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윤치영 (동음이의)]]}} {{공직자 정보 |이름 = 윤치영 |원래 이름 =尹致暎 |직책 = 초대 내무부 장관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9/%EC%9C%A4%EC%B9%98%EC%98%81_1961.jpg |그림설명 = 1961년 당시의 윤치영 |출생일= [[1898년]] [[2월 10일]] |출생지=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종로방]]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병사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996|2|9|1898|2|10}} |국적= 대한민국 |학력= [[아메리칸 대학교|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사회과학]] [[석사]] |직업= [[언론|언론인]], 교육가, [[정치가]] |정당= [[무소속]] |종교= [[개신교]]{{웹 인용 |url=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제목=덕수교회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확인날짜=2016-09-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17154055/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보존날짜=2016-09-17 |깨진링크=예 }} |가족. 부인:홍진순. 아들:윤동혁. 딸:윤예진 |경력= [[한국민주당]] 상임위원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전임위원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최고위원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고문
[[경희대학교]] 재단 이사장 |별칭= 그의 [[아명|아명(兒名)]]은 '''윤자능'''(尹子能)
[[호 (이름)|호(號)]]는 동산(東山) | 친인척 = 손자 [[윤인구]], 윤한구
사촌형 [[윤치호]]
큰아버지 [[윤웅렬]]
형 [[윤치오]], [[윤치소]]
조카 [[윤영선 (1896년)|윤영선]], [[윤보선]]
사촌 형 [[윤치호]], [[윤치왕]]
처6촌 [[이병도]] |서명=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2/Signature_of_Yun_Chi-young.svg/200px-Signature_of_Yun_Chi-young.svg.png |웹사이트= }}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다. [[대한민국]]의 제2대 [[서울특별시]]장 겸 제4대 대통령, 상공부장관 [[윤보선]]의 숙부이지만, 그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다. [[이승만]]의 비서실장, [[대한민국]]의 초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과 제2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주프랑스 공사]]를 역임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승만]]의 비서이자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그에게 [[무솔리니]], [[케말 파샤]] 등에 비견하며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될 것을 역설하였다.{{출처}}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고,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9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640페이지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다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56년]]과 [[1960년]]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 [[1963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희의]] 의장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출범 이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 [[서울특별시]]장,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 등을 지냈다. [[1968년]]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종교는 [[개신교]]로 교회의 장로를 지냈다.{{웹 인용 |url=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제목=덕수교회 약력 |확인날짜=2016-09-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17154055/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보존날짜=2016-09-17 |깨진링크=예 }} [[1980년]] 정계에서 은퇴, 사회 원로로 활동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내내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과 정치적 거취를 달리했다. [[한민당]]으로 정계입문하였으나 입각 후 한민당을 탈당,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한민당]]과 [[민국당 (1949년)|민국당]]에 대항하여 친여 성향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조직하여 야당을 견제하였다. == 생애 ==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7/7d/0001.JPG 아버지 윤영렬 동산 윤치영은 [[1898년]] [[2월 10일]] [[경성부]]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의 6남 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집은 굉장한 부자여서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는 형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등과 누이 윤활란, [[윤노덕]], 이름미상 등 3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 중 맏형인 [[윤치오]]와는 30세, 둘째 형 [[윤치소]]와는 28세 터울이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4/40/Yunchiho1945.jpg/130px-Yunchiho1945.jpg 사촌 형 윤치호 윤치영의 9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조선 선조|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8대조 [[윤흔]]은 [[조선 선조|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신]]으로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7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6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조선 인조|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5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조부 윤발(尹潑, 1728~1798) 때에 가계가 몰락하여 윤발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에 이르렀으나 술을 좋아하여 가세가 몰락하였다. [[윤득실]]은 사후 [[증직]]으로 [[증직|증]] [[이조]][[참의]]와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참찬]]에 거듭 [[추증]]되었다.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그의 할아버지였던 [[윤취동]]의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큰아버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아버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사촌 형 [[윤치호]]가 다시 [[외무부]], [[학부 (대한제국)|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윤치영 자신은 청주한씨 한진숙을 어머니라 하였으나, 윤치영이 청주한씨 소생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윤치영이 윤치소의 이복형제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168페이지 라는 설이 있으며, 그의 사촌형인 [[윤치호]]는 그의 숙모 [[한진숙]]이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고 기록했다. 아버지 [[윤영렬]]은 첩의 자식까지 합쳐서 총 9남 3녀를 두었다. ==== 유년기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3/Yun_Bo-seon.jpg/120px-Yun_Bo-seon.jpg 윤치영의 조카이자 유년기 친구였던 윤보선 이후 [[충청남도]] [[아산시|아산]]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산에서 그는 조카인 [[윤보선]]과 함께 한문 서당을 다녔고, 정식으로 한학자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아산시|아산]]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이후 [[안성시|안성]][[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 [[윤영렬]]을 따라 부임지인 [[경기도]] [[안성시|안성]]에 있다가 다시 [[경성부]]로 올라와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졸업하였다. 