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정보 |이름 = 이재면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3/35/Heungchin_02.jpg/300px-Heungchin_02.jpg |작위 = 완흥군 |재위 = [[1900년]] ~ [[1910년]] |대관식 = |전임자 = |후임자 = |작위2 = 흥친왕 |재위2 = [[1910년]] 8월 15일 ~ 1910년 8월 29일 |대관식2 = |전임자2 = |후임자2 = |작위3 = 공 |재위3 = 1910년 8월 29일 ~ [[1912년]] |대관식3 = |전임자3 = |후임자3 = [[이준용 (1870년)|이준용]] |작위4 = |재위4 = |대관식4 = |전임자4 = |후임자4 = |별칭 = 재면(載冕), 이희, 초명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 다른 작위는 완흥군 |시호 = |배우자 = 풍산 홍씨, 여주 이씨, 첩 1명 |자녀 = [[이준용 (1870년)|이준용]], [[이문용 (왕족)|이문용]] |휘 = 이재면 |왕가 = |왕조 = |아버지 = [[흥선대원군]] [[이하응]] |어머니 = [[여흥부대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 |부모 = |친척 = [[대한제국 고종|고종]] (동생), [[이재선]](이복 형제), [[흥인군]](백부) |출생일 =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출생지 = {{국기나라|조선}}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망일 = [[1912년]] [[9월 9일]] (68세) |사망지 = {{국기나라|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안국정 운현궁 |사망원인 = 병사 (노환) |능묘 = 흥친왕릉→흥원 (興園)후에 화장되어 흥원 서북쪽 납골묘에 안장되었다. |능묘좌표 = |매장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매장지좌표 = |거주지 = 운현궁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본 제국]] |서명 = |종교 = [[유교]]([[성리학]]) |웹사이트 = |각주 = |복무= [[대한제국 육군]] |복무기간= [[1907년]] [[11월 27일]] ~ [[1910년]] [[10월]] |계급= [[육군]] 부장(副將) |지휘= [[대한제국 육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서훈=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
[[대한제국]] [[대훈위 서성대수장]]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 }}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 [[1912년]] [[9월 9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군인·정치인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嫡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형이며 [[영선군 이준]]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興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863년]] 음서로 사용이 되었으며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간 중 도승지, 참의, 직제학 등을 지내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퇴출당하고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이조와 형조,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한때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동생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대안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관직은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궁내부 대신, 육군 부장에 이르렀다.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 했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뒤에도, 당시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작위가 완흥군이었으므로 '''완흥군 이재면'''으로도 부른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 흥친왕 이재면은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한성부]] 사동(寺洞) 사저에서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이었다가 뒤에 재면으로 고쳤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이희공실록]]에 의하면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어진 이름은 재록이었다 한다. [[조선]] [[조선 헌종|헌종]]과 [[조선 철종|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이재면 역시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지목되었으나, [[조선 철종|철종]]이 사망할 무렵 그는 성인이었기에 왕위계승권 서열에서 밀리게 되었다. 이는 [[조선 철종|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대한제국 고종|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일부를 포섭할 때, [[김병학]](金炳鶴)의 딸, 혹은 [[김병문 (조선후기)|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대한제국 고종|명복]]의 배필로 맞이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재면 보다는 명복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보내지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의 흥완군 양자 지정 논란은 [[1864년]] 고종에 의해 취소되어 최종 종결되었다. 