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귀족)] [include(틀:친일반민족행위자)] [목차] == 소개 == > 이용구: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 [[우치다 료헤이]]: 뒷날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 허나 정작 저 말을 전한 우치다 료헤이야말로 일진회의 고문이자 이토 통감의 참모였으며, 일본의 대륙진출을 음지에서 추진하던 대륙낭인의 거두였다. 즉, 되도 않은 구라를 쳤을 확률이 높은 셈(...). --게다가 지금도 호평은 못받고 있다.-- [[아시아주의]] 항목도 참조.] >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 『日本之亞細亞』'''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8/Lee_Yong-gu_Portrait.jpg/300px-Lee_Yong-gu_Portrait.jpg 李容九 1868년 2월 14일 ~ 1912년 5월 22일 [[조선]]의 [[정치인]], [[종교인]]. [[일제강점기]] 직전 [[일진회]] 회장을 지냈던 [[친일파]]로 1910년 [[한일병합]] 때 [[이완용]] 등과 함께 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다만 이후 일제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귀족 작위도 거절하는 등 허탈해하다 1912년 사망했다. [[경상북도]] [[상주시]] 출신. 본명은 [[이상옥]]. == 생애 == 1868년 [[경상북도]] [[상주시|상주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농사일을 지어왔다가 1890년 [[동학]]에 입교(入敎)하여 동학 교주 2세인 [[최시형]]의 교육을 받아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으로 참전하였으며 [[동학]] 교주 3세인 의암 [[손병희]]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03년 귀국하여 [[동학]] 포교(布敎) 운동을 벌였다. === 친일파로의 변신 === 동학 포교활동 중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진보회를 결성하였다가 [[친일파]]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병하여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강화 및 포교하게 되면서 동학시절 옛 동지였던 손병희의 [[천도교]]에 맞서[* 이 당시 손병희는 이용구를 비롯한 62명의 동학 지도자에게 출교 처분을 내렸다.] [[친일파]] 성향의 신흥종교인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여 시천교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를 만들고 동 단체의 회장이 된 뒤, 일본의 우익 인사 [[우치다 료헤이]]와 그의 단체 [[겐요샤|현양사]]의 도움으로 친일행위에 나서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조선과 일본이 1:1로 대등합방 하자는 생각 하에 백성들에게 [[일본]]의 사상을 전파하고 친일행위를 찬양하며 [[한일병합]]을 제창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까지 병합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하게 되자 그의 장례식 당일 독립관에서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주관해 왔다가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진회]]가 1주일의 시한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 1주일 내에 해산하라는 것. 그는 1909년 12월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에게 합방 청원에 소요되는 비용 3백만엔을 상의했는데, 이때 가쓰라 다로는 그에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3백만이 아니라 3천만이라도 주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1910년 일진회를 해산하고 나니 일본정부가 일진회에게 준 돈은 달랑 15만엔이었다. '''그것도 이용구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일진회 회원들 전체에게 준 것.'''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참고로 3백만엔이 필요했던 이유는 친일 활동으로 일진회 회원들은 집이 전부 테러를 당하는 등 사회적으로 배척받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로 [[만주]]로 이주해서 만주를 개척하면서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만주독립군이랑 만나면 어쩌려고-- 즉,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문제였는데 [[토사구팽|여지없이 버림받은 셈]]이다. 게다가 이용구는 당시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처럼 [[아시아주의]]를 진짜로 믿고 있었던것 같다. 이용구는 한일 양국이 연방국처럼 1대1로 국가 연합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기당했다-- 결국 그는 뒤통수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일본이 준 [[조선귀족]] 작위도 거절한 이후 허탈함과 격분에 빠진 나머지 몸져 눕고 만다. 1912년 죽기 얼마 전 문안차 찾아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송병준|우]][[일진회|리]]는 [[친일|바보짓]]을 했어요. [[1904년|처음]]부터 [[사기|속았던 건 아니었을까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 사망 === 1911년에 [[일본]] 스마(須磨) 지방으로 건너가 요양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1912년 병고(病苦)로 죽었다. 죽은 후 [[천황]]으로부터 훈(勳)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그의 아들인 이석규[* 1909년 두번째 부인 이화사(李華師)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大東碩奎, 大東國男, 佐藤國郞 이다. 성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죽을 때까지 대동아 공영을 주장했다. 특히 大東國男는 '대동국의 남아'라는 뜻이다.][* 이 아들을 보기 전, 조카인 이현규(李顯奎)를 양자로 두었으나 이 아들을 늦둥이로 보고 바로 파양하였다.]도 [[친일파]]이자 [[일진회]] 고문 출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이완용]], [[송병준]]을 위한 [[한일병합]] 공로자 합동 위령제를 지내는 등 [[친일]] 행위를 해 왔으며 해방 후에도 이용구 전기[* 이용구의 생애(李容九の生涯), 時事通新社, 1961.] 등을 저술하였다가 1986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이 사람은 평생 자기 아버지 이용구가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지용|그나마 사망 직전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후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면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표격으로 남아있다. [[분류:상주시 출신 인물]] [[분류:일진회]] [[분류:1868년 출생]] [[분류:191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