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 [[분류:울주군 출신 인물]][[분류:1924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
* [[대한민국 국군/인물]], [[정치인/목록]], [[불교/인물]]
|||| https://search.pstatic.net/common?type=a&size=120x150&quality=95&direct=true&src=http%3A%2F%2Fsstatic.naver.net%2Fpeople%2F134%2F20070112120237197113282.jpg ||
||
이름 ||이후락(李厚洛)||
|| 출생 ||[[1924년]] [[2월 23일]] [br] [[울산광역시]] [[울주군]]||
|| 사망 ||[[2009년]] [[10월 31일]](총 31297일) [br] [[서울특별시]] [[강동구]] [br]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
|| 본관 ||학성 이씨||
|| 가족 ||부인, 슬하 6남 1녀||
|| 직업 ||[[군인]][br][[정치인]]||
|| 종교 ||[[불교]] ||
[목차]
== 개요 ==
'''[[박정희]]의 책사, [[대한민국]] 최초 대북밀사, [[10월 유신]]의 주역'''
> '''[[권력|떡]]을 만지다 보면 [[뇌물|떡고물]]이 손에 묻는 법이다.'''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대통령비서실장|청와대 비서실장]], 주일 한국대사, [[중앙정보부]]장,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 일생 ==
=== 군인 경력 ===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 [[육군]] [[하사관]]까지 이르렀다가 해방 이후 귀국,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듬해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9년 [[남로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그 시절에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1952년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서 만들어진 79 부대라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어[* 당시 이후락 자신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 부대라고 지은 것이다.] [[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나라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61년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기관]]인 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 대통령비서실장 ===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의 [[남로당]] 입당 전력을 미국대사관에 밀고(?)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영어 실력과 중앙정보연구위 연구실장 경력 덕분에 곧 석방되어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였다. [[제갈량|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책사가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허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선 제갈조조는 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깐다. 사실 이후락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사람이다. 이 시기 글자 그대로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을 꼽을 수 있다.
=== 주 일본 대사 ===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 그리고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대통령비서실장]]에서 경질되었다. 이어 1969년 10월 주 [[일본]] 한국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은 [[박정희]]를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 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주 일본 한국대사로 있으면서도 [[박정희]]를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초밥 에피소드'이다. 당시 주 [[일본]] 한국대사관 부근에 '이즈미'라는 유명한 일식집이 있었는데, 이후락은 이집의 맛있는 스시를 특별 주문하여 잘 포장하고 간이 냉동상태로 대사관 사무관을 시켜 비행기편으로 [[청와대]]까지 직배송을 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몇 차례나, 이 정성스런 선물을 받은 [[대통령]] [[박정희]]는 이후락을 더욱 특별하게 생각했을 것은 자명할 것이다. 이 일화를 소개한 책인 '남산의 부장들' 초판이 발행될 당시(1992년) 이 스시 심부름을 하던 사무관은 외교부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외교관이 되었다고.[* 출처 :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 이는 [[황병태]] 전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회고록 등에서도 확인된다.
=== 중앙정보부장 당시 ===
[[1970년]] [[12월]]에는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하여 유신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가장 큰 배경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앞세운 야당(신민당)의 기세가 매서웠기 때문에, 남산골 샌님 얘기나 듣던 [[김계원]] 대신 정치공작과 막후 술수에 능했던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에 앉힘으로써 대선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락은 정치공작의 달인답게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육군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제7대 대선을 막후에서 관리하여 [[박정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2018년에 이 글을 읽는 위키러들은 잘 이해가 안될 수 있겠지만, 1960~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 정치의 상수(常數)였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중앙정보부]]와 접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아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야당 당사, 언론사, 주요 정부기관, 대학 등에 상주하면서 정보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경찰이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으며, 이들의 선거개입을 총괄하는 것은 [[중앙정보부]]였다.][* 물론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관변조직을 총동원하고, 정부와 여당이 당시 금액으로 무려 600억~700억이라는 거금을 선거에 쏟아부었음에도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그야말로 겨우 겨우 이기는데 그쳤다. [[박정희]]는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 뿐이냐"고 주변을 닥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그 직전까지는 비록 형식뿐이나마 야당의 견제기능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10월 유신]]으로 말미암아 한국 선정사는 다시 유사왕정시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 작업 암호명은 풍년사업.]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미녀파티를 하다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이때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김기춘|바로...]][*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
[[중앙정보부]]장 재임중 대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업적으로는 [[1972년]] 5월 밀사로 [[북한]]의 [[평양직할시|평양]]을 방문하여 당시 주석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다.