친동생 [[조선 고종명복]]이 있었고, 그 외에도 서출 출신 이복형 [[이재선]]과 [[이윤용]]의 처가 된 이씨가 있었다. 한때 [[이재선]]은 그의 동생으로 알려졌다가 [[이재선 모역 사건]] 당시의 심문, 추궁, 재판기록이 나타나면서 이재선이 그보다 연장자인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 관직에 오르다 ====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풍산 홍씨 홍병주(洪秉周)의 딸과 결혼하여 [[이준용]], [[이문용]] 형제와 2녀를 얻었으나 일찍 죽고 뒤에 38년 연하인 참봉 이인구(李麟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밖에 1명의 첩에게서 서녀 1명을 보았다. 남달리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뜻을 거슬리지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그런 그보다 영특하고 야심만만한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더욱 총애한다. 그는 여러번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낙방하였다. 철종 치세기간 중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아들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윤효정]]은 [[흥선군]]이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그의 과거 합격 청탁을 했다 한다. [[흥선군]]은 일부러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 (1818년)|김병기]]는 마음 속으로는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167페이지 흥선군은 똑같이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멸시하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남병철을 지목했다. [[1863년]] 관직에 올랐고, 그 해 사용(司勇)이 되었다.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288a [[11월]] 인정전(仁政殿)에서 [[조선 철종|철종]]이 감제(柑製매년 감과 귤이 처음 열리는 날 직후에, 조선의 임금이 감귤 열리는 것을 기념하여 직접 주관하는 과거 시험이다.)를 친히 주관할 때 1등하여, 바로 [[과거 제도|과거]]에 직부전시(直赴殿試)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초기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5/Lee_Jae-myeon_Portrait_01.jpg/150px-Lee_Jae-myeon_Portrait_01.jpg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이후 고종 집권 초기에 삼사(三司)에서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과 언관직을 거친 뒤에 [[규장각]]시교, [[예문관]]검열, [[승정원]]주서 등을 지냈다. ==== 대원군 섭정기간 중 ==== 그 뒤 당상관으로 승진 [[1865년]](고종 2년) [[1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월 15일 철종의 빈전의 향관(享官)으로 추가 선출되었다. 이후 다시 [[승정원]]동부승지가 됐다가 [[4월]]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부제학]] 등을 거쳐 이후 [[성균관]][[대사성]]·[[승정원]][[도승지]]ㆍ이조참의ㆍ호조참의ㆍ예조참의, 부제학, 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1866년]] [[3월]] [[약방]] 부제조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232페이지 가 되었다. 1866년 도승지, [[1867년]]에는 직제학이 됐다가 그해 3월 가선대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하였고, 바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동지경연사, 종정경에 제수되었고, 의정부 당상을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 금위대장,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73년]] 종정경(宗正卿)이 되었으나 [[1874년]] [[11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 의해 섭정직에서 강제 축출당한 뒤에도 그는 유유하고 고분고분한 성격 덕에 계속 관직에 남아 있을수 있었다. 동생이 국왕이었고 아버지는 섭정인데도 자신에게는 낮은 직위가 부여되었던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는 한때 [[명성황후]] 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가인 민씨 척족에게 아부한 것 역시 관직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 대원군 축출 이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8/Heungseon_Daewongun_Portrait.jpg/200px-Heungseon_Daewongun_Portrait.jpg {{본문|이재선의 옥사}} [[1878년]](고종 16년)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고, 종정부, 춘추관, 의금부사를 겸임하였으며, [[1879년]] [[형조]][[판서]](刑曹判書),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시강원 좌빈객, 별입직(別入直)을 거쳐 종1품으로 특서되었다. 그해 숭정대부에 승진하여 행 병조판서가 되었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80년]] [[병조]]판서, 1881년 [[1월]] 금위대장,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이어 1월 말 판돈녕부사로 통리기무아문당상,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81년]] [[4월]]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이 되고 이후 [[금위대장]]과, 지훈련원사를 거쳐 같은 해 [[8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10월]] [[이재선]]의 옥사가 있자 상소를 올려 [[이재선]]의 적형임을 들어 스스로 죄를 청하였고, 곧 사직했다. 