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정보 |이름 = 현석문 가롤로 |출생일 = [[1797년]] |사망일 = [[1846년]] [[9월 19일]] |축일 = [[9월 20일]]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 = [[서울]]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 |사망지 = [[서울]] [[새남터]] |직업 = 순교자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상징 = |수호 = |매장지 = |성당 = |기도 = }} '''현석문'''(玄錫文, [[1797년]] ~ [[1846년]] [[9월 19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가롤로'''(Carolus)이다. 그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신부]]가 [[순교]]하고 사흘 뒤에 순교하였다.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를 [[조선]]에 데려오고 [[샤스탕]] 신부를 도와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함께 한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 생애 == === 출생과 가문 === 현석문은 [[1797년]]에 [[한양]]에서 [[중인]] [[신분]]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 되던 [[1801년]]에 [[신유박해]]로 [[순교]]하였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1839년]]에 [[기해박해]]로 옥사하였다. 그의 누나 [[현경련]] 또한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 열심한 신앙생활 === 현석문은 온 생애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돕는데 바쳤다. [[교황청]] 문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기린다.: {{인용문2|그는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고덕과 온화하고 친절하며 순박한 성품을 지녔다.}} 현석문은 순교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조선 헌종|헌종]] 2년([[1836년]])에 [[의주]]로 가서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맞아들였다. [[1837년]]에 [[샤스탕]] [[사제|신부]]가 입국하자, 현석문은 그의 [[복사 (기독교)|복사]]가 되어 신부와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한편,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썼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될 때에, 현석문은 [[관아]]에 [[자수]]하기를 원했지만, [[선교사]]들이 그를 말렸고 살아남아서 교우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될 때, 현석문은 [[한양]]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는 [[순교]] 전에 [[조선]]의 [[교회]]를 맡겼다. 이 사실은 주교와 교우들이 그를 얼마나 크게 존경했는지를 보여준다. 현석문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재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격려했고 여러 [[선교]]지들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아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뒷바라지 하였다. ==== 기해일기의 편찬 ==== 그는 아내와 누이가 순교한 후에 《[[조선]] [[천주교]] [[순교자]] 열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기해박해]]가 끝나자, 그것의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상하이]]까지 피해다니기도 하면서 살아남은 [[최희원]]과 [[모방 베드로|모방]] [[사제|신부]]의 [[복사 (기독교)|복사]] [[최형 베드로]],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 등의 협조를 받아 [[순교]] 자료를 모아서 확인 및 보충 정리하여 3년 만에 단편의 《[[기해일기]]》를 완성하였고 교우들에게 배포하였다. ==== 상하이 왕래 ==== 그는 빈번히 [[베이징]]으로 전령을 보내 [[선교사]]들과 연락하였다. [[1845년]] 그는 [[부제 (기독교)|부제]] [[김대건]]과 함께 작은 나무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는 험란한 항해에 동참하였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맞아들였다. 현석문은 [[한양]]으로 돌아온 뒤, 위험을 무릅쓰고 김대건 [[사제|신부]]의 집을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였다. [[1846년]]에는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현석문은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새로운 집을 구입하여 교회의 모든 재산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 있던 여성 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다. ==== 체포 및 투옥 ==== 며칠 후에 그의 새 집에서 포졸들이 손쉽게 그를 체포하였는데, 이삿짐을 나르던 인부들이 고발하였기 때문이었다. [[7월 11일]] 포졸들이 그 집을 급습할 때, [[김임이 테레사]]와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카타리나]] 그리고 [[우술임 수산나]] 등 몇 명의 여성 신도도 있었으므로, 그들도 모두 함께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현석문은 교우 수감자들을 격려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현석문이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고문을 면제 받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관찬 기록(《[[헌종실록]]》)에 따르면,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음력 7월 20일]])에 [[참수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관찬 기록(《[[승정원일기]]》)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군문효수형]]도 선고받았다고 전한다. === 순교 === 현석문은 [[1846년]] [[9월 19일]]에 [[한양]]의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았고 [[군문효수]]되었다. [[김 카타리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평온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2세였다. == 시복 · 시성 == 현석문 가롤로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백과사전 인용 |url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 |제목 =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백과사전 =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확인월일 = 2014-12-25 |인용문 = }} [[시복|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2-25 }}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고 문헌== {{글로벌세계대백과}} *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985&keyword=%C7%F6%BC%AE%B9%AE&gubun=01 가톨릭 사전: 현석문] * [http://english.cbck.or.kr/Saints103/349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현석문 가롤로 Carolus Hyon Song-mun]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35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석문] {{각주}} [[분류:1797년 태어남]][[분류:1846년 죽음]][[분류:연주 현씨]][[분류:조선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