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식'''(李愚軾, [[1901년]] [[11월 26일]] ~ [[1985년]] [[8월 13일]]{{뉴스 인용 |제목=전대법관 이우식씨 별세 |출판사=조선일보 |날짜=1985-08-14 |쪽=11면 }})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법조인으로 [[대한민국의 대법관]]을 지냈다. ==생애==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이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에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뉴스 인용 |제목=法專出身의 四君 高文試驗에 合格 |출판사=동아일보 |날짜=1927-01-18 |쪽=2면 }} 고문시험 합격 동기로는 같은 경성법전 출신의 [[조진만 (1903년)|조진만]]과 [[한격만]]이 있다. 고문시험 합격 후 [[평양부]]의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사법관시보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를 거쳐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전주지방법원, 경성지방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930년]] 10월에 총독부 판사직에서 퇴임{{뉴스 인용 |제목=李愚軾(判事) 命退職 |출판사=동아일보 |날짜=1930-10-21 |쪽=1면 }} 하였고,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미군정]]에서 발탁되어 전주지방법원 법원장으로 임명되면서 판사로 복귀했다. [[1948년]]에 전주지방검찰청이 전주지방법원의 [[좌익]] 혐의자에 대한 처벌이 가볍다면서 이우식에게 좌익 혐의가 있다고 고발한 일이 있다. 미군정은 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검찰, 경찰과 법원 간의 내부적인 알력이 표출된 것으로, 이우식에게는 좌익 혐의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뉴스 인용|제목=전주지방검찰청, 좌익사범을 가볍게 처분했다고 전주지방법원장을 군정장관에게 고발|출판사=평화일보|날짜=1948-09-03}} [[한국 전쟁]] 중인 [[1951년]]에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의 대법관으로 발탁되어 재직했다. 대통령 직속 기구인 [[법전편찬위원회]] 위원도 역임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 == 각주 ==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198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대법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칠곡군 출신 인물]] [[분류:경성법학전문학교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