그 뒤 [[이재선의 옥사]] 관련자들에게 역적의 율로 다스려야 된다는 [[사헌부]]와 [[사간원]] 및 [[성균관]] 유생들의 비난을 받을 때 그는 역모 가담자의 가까운 친족이었음에도 특별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882년]] [[3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 행 예조판서가 되고, 호조판서를 겸하였다. 이어 훈련대장, [[선혜청]] 당상, 판삼군부사를 역임했다. ==== 임오군란과 보정부 왕래 ==== {{본문|임오군란}}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다시 섭정으로 재추대되자 일시적으로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사태수습에 힘썼다. [[호조]][[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훈련원|훈련]]대장을 겸하였다. [[1882년]] 7월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어 [[청나라]]에 호송, [[톈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감금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다. 그는 대원군의 [[텐진]] 납치기간 중 아버지와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인과 문인들의 굴욕과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비밀리에 국내에 편지 서신을 보내 자신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는 [[1973년]] [[10월 4일]] [[대한민국]] 월간 문학사상 자료 조사연구실에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경향신문 1973년 10월 4일자 기사 7면 편지를 쓸때 그는 순 [[한글]]체로 썼는데, 이는 한자나 영어로 썼다가는 발각되었을 때 청나라의 군인들이 해석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인용문|여기서부터 내일 아침에 떠나 출발하면 이틀만에 천진에 도착할 수 있다. 왕복에 7~8일이 허비하리라 한다. 이 배에서 다 말하기를 오늘날 태공(흥선대원군을 지칭)이 천조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다행이라 한다. 총총이 겨우 써서 숨겨두고, 전편(傳便)을 기다려 부칠 생각이다. 동하지(충동당하지) 말고 안정하라

1884년 음력 7월 15일 청나라로 끌려가는 배 안에서 몰래 쓴 편지}} 텐진의 보정부에 감금된 뒤에도 몰래 비밀리에 편지를 써서 인편을 통해 고국으로 부쳤다. {{인용문|다시 뵈옵도 못하고 세상이 올이지 않이하리신이 지필을 다해야 한심하오니다. 태평히지니시옵기 니니 발아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
(다시 뵙도 못하고 이승에서 내 목숨이 오래지 못하겠으니 종이와 붓을 마주 대하기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 보정부 안치죄 이상서

1884년 음력 10월 12일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은 [[흥선대원군]]이 민승호 일가를 폭탄테러로 죽였다고 단정하고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대원군은 바로 비밀편지를 작성하여 아들 이재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인용문|신문지의 경평이([[이세보|경평군]])는 내 편이고, 영익이([[민영익]])는 딴 편으로 말하고, 영익이가 머리 깎았다 하면서 일번 기별하여 원수를 갚는다 하였으니 우습다. 사신청나라로 오는 진주사 을 또 보내어야 되지, 안보내면 상감이 불효의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니 부디 주선하되 (올수 있으면) 너더러 들어가라

1884년 날짜 미상,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 {{인용문|나가고 안이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상감 쳬면이 쳔하의 빗치 나기시니 부디 잘 알외어니 일신을 살려다고....
(나 되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상감의 체면이 천하에 빛이 나겠으니, 부디 잘 아뢰어 내 한몸을 살려다오)

1884년 날짜 미상, 보정부에서 몰래 쓴 편지}}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흥친왕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출국,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다 귀국하였다. ==== 이재면 추대 미수 사건 ==== 1883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5h3642b daum 사전] 대원군은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조선 고종|고종]]을 폐위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재선]]과 이재면을 옹립하려던 추대기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흥선대원군]]은 장손인 [[이준용]]을 추대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용]] 추대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이후 흥친왕과 고종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 장년기 === ==== 갑신정변의 실패와 은거 ==== {{본문|갑신정변}} [[1894년]](고종 31) [[6월]] 특별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여 영종정경과 영돈녕부사를 역임했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에 의해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개화파]]와도 인간 관계를 형성했던 그는 정변 내각의 [[의정부]][[좌찬성]](左贊成) 겸 좌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만에 진압되었고, 그도 좌찬성 겸 좌우참찬에서 해임되었다. 