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정보 | 이름 = 이구영 | 그림 = | 설명 = | 본명 = | 출생 = [[1901년]] [[2월 11일]] | 출생지 = [[한성부]] | 사망 = [[1973년]] | 사망지 = {{국기그림|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분야 = 영화 | 교육 = | 사조 = | 대표작 = | 수상 = }} '''이구영'''(李龜永, [[1901년]] [[2월 11일]] ~ [[1973년]])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영화인이다.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 평론가를 겸하였다. == 생애 == [[한성부]] 출신으로 상동공옥소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배재고보 재학 중이던 [[1919년]]에 [[3·1 운동]]이 발생하면서 참가하였다가 학교를 중퇴하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극장과 촬영소를 드나들면서 영화를 공부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영화 관련 일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에 단성사가 제작한 장화홍련전의 각본을 쓴 것이 본격적인 데뷔이다. [[1924년]]에는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하고 영화 담당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초창기 조선 영화계는 [[윤백남]] 인맥과 단성사 인맥의 양대 파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구영은 [[단성사]] 인맥의 중심이었다. 두 파벌이 충돌하면서 이구영이 기획하던 《심청전》이 무산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구영은 조선배우학교를 함께 설립했던 [[현철 (1891년)|현철]]과는 결별하고, [[고려영화제작소]] 설립, 단성사 선전부장 입사, [[금강키네마]] 설립, [[조선영화예술협회]] 참가 등 이 시기 조선 영화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연출작으로는 데뷔작 《쌍옥루》(1925) 외에 《낙화유수》,《아리랑 그 후 이야기》, 《승방비곡》, 《수일과 순애》, 《갈대꽃》 등이 있다. 1930년대 후반에 [[방한준]]의 《한강》과 《성황당》을 제작한 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까지 활동을 거의 쉬었다. 이때문에 다른 많은 영화인들과는 달리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 제국]]에 협력한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안중근사기》(1946)를 발표하였다. 이후로는 주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였고, 일제 강점기 동안의 항일 운동을 주로 소재로 삼았다. == 같이 보기 == * [[조선배우학교]] ==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강옥희,이영미,이순진,이승희 |제목=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날짜=2006-12-15 |출판사=소도 |출판위치=서울 |id={{ISBN|978-89-90626-26-4}} |페이지=228~231쪽 }} == 외부 링크 == * {{KMDb 사람|00010512|이구영}} * {{IMDb 이름|1081713|Ku-yeong Lee}}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1973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배우]][[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각본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감독]][[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