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정보 | 이름 = 하규일 |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f/%ED%95%98%EA%B7%9C%EC%9D%BC.jpg | 예명 = | 본명 = | 출생 = 1867년 | 출생지 = | 국적 = | 사망 = | 사망지 = | 장르 = | 직업 = [[가수]] | 악기 = | 활동시기 = ? ~ [[1937년]] | 레이블 = | 소속사 = | 관련활동 = | 웹사이트 = }} '''하규일'''(河圭一, [[1867년]]~[[1937년]])은 근세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가곡 (한국 음악)|가곡]] 명창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성소(聖韶), 호는 금하(琴下)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 생애 == 여섯 살 때부터 10여 년간 한문을 공부하고, 집안의 영향을 받아 가곡을 공부했다. 숙부 하준권(河俊權), 재종(再從) 하순일(河順一)이 모두 가곡의 대가였다. [[1885년]]에는 하준권의 제자 최수보(崔壽甫)에게 배웠고, 다음에는 가곡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가곡원류]]》의 저자 [[박효관]]에게서 가곡을 닦았다. 나쁜 성대를 가졌으나 피나는 노력으로 성대를 바로잡고 근세 가곡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한편, 관리로는 [[1901년]] 한성소윤(漢城少尹) 겸 한성 재판소 판사로 있었고, [[1909년]] 내장원 문교 정리위원(內藏院文敎整理委員), 전남 독쇄관(督刷官), [[1910년]] 진안군수(鎭安郡守) 등을 역임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 관직을 그만두고, [[1911년]]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調陽俱樂部)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함재운(咸在韻), 명완벽(明完璧), 김인식(金仁湜) 등과 함께 연주·교육·편찬 등 국악 사업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당시 정악의 명인들로 구성된 수요회(水曜會)를 조직하여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고, [[1926년]]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십여 년간 가곡 전수에 헌신하였다. 그는 가곡의 명창으로뿐 아니라 오늘날 가곡의 전통이 이어져 오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 《가곡필휴(歌曲必携)》가 있다. {{2000년-이 달의 문화 인물}}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토막글|음악가}} [[분류:1867년 태어남]][[분류:1937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가곡 명창]][[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진양 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