좌측 끝이 이후락. 제일 오른쪽이야 뭐 [[김일성|다들 알고 있듯이]]... 뒤쪽에 작게 보이는 인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북한)|김영주]]이다.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신변을 매우 걱정했고 만약 북한이 자신을 감금하고 국가 기밀을 대라고 요구할 경우 자살하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휴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밤에 북한측 수행원이 이후락 일행을 불러냈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이 때 이후락은 엄청난 긴장감에 안절부절.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주석궁'''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내리자마자 [[김일성]]이 서 있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고.[* 이 당시 이후락은 여차하면 삼키려고 청산가리 알약을 주머니 속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나타나 악수를 청하자 손을 주머니에 뺴려 했는데 [[청산가리]] 알약이 땀에 붙어서 잘 안떨어지는 바람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고 부르며 평양까지 와준 것을 치켜세웠고 이후락은 자신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이라고 소개한 뒤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이후 만찬을 함께 하며 [[1.21사태]]에 대한 [[김일성]]의 사과발언도 나왔다.
이때 나눈 대화가 흥미로운데 [[김일성]]이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고 대화 첫마디에 농담삼아, 어쩌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항의하자, 이후락은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요.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소?"[* 해방 이후 1949년 까지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엔 미군이, 그리고 북쪽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다. 미군이 철수한 이후 결국 북한의 남침으로 6.25가 터졌고.]라고 대답했고 [[김일성]]은 ~~[[하하하 이녀석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고.
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언플-- 기자회견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장관]] 등과 함께 [[10월 유신|유신]][[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해가 뜨면 언젠간 지는 법. 1973년 [[사망 플래그|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장성택|독재자는 2인자 따위 안 키운다]]--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언제 숙청될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일본 대사인 권철현이 [[김대중]]을 납치한 후에 각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후에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1922)|최영근]] 전 신민당 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 갑자기 [[홍콩]]을 거쳐 [[영국]]으로 출국했다가 종적을 감춘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전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처럼 해외 망명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영국]]을 거쳐 [[중남미]] [[바하마]]로 날아가서 거기서 한동안 숨어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망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고, [[중앙정보부]]장 해임 이후에 정치적으로 다칠 것을 우려하여 "나는 정권의 비밀 다 알고 있으니 날 건드리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입다물겠다."는 식으로 [[박정희]] 측과 모종의 협상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숙청당한 후 [[박정희]]를 맹비난했던 [[김형욱]]과는 달리 [[박정희]]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박정희]]도 이후락에 대해서는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달리 숙청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 국회의원 ===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고향인 경남 [[울산광역시|울산]]시 [[울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투표율 1위로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였고, 이후락과 악연이 있던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도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락은 당연히 공화당 공천을 원했으나,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었던데다가 여러 불법적인 정치공작에 관여한 것도 있어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와 공화당 측에서 공천을 안 주었다. 하지만 이후락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각하께서 체면 때문에 공천을 안 주신거고 국회의원 당선 후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여 남북대화를 맡는다"는 말을 퍼트리면서 선거운동을 했고 이것이 먹혔다. 당시 울산 지방공무원, 경찰 등도 모조리 이후락 편을 드는 바람에 공화당 공천을 받았던 서영수는 명색이 여당 후보임에도 야당 취급을 받고 ~~여당 공천장이 휴지조각~~ 결국 선거에서 떨어졌다.
