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과 바둑해설에 관하여

양양 8 1475

사실 미생 연재마다 나오는 바둑 기보와 내용을 엮으려는 분들이 제법 많은데... 아무 관련 없습니다. 특히 초반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바둑 그 자체와 미생은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삶에서 바둑은 떼 놓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가깝지요. 그리고 주인공 장그래의 행보는 반상에서 느꼈던 걸 현실에서 복기한다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바둑과 자신의 바둑을 만들어준 전체적인 가르침에 따라 움직이는 걸로 볼 여지는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매화 나오는 1수마다 의미를 두는건 솔직히 의미가 없습니다. 특히 초반은 정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포석 하나 두는데 1분은 고사하고 10초도 채 안 걸리는 건 물론, 기사들끼리 "상대방이 포석을 어떻게 둘지" 이미 1수 정도는 내다보고 있는 상황인지라 중계를 보고 있으면 "어? 저거 백돌이 아직 다 두지 않았는데 왜 흑돌이 자리를 잡으려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상에서 "진짜 기사들의 손이 부딪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손이 부딪칠 정도로 포석은 미리 준비해 온 전략으로 그냥 막 움직입니다.

이건 이미 대국마다 전략이 어느 정도 세워진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거지요. 거의 초반의 50 미만의 수는 포석 그 자체이거나 포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장기로 친다면 마상의 배치를 잡는 정도랄까요? 프로장기에서 마상마상, 마상상마, 상마마상, 상마상마 중 하나를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장기에서 포진을 하는 건 수를 움직이기 전에 이루어지지만 바둑은 흑돌의 수를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얼추 맞습니다. 따라서 포석 전체를 가지고 크게 보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한수 한수를 "그렇게 거창하게 설명하며 인생과 엮을 정도"의 수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과거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신문사에서는 바둑대회를 후원하는 경우가 많아 자신들이 후원하는 대회나 KBS 바둑왕전 급의 기전은 지면을 일부 할애하여 바둑계의 주요 경기들의 기보를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런 경우엔 대부분 150수를 전후하여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고, 혹은 제법 대단한 난전과 속기가 이루어진 경우엔 120수를 내외한 시점을 먼저 알려주곤 했습니다.(물론 90년대 당시의 속기라는 개념이 지금과 비교하면 준속기에 가깝습니다) 세계바둑기전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이전에는 보통 3시간짜리 기전이 많았을 정도라서 300수를 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유는 그 시점이 대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또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로 치면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 정도로 볼 수 있지요. 허나 귀퉁이 하나 둘 세력이 생겨나는, 초반 20수도 채 안 되는 포석중인 상황을 뭘 그리 장황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삼국지로 치면 "영제가 태어났다"라든가 "건석이 내시가 되었다" 정도밖에 안 됩니다. 물론 이 사실이 후한의 멸망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황건적의 출몰, 조조와 원소의 대립, 유비와 손권의 연합, 관우의 죽음과 오의 확장 등과 비교했을 때 도무지 임팩트가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3회 삼성화재배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보기엔 130수를 내외해서 마샤오춘이 흔들렸고, 170수를 둔 시점에선 누가봐도 마샤오춘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몇몇 바둑뉴스에서는 이 시점을 중심으로 대국을 분석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삼국지로 치면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오소를 치는데 실패했거나 허유가 조조에게 안 넘어갔다면?"을 두고 논하거나 "만약 조조가 주유의 고육지책을 간파했더라면?"같은 격렬한 토론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120~130수 사이는 관도대전에 비할 만한 것이었고, 160~170수는 적벽대전에 비할 만한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지요. 헌데 "영제가 안 태어났더라면?", "건석이 내시가 안 되었더라면?"이 과연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을지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흥미있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기 바둑 사이트가서 당시의 뉴스와 기보를 살펴보면 겨우 20수 남짓한 시점이 토론거리가 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걸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그런 댓글처럼 중요한 시점으로 여기질 않거든요.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작가 윤태호 선생은 바둑에 대한 조예가 그리 깊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무협소설에 나오는 천골지체마냥 극초반 포석 한 수를 보고 "아! 이게 바로 돌부처 이창호의 명불허전, 신의 한수구나!"같은 깨달음(...)을 얻어 미생을 그린게 아닙니다. 이건 윤태호 선생이 아니라 이창호 기사와 반상위를 수도 없이 다툰 유창혁 기사나 조국수께서도 못할 겁니다. 다만, 윤태호 작가는 바둑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주인공이 바둑세계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바둑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몸이고, 이 바둑이 마치 현실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습에서 상당한 재미와 공감을 이끌어낼 따름입니다. 헌데 겨우 "영제가 안 태어났더라면"같이 큰 의미 없는, 그리고 실제로 기사들에게조차 그리 기억에 남지 않을 장면을 가지고 쓴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은 "장군님 축지법 쓰시는" 가사와 비슷한, 그런 종류의 글일 뿐입니다.

