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정보 |이름 = 전 덕 기 |사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c/Chundg.jpg/220px-Chundg.jpg |출생일 = 1875년 12월 8일 |출생지 = [[한성부]](지금의 [[서울]]) |사망일 = 1914년 7월 23일(40세) |사망지 = [[한성부]](지금의 [[서울]]) |국적 = [[대한민국]] |학력 = [[감리교신학대학교]] |경력 =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교육가 |직업 = [[감리교]] [[목사]] |이름색 = Black |이름글씨색 = |위도 = 37.300023 |경도 = 126.862166 |종교 = 감리교 }} '''전덕기'''(全德基, [[1875년]] ~ [[1914년]])는 대한제국시절 독립협회, 을사늑약 반대시위, 헤이그 밀사 파견, 신민회를 이끈 인물로 2014년 3월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상동감리교회]]의 전도사와 목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정선 전씨|정선]](旌善)이다. [[신민회]]와 [[상동청년회]]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성부]] 출생이다. 상동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독립협회]]의 서무부에 속하여 일하였다. [[이동녕]], 이승만, [[박용만 (1881년)|박용만]] 등과 함께 함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06년]] 상동감리교회에서 설립한 [[공옥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1907년에 교감 [[이회영]], 교사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이준 (1859년)|이준]]과 상동감리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특사 사건|헤이그 거사 계획]]을 성사시켰다. 역시 같은 해, 감리교 연회(年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상동감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영면했다. 그의 위패가 [[국립묘지]] 무후선열 영모각에 모셔져 있다. == 외부 링크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0049340}} {{신민회 창건위원}} {{2014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1875년 태어남]][[분류:1914년 죽음]][[분류:정선 전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목회자]][[분류:고문 피해자]][[분류: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분류:범죄 피해자]][[분류:한국의 기독교운동가]][[분류:병사한 사람]][[분류:이회영]][[분류:신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