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정보 |이름 = 은전군 |원래 이름 = 恩全君 |작위 = [[군 (작위)|군(君)]]
현록대부(顯綠大夫) |그림 = |그림설명 = |휘 = 이찬(李禶) |출생일 = [[1759년]] [[8월 14일]]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사망일 = [[1778년]] [[8월 26일]] |사망지 = |직업 = [[왕족|왕족 종실]], 문신 |국적 = [[조선]] |별칭 = 자(字)는 연재(憐哉),
별칭은 하엽생(荷葉生),
시호(諡號)는 효민공(孝愍公) |시호 = 효민(孝愍) |종교 = [[유교]]([[성리학]]) |아버지 = [[조선 장조|장조]] |어머니 =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 |배우자 = 군부인 [[평양 조씨]] |자녀 = [[풍계군|풍계군 이당]](양자) |친척 = 이복 형 [[의소세자]], [[조선 정조|정조 이산]],
[[은언군|은언군 이인]], [[은신군|은신군 이진]]
누나 [[청근옹주]] }}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8월 14일]] ~ [[1778년]] [[8월 26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왕족으로, [[조선 영조|영조]]의 [[서손]]이자 [[사도세자]]([[조선 장조|장조]]로 추존)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景嬪朴氏)이다. [[정후겸]], [[홍계능]] 등과 [[조선 정조|정조]]에게 반감을 품었던 [[노론]] [[벽파]]는 정조를 제거하고 은전군의 추대를 기도했고, 결국 무옥(誣獄)으로 몰려 희생되었다. 이름은 찬(禶), 자(字)는 연재(憐哉),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다른 이름은 이찬(李瓚), 이명(李䄙)이다. 별칭은 하엽생(荷葉生)이다. 1762년 1월 그의 생모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가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에게 살해당한 것을 두고,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들 중 그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노론]][[벽파]]로부터 주목받아왔다. [[노론]]은 그를 추대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 [[1776년]] 정조 즉위 후 노론 벽파의 택군(擇君)의 대상이 되었다. [[1777년]] [[8월]]과 [[9월]] 자객이 담을 넘다가 발각되어 [[홍계능]], [[홍상범]] 등이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 그를 추대하려 한 계획이 드러났다.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그는 반항했고, 결국 사사되었다. 자녀가 없어 사후 이복 형 [[은언군]]의 아들 [[풍계군]]을 양자로 입양하였고, 풍계군 역시 일찍 죽어 양손자를 입양하였다. [[1850년]](철종 1년)에 가서야 [[서영순]]의 상소로 복작되고 [[1871년]](고종 8) [[3월 16일]] 효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과 관련하여 [[일제 강점기]] 당시 대중문화의 소재가 된 [[은언군]], [[은신군]]과는 달리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 및 사도세자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 생애 == === 불우한 생애 초반 === 이름은 찬(禶), 자(字)는 연재(憐哉),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아버지는 [[조선 장조|장조]]로 추존된 [[조선 장조|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 빙애이다.고종 때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면서 [[귀인]]으로 [[추증]]되었다가, 2년 후에 장조 황제로 추존되자, 다시 경빈으로 진봉되었다. 생전 작위는 수칙이었다. 어머니 빙애의 실명은 한중록에 기록되어 후대에 알려졌다. [[의소세손|의소세자]]와 [[조선 정조|정조]], [[은언군]], [[은신군]]의 이복 동생이다. 부인은 평양인(平壤人) [[조성]](趙峸)의 딸 군부인 조씨(郡夫人 趙氏)이다. 어머니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 빙애는 [[인원왕후]]전 침방 나인 출신이었다. 그는 [[1774년]] [[7월 9일]], 1774년판 선원속록(璿譜續錄)에 실리게 된다. 장조의 서자로 [[1759년]](영조 35)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3살 되던 [[1762년]], 의대병이 있던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월 그의 생모 수칙 박씨 빙애를 살해한다. 빙애를 구타할 때 [[사도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도 칼로 쳤다. 그리고 칼 맞은 은전군을 문 밖 연못에 던졌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3/10/18/201310180500013/201310180500013_3.html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영조는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상궁]]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선 장조|사도세자]]와 [[조선 정조|정조]]를 미워하던 [[노론]] [[벽파]]는 그가 아버지에게 원한과 적개심을 품었을 것이라 내다봤고,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자녀들 중에서 그를 유독 주목하였다.