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정보 | 이름 = 이규환 | 본명 = | 출생일 = [[1904년]] [[2월 18일]] | 출생지 = [[대구광역시|대구]] | 사망일 = [[1982년]] | 사망지 = | 국적 = {{국기|대한민국}} | 직업 = 영화연출 | 교육 = }} '''이규환'''(李圭煥, 일본식 이름: 岩本圭煥, [[1904년]] [[2월 18일]] ~ [[1982년]])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이다. == 생애 ==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나 어릴 때 [[경성부]]로 이주하여 자랐다. [[우미관]]을 드나들며 [[찰리 채플린]]의 작품을 보며 성장하였다. [[1919년]]에 대구 [[계성고등학교]]의 전신인 계성중학교에 재학 중, [[3·1 운동]]으로 인해 [[밀양시|밀양군]]의 시골 마을에서 2년 동안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이규환의 영화 작품에 드러나는 향토적 화면에 영향을 미쳤다. 피신 생활 중에 영화감독이 될 것을 결심하고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영화 공부를 했다. [[1928년]] 경에는 [[상하이 시|상하이]]로 가서 1년 정도 머물렀다. 이 곳에서 [[전창근 (영화 감독)|전창근]]과 [[이경손]]을 만나 교류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의 [[신코키네마]]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1932년]]에 귀국하여 제작한 작품이 《임자 없는 나룻배》이다. [[나운규]]와 [[문예봉]]이 출연한 이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고 문예봉을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후 제작비 문제 등으로 순탄치 않은 영화 작업을 계속했다. [[1937년]]에는 [[성봉영화원]]을 설립하고 로컬리즘 색채가 강한 《나그네》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성봉영화원이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합된 뒤 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만주]]로 떠나, 일제 강점기 말기의 [[군국주의]] 영화 제작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1944년]]부터 강제징용으로 노역을 하던 중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라디오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화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전쟁]] 후 연출한 《춘향전》(1955)은 전후 대한민국 영화 부흥의 기폭제로 평가받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영화의 경향은 민족주의, 서정적 리얼리즘, 향토색으로 주로 설명된다.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235~240쪽}} == 외부 링크 == * {{KMDb 사람|00004502|이규환|}} * {{IMDb 이름|1175930|Gyu-hwan Lee}}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82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감독]][[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