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욱'''(崔泳旭, 1891년 ~ 1950년)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의사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 언론인이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 후 최초의 [[전라남도]] [[부지사]]였으며, [[1946년]]에는 [[전라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투옥됐다가 학살당했다.
목사 [[최흥종]]은 그의 이복 형이고,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은 그의 처형 [[김순애]]의 남편이다. 음악가 [[정율성]]과도 사돈이 된다. 본관은 [[탐진]](耽津)이며,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 생애 ==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光州)에서 최학신(崔學新)과 공(孔)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대학 졸업 이후 다시 [[캐나다]]로 건너가 [[토론토 대학]]에 입학, 수학하였다. 목사이자 전국의 나병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최흥종]](평양신학원 졸업)은 10년 연상의 이복 형이었다.
귀국 후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를 거쳐 [[광주광역시|광주]] [[제중병원]]장을 지냈다. 이후 [[광주부]] 에 [[서석병원]](瑞石病院)을 개원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군정에 반감을 품은 주민들을 잘 설득하여 유혈사태가 번지는 것을 막았다. [[9월 2일]] 그는 [[미군정]]의 신임을 얻어 초대 [[전라남도]][[부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라남도청]] 내에서 [[영어]]에 유창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던 그는 미군과 한국인, 일본인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그는 즉시 지방의 지인들 중 일꾼이 될 만한 이들을 전라남도 미군정에 추천하였다.
군정 초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의 도움은 유익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군정 부지사로 임명되었다. 군정 당국은 인민 위원회를 참을성 있게 조종함으로써 활동적인 그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신복룡, 김원덕, 《한국 분단 보고서 1》 (풀빛, 1992) 138페이지] 이어 형 [[최흥종]]과 처 김필례 (미국 컬럼비아 대학 석사)가 [[전라남도]] 도청 고문관과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2일]]부로 도지사직을 사퇴했던 전임 도지사 야기 노부오(八木信雄[12월 4일까지 광주에 체류하고 있었다.])와 일본 패전 직전 [[전남도청]] 재무국장인 임문석(林文碩)의 강력 추천으로 그는 도지사 대리에 임명되었다. [[10월 27일]] 그는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군정실시를 선포하고 전라남도 경찰협회에서 운영하던 소록도와 애양원의 운영권을 인수하고 후에 윌슨 의사(형 [[최흥종]]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던 광주지역 선교사)에게 모든 업무를 위임하는 것을 적극 후원하였다.
[[1946년]]에는 한국인 부처장을 임명할 때 [[전라남도지사]]에 임명되었다. 전남지사에서 물러난 뒤 다시 [[서석병원]]을 운영하였으며, [[1947년]]에는 [[호남신문사]]장으로 언론 활동에 투신하였다. [[1950년]] [[4월]] [[광주]]에서 제2대 국회의원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6‧25 전쟁]] 도중 [[1950년]] [[7월]] [[북한 인민군]]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부인 김필례(金弼禮)는 이후 육영사업으로 일생을 보냈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최학신(崔學新)
* 어머니 : 공씨 - 아버지 최학신의 두번째 부인
**[[최흥종]](崔興琮, [[1880년]] [[5월 2일]] - [[1966년]] [[5월 14일]])
* 부인 : 김필례(金弼禮, [[1891년]]~[[1983년]]), 1927년 [[근우회]] 창립멤버,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장, 서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교장및 이사장
* 처형 : [[김순애]]
* 동서 : [[김규식]]([[1881년]] - [[1950년]])
== 평가 ==
도지사 재임시절 그는 청렴결백하게 도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씨 도청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훗날 정직하고 청렴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일화를 남겼고 청렴결백한 도지사로 알려져 있다.
== 관련 항목 ==
* [[서민호]]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참조 ==
{{각주}}
{{전임후임|
|전임자 =
|후임자 = H.H. 바트렛(H.H. Bartlett)
|대수 = 1
|직책 = [[전라남도|전라남도 부지사]]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5년]] [[10월 26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율리우스 린트너]]
|후임자 = [[랄프 F. 갤러기]]
|대수 =
|직책 = [[전라남도지사|미군정 전라남도지사 대리]]
(한국인 도지사로도 불렸다.)
|임기 = [[1945년]] [[12월 3일]] ~ [[1946년]] [[1월 19일]]
}}
{{전임후임|
|전임자 = H.H. 바트렛(H.H. Bartlett)
|후임자 = [[원응상]]
|대수 = 3
|직책 = [[전라남도|전라남도 부지사]]
|임기 = [[1946년]] [[1월 23일]] ~ [[1946년]] [[2월 14일]]
}}
{{전임후임|
|전임자 = 랄프 F. 갤러기
|후임자 = [[서민호]]
|대수 = 6
|직책 = [[전라남도지사|미군정 전라남도지사]]
|임기 = [[1946년]] [[2월 15일]] ~ [[1946년]] [[10월 16일]]
}}
[[분류:1891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전라남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