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패미니즘을 흔들 것인가?
여권의 변화는 산업의 변화와 함께 한다고들 하죠.
예를 들어서 본래 여성의 성역할이 가정일에만 국한된 것은 산업혁명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쉽게 "가정일"이라고 해도, 사실 여성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가옥 구조는 간단한 수리나 구조 변경도 여성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이 많았죠. 여성이 부엌을 지킨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정작 그 부엌에서 조리할 식재료를 구하려면 남성의 손을 타야했습니다. 특히 서양은 주식이 고기였기 때문에 짐승을 잡고 잡은 짐승을 다듬어서 조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드는건 모두 남성의 몫이었습니다. 시장보기는 근대 이후에는 여성의 성역할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과거엔 시장을 이용하기 위해서 며칠 씩 걸려서 험한 길을 가야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맹수나 도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죠.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시대에 보면 오일장에 가기 위해 아버지가 며칠 씩 길을 나서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시장보기가 산업혁명 이전에는 "남자가 해야할 바깥일"로 취급되었던 거죠. 이런 식으로 오늘날 "가정일"이라고 생각하는 일 중에는, 과거에는 여성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도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바깥일"은 또 여성의 도움이나 협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농업의 경우는 힘이야 어쨌든 한 명이라도 손이 많을 수록 유리합니다. 당연히 여자고 남자고 할 거 없이 모두 밭에 달려들 수밖에 없었죠. 어촌에서는 여자를 배에 태우진 않더라도 그물을 다듬고 잡은 고기를 손질하고 옮기는건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모두 달려들어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시절의 "바깥일"과 "가정일"의 구분은 좀 모호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때는 순수하게 "힘쓰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로 구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바깥일 중에서도 특히 위험하거나 힘쓰는 일은 남자가, 힘하고 상관없이 노동력 자체가 필요한 경우는 여자가 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시대가 오고 사회구조가 많이 변했습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도입된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애매하게 구분되어 있던, 육체적인 힘에 의해 구분되어 있던 성역할 구분을 상당히 바꿔 버렸습니다. 즉 이때부터는 남자의 바깥일이 "산업에 종사해 돈을 벌어오는 일"이 되었고, 여자의 가정일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전담하는 걸로 바뀌었지요. 심지어 자식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일은 원래는 대부분 남자 쪽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능이 "학교"라는 형태로 완전히 바뀌게 되자 가정내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직접 "교육"하기 보다는 "징벌"에 한하게 되었고 이런 징벌을 내리기 전에 훈육하는 일은 또 어머니의 일이 되고 만 거죠.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 기술의 발달이 실제 가정일 대부분을 "편리"하게 바꿨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원래 남성이 해야 했던 "가정일"은 발달된 기계와 임금을 받는 기술자가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오로지 바깥일에만 종사하게 되는 겁니다. 즉 발달된 기술로 "가정일"에서 "여자들이 하던 부분"만 남아 버린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는 거죠.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시기를 전후로, 이 시기의 성역할은 신체적 특성하고 무관하게 순수하게 "권위"에 의한 걸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전에도 남성이 식재료는 조달해도 직접 조리하는 것은 기피하는 등 성에 따라 금기시되는 일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순수하게 권위로서 "남자는 바깥에서 돈만 벌면 되고, 여자는 집안일만 하면 된다"라고 못 박힌 것은 이때라고 생각합니다.
패미니즘의 발생과 함께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시킨다"는 구호가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패미니즘의 주된 활동은 여성을 가정일에서 해방시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조차 그렇죠.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기술의 발달이 가정일을 오로지 여성의 일로 국한시킨 것과는 반대로, 종국엔 기술이 가정일 자체를 없애버리는 상황도 올 수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가정일을 발달된 기술에 의해서 처리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가정일"의 가짓수 자체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청소 분야의 경우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집안일 분야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던 부분인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계속 비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청소도구는 갈 수록 더 가볍고 편리하게 변하고 있고 심지어는 로봇 청소기까지 등장했고 제법 보급되고 있습니다. 세탁이나 조리분야는 성능이 달라졌을 뿐, 들이는 수고나 기능성은 크게 달라진게 없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죠. 아마 이대로 기술이 정발전한다면 몇 십년 내에 "청소"는 그냥 기계해주는 것이고 가정일에 끼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발달된 인공지능이 직접 가정에 적용된다고 했을 때, 또 한 번 가정일이 격감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구글에서는 알파고에 로봇팔을 달아서 마우스와 키보드로 스타크래프트를 시키겠다고 하는데, 농담 같지만 정말로 된다면 엄청난 일이 됩니다. 요리나 세탁처럼 기계가 대신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가정일 분야도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되는 거니까요.
즉, 기술이 발달은 가정일 자체를 없애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는 생각보다 빨리 올 겁니다. 솔직히 기술만 놓고 본다면 지금이라도 프로토타입 조리로봇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 같으니까요.(따지고 보면 지금 대량생산되는 인스턴트 식품들은 모두 "로봇"이 만들고 있는 셈이긴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여전히 "여성을 가정일에서 해방시킨다"는 구호에 머물고 있는 패미니즘 운동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존립 그 자체가 흔들린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패미니즘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분야에 따라서는 훨씬 진보된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류적인 목소리는 그렇지 못하죠. 과연 패미니즘이 이렇게 급격한 사회변화, 기술변화에 따라서 같이 진화해 나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패미니즘 자체가 사멸하고 그걸 대체할, 새로운 산업사회에 적합한 성담론이 대두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