판종정경의 직위를 받았으나 [[갑신정변]] 당시 고위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민씨 일파의 공격을 받았으며, 정변 관련자들과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형이라는 이유로 불문율에 붙여진다. 그 후 흥친왕은 7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1887년]] [[12월]] 첫 부인 풍산홍씨와 사별하였다. 상처한 그는 57세에 20세인 여주이씨 이인구의 딸과 결혼하였다. 여주이씨는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연하였고, 며느리인 [[광산 김씨]]보다도 5년 연하였다. 결국 [[운현궁]]의 살림은 며느리 광산 김씨의 몫이 되었다.며느리 광산 김씨 역시 아들 이준용의 재취였다. ==== 운현궁 칩거생활 중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a/Leejunyong-1918.jpg/150px-Leejunyong-1918.jpg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7월 14일]] 특별 가자되어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7월 15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됐다. [[8월 13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궁내부 대신을 거쳐 [[1895년]] [[8월]]에 다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 을미사변 전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9/The_murderers_of_Empress_Myeongseong.jpg/220px-The_murderers_of_Empress_Myeongseong.jpg {{참고|을미사변}}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난에 가담하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제거되자, 그는 [[흥선대원군]]과 주한[[일본]]공사관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밀약에 의해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제1차 김홍집 내각)의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1/%EB%8C%80%ED%95%9C%EB%AC%B8_%EC%95%9E_%EB%AA%85%EC%84%B1%ED%99%A9%ED%9B%84_%EA%B5%AD%EC%9E%A5%ED%96%89%EB%A0%AC-1897.gif/210px-%EB%8C%80%ED%95%9C%EB%AC%B8_%EC%95%9E_%EB%AA%85%EC%84%B1%ED%99%A9%ED%9B%84_%EA%B5%AD%EC%9E%A5%ED%96%89%EB%A0%AC-1897.gif [[명성황후]]의 국장 때 그는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 빈전에서 왕과 왕자들이 곡을 할때 왕의 가까운 친척으로써 상복을 입고 곡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초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을 사퇴한 뒤, 총호사(總護使)에 임명됐다가 2월 중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퇴거,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이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임명되었다. [[1898년]] [[1월]]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에 이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임종을 지켰다. [[흥선대원군]]은 죽기 직전 어가가 대궐을 떠났느냐며 고종의 행차 여부를 물었으나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사망한 직후에도 고종에게 아버지의 임종을 알렸다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침묵하였다. === 생애 후반 === ==== 대한제국 수립 이후 ==== [[1899년]](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면서 [[9월 1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사도세자의 4대손에 해당되는 자손들은 현주에서 옹주로 격상되거나 생전 품계보다 높은 품계를 받았다. 동시에 군의 작위를 받지 못한 고종의 동항렬 인사들은 군의 작위를 받았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1900년]](광무 4년) [[4월]]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이재면이 [[을미사변]]에는 직접 참여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나, 을미사변으로 생겨난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역임한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한동안 벼슬이 없던 그는 생활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韓國의 名建物 (2) 雲峴宮", 경향신문 1984년 10월 10일자 9면, 생활/문화면 [[1902년]] [[일본]]에 망명중인 장남 [[이준용]]으로부터 생활비 지원요청을 받자 그는 임정규를 통해 충분하지 못한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1p [[1907년]]까지 이재면은 별다른 관직도 직업도 없이 생계가 곤란하였다. 