만약 정말로, 진짜 만에 하나라도 매화 시작마다 나오는 수에 미생의 전개와 밀접한 의미가 있다면 1부의 마지막은 어째서 응씨배의 결승대국을 다루지 않고 조치훈의 휠체어대국을 다루는지, 그리고 이 두 대국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설명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대국 사이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조국수의 응씨배 결승과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의 공통점은 잘 봐야 현대바둑이 열린 이후 손에 꼽히는 "명승부"라는 사실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미생과 포석단계에 있는 돌 한수한수를 매칭시킨다? 한마디로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꿈보다 해몽이 좋고, 저기 고속버스터미널 역에 있는 사주팔자 보는 사람들처럼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워털루 전투와 청산리 대첩 사이에서 의미있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상식 밖의 요상한 논지를 들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글들이 모여 있는 책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계발서 종류입니다. 자기계발서가 도움이 되는 분들께는 이런 "꿈보다 해몽이 좋은"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탐탁치 않은 건 사실입니다. 은하영웅전설에서 양 웬리가 승승장구하니 "양 웬리 리더쉽"이라는 책이 동맹 곳곳에서 유행하자 양 웬리가 "이뭐병"이라는 반응을 보이지요. 제가 보일 수 있는 반응도 양 웬리와 같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거지요. 잘 해봐야 공통점이라곤 "명승부"이며, 명승부에서 흔히 오는 쾌감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대국에서 오는 전체적인 감동"만을 강조한게 아니라 인간의 세상사가 여기에 있다는 식과 등장인물의 행동을 엮는 건 누가봐도 무리숩니다. 

결국 이런 글은 단순히 끼워맞추기에 불과한 그런 글입니다. 게다가 일반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바둑"을 제법 그럴듯이 포장하는 모양새를 볼작시면 환빠와 닮은 점도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서 나온 댓글은 사실을 곡해하는 글일 뿐더러 다른 이에게 작품을 곡해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듯이 이런 사이비 해설은 바둑에 있어 전혀 도움도 안 되고, 작품의 이해에는 더더욱 해를 끼치기에 이런 지뢰를 피해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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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타이커습니다  
뭐 어찌됬든 미생자체는 잘만든 만화지 않습니까. 거기다 주인공이 기사를 꿈꾸다 꿈을 접고 취업전선에 나갔다는 설정이니 바둑관련 이야기를 넣고 싶고싶으신 마음이셨을겁니다.
양양  
전 미생을 책으로도 구매했을 정도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셋트로 사면 케이스를 준다는 말에 혹해서 보관용으로 또 구매하기도 했지요.
정작 제가 맘에 안 드는 행태는 윤태호 작가님의 작품 수준이나 매화의 시작에 들어가는 수를 넣는 연출이 아니라 이걸 괜시리 해석하려 드는 사이비들이 맘에 안 들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매화마다 나오는 한수 한수씩 진행하는 부분은 1화가 지나가는 걸 "바둑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 그 이상으로 여기기 어렵습니다. 이는 타이커스님이 지적해 주신 바둑관련 설정을 인상깊게 표현하기 위한 삽입(=시각적 연출로써의 장치)일 뿐이지 이게 작품의 내용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이창호 기사가 되었든 조국수가 되었든 번기의 전체도 아니고 겨우 한 수를 우리네 삶에 대입할 게 뭐 그리 많다고 나대는 게 눈살 찌뿌리게 만드는 사실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윤태호 작가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바둑은 물론, 미생이라는 작품까지 왜곡하게 만드는 독자가 나쁘다는 이야기지요. 지난 시즌1 때도 보는 내내 불편했고, 시즌2에 와서도 불편했기에 이젠 더 이상 미생은 웹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단행본은 늘 그랬듯이 나올때마다 계속 구입하겠지만요.
