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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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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천경자(千鏡子)||
|| '''출생'''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
|| '''사망''' ||[[2015년]] [[8월 6일]](향년 90세), [[미국]] [[뉴욕(주)|뉴욕 주]] [[뉴욕|뉴욕 시]] ||



이름 천경자(千鏡子)
출생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
사망 2015년 8월 6일(향년 90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본관 영양 천씨
학력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미술학
소속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자녀 2남 2녀
공식웹사이트 http://www.chunkyungja.org

목차

개요

대한민국화가수필가. 환상적인 세계관을 결합시킨 짙은 색채의 채색화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많은 수의 수필집들도 집필하여 생전부터 큰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화가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미술사상 최악의 위작 시비로 인해 일시적인 절필 선언 등 상당한 수난을 겪기도 한 화가이다. 위작 시비에 대해서는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 항목 참조.

자세한 건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참조.#

활동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출생했다. 이후 1944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서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화단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후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 학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으로 수필가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부터 발표한 수필을 모아 1955년 첫 수필집 "여인소묘"를 출판하기도 했고 남태평양을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자신의 데셍 삽화와 함께 출판한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를 출판하기도 했다. 평생 발표한 저서만 10권이 넘을 정도로, 지금은 대부분 절판됐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또한 한말숙, 박경리 등 문인들하고도 각별히 교류하였다.

그녀는 동양화가이면서도 대담하게 밝은 색채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 공부해서 지나치게 왜색물이 들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근데 그시절에 일본에서 공부 안 한 사람이 있기나 하나 이런 그녀의 시대를 앞선 스타일은 그녀를 해방이후 한국 미술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꽃과 여성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한 부분이다.

여성들에게 보수적인 시대였음에도 상당히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수십 년 전에 세계일주를 했을 정도이니. 또한 상당한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에도 담배가 자주 소재로 등장할 정도. 배우 윤여정은 천경자가 맞담배를 허용해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과거에는 회충을 잡아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담배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천경자 집안에는 대대로 애연가가 많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애연가였으며, 천경자의 딸 또한 애연가였고, 모녀 간에 맞담배를 즐겼다 한다.# 참고로 천경자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장녀 이혜선, 장남 이남훈, 차녀 김정희, 막내 김종우[1])
위작시비에 대해 천경자에게 동정적인 기사에서 성격을 묘사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매우 잘해주면서 동시에 두려움과 의심을 갖고 대한다고 했다.

1991년 일어난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창작활동은 파탄을 맞게 된다. 그녀 자신이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잠시 미국으로 요양차 떠나 있었으나, 얼마 뒤 귀국해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였고(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필은 일시적인 것이였다) 1995년 호암갤러리[2]에서 첫번째 회고전(11.1~11.30)을 개최한다. 당시 회고전은 굉장한 화제가 되어서 전시장 매표소에서 시작된 줄이 호암갤러리 밖 서소문 거리에까지 이어졌을 정도였고, 한달 동안 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마지막 주말에는 하루 5천명까지 입장하였다고 한다[3],[4]. 그러나 1998년 9월 건강이 나빠져 결국 한국 생활을 접고 큰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그동한 가지고 있던 채색화와 드로잉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다[5].

미국으로 떠난 이후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으로 떠난 뒤 그녀의 작품 가격이 치솟아서 2013년 현재도 그녀의 작품은 미술 시장에서 가격이 가장 치솟은 작가로 꼽힌다.[6] 2003년에 호당 1000만원대이던 그녀의 작품은 2013년 현재는 호당 4000만원대를 호가한다는 것.[7] 그녀가 1998년 미국으로 떠난 뒤 공개적인 작품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가는 계속 될 거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탓에 그녀의 작품의 다른 위작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러다 2003년 뇌일혈을 일으켜 거동은커녕 말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작품활동은 중단되었다. 이후 2006년 갤러리 현대[8]에서 장녀 이혜선의 협조로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채색화와 드로잉, 미완성 작품 등을 모은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고, 2007년에는 새로운 화집 "천경자-그 생애 아름다운 찬가"가 발간되었다[9].