하지만 이준용은 망명지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 이재면을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재면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여 왕족으로 예우함과 동시에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1907년 그는 동생 고종으로부터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 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907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육군]] 부장(副將)에 임명됐다. 이어 일본에 보내는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되고, 아들 [[이준용]]은 육군 참장에 임명되어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11월 보빙사절단 과 수행원 [[이준용]], [[이달용]] 등을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1909년]] [[대훈금척대수장]](大勳金尺大綬章)을 받았다. ==== 친왕 진봉과 강제 병합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6/66/Heungchin2.JPG/180px-Heungchin2.JPG [[1910년]] 8월 15일 한일합방 조약 서명을 불과 수일 앞두고 흥왕(興王)에 봉해져 이름을 이재면에서 이희(李熹)로 고치고, 합방 공포 하루 전인 28일에 책봉식을 가졌다. 책봉식 다음날 일제에 의해 왕에서 강등, 세습할 수 있는 공(公)족으로 분류되어 이희 공(李熹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이미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의 지위에 있던 아들 [[이준용]]은 그의 작위와는 상관없이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한일 합방 직후 막대한 양의 합방 공채금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별도로 협력하거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 사망 ==== 운현궁의 이로당에서 거주하다가 [[1912년]] [[9월]] 병세가 위독해졌고 순종은 전의(典醫)를 그의 집에 보내 왕진(往診)을 시켰다.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이태왕 고종은 자신의 어의(御醫)를 보내 흥친왕을 진료하게 했다. 그러나 병세는 심해져 [[1912년]] 양력 [[9월 9일]]에 67세를 일기로 [[운현궁]] 정침에서 병으로 병사하였다. 어느 병환으로 사망했는가 여부는 알려져있지 않다. 그가 죽으면서 그의 [[공작 (작위)|공작]]의 지위는 아들 [[이준용]]이 상속하였다. 소생으로 영선군 [[이준용]], [[이문용 (왕족)|이문용]]과 딸 1명을 두었다. 흥친왕이 죽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친히 그의 빈소에 가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처음 그의 시신은 [[경기도]] [[김포군]] [[고란대면]](古蘭臺面) 풍곡리 야산 좌곤(坐坤)에 안장되었다가, [[1921년]] [[9월 1일]]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되었다. 이때 처음 [[광주군]] [[세촌면]] 수곡리 계좌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양주군]] [[회암면]] [[회암리]](후일의 회천읍 회암리)에 안장되었던 부인 풍산홍씨 역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 그의 묘소 북서편, [[이우 (1912년)|이우]]의 묘소 우측 언덕에 후일 [[흥선대원군]] 내외의 묘소가 이장, 조성되었다. === 사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b/b3/Heungchinwang.jpg/200px-Heungchinwang.jpg 이재면의 거처는 운현궁의 영로당이었다. 그가 거처하던 [[운현궁]]의 영로당은 [[1917년]] 그의 아들 [[영선군]] [[이준용]]이 오랜 병치레 끝에 사망하자,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가 그의 주치의에게 사례로 주었다 한다. 이 주치의는 김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김영무와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의 아버지이다. 두 번째 부인 여주이씨는 29세에 남편을 잃고 종친회의 도움으로 혼자 살아가다 [[1978년]] [[1월 8일]]에 운현궁에서 사망했다. 한편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한 뒤에도 그는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저씨뻘 되는 [[이재완]] 등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국왕]]의 친형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신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객들의 [[일본]]행도 막지 못한 점, [[일본]] 망명 중에 아버지이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42쪽. [[1920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되었다. 신도비는 [[1919년]] [[5월]] 세워졌다. 초창기에는 이희공전화 신도비명이라고 세웠지만초기의 탁본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훗날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고 [[1948년]] 신도비를 다시 세울 때는 흥친왕신도비로 제목 3글자가 바뀌어져서 세워졌다. == 기타 == === 친일 행적 논란 === [[2006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회의에서 대한제국 황족 대표로 참석해 조약 체결에 동의하는 데 가담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47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88http://www.ytn.co.kr/_ln/0103_200910051412251653 했다는 것이 그가 친일파로 지목된 이유였다. 