박정달씨  
실례지만 자신의 해석이외의 다른 해석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시는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작품해석의 정답은 없고, 극단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은 모든 해석은 설사 작가의 뜻에 어긋나더라도 허용됩니다. 말씀하신대로 무리수고 억지일 수도 있지만 그런식으로 작품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Nullify  
환빠니 뭐니 언급하시는 걸로 봐서는 저런 무리수와 억지를 허용하는 것 자체를 꺼리시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저런 류의 해석 자체가 바둑에 대한 덜 성숙한 혹은 잘못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걸러볼 필요가 있다는 거겠지요. 작품 해석 자체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맞지만, 그 작품에 쓰인 기본적인 배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해석이 오류로 발전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본문의 해석이 타당한지는 둘째치고, 왜 해석이 (나와 같고 다르고를 떠나서) 타당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박정달씨  
글쎄요 작품 이름부터 바둑용어인 '미생'을 따오고서는 화마다 기보올리는 작품을 두고 '그런식의 해석은 틀렸다. 윤태호작가는 바둑을 모른다.'라고 하는건 핀트가 어긋난거 아닐까요. 그런식으로 연재하는 작가를 까고 작품 컷 구성을 까는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구성은 글쓴분이 말씀하신 '사이비'해석을 유도하는 모양새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좋은 작품일 수록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야하고, 그런면에서 윤태호 작가가 글쓴분 말대로 바둑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기보를 매화 처음에 넣는 방식으로 연재한거라면 오히려 '무리수든 사이비든 뭐든 니들 멋대로 해석해봐라. 나도 모르고 집어넣은 거니까.'라는 의미에 가깝게 낚시를 한거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일단 바알못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좋게좋게 봐주려면 그런식으로 해석이 됩니다.
양양  
엄밀히 말하자면, 저는 매화마다 나오는 기보의 1수를 작품의 내용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삶에 대입하려는 섣부른 댓글들을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제목을 좀 잘못 선정한 감이 있는데 '바둑해설'이라기 보다는 '댓글러들의 미생기보해설'이라고 적었으면 오해의 소지가 좀 더 적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위의 Nullify 님이 말씀해 주신게 제 의도와 거의 맞는데, 바둑의 한수 한수를 구태여 작품의 주제와 등장인물의 심리는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왜 우리네 삶에 대입까지도 가능한, 말하자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의 해석은 피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미생 시즌 1에서는 주인공 장그래의 깨달음에 가장 가까운 대국은 조국수가 세계를 제패한 제1회 응씨배 결승대국(매 화의 시작마다 나오는 기보)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했지만 장엄한 대국이었던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이 장그래의 가치관에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이건 실제로 주인공 장그래의 입장에서 정리가 되어 나옵니다.
즉, 이건 미학적 구도의 충실함을 위한 것에 가까울 순 있어도 "작품의 주제, 등장인물의 의식, 나아가서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까지 이 기보를 바탕으로 표현하는 건 누가봐도 무리로 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작품에서는 이 대국들이 제대로 언급이 되지도 않았거든요.
