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국'''(丁致國, [[1865년]] [[7월 7일]] ~ [[1924년]] [[10월]])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다.
== 생애 ==
[[부산광역시|부산]] 출생으로 젊은 시절 [[인천광역시|인천]]으로 이주했다. 객주업에 종사하여 [[1895년]] 최초의 근대 극장으로 여겨지는 협률사(協律社, 나중에 축항사(築港舍)로 이름을 바꿈)를 세웠을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단층 창고형 건물로 개관한 인천의 협률사는 7년 뒤인 [[1902년]] 개장한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으로 여겨지는 서울 정동의 [[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며 [[애관극장]]의 전신이다.[{{뉴스 인용
|저자=김준기
|제목=애관극장, 국내 최초의 극장 - 110년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꿋꿋이
|출판사=컬처뉴스
|날짜=2005-06-07
}}]
[[1898년]] 대한협동기선회사를 설립하는 등 인천항을 근거 삼아 운수 분야의 기업인으로 활동하던 중, [[1900년]] [[이완용]]의 형이며 세력가이던 [[이윤용 (1854년)|이윤용]]과 함께 해운회사 대한협동우선회사를 설립하고 총무장 겸 인천 지점장이 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협동우선회사는 [[일본군]] 편에서 군수물자와 군인 수송에 참여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군을 도운 정치국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일본제국 육군]]은 상여금으로 30엔을 하사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의 훈장도 받았다.
[[1906년]] 인천항 미곡 거래를 담당하는 근업사를 창립해 사장을 맡고, [[1908년]]에는 인천 조선인상업회의소의 회두가 되는 등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사업가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인천부 참사, [[경기도]] 도평의회원,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맡는 등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적극 협조하는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19년]]부터는 인천금융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운수와 위생, 교육 분야에 공로가 있다며 여러차례 표창장을 비롯한 상훈을 받았다. 1924년 사망했을 때는 유산을 둘러싸고 집안 분쟁이 일어나 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될 만큼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2006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지만 보류되었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연도=2006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출판위치=서울
|쪽=596~603쪽
|장=정치국
|장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6JOSA/KYUNGHAE/JUNGCHIGUK.pdf
}}
* {{뉴스 인용
|저자 = 김윤식
|제목 = 영남 출신 부호 정치국
|url = http://www.incham.net/upfiles/webzine/incham_0505-10.pdf
|쪽 = 35~36
|출판사 = 인참비즈니스뉴스
|날짜 = 2005-05-01
|확인날짜 = 2007-11-27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33110/http://www.incham.net/upfiles/webzine/incham_0505-10.pdf
|보존날짜 = 2016-03-04
|깨진링크 = 예
}}
== 각주 ==
[[분류:1865년 태어남]][[분류:1924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