이듬해인 1979년 6월 [[최치환]],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변정일]], [[김수(정치인)|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정치인)|박정수]], [[정휘동]], [[임호(정치인)|임호]], [[임영득]], [[한갑수(정치인)|한갑수]], [[홍성우(1941)|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0.26 사건]] 이후 신군부 세력에 의하여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 신군부 측에서 [[김종필]]의 부정축재에 대해 증언해주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자 승낙하고 김종필이 연행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이 때 부정축재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치자금을 떡고물에 비유해 "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주무를 수 있나"라는 항변으로 재산 형성을 자기 합리화해 대중들을 벙찌게 하기도.(...) 이 때문에 당시에는 이른바 '떡고물' 발언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당시 [[신군부]]의 추정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94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현재 화폐가치로 약 1200억원 정도] 군인으로 전역한 사람이 20년만에 저 돈을 모았다는거니 그 당시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물가 따질 때 흔히 나오는 강남의 한보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80년대 초반 당시 2천만 원대. 지금 10억 원대 --거품-- 매매가를 자랑한다. 그것으로 계산하면 현재 가치로 대략 9700억 원.(...) --은마아파트가 비정상인 것이긴 하지.--
=== 말년 ===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경기도]] [[광주시]]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7.4 남북 공동 성명]] 15주년 특집방송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하고 같은해 [[제13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신민주공화당]]을 방문해 낙선한 [[김종필]]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6892|2003년에는 생리현상 조절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것이 언론에 공개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생무상-- 그 후 2009년 10월 31일에 사망했다. 향년 86세 (만 85세).[* 여담으로 이후락이 1973년에 무리하게 납치해서 살해하려 했던 [[김대중]]이 자기가 사망하기 2개월 전에 서거했다, 게다가 두 사람 다 같은 1924년생이다. --태어난 해도 같고 저 세상에 간 해도 같고 참으로 완전 닭살-- ] [[박정희]] 밑에서 움직이던 동료와 선후배 대부분은 단명했다. [[김재규]]는 대통령 살인범으로 찍혀서 처형되었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형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박종규]]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숨졌다.[* 여기에 언급된 [[박정희]] 정권의 2인자 정치인들 중에선 친인척 지간이기도 한 [[김종필]]을 제외하곤 가장 오래 살았다, 그리고 [[김종필]]을 포함해서 가장 나이가 연상이다.]
== 선거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4선거구)[* [[울산광역시|울산]]시, [[울주군]]] || '''무소속''' || '''97,393 (48.32%)''' || '''당선 (1위)''' || ||
== 기타 ==
* 그는 슬하에 6남 1녀를 뒀는데, 이 중 차남 이동훈(1948년생)은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의 고명딸 김영혜와 [[정략결혼|결혼]]한 뒤 장인에게 [[제일화재]]를 물려받았고, 막내 이동욱(1962년생)은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의 막내딸 최예정과 결혼했다. 상술한 1980년 기준 약 194억 원의 재산이 누구를 삥뜯어서 나온 건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고향인 [[울산광역시|울산]]에 이후락이 설립한 학교도 있는데, [[학성고등학교]]와 우석고등학교(현 [[신정고등학교]]), 울산여자상업고등학교가 그것이다.[* 이들 학교들은 모두 남구에 있는 공업탑 로터리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세 학교 모두 공립화되었고 울산의 일반계 고등학교 입시도 평준화되었지만 학성고와 신정고 간의 라이벌 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영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진 중 한명이었다.
* 제 9대 국회의원 [[김원규(1925)|김원규]]는 그의 6촌 처남이었다.
