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정보 | 이름 = 임창모 | 현지어표기 = 林昌模 | 생애 = ? ~ [[1909년]] [[10월 12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 |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전라남도]] [[보성군]] | 본관 = [[나주 임씨|나주]](羅州) | 복무 = [[의병|대한제국 의병]] | 종교 = [[유교]]([[성리학]]) | 자녀 = [[임학규 (대한제국)|임학규]](장남) | 복무 기간 = [[1905년]] ~ [[1909년]]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1905년 을사늑약 항거 의병 투쟁
1909년 전라남도 보성 일본군 항전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조선 전라남도 보성 의병 독립 부대 부대장 대장군 | 근무 = 대한제국 조선 전라남도 보성 의병대 | 지휘 = 대한제국 전라남도 보성 의병 독립 부대 부대장 | 서훈 내역 = 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 독립장 추서 }} '''임창모'''(林昌模, ? ~ [[1909년]] [[10월 12일]])는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 생애 ==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이다. 출생 연도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일 전쟁]]이 [[일본 제국]]의 승리로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임창모는 전남 [[화순군]] 출신인 [[양회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에 화순에서 공격을 당하여 포위되었고, 의병을 이끌던 양회일과 임창모가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된 두 사람은 [[광주감옥]]에 갇혔다. 양회일은 단식투쟁을 하다가 곧 옥사하였고, 임창모는 [[신안군]] 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908년]]에 유배가 해제되어 풀렸났다. 임창모는 유배에서 풀려나자마자 당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전남 [[보성군]]의 [[안규홍]] 의병대에 합류하여 다시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다. 1908년 6월 이후에는 임창모의 부대가 안규홍의 의병대에서 따로 분리되어 독립하였으며, 보성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에 호남 지역에서 군과 경찰이 투입되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펼쳐졌다. 임창모는 전남 [[해남군]]과 [[강진군]], [[영암군]]에 걸쳐 있는 [[흑석산]]에서 첫째아들 [[임학규 (대한제국)|임학규]]와 함께 있다가 정체가 발각되었고, 병부대는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임창모도 전사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 자료 == * {{독립유공자|6655|임창모}} {{토막글|군인|한국의 독립운동}} [[분류:생년 미상]][[분류:1909년 죽음]][[분류:나주 임씨]][[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유교 신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육군 장군]][[분류:한말 의병장]][[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작전 중 사망자]][[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광주광역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