깐깐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었던 그의 유년기의 몇안되는 친구는 1년 연상의 조카인 [[윤보선]]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30년 연상의 맏형 [[윤치오]]와 [[윤치소]], 사촌 [[윤치호]]의 집에 드나들던 [[노백린]], [[박영효]], [[유길준]], [[양기탁]], [[이승훈 (1864년)|이승훈]], [[이승만]], [[김광서]] 등의 청년지사들을 보게 된다. 그는 다른 형제나 조카들과 달리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고 한다. ==== 소년기와 학창 시절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6/Yun_Chi-young_191602.jpg/160px-Yun_Chi-young_191602.jpg 중앙고등학교 졸업 무렵 그 뒤 그는 [[1913년]] [[3월]] 무시험 추천 입학으로 [[관립]]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 첫날부터 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던 그는 가족 아무와도 의논 없이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로 전학을 결심한다. 13년 봄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함부로 전학한 것에 대해 형 [[윤치오]], [[윤치소]] 등에게 책망을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에서는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국어 담당 교사로 만났다. 중앙학교에 다니면서 윤치영은 YMCA학당 중학부 과정(야간)을 함께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이때 [[변영로]], [[안재홍]], [[안재학]]([[안재홍]]의 동생) 등과 알게 되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7/Rhee_Syng-Man_in_1956.jpg/140px-Rhee_Syng-Man_in_1956.jpg YMCA 청년회 학당 시절 그에게 영어, 철학과목을 가르친 이승만. 1920년 미국에서 재회한 이후 그는 40년간 이승만의 가신이며 정치적 최측근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YMCA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이상재]], [[김규식]], [[이승만]] 등에게서 수학한다. [[1912년]] [[YMCA]] 기독교청년회 학당에서 그는 [[허정]], [[임병직]], [[이원순]], [[김영섭]] 등과 함께 [[이승만]]에게서 배웠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92페이지 윤치영과 그의 동문들은 여러 교사들 중 [[영어]] 교사였던 [[이승만]](李承晩)에게 특히 매료되었다. 이후 윤치영은 그의 동문들 ([[임병직]], [[허정]], [[이원순]], [[김영섭]]) 등과 함께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 일제 강점기 초반 === ==== 체육 활동과 애교심 ==== [[1915년]] YMCA학당 중학부 2년 과정을 수료했고, [[1916년]] 봄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YMCA 강당에서 그는 강사로 있던 [[이상재]], [[이승만]] 등을 만났고 동문으로는 [[여운홍]], [[허정]] 등을 만났으며 중앙학교 동창인 [[여운홍]]의 형 [[여운형]]과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후일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스포츠를 좋아하던 그는 [[중앙학교]] 재학 당시 그는 [[야구부]]와 [[축구부]]에 가입하였으며 졸업 직후 잠시 모교인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의 야구부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중앙학교에서의 은사로는 국어와 역사 교과목을 가르치던 [[주시경]], YMCA중학부에서는 월남 [[이상재]] 등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한다. [[1916년]] 조카인 [[윤보선]]이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그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집안의 주선으로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이며 역사학자 [[이병도]]의 누이인 [[이병영]] 결혼하게 된다. [[이병도]]는 그의 둘째 누나의 남편 [[이병림]]의 일족이었다. {{인용문|마침 이 해난 아버님의 회갑연이어서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막내를 하루빨리 장가들이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56-60페이지 같은 해에 조카인 해위도 장가들인 터여서 아재인 나의 혼담도 서둘러졌을는지 모른다. 상대방 규수는 서린동 이봉구(李鳳九) 수사의 따님으로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이름은 [[이병영]](李丙暎), 그러니까 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누이동생이었다.

매파(媒婆)라고 하는 요새 말로 중신아비가 있었겠지만 세교(世敎)가 이어진 가문간이라서 양가에서는 천생연분으로 경사났다고 기뻐하였다. 아버님은 교분이 두터웠던 이수사를 직접 만나 결혼의 날짜와 절차가 합의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에 앞서 벌써 나의 둘째 누님 [[윤정숙]](尹貞淑), 아명은 노덕(老德)이 [[이병도]] [[박사]]의 6촌 형님 이병림(李丙琳)에게 출가했으니 양가는 겹사돈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혼식 첫 날에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한다. '일생을 해로할 반려자가 될 아내를 택하는데 당사자끼리는 단 한 번의 상면도 없이 집안에서 정해주는 대로 결혼식날 비로소 얼굴을 맞개게 되어 있었으니 참으로 고루한 일이 아닐수 없다.'고 평하였다.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영은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애교심이 워낙 강한 그는 아들 차남 [[윤인선]](尹仁善, [[국회사무처]] 해외자료과장 역임)과 손주 윤황구가 진학할 때 [[중앙고등학교]]를 선택하도록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윤황구는 중앙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경복을 나왔다. 윤치영은 무시험세대인 손자가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주소를 옮기기까지 하며 중앙을 권했다고 한다. 차남 윤인선은 [[중앙고등학교]] 57회 동문이다.이건우 주간부기자. 교육화제, 주간조선. 1993.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 일본 유학과 2·8 독립 선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9/Okuma_lecture_hall_Waseda_University_2007-01.jpg/150px-Okuma_lecture_hall_Waseda_University_2007-01.jpg 모교 와세다 대학교 {{참고|2·8 독립 선언|2월회|3·1 만세 운동}} 사립(현재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을 졸업하고 모교의 [[야구]]부 코치를 맡던 그는 [[1917년]] 도일,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예과(豫科,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였다. [[1918년]] [[2월]] [[와세다 대학]]의 예비 과정(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해 [[3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정치경제학부]] [[법학|법학과]]에 입학했다. [[1918년]] [[일본]]을 방문한 [[여운홍]] 등을 만나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 등의 정보를 입수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조선]] [[2·8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으며, 같은해 [[11월 23일]]에는 [[여운형]]의 일본 입국을 환영하는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론을 강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YMCA 청년회]]에도 활약, 재동경 한인 YMCA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힌 그는 그의 셋째형 [[윤치성]](尹致晟)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육사]] 출신으로 [[러일전쟁|노일전쟁]] 때 [[일본군]] [[기병]]대 [[장교]]로 참전해 용맹을 떨친(《윤치영의 20세기》, 72쪽)" 덕분에 [[불령선인]] C등급으로 분류되어 구속은 모면하고 훈계 방면되었다. 