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판소를 읽을 때 가장 신기한 점 ⑤ - 마법(아공간) 편
마법은 판타지세계의 아이덴티티에 가깝습니다. 환상문학의 "환상"은 사실 이걸 나타낸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요. 무협소설에 "무"가 들어가지 않는다거나 SF소설에 초능력 및 과학기술이 없는 작품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환상문학에서 마법은 작품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도구라 할 수 있겠지요. 때문에 마법에 대한 설정을 어떤 식으로 가져가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과 세계관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맥루한의 명언을 빌어 본다면 "마법이 곧 세계다"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신기한 것은 마법이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선 현대사회를 능가하는 모습을 보임에도 사람들은 이걸 제대로 활용할 생각을 전혀 하질 않습니다. 이게 짧은 기간이라면 말을 안하겠지만 경우에 따라면 수세기는 물론이고 수십세기에 걸쳐서 말이지요. 비유하자면 현대식 항공모함을 만들어 화살로 공격하는(...) 꼴입니다. 이런 경우를 "그럴듯한 세계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좀 있어 보이는 말로 한다면 핍진성의 부재로 표현할 수 있겠지요.
이번에 다뤄볼 마법은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 같은 아공간입니다.
1. 아공간이란 무엇인가?
판타지에서 아공간은 마법적 법칙에 의해 존재하는 또다른 공간입니다. 대개 아공간은 게임에서처럼 "인벤토리"의 개념으로 사용되며, 해당 세계관에 있어 아주 편리한 도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파이어볼처럼 이름은 같아도 소설마다 그 특징과 묘사가 다르듯이 아공간도 그 설정이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아래의 특징들 중, 하나 이상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마법적 처리를 통해 무게와 부피의 제약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다.
2) 무게가 완전히 느껴지지 않는, 즉 완전히 다른 공간에 두는 경우도 있지만 아공간배낭과 같이 어떤 매개물을 통해 만들었다면 원 무게보다 다소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3) 무한한 공간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ex: 9클래스 마법으로 만들면 무한, 6클래스가 만들면 40피트 컨테이너 정도)
4) 아공간은 마법에 의해 현실과 괴리된 공간이므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설정을 가진 소설이 많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주인공이 마을에서 준비한 도시락은 현실의 레이션보다 훨씬 우수할 정도로 보관이 용이하다.
5) 살아있는 생명은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살아있다"는 판정을 받으면 아예 못 들어간다고 묘사하는 소설도 있지만, 더 많은 소설에서는 "아공간은 공기가 없어 들어가면 죽는다"는 설정을 갖는다.
6) 어떤 경우에는 "마탑"과 같은 마법기술을 제공하는 기관에서 판매하고 있으며, 무게와 부피를 얼마나 많이 효율적으로 줄여주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보면 알겠지만 매우 유용한 기술입니다. 특히 무게와 부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속성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요. 허나, 이런 사기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판타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멍청하다 못해 창의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못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부분이 문제일지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2. 개선되지 않는 판타지 세계의 물류문제
가장 먼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 환상적인 기술이 어째서 물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라는 겁니다. 물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물류가 왜 발달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텐데 상당히 의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공간이라는게 드래곤과 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만 사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소설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닌 경우엔 인간에 욕심에 의해 이 부분은 발전해야만 하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아공간 하나만 있어도 교류는 매우 쉬워집니다. 무한한 아공간을 갖는 경우에는 세상의 부는 완벽하게 돌고돌며 제한적인 아공간이라 하더라도 거래규모는 최소한 몇배 이상 증가합니다. 가령 당나라의 어떤 상인이 아공간을 가지고 있다 친다면 그 상인은 실크로드를 제압하는 정도를 넘어 로마부터 당나라에 이르는 모든 무역로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무게와 부피라는 현실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워졌는데 그깟 실크로드 따위는 당연히 제압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몰고 올 사회적 변혁은 어마어마하겠지요. 게다가 사막같이 사람이 도무지 가기도 어렵고, 작년에 있던 오아시스가 올해는 없어서 죽을 수도 있는 길이 사막길인데 이조차도 서호보다 더 많은 양의 물과 식량을 준비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대항해시대를 플레이하는데 "적재량 제한이 없는" 배를 몰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조금 생각을 해본 작가들은 "대륙과 대륙을 넘으려면 마력폭풍지대를 거쳐야만 하는데 이게 정말로 어렵다"라든가 "국가에서 무역을 금지시켰다"같은 제약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정조차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건 매한가지입니다. 비록 아공간이 무한한 공간과 0에 가깝게 무게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쳐도 "썩지 않는다"는 설정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라도 산지와 동등한 수준의 서비스가 가능해집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겨울에 모아둔 얼음을 여름에 장사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동이 없더라도 계절적 변화에 무관한 특성을 이용해 "이동하지 않는 물류의 성장"까지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두가지가 결합된다면 더더욱 무서운 물류의 변화가 옵니다. "사막에 물이 아니라 얼음을 파는" 상황까지 만들 수 있는 마법이 바로 아공간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시는 분들은 감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찌된게 아공간 가방을 팔기까지 하는 세계에서 이런 물류의 발전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3. 병참과 전쟁의 기교가 왜 발전하지 않는가?
전쟁을 계획할 때는 당연히 병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 안 하다가는 牟田口廉也 꼴 난다는 건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寒紙? 이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과 전쟁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을 고민거리입니다. 그런데 아공간은 이러한 고민의 상당부분을 날려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넣고 다닐 수 없으니 그렇다쳐도 공성병기, 식량, 식수 등을 아공간 하나에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해결됩니다. 특히 영지물의 경우에는 이 아공간의 존재 하나만으로 밸런스가 그냥 깨질 수 있습니다. 비록 아공간의 성능이 무한이 아닐지라도 엄청난 효율을 보일 수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식수와 식량을 무한에 가깝게 준비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병참선이 길어져도 이전에 비해 안전하다는 건 사실이며, 적의 보급을 습격해서 태울 필요도 없이 다 챙겨갈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무게와 부피의 제한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짐에 따라 병력의 이동속도도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지기 때문에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2번에서 설명한 바대로 "적재한도가 존재하지 않는 군함"이 되기 때문에 상황만 주어지면 상당히 긴 상륙작전범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혹은 "배를 통째로 넣어"다니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상황입니다. 수에즈 운하 없이 홍해와 지중해의 사이를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거 the 혁신 of 혁신 아닙니까?
...그런데 소위 양판에서 "명장"이라고 하는 등장인물들 중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수천년동안이나 말이지요. 마치 진격의 거인 작가가 말한 것 처럼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바보로 만들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어찌보면 양판의 퀄리티에 걸맞을 정도로 핍진성을 생각하지 않은 거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아공간이라는 건 함부로 사용할 만한 마법도구는 아닐겁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생각하는, 그리고 양판을 제외한 장르소설 어디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부피와 무게는 물론이고 시간까지 멈출 수 있는(=시점을 제어가능한) 능력은 사실상 신을 넘보는 수준이기에 함부로 쓰기엔 곤란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존재 자체가 "이 소설은 치트키가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다만, 이게 워크래프트 2처럼 "너도 나도 치트를 쓰느냐?(아공간이 나만 쓰는게 아니다)", 혹은 심시티처럼 "나만 쓰느냐?(나만 아공간이 있다)"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적한 문제 말고도 제가 보지 못한 문제점은 더욱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더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