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홍'''(崔昌弘, 일본식 이름: 廣田昌弘, [[1903년]] [[5월 7일]] ~ [[1951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이다.
== 생애 ==
[[1925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1934년]] 10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고 [[1936년]] [[5월 21일]] [[경기도]] [[장단군|장단]][[군수]]로 임명되었다.
[[1937년]] [[2월 20일]]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로 임명된 뒤부터 군용 자동차 징발 및 운전수 징집, 지하자원 개발 및 공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및 검거, 국내 물자 조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8년]]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간사를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1월 24일]] [[경상남도]] 이사관 겸 [[경상남도청]] [[내무부]] 학무과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경상남도]] 내무부 전무과장(1941년 8월 18일 임명), 도청 전매국 제조과장(1943년 9월 30일 임명)을 역임했고 [[1943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서기관 겸 재무국 전매사업과장, [[1944년]] [[11월 22일]] 재무국 연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학도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근로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농업계획위원회 간사, [[조선철도간선긴급증강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는 동안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1945년]] [[5월 11일]] [[충청북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고등관 3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참고 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8|연도=2009
|id=
|출판위치=서울
|쪽=485~492
|장=최창홍
|장url=
}}
{{전임후임|
|전임자 = -
|후임자 = [[구연직]]
([[충청북도 부지사|충청북도 민정관]])
|대수 = 1
|직책 = [[충청북도 부지사]]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5년]] [[9월 2일]]
}}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분류:1903년 태어남]][[분류:1951년 죽음]][[분류:대한제국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