그는 유학기간 중 방학이나 휴가 때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고 여행을 하며 즐겁게 지낸 일을 소중한 추억으로 그의 자서전에 회고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 중 일본 YMCA 청년회에 나갔으며 YMCA 청년회 야구부와 축구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밖에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야구나 축구 모임이 없으면 [[등산]]을 하였다. ==== 임시정부 수립 직후 ==== [[1919년]] [[4월]] 경 재동경 YMCA 등을 방문하고 도쿄 시내의 번화가와 서양인 거주지 등을 방문하였다. 이때 재동경 중국 YMCA에 방문했다가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조카 [[윤보선]]을 만났다. 재동경 중국 YMCA 사(謝) 총무로부터 좀 만나자고 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동경]] 한복판 간다구(神田區)에 5층 건물 하나를 차지하고 위용도 당당하게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총무실에 앉아 있던 중 방문한 인물은 그의 조카 [[윤보선]]이었다. [[윤보선]]은 당시 중국 남경 정부의 요인 서겸(徐謙)이라고 하는 당시 [[중화민국]] 사법부장의 조카를 위장하고 [[동경]]에 잠입한 것이었다. 그와 [[안재홍]], [[이광수]], [[윤일선]] 등은 놀랐지만 [[윤보선]]이 제출한 여권을 보고 안도하였다. 윤보선의 동경 잠입을 계기로 그는 이른바 [[2월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로서 윤치영 등이 주동이 되어 [[김도연 (1894년)|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유억겸]](兪億兼), [[백관수]](白寬洙), 박승철(朴勝喆), 최원순(崔元淳) 등이었다. [[1922년]]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는 절대 빠져들지 말라는 사촌형 [[윤치호]]의 경고와,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점 때문에 [[사회주의]] 청년 단체와는 멀리하였으며, 윤치영은 그들로부터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조롱을 당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 [[장덕수]], [[안재홍]], [[장택상]], [[조봉암]] 등을 만나서 어울렸다. [[1922년]] 봄 [[인천광역시|인천]] [[제물포]]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사촌 형 [[윤치호]]와 스승 [[이승만]] 등의 만류로 고국에 체류하게 된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도미와 독립운동 ==== ===== 중앙 기독교 청년회 활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2/22/RheeKim.jpg/200px-RheeKim.jpg 이승만, 좌측에 앉은 이 {{참고|한국 기독교 청년회|대한인동지회}} [[1922년]] 귀국하여 윤치호·[[이상재]] 등이 지도하던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관]]에 들어가 일하였다. 또한 모교의 야구부 코치이자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YMCA)의 야구부 감독, 축구부 감독을 겸하였다. 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던 중 그는 [[이승만]]의 권고로 [[미국]] 유학을 결심,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1921년]] 7월에 조직된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그는 민찬호·김영기 등과 [[대한인동지회]] 중앙부 이사원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옹호와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21년 태평양잡지(뒤에 태평양주보로 개칭)의 주필로서 민족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동시에 [[동아일보]]의 연락으로 [[동아일보]]와 제휴, 동아일보 북미합중국 특파통신원을 겸하였다. [[1923년]]에는 귀국하여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의 야구팀 코치가 되었다. [[1923년]] [[7월 5일]] [[하와이]] 이주노동자 2세 학생들이 야구팀을 결성했다.천정환, 《끝나지 않는 신드롬》 (푸른역사, 2005) 106-107페이지 이때 YMCA에서는 [[하와이]]로 원정경기를 가는 야구단을 조직했다.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축구, 야구, 육상 선수로 활동했고 중앙고보의 야구 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야구단의 한사람으로 차출, 1루수로 선발되어 태평양에 건너갈 수 있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무국에서는 윤치영이 반일분자라 하여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당시 [[충청남도지사]] [[김관현]](金寬鉉)의 주선으로 출국이 허용, [[조선총독부|총독부]] 외무국에서 여권을 발급받고 출국하였다.경향신문, 1972년 04월 08일자 4면, 사회면 그러나 그가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난 것이 알려지면서 [[김관현]]은 징계를 받게 되고, [[조선총독부]]는 [[하와이 섬]]에 밀정을 파견한다. ===== 이승만과 국내 지도자들의 연락 활동 ===== 이듬해 [[1924년]] [[6월]] 중앙YMCA야구단은 이들을 답방했다. 중앙YMCA야구단의 주장은 윤치영이었다. 당시 그는의 야구 코치도 맡고 있었는데, [[윤치호]]가 그에게 하와이로 가서 시합도 하고 [[이승만]]을 만나보라고 했다. 6월 초 윤치영은 중앙YMCA야구단을 이끌고 출국,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 윤치영이 이끈 팀은 [[하와이]] 한국인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하와이]]의 [[일본인]] 팀과 서울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4대 0 패배였다. 윤치영의 하와이행에는 [[야구]]보다 중요한 비밀 임무가 있었다. 이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김성수 (1891년)|김성수]](金性洙) 등이 보내는 약 5만 달러의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하는 사명이었다. 떠나기 직전 [[이상재]]는 윤치영의 귀에다 대고 "이놈아 잘 가져가. 가서 우남장 뵙거든 우리 모두 씩씩하게 일 잘한다고 전해라"하고 안부 전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자신의 아랫배 속옷에 돈을 감추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 출국할 수 있었다. 그가 일행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탄 배는 [[시모노세키]]-[[도쿄]]-[[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도착 직후 [[워싱턴 D.C.]]에서 달려온 [[이승만]]에게 그는 안부편지를 전하며 숨겨온 약 5만 달러를 전달했다 국내에서 그는 아들 윤기성이 병으로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첫 부인인 [[이병영]]의 사망 소식까지 접한다.신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이승만]]과 [[안창호]] 등이 수시로 찾아와 실의에 빠진 그에게 독립과 이상을 말하였고, 그는 이내 실의를 잊고 독립운동과 학업에 전념하게 된다. ===== 도미와 유학, 독립운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b/b8/%EC%9E%84%EC%A0%95%EA%B5%AC%EB%AF%B8%EC%9C%84%EC%9B%90%EB%B6%80_%EB%B0%9C%ED%96%89_50%EB%8B%AC%EB%9F%AC%EA%B6%8C_%EB%8C%80%ED%95%9C%EB%8F%85%EB%A6%BD%EA%B3%B5%EC%B1%84%ED%91%9C.PNG/140px-%EC%9E%84%EC%A0%95%EA%B5%AC%EB%AF%B8%EC%9C%84%EC%9B%90%EB%B6%80_%EB%B0%9C%ED%96%89_50%EB%8B%AC%EB%9F%AC%EA%B6%8C_%EB%8C%80%ED%95%9C%EB%8F%85%EB%A6%BD%EA%B3%B5%EC%B1%84%ED%91%9C.PNG 임정 구미위원부 발행 50달러권 대한독립공채표 [[1923년]]부터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4년]] 다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7월 10일]] [[이승만]]이 그를 만나 자신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에서 활동하며 [[대한인동지회|동지회]] 기관지인 월간 태평양 잡지의 집필과 인쇄 과정을 맡아 봤고,발간, 발송, 광고, 수금 등의 일도 직접 맡아 보았다. [[1924년]] [[7월]]부터 [[1937년]]까지 [[대한인동지회]] 총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미국]] 본토행을 단념한 그는 [[이승만]]의 요청대로 [[하와이]]에 눌러앉아 이승만이 교포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태평양]]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 이 잡지는 [[이승만]]이 발행하던 것으로서 [[한국사]](韓國史)와 한국 문화를 [[영어]]영문으로 소개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운전을 할 줄 몰랐던 [[미국]]생활 초기에는 [[이승만]]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함께 배달하러 다녔다. 