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에서 수작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
제가 바라보는 "현대물"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대물은 사회 시스템과 인식이 현실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물건이라고 보고,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는 명백히 대중이 초능력의 존재를 인지함은 물론이거니와 사회가 이에 발맞춰 대응하고 있는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물건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물에서는 사회가 인지하지 못한 초능력을 아주 극히 일부의 인원만이 이용합니다. 이 때문에 주인공을 포함하여 사회의 시스템이 주는 제약을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습니다. 존재의 유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인데 여기에 대응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지요. 말하자면 남 몰래 쓰는 치트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물들은 치트를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가지요.
이처럼 치트를 이용하여 쓴 물건이 제대로 된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냐면 당연히 아닐 겁니다. 껏해봐야 문장을 조금 다듬은 투명드래곤 정도면 다행입니다. 게다가 사회의 시스템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권리는 챙길대로 다 챙기고 의무는 거의 다 회피하는 식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철저하게 대리만족만을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1. 현대물의 태생적인 한계 - 핍진성 부여에 대한 제약
현대물은 어찌되었든 주인공이 있는 배경은 반드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를게 없습니다. 때문에 작품의 핍진성과 개연성은 반드시 우리의 현실에서 따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역사를 포함하여 사회의 인식, 그리고 이에 발맞춰 인류가 구축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지혜를 갖춘데다가 높은 수준의 글쓰기 실력까지 골고루 갖춘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드물것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가령 어떤 주인공이 초능력을 이용하여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고자 한다면 최소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물론이거니와 "전자금융거래법" 운운할 만큼의 지식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식수준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어떤 소설인지 기억이 애매한데 주가가 10%이상 하락했음에도 서킷브레이커는 고사하고 사이드카가 발동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주식시장이 돌아가는 묘사가 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개념들이 상식선의 문제라는 걸 생각하면 비판이 충분히 될 수 밖에 없지요. 세계관의 핍진성의 근간이 현실인데, 현실의 상식을 무시했으니까 이건 필연입니다.
현대물에서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없이 쓰게되면 이렇게 막장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적으로 판타지나 무협의 경우는 핍진성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재창조 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만든 세계관은 오롯이 작가의 구상으로 탄생하였기에 작가는 독자들과 암묵적 합의하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떤 판타지 세계에선 인류를 단 한방에 멸망시킬 수 있는 10서클 마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비평을 할 때 이 부분을 "핍진성의 부재"라 깔 수 없습니다. 작가가 설정집을 내거나 작품 내에서 설명이 동반되면 그것을 독자가 보고 판단하여 세계관의 완성도를 결정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의 부분들은 설명이 없으므로 독자들이 현실에 입각하여 판단을 하면 충분하지요. 드래곤볼의 주인공들이 그 연약한(?) 야무치조차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 누구도 드래곤볼의 이야기가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또한 아무도 대통령이 개(...)라고 조산명에게 항의하지도 않고요. 엄밀히 말하자면 드래곤볼의 세계관도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핍진성의 대부분을 현실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현대물은 현실과 명백히 다르게 가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뿐더러 설득력이 부족한 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뢰가 될 가능성이 높지요. "현대"물 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이미 아웃인 겁니다. M16으로 총을 박격포처럼 쏴 포트리스 빽샷같은 궤도로 암살하는 밀리터리물과 비교할 수 있을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2. 조폭물과 연계된 상황
판타지나 무협에 기반한 소설들은 주인공의 무력을 뽐내는 장면이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무력을 가진 조직이 가진 불의에 맞서 싸우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판타지, 무협에 비해 현대사회에서 국가를 제외한 조직이 물리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영화 시카리오가 보여주듯이 멕시코, 콜롬비아 등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치안이 안정되어 있으며 일정 이상의 힘을 갖고 행사하는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행사한다면 이건 소말리아나 북두의 권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무력을 행사하는 단체는 껏해봐야 조폭 정도입니다. 조폭은 당연히 인간 말종들인데다가 의리고 나발이고 없는, 그야말로 사회에 필요가 없는(사필없) 존재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적은 늘 조폭이거나 조폭과 연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잘 알다시피 현실의 조폭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매직 미사일을 기관총처럼 쓰고, 총알을 피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미사일이 날아와도 쉴드로 막는 주인공에게 조폭은 그리 대단한 벽이 아닙니다. 조폭 1000명이 모두 무기를 든 UFC선수들이라고 가정해도 게임이 안 될 판국인데 이렇게 양학하는 내용 가지고는 딱히 재미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제대로 된 설정 없이 조폭이 주인공에게 위협을 가하는 건 또 현실반영이 제대로 안 되기에 비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조폭이 UFC선수를 넘어 개개인이 무림문파의 고수라고 설정하면 이건 다른 이유로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래나저래나 난감할 따름입니다.
