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제대로 된 라이벌 관계

양양 2 1982

* 일부 정치인이 언급될 수 있으나 정치이슈와는 무관합니다.

 

K리그에서는 더비가 존재합니다. 이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게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투쟁과 경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엔터테인먼트이며, 이는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관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경쟁이 반복되고 역사가 쌓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라이벌구도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라이벌구도를 정립시키기 위해서는 당사자들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어야지만 가능합니다. 이런 관계는 제3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주는게 아니라 당사자들의 인식에 따라서 형성되어야지만 진정한 라이벌 구도가 됩니다.

 

먼저 포항과 울산의 경우는 인접한 도시라는 사실(=원정경기를 다니기가 상당히 편리)과 함께 리그 우승의 길목에서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끊임없이 붙잡은 역사는 자연스레 이 두 팀들을 라이벌로 규정하는데 만인이 동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리그 최종전이 우승 결정전이 되었던 2013 K리그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K리그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 수삼(수원 삼성)과 서울은 당사자들이 표면적으로는 서로 라이벌이라고 칭하진 않지만, 스스로가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은 이겨야 한다"는 투쟁심을 늘 보여주었습니다. 특히나 2008 K리그에서는 승점까지 동률이었기 때문에 골득실로 정규리그 우승을 결정할 만큼 치열한 대회였으며, 당시 1위와 2위는 수삼과 서울이었습니다. 이 역시 자연스레 형성된 라이벌 구도입니다.

 

그러나 현재, 위 두 짝을 제외하면 언론에서 "라이벌"이라 칭하는 건 사실상 언론플레이에 가깝습니다. 울산과 전북의 관계를 보고 "현대더비", 전남과 전북은 "호남더비", 호남에 있는 팀과 영남에 있는 팀끼리 붙으면 "영호남더비"(...), 슈퍼매치를 제외하고 수도권 팀들(ex: 인천 vs 서울, 수삼 vs 인천, 서울 vs 성남 등)끼리 붙으면 수도권 더비(...)라는 식이지요. 각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서로에 대해 숙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데 라이벌전이 성립하는 생각 자체가 무리숩니다. 이는 파나마와 이집트의 A매치를 보고 "운하 더비"라고 부르거나 dlqudals과 dlwogh끼리의 대결을 "xnaud ejql"라고 부르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억지입니다. 이쯤되면 더비없는 팀이 어디있냐고 반문했을 때 대답할 수 없을 정도지요. 그리고 그간 K리그를 다루는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서는 한국프로축구연맹조차도 이런 흐름에 편승하면서 팬들의 비웃음만 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라이벌 관계가 제대로 형성된 사례가 생길 것 같아 팬들은 오히려 이쪽이 더 반가운 분위기입니다. 수프(수원 FC)의 승격에 따라 예상했던 더비는 물론이고, 예상치 못했던 더비까지 생기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수원은 예전에도 제가 논한 바 있지만, 현 시점에서 축구수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입니다. 사상 최초로 같은 지역을 연고로 둔 1부리그 팀이 둘 생겼기에 역사적 의미에서의 더비(지역 라이벌)가 제대로 이루어졌으며, 최근에는 성남과의 마찰(?) 때문에 구단주들끼리 트위터로 설왕설래하는 과정에서 미묘한 경쟁의식이 들고일어나면서 성남과 수프간의 더비가 생길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가히 축구로 흥할 만한 좋은 조건이지요.

이런 움직임은 분명 K리그의 라이벌 관계를 생성하는 좋은 선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기존처럼 팬이 아닌 제3자가 어거지로 만들기 보다는 팬들이 상대방 팬을 적절히 "도발"(?)함으로써 서로가 대등한 경쟁관계임을 꾸준히 인식시키는 과정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수프와 성남은 각자 사정에 따라 현재 서로를 도발하는 중입니다. 각 팀의 시장들이 구단주로써, 그리고 구단주이기 때문에 자처할 수 있는 "팬"이라는 위치에서 상대방을 약올리는 겁니다. 현재 성남과 수프가 그러합니다.

아예 이 갈등이 진화한 나머지 오늘 있을 수프 vs 성남의 대결은 지금 "깃발대첩"이라 불릴 예정입니다. 이재명 성남 시장과 염태영 수원 시장의 SNS신경전이 처음엔 상대방 구단주의 신경을 조금 긁는 수준에서 이야기되던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긴 팀이 상대방 홈에 깃발을 꽂을 권리를 갖자!"는 결론으로 도출되었습니다(...).

만약 성남이 이길 경우, 수프 홈 구장인 수원종합경기장에 성남FC의 깃발을 꽂고, 반대로 수원이 이기게 되면 성남의 홈 구장인 탄천종합운동장에 수원FC의 깃발을 꽂겠다는 말입니다. 팬들의 집이라 할 수 있는 홈 구장에 남의 깃발이 잠시일지라도 펄럭이는 걸 봐야 하는 심정을 생각하면 거의 고니와 아귀가 손모가지를 거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이건 팬들끼리의 "자존심" 그 자체를 건 대결이기 때문에 지금 성남과 수프의 팬은 물론이거니와 K리그 팬들은 너나 할 것없이 지금 이 싸움의 결말을 팝콘뜯고 기다리고 있습니다.~~전 가난해서 조리퐁(...)~~

성남과 수프는 지금까지 이 정도로 K리그 팬들로부터 관심을 받아본 역사가 없습니다. 수프야 이제 막 클래식에 올라왔으니 말할것도 없겠지만, 성남 역시 왕조를 이뤘던 일화시절까지 고려해도 이 정도로 남에게 주목받았던 역사가 없습니다. 헌데 이런 단순한 구단주들간의 치킨게임 하나에 지금 모든 관심은 수원종합운동장에 집중되었고, 공중파인 KBS도 지금 여기에 낚여서 오늘 15시에 중계가 잡혔습니다(...).

 

K리그를 즐긴지 20여년동안 억지스런 더비생성과정을 보다가 이렇게 흥미로운 더비생성과정을 보니까 확실히 K리그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듭니다. K리그에 있어 짜증스런 억지만 보다가 이런 과정을 지켜보니 즐겁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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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뭐, 영남과 호남은 70년대부터 형성된 지역감정도 있고 정치성향쪽 차이도 있어서 관련팀이 사이가 나쁜 편은 흔했죠.(예:삼성과 해태) 뭐 현재야 연고에 따라 팀을 응원하는 일이 줄어서 좀 수그러들었지만...
양양  
이 경우엔 야구와 축구의 시대적인 배경이 갈려서 둘을 비교하는게 사실 어렵습니다. 야구는 탄생 시점부터 해태가 광주를 홈으로 창단하였고, 또 쌍방울이 있던 시절에는 전라도에 팀이 두개나 있을 정도였지요. 게다가 삼성과 해태는 모두 강팀이었기에 영호남을 대표하는 팀으로써 둘의 대결중에 스토리가 나올만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축구는 오로지 서울과 영남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강팀은 이 두 지역에서 출발한 팀들뿐이었고, 이로인해 그 이외 지역에선 축구인기가 정착하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요. 자연스레 이 두 지역을 기반으로 한 팀들과 이후에 태어난 팀들간의 인기, 쌓아온 역사 등의 격차가 지금도 좁혀지지 않을 정도라서 영남과 호남의 대결이란 구도는 축구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혹은 처음부터 승강구도라도 있었으면 지금 수프처럼 약팀이라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스토리의 재료라도 주어졌을테지만... K리그의 승강구도가 생긴 원인을 생각해보면 당시로선 도무지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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