후일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은 15센트 짜리 빵 한 개, 4~5센트 하는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에도 빵 한 개와 야채 스프가 고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그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 교민들은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고, 윤치영과 [[이승만]]도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은 대화와 언변에도 능했지만 잡다한 재주도 있었는데, '이 박사는 농사일 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힌 솜씨인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도 대단해서 샌님인줄 알았던 한국 교포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회상하였다. 뒤에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몇인의 배달부를 채용하여 배달, 배송을 시켰지만 기타 제반사항은 윤치영 자신이 직접 주관하였다. ===== 이승만 보좌와 미국 본토행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9/95/Yun_C.y_1925%27s.jpg/180px-Yun_C.y_1925%27s.jpg 하와이에서 미국본토로 출발하는 선상에서 (1925년 8월) 생활할 곳이 없던 [[1923년]] [[미국]] 입국 초기에 그는 [[하와이]] [[한인 기숙학원]] 기숙사, [[미국]] 한국인 교민총회 하와이지부 본부의 숙사 3층 등을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였다. [[1925년]] 이후에야 국내에서 약간의 여비가 보내져서 생활형편이 나아졌다. 이후 집에서 충분한 학비를 보내왔기 때문에 그는 자유롭게 정치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윤치영은 학업에 많은 지장을 받기는 했으나 "나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에 몰두했다 고 회상하였다. [[1924년]]초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 본부이사 겸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으로부터 해군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제2차 태평양 회의에 파견,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을 수행하여 일본의 침략적 야만성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연안 국가 17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서재필]]을 대표단장으로, [[신흥우]], [[유억겸]], [[이승만]], [[양유찬]]과 윤치영을 대표단원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전보로 보내왔다. 당시 [[일본]]은 30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윤치영은 일본측 대표단장 쓰루미 유스께(鶴見佑輔)를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 쓰루미 유스케에게 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침략상과 [[조선총독부|총독부]] 정치의 잔혹성 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윤치영의 회고에 의하면 "만약 그가 불손한 태도로 나온다면 주먹다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한다. 그런데 쓰루미는 윤치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신중한 태도로 듣고 있더니 반박하였다. {{인용문2|[[일본인]]들은 비록 하찮은 인력꾼(잡역부)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은 잘사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애국심]]이 없어서 협박에 약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대학]] 출신들이고 당신부터도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 아니냐? 그래도 조선인 가운데 애국애족 하는 사람들은 상당수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니 이 점을 너희는 [[일본]]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쓰루미 유스께]]의 역설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윤치영은 민망해서 물러났다. 후일 회고하기를 "내가 그 사람의 노련한 말솜씨에 완전히 말려들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25년 여건이 악화되면서 [[하와이 대학교]]를 중퇴한다. 그해 여름 [[이승만]]으로부터 본토로 건너가 공부하는 것이 후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권고를 듣고 이듬해, [[이승만]]으로부터 약간의 여비를 받고 [[호놀룰루]] 항구에서 배를 타고 본토로 건너간다. 바로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28년]] 3학년 수료 후 중퇴한다. [[이승만]]과 헤어지기 전 그는 이승만에게서 기념으로 대형 [[태극기]]를 선물받았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태극기를 고이 간직하였다. 이 태극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파리 대표부(통합되기 전 임정 파리대표부)에 걸려 있었던 태극기였다. ===== 미국 생활과 대학 재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4/4c/Yun_C.Y_1926%27s.jpg/210px-Yun_C.Y_1926%27s.jpg 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시절 [[1925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동시에 각지에 동지회 지부를 설치하고, 순회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웹 인용 |url=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제목=나라사랑 광장 |확인날짜=2010-01-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959/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보존날짜=2016-03-05 |깨진링크=예 }} 이후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워싱턴 대학교]], [[아메리칸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 [[6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인 허 정을 중심으로 [[김도연 (1894년)|김도연]]·김양수 등과 편집을 맡아 일하였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 소식을 접한 [[안창호]](安昌浩)는 사람을 보내다가, 직접 윤치영이 거주하는 하숙집을 찾아와서 그와 세상과 정치 담론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안창호]]는 그에게 자신의 [[국민회]]와 [[흥사단]]에 들어와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윤치영은 자신은 [[이승만]]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안창호가 거듭 부탁했으나 그는 거절하였고, [[안창호]] 역시 설득을 포기하였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0/Professor%27s_Gate_-_GWU.JPG/210px-Professor%27s_Gate_-_GWU.JPG 모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입구 프린스턴 대학에 2년 다니다가 [[1927년]]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겼다. [[1928년]]에는 [[엘리자벳 대학]]에서 강의를 듣다가 다음해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옮겨서 수강하였다. 1920년대 후반 [[뉴욕]]에 체류중이던 윤치영은 이승만과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 시기에 그가 보낸 간찰 중 장문의 간찰 2통이 발송되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간찰유영익, 《이승만 동문 서한집 (상)》(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31-32페이지 답신을 받았다. 