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김귀주]]와 [[홍계희]] 등의 일가 친척들, [[조선 정조|정조]]의 친모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족들도 끼어 있었다. === 출궁과 가례 === [[1765년]](영조 41) [[6월 26일]] 그의 이름이 [[의소세자]]의 이름 정(琔)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이름을 찬에서 명(䄙)으로 개정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개명되지 않았다. [[1767년]] [[11월]] 군호는 은전으로 정해지고, 곧 은전군에 책봉되었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9년]](영조 45) [[6월]] 출궁하여 [[6월 10일]] [[호조]]에서 그의 집터를 마련하였다. 이는 [[호조]]에서 올린 장계를 통해 승지 이재협(李在協)이 영조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1771년]](영조 47) [[2월 10일]] 영조의 특명으로 [[종친부]]유사당상에 임명되었다. [[1772년]](영조 47) [[10월 19일]] 영조의 명으로 관례를 올리고 주관자로 종실 응선군 희(凝善君爔), 광릉부수 정(廣陵副守烻) 등이 정해져 [[10월 20일]] 관례를 올렸다. [[1773년]] [[3월 4일]] 영조의 특명으로 [[예조]]에서 은전군의 부인을 간택하였고, [[3월 5일]] 바로 영조의 명으로 조성(趙峸)의 딸을 낙점하여 [[6월 15일]] 길례날자를 정한 뒤, [[6월 28일]] 친영으로 [[결혼|혼례]]를 올렸다. === 관료 생활 === [[1771년]](영조 47) [[2월 10일]] 영조의 특명으로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을 거쳐 [[1773년]](영조 49년) [[7월 27일]] 종친부당상(宗親府堂上), [[1773년]] [[8월 5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고, [[9월 23일]] 진시(辰時)와 [[9월 24일]] 진시(辰時) 약방제조 등과 함께 [[집경당]]에 입시하였다. 그 해 [[10월 4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으나 잘못 가자되었다는 이유로 [[이조]]에서 장계를 올려, [[10월 5일]] [[가덕대부]]로 개정해서 임명되었다. [[1774년]](영조 50) [[1월 7일]]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안국동]]에 있는 경은부원군 [[김주신]] 내외의 사당에 치제하고 돌아왔다. [[1774년]]에 그는 종학(宗學)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774년]](영조 50) [[2월 3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5월 20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고, 이해 [[9월 19일]]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다. [[1774년]] [[5월 20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775년]] [[4월 16일]] 영조가 [[집경당]]에서 약방의 진료를 받을 때 약방도제조 이사관, 제조 구윤옥 등의 관원들과 함께 입시하였다. [[1775년]](영조 51) [[4월 24일]] 영조의 특명으로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12월 10일]] 다시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1776년]](영조 52) [[1월 17일]] [[종부시]]제조(宗簿侍提調)가 되어 《[[선원보략]] (璿源譜略)》의 발문을 썼다. 이해 [[2월 5일]] [[조선 정조|왕세손]] 및 이복형 [[은언군]](恩彦君)과 함께 [[수은묘]](垂恩墓)에 가서 봉심(奉審)과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한때 그는 전주이씨 문중의 문장(文長) 후보로 추천, 문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품던 [[조선 정조|정조]] 대신 [[노론]]은 그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과 [[은신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으나 [[홍봉한]]이 이들의 시장에서 진 빚을 갚아준 것을 이상하게 본 [[조선 영조|영조]]에 의해 [[제주시|제주도]]에 유배, [[은신군]]은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한다. 그 뒤 [[노론]]은 그에게 주목하였다. [[1776년]](영조 53년) [[1월 17일]] [[종부시]]제조에 임명되었다. 종부시제조로 있으면서 역대 국왕의 팔고조도(八高祖圖), 왕비세보(王妃世譜)의 현황을 새로 갱신하였고, [[인빈 김씨]]과 [[숙빈 최씨]]의 팔고조도를 제작하고 [[1월 20일]] 영조에게 보고하였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고 [[조선 정조|정조]]가 즉위한 뒤,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2일]] 궁궐에 입궁할 때 [[수행원]]을 많이 대동하고 들어왔다는 이유로 [[도승지]] [[서호수]]의 탄핵을 받아 정조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바로 당일날 취소되고 서용되었다.정조실록 1권 1776년(정조 즉위년 청 건륭 41년) 5월 12일 임오 1번째기사, "은전군 이찬을 삭직하도록 명하였다가, 이어 직첩을 주고 서용하도록 명하다." 그러나 은전군의 장인 조성은 [[김귀주]]의 측근이었고, 정조는 그를 의심하였다. === 추대 사건과 최후 === [[1777년]](정조 1) [[5월 12일]] 파직되었으나 바로 복작시켰다. 