한편으로 그녀는 고향 고흥군에 2007년 드로잉과 판화 66점을 기증하고 고흥군은 이를 고흥군 종합문화회관내에 천경자 전시실을 설치해 전시했으나 고흥군의 무성의한 작품 보존행태에 분노한 그녀는 2010년 작품 반환을 요구했다. 작품에 손상을 가하는 할로겐 전구를 전시실 조명으로 쓰는가 하면 심지어는 청소용구를 보관하는 창고에 작품을 보관하는등의 행태를 듣고 분노한 그녀[10]가 작품 반환을 요구하게 된것. 고흥군은 발뺌하다가 결국 2012년 3월에야 반환을 결정했지만 작품의 상태문제에 대해서 또다시 실갱이를 벌인끝에 12월에야 돌려주는 추태를 보였다.

헌데 2014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천경자의 딸 이혜선씨가 일부러 천경자의 죽음을 숨기고 계속 예술원 수당을 지급받고 있다는 것. 2014년 천경자는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살고 있는 상태. 공예가인 딸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거동은 어렵지만 의식은 있는 상태라고는 하는데... 예술원은 수당 지급 문제로 천경자의 근황을 확인하려고 지난해부터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경자의 의료 기록 등을 요구했다. 이씨는 이 같은 요구가 천경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예술원은 지난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중단했고, 이씨는 회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예술원은 천경자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 처리는 하지 않은 상태다.# 천경자의 딸 이씨의 경우 고흥에 기증했던 작품들도 관리를 허술히 했다는 이유로 천경자미술관 건립을 무산시켰고,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11]. 2014년 6월 27일, MBC의 '리얼스토리 눈'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런데 천경자가 2015년 8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유족들[12]은 천경자의 유골의 위치를 모른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장녀 이혜선 때문이라고 한다. #. 후에 장녀는 어머니의 유골을 허드슨 강에 뿌렸다고 밝혔다# .

2016년에는 작고 1주기를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증작품을 중심으로 한 추모전이 개최되었고, 같은 해 미술평론가 최광진[13]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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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07년 작고. 前세공문고 대표. 이 인연으로 후에 세종문고는 천경자의 화집(1995년판)도 출간했다.
  • [2] 과거 중앙일보사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의 별관이였으나,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하면서 이곳을 중앙일보사에 되돌려 줌에 따라 폐관되었다.
  • [3] 이는 당시 회고전을 기획했던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인 최광진의 저서 "천경자 평전"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 [4] 이러한 흥행은 작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것도 이유이지만, 당시 천경자가 전시장에 거의 매일 직접 나와서 관람객을 맞고 사인을 해 주기도 한 것도 어느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최광진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에 언급된다.
  • [5] 이것을 토대로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는 따로 "천경자실"이 마련되어 천경자의 기증작품들이 연중 상설전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 [6] 경제학적으로 보면 당연한게, 공급은 끊겼는데 수요는 이슈화되면서 올라갔으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사실 상당수 작가들이 죽어서 뜨는 경우가 많다. 재주는 예술가가 부리고 돈은 콜렉터들이 버는 경우도 많다.
  • [7] 하지만 이는 해외예술시장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해외에서야 천억원이 넘는 작품도 경매에서 나오니. 전반적으로 한국예술시장은 규모가 초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외예술시장이 그만큼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봐야겠지만.
  • [8] 1973년, 1974년, 1978년, 1980년에 한번씩 천경자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력이 있다.
  • [9] 다만 비매품이다.
  • [10] 정확히는 그녀의 장녀인 이혜선. 2003년 천경자가 뇌일혈로 병상에 누운 뒤부터 작고할 때까지 사실상 천경자의 대리인 행세를 해 왔다.
  • [11] 당시 기사. 이에 대한 장녀 이혜선의 해명.
  • [12] 정확히는 장녀 이혜선을 제외한 나머지 유족들.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151|기사 에 따르면 나머지 유족들은 어머니의 은행 통장 해지 전화를 받고 나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 [13]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 1995년 천경자 회고전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