장문의 간찰 중 첫 번째 간찰에서 그는 이승만을 [[프랑스]]의 [[나폴레옹]], 터어키의 [[케말 파샤]], 이태리의 [[무솔리니]] 등에 비견시키면서 [[이승만]]에게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독재적 지도자가 되라고 권고하면서 윤치영 자신은 이승만을 위해 '견마지로(견마지로)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승만에게 필요한 금력, 정략 및 국내외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동지회와 동지식산회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뉴욕지역 동지회 지회 조직에 앞장설 각오를 피력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도 그는 수시로 편지와 전화로 [[이승만]]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 구미위원부 활동 ===== {{본문|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이후 윤치영은 [[미국]]내 한인 유학생들을 포섭, 독립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58명의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규합하여 청년조직으로 활용하면서 [[대한인동지회|동지회]]를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 한인 교포사회에 홍보하였다. [[미국]]내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모임에 참석해서는 기회마다 [[일제]]의 죄악을 폭로하는 강연을 하는 한편, 중남미 지역에 산재해있는 [[한국인]] 교포들과의 연락관계 업무를 맡았다. 당시 [[멕시코]]에 1천 명, [[쿠바]]에 5백 명 가량의 한국 교포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윤치영은 이승만에게 수시로 보고서와 편지를 송부했다. 두 번째 장문 간찰에서 윤치영은 [[뉴욕]]에 집결한 [[한국]]인 유학생들 58명을 중심으로 [[대한인동지회|동지회 뉴욕지회]]를 발족시키는 데 성공하였음을 알리면서 앞으로 수준 높은 회원들을 더 많이 포섭하기 위해 '[[국부]](國父 : the father of Korea)' [[이승만]]이 (독립 이후) 건국 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윤치영으로부터 고무적인 간찰들을 접수한 [[이승만]]은 직접 친필로 네 차례의 답신을 통해 [[하와이]]의 동지촌과 [[동지식산회사]]의 실황을 알려주고 또 윤치영이 제기한 네 가지 의문점에 대해 대답을 하였다. 윤치영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이상촌 건설 주장에 고무되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및 한인동포 청년들을 모으고, 청년 비서들을 채용하여 미국 및 한국 국내외, 일본 등의 정세와 언론의 동향을 파악,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체육활동, 청년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던 윤치영은 청년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고 [[이승만]]은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0/02/Yun_Chi-Yeong_1935.PNG/150px-Yun_Chi-Yeong_1935.PNG 귀국 직전 미국에서 (1935년 무렵)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6/6e/Yun_Chi-ho%27s_Family_02.png/300px-Yun_Chi-ho%27s_Family_02.png 형수 이범숙의 회갑연(1936년), 다섯째 줄 오른쪽 끝이 윤치영, 넷째 줄 가운데, 색동옷을 입은 윤치소의 뒤측 오른편, 한진숙의 바로 뒷쪽열은 윤치호, 둘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는 조카 윤보선, 셋째 줄 가운데는 형 윤치소, 그 옆은 어머니 한진숙, 넷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형수 이범숙, 다섯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 [[1929년]]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 외교위원부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그해 윤치영은 [[미국]] [[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교]] [[외교학|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결석이 잦아 1학년 재학 중 중퇴하고 만다. [[1930년]] [[태평양잡지]]가 [[태평양주보]]로 개명하면서 윤치영은 [[태평양주보]]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이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위원]]의 직함과 동시에 [[태평양주보]]에 칼럼 기고 활동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고국에서 친지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강연료, 재미동포들의 후원금으로 가난한 생활을 연명하였다. [[1932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국제법]] [[학사]] 학위를 받고, [[1934년]]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국제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193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에 선출되었다.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21070057 고 윤치영 전공화당 당의장], 1996년 2월 10일자 이후 계속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5년 계약직 연구원이 되어 국제법을 연구하였다. [[1935년]] [[5월 11일]] 일시 귀국했다가 [[1936년]]초 출국했으며, [[1937년]] [[5월]]에 [[미국]]을 출발, 영구 귀국하였다. ===== 귀국과 흥업구락부 사건 ===== {{참고|흥업구락부 사건}} [[1937년]] [[5월]]에 귀국했다. 윤치영은 이승만을 '아버지' 혹은 '한국의 아버지(Father of Korea)'라 불렀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 381-383페이지 귀국 후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겸 [[흥업구락부]] 간사,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 등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주말마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를 자주 위문하였다. 윤치영은 자신의 귀국 목적이 재정난을겪고 있던 [[이승만]]에 대한 자금 조달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23-147페이지 그러나 정병준은 윤치영의 귀국이 [[이승만]]과의 사전 협의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윤치영은 이승만 관련 최신 정보를 흥업구락부에 제공했음이 분명했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흥업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후일 [[정병준]]은 그가 [[흥업구락부]]의 정식 회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출입하던 그는 미행을 당했고, 종로 연건정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불심검문을 이유로 체포되어 전신수색을 당한 뒤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종로구]] 집에 도착 생활하던 중, [[1938년]] 말 집에 찾아온 [[서대문구|서대문]] 경찰서 소속 형사들에게 다시 연행되었다. 이때 그의 가택에서 발견된 '[[일본]]경찰의 눈에 띈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역시 화근'이 되었다. 체포된 그날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취조 과정에서 [[서대문 경찰서]] 2층에 끌려간 그는 [[이승만]]으로부터 어떤 밀명을 받고 귀국했는가 추궁당했다. 이어 [[미국]]에서의 행적을 설명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승만]]과의 관계, [[안창호]]와의 관계 등을 집중 추궁당했다. ==== 흥업구락부 사건 전후 ==== ===== 투옥과 형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c/cf/%EC%84%9C%EB%8C%80%EB%AC%B8%ED%98%95%EB%AC%B4%EC%86%8C_1938%EB%85%84.png/130px-%EC%84%9C%EB%8C%80%EB%AC%B8%ED%98%95%EB%AC%B4%EC%86%8C_1938%EB%85%84.png 1938년의 서대문 형무소 외곽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3개월간 감금당했다. [[일본]] 경찰로부터 [[워싱턴 D.C.|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의 활동을 추궁당하다가, 일제는 그와 [[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을 걸고 넘어졌다.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연락망을 대라, [[임정 구미위원부|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국내 비밀공작을 대라, 해외 독립단체들과의 연락관계를 불라는 구타와 협박을 당하였다. {{인용문|나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입은 다물어졌으며 오히려 더욱 강하여지고 담담하여졌다. 나는 이러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 나이를 먹기까지 철없이 살아왔구나 싶은 뉘우침이 들기도 하였다. 