정조 즉위 직후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워 [[1777년]](정조 1) [[7월]] [[홍술해]](洪述海)의 아들 [[홍상범]](洪相範 ), [[홍계희]]의 8촌 진선 [[홍계능]] 등이 밤낮으로 정조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겨 나라를 원망하면서 [[전라북도|전북도]] [[전주시|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강용휘]](姜龍輝) 등과 공모하여 [[조선 정조|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은전군이 이들과 적극적으로 모의하거나 만나거나, 내통했다는 근거는 없다. 한편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조선 정조|정조]]의 친외삼촌인 [[승정원]]승지 [[홍낙임]](洪樂任)도 있었다. 홍낙임은 대장(大將)의 역할을 맡게 된다. [[1777년]] [[7월]]과 [[8월]]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은 장사 [[전흥문]](田興文) 등을 매수, 이들에게 [[비수]]를 품고, 취침 중이던 정조를 찌르려 대궐로 들어가게 했지만 정조는 피신하였고,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이 [[포도청]]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자 모든 것이 드러나 [[홍상범]] 등 일당이 모두 잡혀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사 과정에서 한편 [[홍계희]]의 8촌간인 [[홍계능]](洪啓能)이 유배가기 전, 자신의 아들 [[홍신해]](洪信海), 조카인 [[홍이해]](洪履海) 그밖에 [[참판]] [[민홍섭]](閔弘燮), [[승정원]] [[승지]] [[이택수]](李澤遂) 등과 함께 사전 모의한 사실까지 발각되었다. 그해 [[8월]] [[의금부]]에서 이들을 체포하여 추국했고,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지목되었다. [[8월]]부터 [[홍국영]]은 은전군을 공격했고, 이후 삼사(三司)·대신·종친들이 번갈아 상소하여 은전군을 죽이라고 하니 정조는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결국 자진을 명했는데, 그가 자신이 역모를 하지 않은 이상 죽을 이유가 없다며 반항하자, 삼사와 [[의금부]]의 탄핵은 거세어졌다. [[1778년]](정조 2) [[8월]] 정조는 부득이 왕명으로 [[사약]]을 내려 사사(賜死)하였다. 죄명은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며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의 나이 향년 19세였다. 한편 유배된 그의 처 군부인 서울조씨(郡夫人平壤趙氏)는 [[백령진]](白翎鎭)에 안치되었다가, [[1778년]] [[2월 7일]]에 정조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과천시|과천군]] [[군포시|군포]](현, [[경기도]] [[군포시]])산 미좌(未坐)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묘소의 위치는 실전되었다. [[1777년]](정조 1) 후사가 없어 후일 이복형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을 후사로 내정했고 후일 은언군의 사남 [[풍계군]](豊溪君) 이당(李瑭)을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풍계군]] 역시 후사가 없이 일찍 죽어 파양되었다. [[조선 순조|순조]] 때에 이르러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무산되었고, [[1819년]](순조 19) 그의 처 군부인 조씨가 그의 신원을 청하는 격쟁을 하여 [[형조]]는 승정원에 계를 올렸다. [[조선 철종|철종]]이 즉위한 [[1850년]](철종 1) [[11월 10일]]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유치선]](兪致善)에게 정조때 당시 부득이한 처분이므로 금일 가부를 논해야 하느냐며 일의 관계가 무거운바 시원임대신을 모아 상고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해 [[12월 22일]] [[비변사]] 시원임대신 회의에서 그의 일은 [[건릉]]의 구 지문을 근거로 논의하였다. [[1850년]](철종 1) [[12월 22일]] [[비변사]]당상 [[서영순]](徐英淳)의 상소로 [[12월 23일]] [[현록대부]]에 복작되었고, [[1871년]](고종 8) [[3월 16일]] 효민(孝愍)이라는 시호(諡號)에 추증하였다. [[1851년]](철종 2) [[7월 14일]] 은전군의 봉사손을 정하라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뜻에 따라, 철종은 은전군의 사후양자 후보를 찾다가, [[풍계군]]을 다시 은전군의 양자로 지정했다. 