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디칼리즘이 프랑스에 유난히 인기가 많았던 이유-로윈과 기어리의 분석을 기초로.

기스카르 0 2917

이 글은 생디칼리즘이 왜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절대적으로 인기가 많았음에 대해 얘기해보는 글이다. 

 

우선, 생디칼리즘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노동조합주의'이며, (한국에선 보통 코퍼러티즘을 이렇게 부른다.) '생디카'라고 부르는 노동조합이 사회의 기초단위가 되어 최종적으로 이러한 생디카들의 연합들로 이뤄진 집단(보통은 1902년에 세워진 노동단체인 CGT로 치급된다.)이 국가 전체의 분배등을 관장한다는 사회주의계열 사상이다. 생디칼리즘에 대해선 영국의 '신디칼리즘'의 경우나, 이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횡행했던 우파적 생디칼리즘, 속칭 '국민 생디칼리즘'에 대한 얘기도 필요하겠으나, 여기선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들은 특히 1800년대 중후반~190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이유로 프랑스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한 것 일까? 로윈에 따르면 생디칼리즘의 성장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1. 19세기 프랑스의 산업은 영국과 같이 거대 산업지대를 가진 자본가가 없었다. 이러한 산업발전은 대단히 완만하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본가들은 대규모 공장지대에 모여서 거대한 공업단지를 형성하는 대신 중소규모의 공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클랩햄의 표현대로면, ‘프랑스에는 결코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러한 공장들의 점조직화와 거대화의 미비는 노동조합 사이에서 중앙집권주의로 대표되는 맑스주의보단 여러 노동조합의 협업을 중시하는 생디칼리즘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2. 이러한 프랑스의 산업구조는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을 혹하게 하는 거대한 경제성장이 없었고, 한편으로는 이에 따른 임금 상승 역시 그다지 높지 못했다. 자연히 노동자들의 불만이 누적돼 오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형편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못했으며, 노동자들과의 타협이나 협상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자연히 사민주의 등의 타협주의보단 혁명적 노선을 주장하는 생디칼리즘에 매혹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3.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불평등과 차별이 해소되지 않자 노동자들이 더욱 혁명주의에 휩쓸리기 쉬워졌다.

4. 노동자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노동자 독자주의가 큰 호응을 얻었다.

5. 대혁명 이후 19세기 내내 일상화되어갔던 혁명은 노동자들에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낳게 했고, 한편으로는 혁명으로 인한 사회변혁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6. 노동조합이 CGT를 중심으로 통합되어가던 1902년 전까지 사회주의 정치조직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정당 조직의 이러한 분열은 정당과 노동조직과의 연계를 결정적으로 저해했다.

7. 피에르 프루동의 아나키즘이 노동운동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로윈의 이러한 분석은 왜 생디칼리즘이 노동현장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는가에 대해서 충분할 설명을 준다보긴 어렵다. 1,2,3의 경우에는 어째서 급진주의 노동운동이 프랑스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는가에 대해선 충분한 설명을 선사해주지만, 반대로 어째서 맑스주의가 아닌 생디칼리즘을 택했는지 에는 충분한 설명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5,7에 대해서도 이 세가지는 충분한 시대적, 상황적 설명이 필요함에도 이에 대해선 설명을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6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는데, 영국의 노동당의 경우에는 그때까지의 노동 조직의 미비를 TUC를 중심으로 뭉쳐서 성공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을 유치했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정치조직이 이뤄지지 못한 이유가 그저 노동조직의 분열 때문이라고만 보기엔 어느정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열이 어떤 이유에서 온 것일까?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은 기어리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기어리의 역사 분석에 따르면, 노동운동에서 투쟁이 특정한 상황에서 한계에 부딪힐 때,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의 탄압이 강력하고도 지속적일 때, 노동자들은 체제의 근본적인 혁파를 목표로 투쟁의 목표로 설정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주제의 연장선에서 기어리는 프랑스의 노동운동에서 생디칼리즘이 강력했던 이유를 오히려 프랑스의 노동조직의 취약성에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CGT의 설립이전에 프랑스의 생디카들은 대개 조직원 수가 200명을 넘지 못했고, 재정상태 역시 극도로 취약했다. 따라서, 이들은 정상적인 투쟁으로썬 도저히 자본가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노동자들의 역량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총파업을 통한 투쟁을 결의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그들에게 생디칼리즘은 극도로 매력적인 사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기어리의 설명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생디칼리즘의 거대한 인기는 정치적 요인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노동자들이 참여해 부르주아들에게 받아낸 대가는 르 샤플리에 법을 통한 조직화의 제한과 참정권의 불인정이었다. 10년간의 혁명 열기를 진압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그의 형법을 통해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불법화했다. 이후 18307월 혁명때 파리의 직물업 노동자들은 또다시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나 그로 인해 형성된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은 또다시 노동자들을 억압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기대를 배신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배신은 1830년대에 파리와 리옹에 벌어진 폭동과 봉기로 인해 분출되었으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패배감에 그저 모든 것에 침묵하면서 손을 놓아버리거나, 오귀스트 블랑키의 급진주의적 비밀결사에 가담했었다. 1848년 부르주아와 협업해서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을 붕괴시킬 때만 해도 노동자들은 그들이 원하던 국가를 드디어 만들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의 배신과 뒤이은 6월의 노동자 학살은 프랑스의 모든 노동자들을 쓰라린 배신감과 절망감, 허탈에 휩싸이게 하기 충분했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국왕, 성직자, 농민 등 그 당시 프랑스에 존재한 거의 모든 계급들에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자들은 나폴레옹 3세가 제 2공화정을 철폐시키고 제정을 부활시킬 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나 부르주아들의 제 2공화정이나 똑같은 수준의 압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또한 제 2공화국 초기에 루이 블랑 등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들과 연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노동자들은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 역시 부르주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들 역시 진정한 신분, 계급 해방을 위해 타계해야될 대상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1850~1860 년대 프랑스 노동운동 일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 일체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했던 프루동의 아나키즘 이란 건 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871년 파리 코뮌과 이를 진압하기 위해 2만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학살된 것은 이러한 프랑스의 노동자들의 한의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생디칼리즘의 흥기는 항상 무시되고 이용당해왔던 프랑스 노동자들의 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해당 글은 김수진, 노동운동 이념연구: 생디칼리즘 연구(1999)을 읽고 정리해본 글입니다. 에....이글이랑 좀 다른 관점에서 보는 오관호의 글도 찾아봤는데...하필 1980년대 글이라 국문혼용체의 압박이 너무 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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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웃으면서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잉여!....크킹이랑 유로파 좋아하고 시공이랑 시계도 가끔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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