더욱이 나도 모르게 침착하여지고 냉정해졌으며 마음과 정신이 맑고 깨끗해짐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인생대학([[형무소]]를 지칭)의 큰 시련장이었던 것이다. 나라 없는 인간은 이렇게 당하다가 맥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을 했다. 그러나 나의 육신은 한계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육상이나 야구, 검도로 단련된 강단있는 몸이지만 저들의 연일 계속되는 모진 고문에는 당할 항우장사가 없었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0-133페이지}} 몇 차례의 구타와 고문에 계속 기절하자 형사들은 강제로 신체검사를 했다. 신체검사가 있던 날 그는 헌병에 의해 목욕탕이 있는 으슥한 지하 취조실로 끌려갔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구미위원부]]로부터 어떤 목적을 받고 국내에 파견되었는가 진술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거절했다.취조실에서 그는 헌병들에 의해 넘어진 뒤 물고문을 당한다. ===== 고문과 아사 직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3/Seidaimon_Prison2.JPG/220px-Seidaimon_Prison2.JPG 일제 강점기 당시 서대문 형무소 전경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2/2a/DSC_0472.JPG/150px-DSC_0472.JPG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그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모른다며 잡아떼었다. 그러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종로구에 있는 그의 집을 뒤져서 그의 서재에서 [[이승만]], [[서재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원들과 촬영한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독립공채표 등을 찾아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며 부인했고, 일본 형사들은 그에게 고문을 가한다. {{인용문|칠성판 처럼 생긴 판대기가 철침대 모양의 대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처음이라 일본 헌병들이 시키는 대로 칠성판 위에 머리를 제친 채 드러누웠다. 두 팔을 칠성판 밑으로 비틀어서 오랏줄로 붙들어 매어 꼼짝 못하도록 고정시킨 뒤, 덩치 큰 놈이 내 배에 올라카는 것이었다. 내 몸을 요지부동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코에다 대고 들이붓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숨이 막혀 질식하게 되었다. 그들이 번갈아가며 이 짓을 계속하였는데 나는 어느 새 기절하고 말았다. 그들의 인공호흠으로 내가 얼마만에 정신이 들자 그동안에 다그쳐온 질문들을 또 다시 반복하는 것이었다.}} 후일 "앞서 말한 물고문은 '해전'이라고 해서 고문치고는 그래도 약과였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매질을 한다든가 물을 먹이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ABC와 같은 초급의 것이다.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공중전'(空中戰)이라고 하는 혹독한 신체적 고통이 계속되는 형벌이었다. 그에 의하면 이것도 밤이 깊어 자정이 지난 시각에 지하실 으슥한 곳에서 행하여지는데, 우선 두 팔을 묶은 뒤 목총을 묶인 팔과 등 사이에 찔러넣고 양 끝을 밧줄에 매서 천장에 끌어올린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얼마 안가서 어깨, 팔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는 것이다. 기절하면 머리에 물을 쏟아붓기도 하고 몽둥이로 쿡쿡 쑤시기도 하며 호령 호령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끝내 자백을 받아낼 수 없게 되니까 이들은 점점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나중에는 손가락을 비틀고, 침질을 하여 고문하였다. 그 뒤 [[1939년]] [[3월]] 초 중부경찰서로 이송되었다. ===== 서정억기자 구타 사건 ===== 옥중에서 그는 [[3월 10일]] [[안창호]]의 부음 소식을 접하였다. 그리고 곧 [[경기도경찰청|경기도 경찰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안재홍]]을 추켜세우고 [[여운형]]도 이미 자백을 하였는데 너만 혼자서 버틴다며 회유하였다. 그 뒤 그의 국내활동을 따지더니 교우관계를 추궁당하였다. 일경은 그에게 제시한 흥업구락부의 명단을 제시하며 관련성을 집중 추궁하기도 했다. 그 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4개월 수감되어 있었고, [[유길준]]의 아들이자 순종의 동서인 [[유억겸]]도 끌려와 취조당하였다. 중부서와 경기도경찰청 등으로 끌려다니며 5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 과정에서 윤치영은 [[흥업구락부]] 회원은 아니지만 흥업구락부의 영향하에 있는 서울 거주자들의 명단을 진술한 적이 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365-366페이지 수감기간 중 윤치영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자신과 최근 교류했던 인물들을 모두 진술했고, [[유억겸]], [[유만겸]], [[안재홍]], [[김병로]], [[곽상훈]], [[허정]] 등이 끌려가 고문당했다. 이때 함께 투옥당한 인물은 [[김준연]], [[구자옥]](具滋玉), [[이만규]], [[박승철 (1897년)|박승철]](朴勝喆), [[정춘수]], [[오화영]], [[최두선]]최남선의 동생이다., [[안재홍]], [[이철원]] 등이었다. 옥중에서 그는 사촌형 [[윤치호]]와 그의 [[중앙학교]] 시절 은사 [[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이 사적으로 보내주는 사식과 영치금으로 겨우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그는 또 [[흥업구락부]] 예하 3개 그룹에서 포섭하려던 포섭자 명단을 [[일본]] 경찰에 발설하였다. 마침 [[서대문 경찰서]]에 취재차 왔다가 윤치영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매일신문]] 기자 [[서정억]]은 그의 처참한 고문 장면을 목격하고 항의했다가, 취조형사들에게 구타당하였다. [[서정억]]의 구타사건으로 현명건 등 서대문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경기도 경찰부에 항의하기도 했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5-136페이지 윤치영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다. 그의 고문현장을 목격한 [[동아일보]]사 [[서정억]] 기자에 대한 구타사건은 언론계와 [[기독교]]계로 번졌고, 외부로도 알려져 [[일본]] 본국의 언론인과 [[기독교]] 단체에서 총독부에 항의성명서와 항의방문을 하는 사태로 확산되었다. ===== 석방과 감시 ===== 그 뒤 사촌형 [[윤치호]]가 사건 연루자 전원 52명의 신원을 책임진다는 신원보증서와 시말서를 작성했고 이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석방되었지만, 사촌형 윤치호가 조선총독부 특무기관으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공황상태에 빠져 그해 가을 내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이후 [[1942년]]까지 4년간 [[대화숙]] 보호 관찰소에 출입하였다. 고문 후유증은 쉽게 아물지 않았고, 그는 '오랫동안 팔다리를 마음대로 가눌 수 없었고 불길한 예감이나 강박증에 시달림을 당했다. 이후 날이 궂으면 어깨나 팔 여러 곳이 결려서 고생하였다. 그의 거처는 그의 부모가 마련해준 안국동 104번지에 제한되었다. 아내의 간호로 몸이 어느 정도 차자 나아 정상을 찾아가던 때에 그는 보호관찰처분을 받고 대화숙에 입소했다. {{인용문|아내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로 나의 몸이 차차 정상을 찾아가던 어느 날 나는 또 그들의 호출을 받아, 어느 장소로 끌려나갔다. [[서대문구|서대문]]에서 신촌 굴레방다리로 넘어가는 아현 마루턱에 있는 옛날 감리교 신학교 자리였다. 해방 후에는 다시 신학교로 쓰이다가 지금은 새마음 병원으로 변하였지만 당시 일제는 이 건물을 강제 징발하여 그들의 '''[[일본]]정신 고취'''를 위해 설립했다는 이른바 '대화숙 보호관찰소'(大和塾 保護觀察所)를 여기서 운영하였다.}} 30년대 후반 이후에도 윤치영은 청년들과 사귀며 연락을 통해 국내외 정세와 언론 동향, 정보 등을 입수하여 대응하였다. 윤치영은 [[야구]]와 [[축구]] 등을 잘 했고 체육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체육]]을 통해 그는 청소년들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한 교회 청년 활동에도 참석하여 교회를 통해서도 청년층을 주변에 포섭하였고 [[이승만]]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선총독부|총독부]] 당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분류하여 내사, 감시하였다. 