다시 [[풍계군]]의 사판을 은전군의 사판과 함께 봉사하게 되었다. [[1851년]] 다시 [[조선 철종|철종]]의 명으로 풍계군을 양자로 들이고, [[이세보]]를 풍계군의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이세보가 외척의 정치 관여를 비판하다가 유배되면서, [[조선 선조|선조]]의 9남 [[경창군]]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인 [[이승응]]을 다시 풍계군의 양자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철종, 고종, 흥선대원군의 직계이며, [[일제 강점기]] 당시 소설, 연극, 시 등 대중문화의 소재가 된 이복 형 [[은언군]], [[은신군]]과는 달리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였고, [[1948년]] 이후 편찬된 한국의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다. 1970년 이후 국사펀찬위 등에서 조선욍조실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을 한글로번역하기 시작했고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관계, 사도세자 정신질환자설에 대한 이의제기,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견해 등이 나오면서 조명받게 되었다. == 저작 == * 《선원보략 (璿源譜略) ([[1776년]]판)》 발문 ==가족 관계== '''왕가(王家)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조부 : 제21대 [[조선 영조|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 조모 : [[영빈 이씨|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1764) ** '''아버지''' : 추존 [[조선 장조|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적모 : [[헌경왕후|혜경궁 홍씨]](惠敬宮 洪氏, 1735 ~ 1815) *** 이복형 :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 ~ 1752) *** 이복형 : 제22대 [[조선 정조|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1752 ~ 1800) *** 이복누나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 1821), 광은위 김기성(金箕性)에게 하가. *** 이복누나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 1802), 흥은위 정재화(鄭在和)에게 하가. ** 서모 : [[숙빈 임씨]](肅嬪 林氏, ? ~ 1773) *** 이복 형 : [[은언군]](恩彦君, 1754 ~ 1801) *** 이복 형 : [[은신군]](恩信君, 1755 ~ 1771) ** '''생모''' :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景嬪 朴氏, ? ~ [[1761년]] [[음력 1월]]) *** 누나 : [[청근옹주]](淸瑾縣主, ? ~ [[1835년]] [[음력 9월 1일]]), 당은첨위 증 당은위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 ~ 1778)''' * 정실 : 군부인 [[평양 조씨]](郡夫人 平壤 趙氏, [[1758년]] [[10월 28일]] ~ [[1817년]] [[3월 8일]]), 군수 조성(趙峸)의 딸. ** 친자 없음. ** 양자 : [[이당 (왕족)|풍계군 이당]](豊溪君 李瑭, 豐溪君 李瑭,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이복형 [[은언군]](恩彦君)의 넷째 아들. ** 양며느리 : 광산현부인 증 광산군부인 광산김씨(光山縣夫人 贈 光山郡夫人光山金氏, [[1803년]] [[4월 4일]] ~ [[1864년]] [[3월 29일]]), 김시채(金時彩)의 딸 - 자녀 없음 *** 양손자 : 완평군 [[이승응]](完平君 李昇應, 생물년 미상)[[조선 선조|선조]]의 9남 [[경창군]]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 *** 양손자 : [[경평군 (1832년)|경평군]] [[이세보|이호]](慶平君 李晧, 1832 ~ 1895)[[조선 원종|원종]]의 2남 [[능원대군]](綾原大君) 8대손이며, [[안풍군]] [[이영]](安豊君 李𪸠)의 현손. ** 양 첩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李氏, 생물년 미상)양자 [[풍계군]]의 첩 *** 양손자(출계) : [[이희 (1824년)|익평군]](益平君 李曦, 1824 ~ 1863)종숙(從淑)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에게 출계. == 기타 == 어머니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가 [[조선 장조|사도세자]]에게 살해당한 일로 사도세자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1776년]](정조 즉위년) [[조선 정조|정조]] 즉위 후 [[노론]] [[벽파]]의 택군의 대상이 되었다. == 은전군이 등장한 작품 == * [[2007년]]~[[2008년]] [[MBC]] 드라마 《[[이산 (드라마)|이산]]》 - [[강산 (배우)|강산]] * [[2011년]] [[SBS TV|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 - ? == 관련 항목 == {{Col-begin}} {{Col-2}} * [[선원보략]] * [[은전군 추대 사건]] * [[조선 정조|정조]] * [[은언군]] * [[은신군]] * [[홍상범]] * [[홍술해]] * [[홍인한]] * [[정후겸]] * [[노론]] {{Col-2}} *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 * [[사도세자]] * [[의소세손]] * [[한중록]] * [[홍낙임]] * [[홍국영]] * [[벽파]] * [[시파]] {{Col-end}} == 각주 == {{각주}} == 참고 문헌 ==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철종실록 {{조선의 왕자}} [[분류:1759년 태어남]][[분류:1778년 죽음]][[분류:은전군]][[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문신]][[분류:운현궁]][[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전주 이씨]][[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정조]][[분류:조선 장조]][[분류:사형 집행 후 무죄가 밝혀진 사람]][[분류:자살형으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