* [[중앙정보부]]장 시절, 유태인 차관 중개인 메나도[* 형수가 [[한국인]]인 인연으로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금융 브로커. 메나도가 아닌 메리도라고도 불렸으며, 훗날 [[이스라엘]]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인터뷰집 「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86년, 삼성출판사),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도 등장한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인터뷰에서 그를 일컬어 "대단한 수완과 정보력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경제차관도 많이 주선했지만, 반면에 [[빚쟁이|(빚을) 크게 씌우기도 한 사람]]"이라 평한 바 있다.]와 가깝게 지내며 그를 통해 차관을 많이 들여왔다. 간혹 상공부에서 그런 돈은 쓸수없다."고 하면, 이후락이 다그쳐서 차관을 들여오게 했고, 이렇게 유입된 차관자금의 5 ~ 6%는 이후락 측에서 정치자금으로, 다시 O%를 메나도 측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메나도는 이렇게 차관 브로커 노릇을 하며 모은 돈으로[* [[F-4 팬텀]] 25대 분량의 자금을 동북아 차관 중개로 확보했다는 후문(後聞)이 있다.], [[프랑스 해군]] [[함정]]을 사들여[* 당시 메나도가 소유한 노르웨이 아카 조선소 이름으로 사들였다고 한다.] 고철로 분해해 두었다가, [[6일 전쟁]] 발발 후 다시 조립하여 [[이스라엘 해군]]에 제공해, [[이집트 해군]]을 격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훗날 메나도는 '''"[[매국노|한국 관료들은 10만불만 쥐어주면 국가에 1000만불 손해가 나도 도장을 찍어준다.]]"'''는 회고담을 남겼다고 한다.
* [[울산광역시|울산]]([[울주군|울주]] 포함)과 [[경주시]], [[포항시]](영일 포함)등을 합쳐 '''[[경상동도]]'''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허경영|문득 경전도, 전경도가 생각난다.]]~~ [[2000년대]] 들어 [[행정구역 개편]]이 이슈가 되었을 때도 비슷하게 경포울 통합 구상이 나오기도 했다. [[경상도]]가 다른 도들보다 면적이 너무 넓기도 하고 인구면에서도 3개 도시만 합치더라도 수도권 제외한 전국평균급은 찍으며 울산 같은 경우 [[창원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중심부와는 생활권이 다르고 오히려 인접한 경주/포항과 가까운 편이기 때문이다.
* 딕패밀리의 멤버 김후락의 본명은 홍수진인데, 그룹 결성 초반에 우연히 MBC 방송국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을 만나 예명을 김후락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락이 홍수진의 이름을 듣고 자신의 이름으로 예명을 쓰라고 했는데, 성까지 쓰지는 말고 김이박최에서 돌 던지면 맞는 성으로 써라고 해서 예명이 김후락이 되었다고 한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53704|링크]]
* [[김대중 납치사건|자신이 죽이려 했던]]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과 생몰연도가 일치한다.
== 매체에서 ==
|| 제3공화국의 이후락 || 제5공화국의 이후락 ||
* 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오지명]]이,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임채무]]가,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와 [[삼김시대(드라마)|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정욱(1938)|정욱]]이,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홍성선[* 개명전 이름, 개명 후 홍훈으로 활동 중이며, [[허준(드라마)|허준]], [[상도(드라마)|상도]]에 출연한 이력이 있다.]이,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광남이 이후락을 연기하였다.[* 여담으로 [[임채무]]와 박광남은 [[전원일기]]에서 김회장([[최불암]]분)의 사위들로 고정출연했었다. 그리고 최불암은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에서 [[이승만]]역을 맡았었다.]
== 둘러보기 ==
||<#005ba6><-5><:> {{{+1 [[대한민국|{{{#ffc224 ''' 대한민국 ''' }}}]] [[국가정보원장|{{{#ffc224 ''' 중앙정보부장 ''' }}}]] }}} ||
||<#FFFFFF><-5><:> [[중앙정보부|[[파일:나카세이.jpg|width=125]]]] ||
||<#580E0E><-5><:> [[대한민국 제3공화국|{{{#FFFFFF '''제3공화국 (1963 ~ 1972)'''}}}]] [[대한민국 제4공화국|{{{#FFFFFF '''· 제4공화국 (1972 ~ 1981)'''}}}]] ||
|| 제 5 대[br][[김계원]] ||<:> → || 제 6 대[br]''' 이후락 ''' ||<:> → ||<:> 제 7 대[br][[신직수]] ||
||||||||||||<:> '''[[한국기원|{{{#000000 재단법인 한국기원 총재}}}]]''' ||
||<:> (초임) || {{{+1 ←}}} ||<:> '''초대 이후락''' || {{{+1 →}}} ||<:> 2~4대 [[김우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