3. 미인은 어째 죄다 연예계 종사
주인공은 어째서인지 연예계와 늘 엮입니다. 아름답다고 해서 죄다 연예계에서 종사하는 건 아닐텐데요(...). 물론 연예인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상당 부분이 연예계에서 종사하는 히로인은 꼭 있습니다. 마치 무협에서 히로인이 꼭 무림문파의 후기지수인 것 처럼요(...). 그렇다고 연예계에 대한 이해가 따르냐고 묻는다면... 과연 그럴진 좀 의문입니다. 거기에 연예계를 다루면 반드시 위의 조폭들과 연계하여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게 진짜로 현 21세기의 연예계를 반영하는 건지는 좀 의문입니다. 오히려 90년대 노루표 쌈마이 소설들(ex: 人시리즈)처럼 유명 술집 마담과의 썸이 더 현실성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저 90년대 쌈마이 소설도 지나친 조폭의 미화와 더불어 현실성 없다고 까였던 마당에 대체로 연예계와의 지나친 연계는 더 저질이라는 이야기지요.
4. 전국에서 순위권에 드는 금수저와 전국 싸움신의 공생
주인공이 고등학생인 경우, 그 학교는 반드시 쾌산고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럭키짱의 무대 말이지요. 전국에서 잘 사는 학생이 꼭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모의수능결과에서 전국 순위권에 드는 학생, 그리고 조폭과도 닿아있는 명지관같은 놈이 꼭 나옵니다. 이 정도 배경설명 했으면 눈치채셨겠지만... 이쯤되면 사이오닉 스톰 쓰는 강건마가 연예인 여자친구 만나 조폭과 싸우는 럭키짱 소설이 됩니다. 지금 네이버 평점을 보시면 알겠지만 럭키짱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처참함을 감히 말로 표현 못할 정돕니다. 이걸 소설로 만들었으니 내용이 껏해봐야 럭키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주 막장으로 가면 드라군까지 출동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설정이라 평할 수 있을 겁니다. 고위기사의 사이오닉 스톰과 맞먹는 마법은 물론이고 암흑기사의 공격력을 갖춘 주인공도 있는데 드라군 출동하는 것 쯤이야... 이런 물건이 지뢰가 아닐 가능성은 김치워리어가 슈렉을 누를 확률과 엇비슷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와중에 나름의 핍진성을 부여하겠답시고 별별 설정을 내려하지만,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무협이나 판타지와는 달리 현대물의 역사는 상당히 짧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되어 온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위에서 설명했지만 핍진성을 현실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한계를 깨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DxD라든가 갓오하 같은 물건을 낸다면 이건 이미 현대물이 아닙니다. 위에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지만 이건 능력자 배틀물 같은 물건이 되는 겁니다. 현대물이 아닌 물건을 "좋은 현대물"로 포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결론을 내리자면 현대물은 재미와 평가에 있어서 그리 좋지 않은 장르라고 여겨집니다. 이건... 그야말로 답이 없습니다. 캐리어 가도 안될 물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