석방된 뒤 그는 신병(身病)을 가장하여 외부 출입을 삼갔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는 안국동 집앞을 지키는 [[일본]]헌병의 눈을 피해 등산가는 척하고 [[강원도 (남)|강원도]]의 야산 속으로 숨어버릴 생각을 했지만 두 번씩 망우리 고개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가다가 도중에서 잡히면 오히려 더 나쁠 것 같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 ==== {{참고|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대화숙}} [[대화숙]]에 입소하면서 그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묶인 뒤 세뇌교육을 당했다. 꿇어 앉혀놓고 [[일본]] [[승려]]가 나와 [[불경]]을 읽고 정신을 차리라고 냉수를 머리에 끼얹는 모욕을 당했다. [[일본]] [[군인]]을 데려다가 강연도 시켰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중에서도 제일 고약한 짓은 남산 꼭대기에 있는 [[조선신궁]] 광장으로 끌고 올라가 [[신사 참배]]를 시키는 일이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들어 [[신사 참배]] 거부 의사를 표현하였다가 온갖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대화숙]] 보호감찰기간동안 세뇌교육을 거절하며 버텨냈다. 이후 그는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품게 된다. [[일본]]에 대한 반감과 감정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에 의하면 '(고문) 이후 그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입은 다물어졌으며 오히려 더욱 강하여지고 담담하여졌다. 나는 이러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 나이를 먹기까지 철없이 살아왔구나 싶은 뉘우침이 들기도 하였다.고 회상했다. 침착하여지고 냉정해졌으며 마음과 정신이 맑고 깨끗해짐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듣거나 보지 못했던 인생대학(형무소를 지칭)의 큰 시련장이었던 것이다.'고 했다.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엄한 감시와 고문에 그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된다. 그에 의하면 "그들의 무자비한 식민 통치의 폭력 앞에 나는 하루 아침에 짐승이나 벌레만도 못한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나를 죽음의 일보 직전 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나라 없는 인간은 이렇게 당하다가 맥없이 죽어가야만 하는구나 하는 뼈저린 자각을 했다." 라며 이후에도 한일 외교에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하며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냈다. ==== 일제 강점기 후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9/97/Ycy.jpg/160px-Ycy.jpg 윤치영 ===== 태평양 전쟁 직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c/USSArizona_PearlHarbor.jpg/220px-USSArizona_PearlHarbor.jpg 태평양 전쟁 {{본문|태평양 전쟁|창씨개명}} [[1940년]] [[1월]] 그의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토론하였다. [[1월 7일]] [[윤치소]],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형 [[윤치오]]의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치창, 치왕, 치오 등은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 형제들과 사촌들, 조카들 등이 참여한 문중 회의에서 그는 "[[이승만]] 박사 등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달성될 것이다" 라는 견해를 피력했지만 묵살당했다. 그는 문중의 창씨개명 시도를 반대하고 저항하였지만, 문중 총회에서 창씨개명은 결정되었고 그도 본인 의사와 관계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다. [[1940년]]대초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그는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승만]], [[윤치호]] 등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 대외활동을 줄였다. [[이승만]] 등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였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라디오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 ===== 창씨개명 ===== {{참고|창씨개명|단파방송 밀청 사건}}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다. [[1월 7일]] 사촌 형 [[윤치호]]는 첫째 형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 [[윤치호]], [[윤치소]],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당시 윤치영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이 달성된다면 일본의 패전은 시간 문제이고, 해방은 멀지 않은 미래에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된다는 윤치영의 말은 묵살당했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윤치영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며 창씨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결국 그는 이토 치에이로 창씨 개명한다. ===== 명의 도용 사건 =====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국내에 있는 문사,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을 여기저기 내걸도록 강요하고 나섰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9페이지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점점 미쳐간다며 분개하다가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민족 대표 33인|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가 그를 만나자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그 당시 [[조선총독부|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양지광〉에서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저명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 윤치영은 자신의 허락 없이 명의를 도용했느냐며 항변하였다. [[박희도 (1889년)|박희도]]는 지금 일본은 1억 인구가 총동원이 되어 전쟁수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의 유지들이 살아남는 길은 억지로라도 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는 길뿐이어서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했노라고 하였다. [[박희도 (1889년)|박희도]]는 그의 이름 뿐만 아니라 백모, 현모, 신모 등 다수의 이름을 본인의 승락 없이 게시한 모양이었다. 윤치영은 그들과 같이 [[박희도 (1889년)|박희도]]를 찾아가 심한 항의를 하였으나, 일제 전시하의 때가 때이니만치 명예훼손 소송 등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해 [[12월 20일]]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가 운영하는 순일본어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사에서 주최한 "미영 타도 대좌담회"에서 연설하였는데, 법률이나 외교를 연구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간섭 행위"에 대한 일본의 "신성불가침의 자주권, 환언하면 국가 생존권에 관한 최후적 발단"이라고 [[일본]]의 행위를 옹호하였다. 1942년 3월 「동양지광」에 쓴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이란 글을 기고했다. ===== 친일 활동 의혹 ===== {{중립 필요 문단|날짜=2011-8-8}} [[1940년]]대 초반 윤치영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에 참여하였다. 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에 참가하였다.청산하지 못한 역사 1 - 1(반민족문제연구소청년사, 1994) 임전대책 협의회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를 조직하여 [[9월 7일]] [[서울]]에서는 76명이 1원짜리 채권을 가두판매 하였는데 윤치영은 여기에 동대문지구 대원으로 참가했다. [[1943년]] "우리 [[조선]]청년을 영광스러운 일본 해군의 자랑스러운 대열로 받아들인 데 대하여 제국 정부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파격의 영광인데 어찌 주저할소냐.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 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1942년]]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 출연하자 윤치영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성수 (1891년)|김성수]],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등과 함께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였다. 