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와 손권의 세대차이 - 형주 갈등

함장 3 5658

사실 이 두 사람이 '땅따먹기 게임'을 바라보는 룰이 애초에 틀려서

가치관의 차이로 심각하게 마찰을 빚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일단 적벽대전 직후에 유비는 '토로장군'(잡호장군 급)이던 손권을 '거기장군'으로 올립니다.

이전까지 유비의 장군 칭호는 '좌장군'이었고, 유비가 세력은 약하지만 손권보다 관직은 높았지요.

이런 불균형 관계를 '동격'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손권은 이전까지는 '회계태수'였는데, '오나라(로 발전하는 세력)'은

손책 때부터 원칙적으로 '일개 태수'에 불과한 인물이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따라서 주변의 정복지에 태수를 마음대로 임명하고,

손가의 가장이라는 사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이 태수들을 컨트롤하는

비정상적인 체계였습니다.

 

적벽에서 승리하면서 이러한 '사적인 지배체계'를 어느 정도 '공식적인 지배체계'로 바꾸게 되는 거죠.

자사직도 칭하게 되는데, 손권이 칭한 자사직은 놀랍게도 '서주자사'입니다.

 

그리고 유비는 구 형주목 신하들을 모아서 '형주목'을 칭합니다.

이는 과거 유비가 '서주목'을 칭했을 때도 비슷하게 했던 요식적인 절차인데,

 

여기서 유비가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를 알 수 있는데,

손권은 현재 영토->서주로 진출

자신은 형주->(이후로 익주로 진출 예정, 아직 유장에게 들키면 안되니까 '익주목'을 칭하지는 않음)

이라는 식으로 본다는걸 드러내고 있습니다.

 

손권이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특별히 태클이 없었기 때문에,

유비는 아마도 손권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동의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손권은 이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유비의 형주목 지위 자체에는 태클을 걸지 않으면서도,

형주목으로서 지배권은 완전히 무시하고…

'내가 정복한 땅인다 내 땅이지. 근데 필요하다니까 빌려주긴 한다.'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한 태도를 보입니다.

 

여기서 이전까지 삼국지의 스토리를 보면,

중원에서는 누구도 '내가 정복했으니까 내땅이지'라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아요.

공손찬이나 원소든 원술이든 일단 '정복'하는 과정에서는,

그 지역에 부하를 앉히든 어떻든 '지방관'을 임명하고,

지역 호족과 협조를 구하든, 모가지를 자르든 어떻게 통제 체계를 만듭니다.

 

물론 '후한 조정'의 입장에서 이거 전부 반역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정당성'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최소한의 '형식적 절차'는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데 손권은 이 시점에서 이러한 '형식적 절차'마저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내가 정복했으니까 내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위에다 열심히 썻던 관직명의 변천사항은 사실 손권 그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니가 형주목이고 뭐고 알바 아니다. 하고 싶으면 형주목 해. 근데 땅은 내거야.'

 

삼국연의에서는 노숙이 땅 달라고 오는데 유비가 다 죽어가는 유기를 내보내주니,

"어이쿠 형주목이 있었구나."하고 물러나지만, 그런 식의 "존중"도 없었죠.

유비의 입장에서 이것은 매우 '게임의 법칙'에 어긋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손견-손책-손권이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이

유비가 세력을 형성했던 과정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견은 장사태수의 신분으로, 자신의 상관격이던 형주자사 왕예를 살해했고,

손책은 원술에게 군사를 지원받고 관직에 임명되어…

후한 조정에 임명된 여강태수 육강, 양주자사 유요 등을 제거하는 등의 행보를 보입니다.

 

손가가 원래부터 조정의 권위나 난세에서도 중원에서는 지켜지던 '게임의 법칙'을 

전혀 인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테지만, 현실적으로 강동 지방에서는

오직 '힘의 논리'만이 통용되며 이러한 '게임의 법칙'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아 물론 힘의 논리가 통용되게 되버린 주요한 원인이 손가의 깽판이기는 한데(…).

 

'일개 태수가 사적 권위로 주변 태수를 통제'하는 손가의 지배체계 역시

중원식의 '게임의 법칙' 이전에 '힘의 논리'가 뒷받침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가는 중원의 '게임의 법칙'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집단이고,

손권은 그들의 수장으로서 이 게임의 법칙과는 다른 힘의 논리 속에서 성장한 인물입니다.

 

 

후한의 지배체계가 살아 있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비교적 게임의 법칙이 통용되던 중원에서 군벌로 성장한 유비와는 달리,

손권은 태어나고 점점 머리 굵어질 때부터 후한의 지배체계 그딴건 이미 존재하지 않는거나 다름 없었고,

오직 실질적인 힘의 논리만이 통용되는 100% 난세에서 자라난 청년입니다.

 

손권에게 게임의 법칙에 따라서 관직에 따른 '정당성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유비는 

자신에게는 실감되지 않는 정치적 논리를 정당하다고 들이대는 사기꾼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 양반이 중원에서 왔다고 나이 많고 경험 많다고 오냐오냐 하고 따라자고

여동생도 시집보냈더니 내 땅을 잔뜩 뜯어먹으려 드네…. 싶었을 거고.

 

'내가 정복했으니 내땅'이라는 원초적인 힘의 논리를 들이밀면서 멱살을 잡았으며,

유비로서는 난세가 길러낸 '무서운 세대'의 등장에

그나마 한조의 위명이 살아있던 시절의 구세대로서 전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거기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한조의 기억이 남아 있는 중년 구세대와

한조 따위는 겪어본 적도 없는 난세 신세대의 갈등은

결국 참다못한 손권이 유비의 뚝배기를 깨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거지요.

 

 

 

잡썰이 길었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유비는 후한의 지배체계가 살아있던 시절에 성장했고, 활동하던 중원 지역도 난세화 되었지만 나름대로 그러한 '룰'에 맞춰서 정치가 이루어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런 룰에 맞춰서 손권을 대했고,

 

손권은 후한의 지배체계가 완전히 붕괴한 시절에 성장헀고, 활동하던 강동 지역은 완벽하게 난세화(사실은 손책 때문이지만) 되어서 힘의 논리 말고는 아무것도 통용되지 않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갈등을 바라보는 것도 어떨까 싶습니다.

 

 

여담으로 이러한 성향은 동오와 촉한이 건국된 이후에도 남아서

촉한은 인물의 지위와 특성을 '관직'에 따라서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지만,

동오는 '관직' 보다는 '실세'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중요하게 해석되는 경향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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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호오...흥미로운 관점이군요. 퍼가도 될까요?
함장  
예. 괜찮습니다.
삼도에 똑같은 글이 올라왔던데 동일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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