그러나 흥친왕의 친일 행적이나 은사금 수령이 일제에 의한 회유책이지 흥친왕의 자발적인 행적은 아니라는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2007년]] [[1월 18일]] 이재면의 증손 이모씨가 자신의 증ㆍ조부의 행위를 친일행위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23704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해 구한말 자신의 증조부와 조부의 행적을 친일행위로 규정해 발표하자, 2006년 11월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 등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782211&cDateYear=2009&cDateMonth=10&cDateDay=05http://news.mk.co.kr/v3/view.php?year=2009&no=517181 1월 18일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이씨는 소장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증조부와 조부의 행위를 일제 강점기하에서의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한 근거법률인 반민족특별법이 위헌이기 때문에 이 결정은 효력이 없어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결정이 위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후 제출할 위헌심판제청신청서에서 자세하게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009년]] [[10월 5일]] 그의 증손이 낸 소송은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되었다. [[2009년]] [[10월 5일]] 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통한 후손의 인격권 침해는 법률조항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른 결정과 사료의 공개라는 구체적인 집행행위를 매개로 발생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행정소송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결정했다. "사자(死者)인 조사대상자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있으면 사자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의 인격상을 형성하고 명예를 지켜온 후손의 인격권도 제한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는 일반 행정소송의 방법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기본권 침해의 직접성을 부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 사건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은 해당 법률 조항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른 결정과 이에 수반되는 조사보고서 및 사료의 공개라는 구체적인 집행행위를 매개로 비로소 발생한 것"이라며 "이는 일반 행정소송의 방법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이씨의 심판 청구는 기본권 침해의 직접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으로 인해 조사대상자 및 그 후손의 인격권이 제한받게 되더라도 이는 부수적 결과에 불과할 뿐 이것을 두고 일종의 형벌로서 수치형이나 명예형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따라서 청구인의 기본권 침해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수록되었다. === 은사금 논란 === [[친일파]]나 적극적인 친일본 인사는 아니었으나 [[한일 합방]] 직후 83만 엔(2010년 대한민국 기준 166억 원)이라는 거액의 은사금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41120011&code=940100 을 받아 논란이 되었다. 이는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완용]]이 받은 15만 엔, [[정미칠적]] 가운데 한 사람인 [[송병준]]이 받은 10만 엔의 약 6, 7배에 해당되는 액수라 지탄받는 원인이 됐다. == 상훈 == * [[1907년]]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 * [[1907년]] [[대한제국]] [[대훈위 서성대수장]](大勳位瑞星大綬章) * [[1909년]]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 가족 관계 == {{운현궁 가계도}} * 할아버지 : [[남연군]]([[1788년]] ~ [[1836년]]) * 아버지 : [[흥선대원군|흥선대원왕]](興善大院王, [[1820년]] ~ [[1898년]] [[2월]]) * 어머니 : [[여흥부대부인|여흥대원비 민씨]]([[1818년]] ~ [[1898년]] [[1월]]) * 첫째 부인 : 풍산 홍씨(豊山 洪氏, [[1844년]] [[4월 8일]] ~ [[1887년]] [[12월 19일]]), [[통덕랑]](通德郞) 풍산인(豊山人) [[홍병주]](洪秉周)의 딸. ** 장남 :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 [[1917년]]) ** 며느리 : 군부인 증 흥친왕비 남양홍씨, 판서(判書) 남양인(南陽人) [[홍종석]](洪鍾奭)의 딸. *** 양손자 : [[이우]]([[1912년]] ~ [[1945년]]), 조카 [[의친왕]]의 차남 *** 양손부 : [[박찬주]], [[박영효]]의 손녀 ** 며느리 : 광산김씨([[1878년]] ~ [[1955년]]), 광산인(光山人) [[김재정]](金在鼎)의 딸. ** 첩며느리 : 이옥경 [[조선총독부|총독부]] 간부나 고위 장성과 어울려 친일 행각을 벌였다.