보여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칼뱅주의의 핵심은 이신칭의와 유기적 영감설에 기초한 성경무오설(성경의 문자 자체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이를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 뜻에는 오류가 없다)인데, 일단 그러한 발상 자체가 행위구원론이고 성경에도 어긋납니다. 이신칭의는 누구든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므로, 부와 명예를 얻어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도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던 행위구원론입니다.
*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 벨직 신앙고백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 도르트 신조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만일 본문에 나온 것과 같은 진술이 호무라님의 개인적인 입장이라면 칼뱅주의와 예정설에 대해 아주아주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고, 사학계의 견해라면 그것 역시 칼뱅주의와 예정설의 본질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지스  
칼뱅주의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은 수업시간에 들었지만 이런 형식으로 관련짓기는 좀 애매하긴 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러니 직업 속에서 소명을 실천하면서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식의 사상이라고 들어서(…)
칼뱅주의도 나름대로 문제가 많긴 하다고 들었지만 거기까지는(…)
윌버포스  
일단 칼뱅주의가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은 막스 베버가 처음 주장한 것인데, 그 주장 자체에도 현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은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제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만 해도<돈에서 해방된 교회>라는 책에서 그런 진술이 왜 틀려먹었는지에 대해서 조목조목 비판을 하고 있을 정도니... 설령 그 진술이 맞다고 해도 칼뱅주의에 근거한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에 해당되는 것이고, 산업혁명 이후의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이 유력합니다. 얼마 전에 박철수 목사님이 거기에 대해서 뉴스앤조이에 장문의 칼럼을 기고를 하셨죠. 설령 자본주의가 칼뱅주의에 기반했다고는 해도 그것은 옛날 자본주의 이야기고,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해당사항 없다고 말입니다.
주지스  
옛날 자본주의와 지금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르나요?
윌버포스  
박철수 목사님 칼럼 한 번 긁어와 볼게요.

한국교회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오해가 많다. 마치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책에서 명백히 밝힌 것처럼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은…종교개혁의 어떤 영향의 결과가 아니면 형성될 수 없었다거나,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개혁이 창조해 냈다는 어리석고 공론적인 명제를 주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만 둘 사이에 '결합하기 쉬운 유사점'이 어느 정도 있어서 자본주의 정신이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그리스도인 경제사학자인 리처드 토니는 자신의 저서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에서 그 관계를 좀 더 세밀하게 밝혔다. 베버는 상업 및 산업자본주의시대를 배경으로 연구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시대의 자본주의는 오늘의 자본주의보다는 상대적으로 건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핵심의 한 축이라 할 수 있었던 근면, 절제, 검소와 자본주의 정신이 서로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러기에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오늘의 금융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이다. (중략)

자본주의는 원래 서유럽 즉 영국과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해서 16-17세기경에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상업과 산업 활동에 대한 긍정적 태도,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 영국의 석탄 매장 패턴, 새로운 과학의 태동으로 가능해진 새로운 기술의 발전 등 다양한 원인들이 제시되어 왔다. 18세기엔 방직, 제철 그리고 화학 등의 산업 분야에서 기계화된 생산 체계가 가능해지기 시작했고 1820-70년 사이에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는 급속히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자원 확보와 시장 개척을 위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렇게 고속 주행하던 자본주의는 1, 2차 세계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파란을 겪게 된다.

