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정보
|이름 = 이 카타리나
|출생일 = [[1783년]]
|사망일 = [[1839년]] [[10월]]
|축일 = [[9월 20일]]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그림 =
|크기 =
|설명 =
|출생지 = 서울[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
|사망지 = 서울
|직업 = 순교자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상징 =
|수호 =
|매장지 =
|성당 =
|기도 =
}}
'''이 가타리나'''(李加大利納, [[1783년]] - [[1839년]] [[10월]])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카타리나'''(Catharina)이다.
이 가타리나는 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같이 수감되어 있다가 한날한시에 [[예수]] 곁으로 갔다. 그들은 생전에 여러 해를 가난하게 살았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천국]]의 영원한 부를 주었다.
== 생애 ==
이 가타리나는 [[시골]]에서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천주교]] 신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14세에 [[조씨#나라 조 (趙 / 赵)|조(趙)씨]] [[성씨|성]]을 가진 한 남성과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남편이 개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3남매를 낳아 기르며 가르쳤다.
그들 중 [[조 막달레나]]가 [[천주교]]에 가장 열심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는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도왔다. 조 막달레나가 18세가 되자, 어머니 이 가타리나는 그녀를 한 교우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조 막달레나는 어머니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가타리나는 딸의 결심을 이해할 만큼 독실했지만, 이교도들이 딸을 의심할까봐 염려스러웠다. 왜냐하면, 만일 자신이 [[순교]]하면, 딸이 홀로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딸이 결혼하도록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조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처녀로 살기를 고집했다.
조 막달레나는 가족의 성가신 요구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해 [[한양]]으로 올라왔고, 한 [[천주교]] 집안의 [[하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이 들었다. 그녀는 병이 완쾌되고, 좀 더 편한 곳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조금이나마 돈을 벌어 그녀의 어머니한테 보냈다.
[[조 막달레나]]는 서른이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자신에게 시집가라 말하는 사람이 없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맹]]의 예비 신자를 가르치며, [[병자]]들을 돌보며 죽을 위험에 처한 이교도 집안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녀는 언제나 사심없이 쉬운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스스로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서 했다.
[[1838년]] 고을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이 가타리나는 딸과 함께 박해를 피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앵베르]] [[주교]]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이영덕 막달레나]]와 [[이인덕 마리아]] 자매 교우의 집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잠시 뿐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로 인해 천주교인들에게 한양은 [[시골]] 지역보다 더 위험했다. 하지만, 그들은 용감하게 박해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여성 교우 몇 명이 그 집에 모여서 [[포도청]]으로부터 수배되어 있는 [[앵베르]] [[주교]]에 대해서 말했다. 막달레나는 그들에게 만일 앵베르 주교가 [[체포]]된다면 함께 [[자수]]할 것을 제안했고, 모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신심 깊은 여성들에게는 자수할 때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 중 다섯 명은 약 한 달 후인 [[1839년]] 6월말에서 7월초 쯤에 포도대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이 가타리나의 나이 57세였고 [[조 막달레나]]는 33세였다.
물론, 그들은 배교하라는 포장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고, 극심한 [[고문]]을 견뎠다. 그들은 계속되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감옥]]에서 수 주 동안을 몹시 앓았다. 그들은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수일 간격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숨을 거두었다.
== 시복 · 시성 ==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백과사전 인용
|url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
|제목 =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백과사전 =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확인월일 = 2014-11-23
|인용문 =
}}] [[시복|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1-23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1017165028/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보존날짜 = 2014-10-17
| 깨진링크 = 예
}}]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고 문헌==
*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2784&keyword=%C0%CC%B0%A1%C5%B8%B8%AE%B3%AA&gubun=01 가톨릭 사전: 이가타리나]
* {{언어링크|en}} [http://english.cbck.or.kr/Saints103/297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이 가타리나 Catharina Yi]
== 각주 ==
{{각주}}
[[분류:1782년 태어남]][[분류:183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