이쯤되면 고려시대임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 소품으로 고려청자를 배치했는데, "이 고려청자를 통해 고려시대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겠구나!"라는 반응이라면 누가 봐도 이해하기 쉽고, 또 평론에 있어 미학적으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일텐데 "이 고려청자는 살짝 귀퉁이가 우그러져 있는 걸로 봐선 현 고려의 상황이 몽고에 침략당하고 있는 걸 의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자에 금이 없는 건 공민왕이 고려에 희망이 있다는 걸 믿는 걸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이 고려청자가 노국공주의 방에 있는 걸로 봐선 몽고출신인 노국공주를 바라보는 공민왕의 심정을 대변할 수도 있겠네요. 고려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몽고인, 즉 일부가 우그러져 있는 상태는 고려에서 백안시 될 수 있는 노국공주를 의미하는 거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건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사랑하여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겠지요." 라고 쓴다면 이걸 받아들이기 쉬울까요? 그리고 이게 정말로 감독이 영화를 만들때 의도한 바고, 또 일반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평가인지는 생각해 봐야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적은 글입니다. 만약 정말로 공민왕(=주인공)의 심정이나 노국공주(=여주인공)의 상태를 고려청자가 반영하는 거라면 후에 언제라도 충분히 이에 대해 연결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근거, 예를 들면 고려청자에 심한 금이 간다던가, 바람이 불어 고려청자가 탁자에서 떨어져 깨인다거나 하는, 함축적이고 은근하게 심리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정작 나온 암시는 "몽고에서 노국공주에게 선물받았던 거울이 두 동강이 나니 노국공주가 난산 중에 죽고 말았다"같은 결론이 나왔다면 이건 해석을 위한 작품의 이해를 잘못하게 된 겁니다. 실제로 제가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에서 실제로 장그래의 생각을 통해 언급된, 자신의 상황에 가장 큰 깨달음을 주는 대국은 매화의 시작을 알렸던 "제1회 응씨배 결승대국"이 아니라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이었습니다. 이는 윤태호 작가가 소재로 삼은 건 결국 "바둑"이지, "제1회 응씨배 결승전, 조훈현 vs 녜웨이펑"이나 "제3회 삼성화재배 결승전, 이창호 vs 마샤오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댓글러들은 베댓이 되기 위해서인지 어쩐건지 목표는 모르겠으나 작품의 이해를 하기 위하여 "바둑에서 미생이었던 장그래의 인생사"를 매 화의 시작을 의미하는 "미학적 표현의 하나", 그 이외의 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운 기보에 집중하여 이걸 왜 계속 확대해석하는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제가 경계하는건 '무리수든 사이비든 뭐든 니들 멋대로 해석해봐라. 나도 모르고 집어넣은 거니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윤태호 작가를 비판한게 아니라(오히려 미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바둑"이란 소재를 버리지 않음과 동시에 화수의 진행을 적절하게 표현한 기보의 진행은 얼핏보면 진부할 수 있으나 웹툰에 있어서는 제법 혁신적인 발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충분히 다른 독자들을 현혹시킬 수 있고, 또 지금까지 작품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침소봉대하여 이해를 저해시킬 수 있는 댓글러와 이들의 댓글을 경계하는 겁니다.
박정달씨  
먼저 작품 진행전에 기보같은 게임진행상황을 나열한 작품은 '미생'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식으로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요.

지금 미생의 기보를 보여주고 시작하는 구성을 영상물에 그대로 적용시켜서 보자면 사극전에 고려청자를 크게보여주고 줌아웃하며 한화가 시작하는 구성에 가깝습니다. 그걸보고 "그 고려청자는 단지 고려시대임을 나타내기 위한 소품이다"라고 해석하는거 자체가 무리인거죠. 시작과 끝에 나타나는 소품에 의미가 없다면 그건 맥거핀밖에 안되요. 체호프의 총에서 나타나는 말마따나 안쏠꺼면 눈에띄게는 안보이는게 정상입니다. 바꿔말하면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눈에띄는 모든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고 파악하는건 매우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해석방법입니다.

말이 좋아서 미학적기능이지 지금 말씀하시는대로면 단행본낼때 매화 표지 디자인으로 쓰기위해 거창하게 기보그려놓는다는 소리밖에 안되잖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구성상의 문제지요. 각화 제목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제목이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고, 미생처럼 제목외에 다른 방법으로 인트로를 넣는다면 그 인트로는 제목과 유사하게 각화를 요약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작가의 의도를 못알아먹고 배댓에 눈이먼 침소봉대'를 뭐라할게 아니라 '작가의 구성'자체를 비판하는게 맞지요. 등장인물의 심리분석까지는 오버일지 모르겠으나 한화를 분석하는 주근거자료로서도 활용이 불가능하다면 그건 윤태호작가가 기보 잘못고른거고, 바알못이고, 다른 바알못들 속여가면서 작품연재하는거죠.
양양  
좀 더 자세하게 미생의 배경과 기보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작가가 구상한 "작품의 길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지, "돌 하나마다 의미를 두는"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미생에서 돌 1수는 1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인터뷰를 통해 상당히 많이 언급이 된 사실입니다.
즉, 기보가 보여주는 가장 큰 기능은 "작품의 총 길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로 볼 수 있습니다. 소설 빙과에서 24절기를 통해 "운치있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듯이 바둑의 기보를 보여줌으로써 "운치있는 작품의 흐름"을 바둑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추가적으로 기보의 본질을 설명하자면 "바둑을 기록"한 겁니다. 작품에서 끊임없이 기보가 나오는 이유는 작가가 시즌1과 시즌2를 통해 몇번이고 언급했지만 "모두는 바둑을 두고 있다. 나(장그래)는 상사들, 동료들, 다른 부서, 다른 회사, 그리고 다른 고객들과 동시에 바둑을 두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기보가 시작되고 아직 두고 있는 상황은 윤태호가 하고 있는 바둑(=만화)이 대국(=진행)중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미학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게 기보일 수 있습니다.