하지만 1945년 즈음부터 산업자본주의는 다시 대약진을 하게 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미국을 중심으로 44개 연합국 대표가 미국 뉴헴프셔 주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 모여 외환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무역을 활성화하는 목적으로 브레튼 우즈 협정을 맺었다. 그 핵심은 35달러를 내면 금 1온스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세계 각국의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킨 것이다. 달러가 세계 중심 화폐인 기축통화가 된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반까지 소위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등으로 미국 금의 양이 떨어지면서 미국이 금을 확보하기 힘들게 되자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세계를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금 태환제를 철폐하겠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달러와 금을 바꿔 줄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 말은 1971년 이후부터 달러는 금과는 전혀 무관한 그냥 종이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때부터 미국은 국익을 따라 재량껏 돈을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원하는 만큼 빚을 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시대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본주의는 400여 년 동안 유지해 왔던 기본 형태에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노동력과 생산 공장을 중심으로 하던 산업자본주의 시대가 하락의 길을 걷게 되고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7656&menu=1
주지스  
음, 이해가 안 가니 공부를 좀 더 해야겠네요(…)
호무라  
미국 개신교는 칼뱅주의가 뿌리이긴 하나 굉장히 독자적인 모습을 구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칼뱅주의의 예정설(이중예정설)이 곧바로 현세에서 택자와 유기자를 구분 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우파적인 시각에서 자기 멋대로 예정설을 가져다가 견강부회하는 것이지, 진정한 핵심을 받아들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같은 칼뱅주의라도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소위 화란개혁주의)라든가, 영국의 퓨리탄이라든가, 미국의 변경예배 및 복음주의 계통이라든가, 한국에서 입으로만 칼뱅주의를 외치는 대형교회라든가, 다 다른 걸 보면 이제 와서 칼뱅주의의 본류를 끌어다 현대적 현상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겠나 합니다.

(무엇이 칼뱅주의인가 아닌가는 절대자의 주권적 권위를 인정하느냐 아니냐 정도로 제한될 따름입니다. 칼뱅주의에서도 부유층이 주권적 유기를 당할 수 있어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거부하는 것도 아닌데요 )
윌버포스  
사실 칼뱅주의는 여러 가지를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게 없다 보니까 무엇이 칼뱅주의라고 딱 정의를 내릴 수가 없긴 합니다. 그 결과 장로교는 어느 나라를 가든 교단들이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죠. 우리나라만 해도 장로교 교단이 100개가 넘고 메이저 교단만 일곱 개(합동, 통합, 백석, 고신, 대신, 기장, 합신)입니다. 스코틀랜드도 여러 교단으로 찢어져 있고 네덜란드나 미국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아일랜드 장로교도 갈기갈기 찢어져서 정신이 없습니다.
윌버포스  
본문에 진술한 것과 같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에는 한편으로는 칼뱅주의적 청교도 사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인본주의적이고 비기독교적 내지는 반기독교적인 사상들(자유방임주의, 자유지상주의, 제국주의, 패권주의, 배금주의(맘모니즘) 등등)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는 정말 곤란합니다.

아울러 미국 독립혁명을 주도한 정치세력은 정통 칼뱅주의인 장로교나 회중파 교회가 아니라 대다수가 유니테리언 신앙(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등등) 아니면 성공회의 하드웨어에 이신론의 소프트웨어를 짬뽕한 신앙(조지 워싱턴, 제임스 먼로 등등)을 가진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현대 미국에서 진짜 칼뱅주의인 장로교나 회중파 교회는 극소수이며 미국의 3대 기독교 종파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인 침례교, 감리교와 이단으로 취급되는 모르몬교입니다.

설령 미국인들의 그러한 사고방식에 칼뱅주의적 청교도 사상이 일정 부분 기여를 했다고는 해도 그것은 칼뱅의 노선을 올바로 계승한 정통 청교도 사상이 아니라, 칼뱅의 노선에서 자기네들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왜곡하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안드로메다로 던져 버린, 즉 칼뱅의 원래 청교도 사상에서 멀리 이탈한 변질된 청교도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지스  
음, 전 루터의 사상이 자유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윌버포스  
루터의 사상이 자유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해서 자유주의가 기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루터의 사상에다가 인본주의적인 계몽사상을 합체해 놓은 거죠. 따지고 보면 그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도 그 배경에는 성경의 가르침과 거기에 입각하여 사회 변혁을 추구했던 생시몽, 오언, 푸리에 등등의 공상적 사회주의가 있거든요. 그걸 갖다가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론과 짬뽕을 시켜서 공산주의라는 폭탄을 만들어 낸 겁니다.
주지스  
애당초 자유주의가 그렇게 나쁜 건가요.(…)
윌버포스  
자유 그 자체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나쁜 게 아닌데, 그걸 갖다가 절대화하는 게 나쁜 거죠.
실제로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 자유지상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왔는지는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