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 ** 첩며느리 : [[전순혁]] *** 서손녀 : [[이진완]] (李辰琬, [[1916년]] ~ [[1997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과 결혼) *** 서손녀사위 : [[윤원선]](尹源善, [[1910년]] ~ [[1971년]]) ** 2남 : [[이문용 (왕족)|이문용]](李𪣢鎔, [[1882년]] ~ [[1901년]]) ** 며느리: 정부인 김씨(貞夫人 金氏), 교관(敎官) 김병일(金炳日)의 딸. ** 장녀 : 왕녀 이씨, 작호 없음, 군수(郡守) [[김인규]](金仁圭)에게 출가. *** 외손자 : 김진숙(金鎭宿) *** 외손자 : 김효진(金孝鎭) ** 2녀 : 왕녀 이씨, 작호 없음(? - [[1924년]] [[8월 21일]], 비서승(秘書丞) [[김두한]](金斗漢)에게 출가.) * 둘째 부인(계실) : 흥친왕비 여주 이씨(驪州 李氏, [[1883년]] [[6월 7일]] ~ [[1978년]] [[1월 8일]]), 참봉(參奉) 여주인(驪州人) [[이인구]](李麟九)의 딸. * 첩실 : [[채시라|중대부인]] ** 3녀 : 왕녀 이씨, 작호 없음, 주사(主事) [[김규정]](金奎定)에게 출가. * 동생 :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1852년]] ~ [[1919년]]) * 서모 : 계성월(? ~ ?) ** 서형 :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 1842년 ~ [[1881년]]) ** 서형수 : 군부인 신씨(郡夫人申氏, [[1844년]] [[8월]] ~ ?) *** 서조카 : [[이관용 (황족)|이관용]], 이창화 ** 이복 여동생 : 이씨(李氏, ? - [[1869년]]) ** 이복 매제 : [[이윤용]], [[이호준 (조선)|이호준]]의 서자, [[이완용]]의 서형 * 서모 : 추선(秋善, 또는 초선, ? ~ [[1885년]] [[8월]]) * 처부 : [[홍종석]](洪鍾奭) * 처부 : [[이인구]](李麟九, [[1856년]] [[10월 26일]] - ?) == 평가 == 호탕한 성격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나 아들 [[이준용|영선군]]과는 다르게 유유한 성격을 가진 호인형의 인물이었다. 그는 위험한 줄타기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처신으로 천수(天壽)를 보존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28/2008032801159.html 한때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그를 추대하고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호인적인 성격만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뒤에 아들 [[이준용|영선군 준]]이 동생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대안자로 지목되면서 [[이준용]]과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사이에서 방관자로 남았다. == 흥친왕을 연기한 배우들 == * [[이원재 (1958년)|이원재]] - 《[[대원군 (드라마)|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1990년]] - [[MBC]] 드라마 * [[이문환]] - 《[[찬란한 여명]]》, [[1995년]] - [[KBS]] 드라마 * [[한범희]] - 《[[명성황후 (드라마)|명성황후]]》, [[2001년]] - [[KBS]] 드라마 * [[정재곤]] - 《[[장사의 신 - 객주 2015]]》, [[2015년]] - [[KBS]] 드라마 == 관련 항목 == {{Col-begin}} {{Col-3}} * [[흥선대원군]] * [[여흥부대부인]] * [[운현궁]] * [[대한제국 고종|고종]] * [[대한제국 순종|순종]] * [[흥인군]] * [[이재선]] * [[명성황후]] * [[이준용]] * [[이관용 (황족)|이관용]] {{Col-3}} * [[을미사변]] * [[아관파천]] * [[갑신정변]] * [[의친왕]] * [[영친왕]] * [[귀인 이씨]] * [[귀인 장씨]] * [[김홍집]] * [[홍영식]] * [[윤치호]] {{Col-3}} * [[을미사변]] * [[박영효]] * [[이우]] * [[박찬주]] * [[완친왕]] {{Col-end}}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꺾쇠표=예 |연도=2006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출판위치=서울 |쪽=162~170쪽 |장=이재면 |장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LEEJEAMYUN.pdf }}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01100094 == 각주 == == 참고 문헌 ==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일성록 * 승정원일기 * 고종시대사 * 조선신사명감(朝鮮紳士名鑑) * 국조방목 * 한국통사(박은식 저) == 관련 서적 == * 석파학술연구원,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전4권)》 (현음사, 2005) * 김제방, 《흥선 대원군·명성황후》 (지문사, 2003) *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 강병 정책 연구》 (연갑수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ISBN|978-89-521-0240-9}} * 연갑수, 《고종대 정치변동 연구》 (일지사, 2008) {{전임후임 |전임자 = [[흥선대원군|이하응]]
(흥선대원왕) |후임자 = [[이준용 (1870년)|이준용]]
(영선군) |대수 = 2 |직책 = [[운현궁]] 종주 |임기 = [[1898년]] ~ [[1912년]]| }} [[분류:1845년 태어남]][[분류:191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외교관|이희]] [[분류:유교 신자|이희]][[분류:과거 급제자|이희]][[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대한제국의 부장]][[분류:대한제국의 친왕]][[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육군 장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한국의 귀족]][[분류:테러 피해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전주 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운현궁]][[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영선군|영선군]][[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서성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19세기 한국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