즉, 작가는 처음부터 매 화의 시간상 흐름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위해 기보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내용 자체는 바둑과는 지나치게 연관짓는 걸 경계하는 편입니다. 이는 작품의 길이와 그 흐름을 파악하는 자료와 "우리 모두(=독자)는 바둑을 두고 있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는 것으로 그 한정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학적기능을 조금 낮춰 보시는 것 같아 약간 서운함 감도 있는데, 기보가 가진 "미학적 기능"때문에 이 기보는 미생 단행본에서 특전으로 추가되었습니다. "침소봉대를 하지 않은" 유저인 "허허허"(언론에도 노출된 적도 있고, 윤태호 작가도 잘 알고 있는 아이디기에 필터링 하지 않겠습니다)는 전적으로 기보의 한수가 가진 의미가 어떤 것인지 "순수하게 바둑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해설을 해 주는" 연관자가 되어줬으며, 이는 미학적 기능이 이끌어낸 괜찮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런 활동은 바둑을 잘 모르던 사람들에게 "추가적인 재미"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미생 단행본을 구입하셨으면 아시겠지만 매 화의 시작은 2페이지를 할애하여 전쪽은 기보의 수를, 후쪽은 박치문 아마 유단자의 해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래 있던 미학의 기능을 업그레이드 시켜 특전이 된 케이스지요. 이게 바알못을 속여가면서 연재한다고 본다면 그건 아니라 생각됩니다. 미생은 바둑을 잘 몰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기보가 보여주는 매력은 상당한 것이었고 "바둑에 흥미가 없던 사람들에게도 충분이 어필이 가능한" 특전이 되어주었습니다.
작품의 한화를 설명하는데 다소 부족할 순 있어도 작품의 전체적인 길이와 관련이 있으며, "우리는 사회에서 바둑을 두고 있다"는 것도 표방할 수 있는 기보의 선택은 분명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진 겁니다. 맥거핀이 아니란 말이지요. 윤태호 작가가 바알못(아마 10급으로 유명하죠. 바알못인거 맞습니다)이라곤 할 순 있어도, 소재와 기보를 잘못 고른것은 아니며 충분히 작품과 관련이 있음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그 관련은 철저하게 한계를 분명히 그었으며 이는 기보의 한 수가 가진 의미는 결코 작품의 내용을 대변할 수 없으며, 매칭이 가능한 건 오로지 시간적인 흐름과 연재횟수만을 의미하는데 두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작가는 이미 작품 내에서도 충분히 표현했고 언론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를 알렸다고 봅니다. 기보의 1수와 1화의 내용은 결코 관련없다고 주요 언론사에서도 언급이 될 정도인데 이걸 구태여 인권이도 근성인 것처럼 끝끝내 억지로 연결하는 건 작품에 대해서 이해할 생각이 없을 뿐더러 그 해석은 환빠마냥 정확한 근거도 없이 '카더라' 밖에 안 됩니다. 싸울아비가 사무라이의 어원이다고 주장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 없는 수준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마치 천경자의 미인도가 본인이 "이거 내 작품 아니다"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이건 천경자가 그린 그림이 맞다"고 박물관이 주장하는 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보를 잘못 골랐다고 볼 여지는 적고, 충분히 주 근거자료로 활용도 됩니다. 다만, 일부 독자들의 눈 뜨고 못 볼 정도의 끼워맞추기는 충분히 경계해야 할 것이며 이런 댓글들은 분명히 지양해야 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건 독자가 바알못이냐 윤태호가 바알못이냐 아니냐 같은 문제를 떠나서 명백하게 이런 작가의 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조중동 등 언론에서도 충분히 어필하였으며 이걸 독자를 속이거나 기만했다고 볼 수 없겠죠) 침소봉대를 하는 건 "미알못"임을 인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생각조차 없으면서 댓글을 남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작품에 대한 이해 자체가 선행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명백한데 작품에 속해 있는 어떤 장치를 넘어 등장인물들의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우리네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건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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