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익'''(李愚益, [[1890년]] [[4월 15일]] ~ [[1982년]] [[3월 16일]], [[경상북도|경북]] [[칠곡군|칠곡]])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본관은 [[벽진 이씨|벽진]]. == 생애 == [[한성부]]에 유학하여 [[1912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법원 서기로 법조계에 입문했다.{{뉴스 인용 |url=http://www.chammalo.com/sub_read.html?uid=4921 |저자=한상범 |제목=일제잔재의 ‘철옹성’ 사법계 - [2006년 과거청산과 개혁과제 4] 사법 - 일제법령 답습, 친일관료 판쳐 |날짜=2006-01-11 |확인날짜=2008-07-02 |출판사=참말로 }} [[1912년]]부터 [[1927년]]까지 약 15년 동안 [[조선총독부]] 소속 법원 서기와 검사, 판사로 근무했다. 1927년에 퇴임할 당시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변호사]]를 개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이육사]] 사건 등 항일 사건의 변호를 맡은 일이 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하에서 다시 검사로 발탁되어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1950년]] 5월 [[한국 전쟁]] 발발 직전에는 [[대한민국 법무부]]의 제3대 장관에 임명되어 같은 해 11월까지 재직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조선인민군]]이 급속도로 남하해오는 동안 대한민국 영역 곳곳에서 정치범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사건의 주무 장관이었다. 법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고향인 칠곡으로 돌아갔고, 제1공화국 말기에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경상북도 위원장과 고문을 지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판사 부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장기간 연구 끝에 사법 부문에서 더 많은 인물을 발굴해 수록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이우익을 제외했다. == 각주 == == 외부 링크 == * {{행정통계 인물|993|N0780|이우익}} {{전임후임| |전임자 = [[권승렬]] |후임자 = [[김준연]] |대수 = 3 |직책 =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법무부 장관]] |임기 = [[1950년]] [[5월 22일]] ~ [[1950년]] [[11월 23일]] }}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1982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경성법학전문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벽진 이씨]][[분류: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