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전에 대한 소고
제가 처음 즐긴 창세기전은 2입니다. 1은 즐기지 않았지만, 2부터 시작해서 창세기전3 파트2까지 모두 구매하여 플레이했습니다. 그렇게 즐긴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면 창세기전은 솔직히 말해 졸작에 가깝습니다. 창세기전 2의 시스템은 전략이라는 것이 배제되어 있는 SRPG이며, 서풍은 팔콤의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대표적으로 영웅전설1)에 비견할 만한 인카운터율에 도입이유를 알 수 없는 돌파시스템으로 인한 밸런스 파괴작이고, 템페스트는 "애초에 다른게임"을 창세기전으로 바꾼 억지작, 창세3는 2에서 정립된 기초 설정들을 뒤엎어버린 물건이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바라볼 때 개발사 소프트맥스는 그리 좋은 역량을 가진 회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이유는 "국산 개발업체 중에서"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때, 게이머들에게 그나마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봐도 한국을 넘어 해외로 시야를 돌려 생각하면 창세기전보다 훨씬 잘 만들고 재미있는 게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SRPG로 보면 파랜드 택틱스 시리즈나 영걸전 시리즈가 창세기전2나 창세기전3에 비해 더 재미있게 잘 만든 물건이며, RPG로 보면 파이널 판타지나 가가브 영웅전설이 더욱 완성도가 높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템페스트같은 육성RPG는 아무리 잘 봐줘도 마법사가 되는 방법 내지는 마리의 아뜰리에와 비교하면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창세기전3 및 파트2는 그래픽 측면에서 조금 더 나아졌다 뿐이지 시스템과 밸런스 측면에선 창세기전2에 비해 그다지 나아진 것도 없을 뿐더러 기존의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스토리로 기존의 팬들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했습니다. 즉, 보편적인 측면에서 소맥은 "국산 개발업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평가가 갈리는 회사였습니다. 국산업체라는 수식이 들어가면 좋은 회사지만 그걸 떼 버리는 순간 그다지 메리트가 보이는 개발사는 아니라는 거지요. 그리고 이런 명성을 얻게 만든 게임이 창세기전임을 감안하면, 창세기전에 대한 평가도 개발사인 소맥처럼 "국산인건 감안하면 양호한 게임이지만, 국산이란 수식어를 빼면 특별히 볼것이 없는 물건"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그랬던 것이 지난 파트2까지의 개인적인 평가였다면 이번 창세기전4에 이르러 드디어 시리즈의 종언을 고할 때가 된게 아닐까 합니다. 파트2에서 보여준 세계관도 엉망이었는데 이걸 고치겠다고 내 놓은 세계관이 고작 평행세계... 세상에... 물론 창세기전의 세계관을 다시 만든다는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건 알겠지만 고작 평행세계라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말하자면 "우리가 뭘 만들던지 기존의 창세기전 설정을 비틀어도 용납해주기 바란다"고 선언하는 듯한 제스처밖에 안 됩니다. 그럼 이건 이미 창세기전이 아니지요. 파이널 판타지처럼 전작과 후작의 스토리 및 설정상의 연결고리가 한없이 0에 가까운 경우가 아니고서야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되는거 아닙니까... 이쯤되면 소프트맥스가 "강점으로 여겼던" 스토리텔링조차도 이젠 더 이상 강점이 아닌 겁니다.(개인적인 판단으론 소맥이 언제 제대로 된 스토리를 쓴 적이 있냐고 되묻고 싶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하길래 놀랐습니다.)
어쨌든 지금 창세기전4가 오픈베타 중입니다만 더 이상 매력적인 게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프트맥스가 생각이 좀 있었더라면 창세기전2의 리메이크를 해서 스팀에 올리는 게 더 나은 판단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창세기전4의 개발은 좋은 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