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정보 | 이름 = 피수영 | 현지어표기 = 皮守英 |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43|2|28}} | 출생지 = {{국기|일제 강점기}} [[경성부]] | 본관 = [[홍천 피씨|홍천]](洪川) | 복무 = {{육군|대한민국}} | 정당 = [[무소속]] | 복무 기간 = [[1967년]] ~ [[1975년]] | 최종 계급 = [[파일:소령.JPG|40px]] {{KOR}}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령]] | 근무 = [[서울대학교병원|서울대학교 병원]] 소속 [[군의관]]
국군수도통합병원 소속 [[군의관]] | 지휘 = 군의무장교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베트남 전쟁]]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바오로) | 배우자 = 有 | 자녀 = 피윤범(장남), 피윤성(차남) | 부모 = [[피천득]](부), 임진호(모) | 친척 = 피세영(형)
[[피서영]](누이동생)
로먼 재키브(매제)
[[스테판 피 재키브]](생질)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졸업]]
[[소아과]] [[의사]] 겸 [[대학 교수|의과대학 교수]]
[[소아과|소아내과의학교육 저술가]]
[[미네소타 대학교|미국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대학 교수|객원교수]]
[[서울아산병원|서울아산병원 예하 소아신생아병원]] 원장
[[울산대학교|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명예교수]] | 웹사이트 = }} '''피수영'''(皮守英, [[1943년]] [[2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의과대학]] [[대학 교수|교수]] 및 [[소아과]] [[의사|전문의]]이다. == 이력 ==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이며 [[미네소타 대학교|미국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객원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1년간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한 피수영은 대한민국 신생아학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며, 대한민국의 신생아 치료 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부친은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수필가 [[피천득]](皮千得)이다. == 학력 ==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학사|사]]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석사]]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 경력 == * 1967년 3월 ~ 1972년 2월 : [[서울대학교병원]] 소아과 전공의 * 1972년 ~ 1975년 :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소령]] 제대) * 1978년 7월 ~ 1980년 6월 : [[유타 대학교]] 부속병원 신생아학 전임 * 1980년 7월 ~ 1995년 8월 : [[미네소타 대학교]] 의과대학 임상부 교수, 둘루스클리닉 신생아과 과장 * 1995년 9월 ~ 2008년 : [[서울아산병원]] 신생아과 교수 * 2001년 ~ 2003년 : 대한신생아학회 회장, 명예회장(현) == 활동 == 피수영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미네소타 대학교]] 외과대학 소아과 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1996년 대한민국의 신생아학회를 탄생시킨 실질적인 주역으로, 신생아 진료 분야를 세계적 수준으로 향상시켰으며, 대한신생아학회 및 대한주산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피수영 교수는 많은 극소·저체중 출생아(일명 '미숙아, 체중 1.5kg이 되지 않은 신생아를 이르는 용어)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낸 명의(名醫)로 불린다. 피 교수는 20여 년간 [[유타 대학교]] 부속병원 등 [[미국]] 내 여러 병원을 거치면서 의술을 쌓았다. 미국에서도 그의 의술은 명성이 높았다. 그가 살았던 미네소타에선 지금도 "피 박사(Dr. 피), 당신이 내 아이를 살렸어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피수영은 인터뷰를 통해 "미국을 떠나 10년 후에 내가 살던 동네 서점에 갔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당신 피 박사 아니냐’고 그래서 ‘날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12살 먹은 아이를 불러와서 ‘당신이 살려준 애다’하였다. 그때 의사 하길 잘 했다, 보람이 있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피수영은 1995년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면서 국내의 수많은 미숙아들을 살리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2000년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 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를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서울아산병원의 의료진은 미국 의사들이 "너희들은 이런 아이들까지 살리느냐"고 할 만치 위험한 상태의 미숙아를 살려내기도 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를 거부하는 부모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나도 백내장에 걸려 치료도 못 받는데 아기를 살려서 뭐하냐"는 아기 할아버지의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땐 피 교수가 "미숙아도 생명이다"라며 자기 돈을 들여 아이를 살려냈다고 한다. 피수영 교수는 '더 이상 경제적 이유로 미숙아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바람으로 유명 탤런트 등 몇몇 지인들과 몇백 만원씩 모아서 1억5000만원을 아산사회복지재단에 기부했다.[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071222083196938 피수영 교수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피천득'], 《머니투데이》, 2008년 7월 25일 2008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신생아학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서울아산병원 피수영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국제심포지엄이 서울아산병원 대강당에서 열렸다.[http://www.whosaeng.com/sub_read.html?uid=23675 서울아산병원, 피수영 교수 정년 기념 심포지엄], 《후생일보》, 2008년 10월 24일 == 가족 관계 ==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낸 아버지 [[피천득]](皮千得)과 어머니 임진호(林珍鎬)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 [[피천득]](皮千得)의 1965년 수필 〈피가지변(皮哥之辯)〉에서 "… 피(皮)씨의 직업은 대개가 의원이요, 그 중에는 시의(侍醫, 임금·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도 있었다는 것이다. …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 아이는 옥관자는 못달더라도 우간다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올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수필에 나오는 아이가 바로 당시 23세로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피천득]]의 차남 피수영이다. 피수영은 부친 [[피천득]] 선생에 대해 '순간의 배부름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강인한 기상을 자식들에게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또 "꼿꼿함과 선비다움을 가풍으로 물려줬다"고 말했다. * 피수영 교수는 미국에서 신생아과 전임의(醫)로 자리잡은 38살이 돼서야 결혼하고, 늦은 나이에 두 아들을 얻었다. 장남 피윤범·차남 피윤성이다. 맏아들 피윤범은 [[뉴욕대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영화를 공부하였고, 차남 피윤성은 [[미국]] 명문인 [[코넬 대학교]] 법대를 다녔다. == 방송 출연 == === 텔레비전 프로그램 === * [[2005년]] [[4월 1일]] [[KBS 제1TV]] <[[신화창조의 비밀]]> [http://medical.amc.seoul.kr/medservice/mednews/noticeView.do?biid=notice&id=2185 신화창조의 비밀], 《서울아산병원》, 2005년 3월 15일 == 각주 == {{토막글|의학|교육인}} [[분류:1943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순천향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울산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홍천 피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