이후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였다. ===== 반론 ===== 그러나 그가 끝까지 [[창씨개명]]에 반대했다는 점, [[이승만]]과 연락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주장했다는 점 등이 지목되고 있다. 또한 당시 칼럼을 기고한 것은 명의 도용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도용된 동양지광에 실린 글에 그는 [[창씨개명]]이 실리지 않고 본명인 '윤치영'으로 게재미영타도 좌담회, 《동양지광》 1942년 2월호 되었다. 윤치영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었음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도 이런 칼럼과 단체에 명단이 올려져 있는 것을 두고 수시로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윤치영은 동양지광에 실린 글은 [[박희도 (1889년)|박희도]]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도용 한 것이라며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었음을 해명하였다. ===== 광산사업 실패와 파산 ===== [[1942년]] 이후 그는 [[광산]] [[채굴]] 사업에도 손을 댔다. 그가 귀국한 목적은 [[미국]]에서 재정적인 곤란을 겪고 있는 [[이승만]]에게 자금을 마련하여 보내는 일이었으므로 친지의 소개로 [[전라남도]]의 실업가인 이태완(李泰完)과 손잡고 유망한 금광 개발에 착수하였다. 자본은 약 10만 원 정도면 될 것이라고 하여 그는 [[전라북도]] 후창(厚昌)에 있는 중흥광산(中興鑛山)에 손을 대고 이태완과 함께 공동경영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만한 거금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윤치영은 우선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 교수로 있던 사촌형 [[윤치왕]]에게 청하여 착수금 2만 원을 [[약속어음|약속수형]](約束手形)으로 받아냈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40-141페이지 그러나 [[윤치왕]] 박사가 현금을 조달하지 못하고 약속 수형을 내면서 그의 이서(裏書)를 요구하기로 그는 여기에 응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업도 사업답게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빚만 눈사람처럼 커져갔다. 약속을 했던 [[윤치왕]]은 뒷돈을 제대로 대지 못하자 은행에서 부도가 나고 해방 전 2, 3년간 갖은 곤경을 다 겪게 되었다. 그는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까지 다 털어넣었지만 허사였다. 빚은 불고 불어 당시의 돈 125만원으로 증가했다. 파산이 선고되자 그의 집은 여섯 차례나 법원으로부터 차압이 들어오고 거리에 나앉을 지경이 되었고, 가족들의 신산고초도 심해졌다. 이때의 빚 후유증은 해방 이후까지도 그를 괴롭혔다. {{인용문|세상 물정을 모르던 나는 빚의 무서움과 더불어 인정의 염량(炎凉)을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친구와 친지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지만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조선총독부]]의 [[고문]]과 감시, [[파산]] 이후 경제적인 빈궁함과 주변의 무시, 조롱, 친한 친구와 지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외면 등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회의]]와 함께 [[냉소주의|냉소적]]인 [[인간관]]을 품게 된다. 이후 각종 회식이나 모임 자리에 나가는 일을 스스로 기피하였고, 홀로 독서와 사색에 빠졌다. ==== 대화숙 보호관찰 처분 ====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언제나 그들의 감시하에 있으면서 집과 [[대화숙]] 사이를 왕복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일본군]] 헌병 군조(중사급)이 파견근무를 하였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7페이지 일제 말엽으로 접어들며 식량이나 무자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갔기 때문에 집안 형편 역시 말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 파견되어 있던 일본 헌병 중 고바야시(小林) 군조는 그의 집안 살림이 궁색한 것을 동정하여 가끔 설탕 배극표라든가 식량 배급표를 건네주어서 도움이 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일본]]의 통치는 사상과 활동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반발하였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3/36/%EC%95%88%EC%9E%AC%ED%99%8D.jpg/200px-%EC%95%88%EC%9E%AC%ED%99%8D.jpg 민세 안재홍, 중학교와 대학 선배이자 사적으로 친한 인물이었다. [[1944년]] [[9월]] [[국민총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맡았다.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10) 695페이지 [[1944년]] [[11월]] [[안재홍]]의 방문을 받았다. [[안재홍]]의 말은 "엔도(遠藤) [[정무 총감]]이 나와 [[여운형]]을 만나보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윤치영은 "패전이 짙어가는 마당에 무슨 수작인가"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에 의하면 '[[1944년]] [[7월 18일]]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총사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이 구성된 지도 여러 달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협력을 가장하고 [[중국]] 동부에 괴뢰정권을 세웠던 [[왕조명]](王兆銘, 개명 王精衛)은 같은 해 [[11월]]에 병사라는 구실하에 제가되었다. 민세의 말은 엔도가 몽양과 윤치영과 자기 세 사름에게 [[남경]]으로 가서 왕정위(王精衛)를 만난 뒤 [[장개석]]을 찾아가 [[일본]]이 [[중국]]과 휴전하는 화평 교섭을 펼 수 있도록 일본 정부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윤치영은 "이 사람이 기가 찬 소리를 한다"고 하며 반대했다. {{인용문|* 윤치영 : 이 사람아 더운 박 먹고 식은 소리 작작하게. 만일에라도 말이네만 형님과 우리가 중경으로 간다고 하세. 혹시 정략적으로 우리를 장 총통과 만나게 해 줄는지는 모르나, 거기에는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서 있고 [[한국 광복군|광복군]]이 있네. [[일본]]의 의도야 어찌 되었건 우리는 (중경에) 갔다가는 당장 총살감이야. 그리고 나는 아직도 감방 생활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성하지 않아 잘 걷지도 못하는 형편일세. 가려거든 몽양과 둘이서나 가보게

* 안재홍 : 괜히 경거망동 하지 말고 몸조심이나 하게. 곧 해방이 될 터이니 }}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과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등을 애청하였지만 [[충칭]]행은 무모한 행위라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안재홍 형은 가끔 싱거운 소리를 잘 하는 친구이지만 그때는 무슨 압력을 받았기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 나는 가끔 그때 생각을 해본다"고 회고하였다. [[1945년]] 초 [[일본]]에서 [[불령선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야산으로 끌고가 처형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뒤 도망치려다가 [[양주군]]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이후 충격을 받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 광복 직전 ==== [[1945년]] 초 광복 직전, 윤치영은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하였다. 기업, [[광산]]사업이 실패한 뒤 별다른 뚜렷한 직업이 없던 그는 아내가 가정 부양을 맡았다. 그의 일과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임영신]]의 집에 가서 그가 삶아주는 닭고기를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밀청했다. [[1945년]] [[2월 4일]], 단파방송은 연합국들의 수뇌들이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문제를 논하고 [[얄타 협정]]을 체결하였다는 보도가 있어서 일본 패망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다. 그해 [[5월 7일]]에는 독일이 먼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고 [[히틀러]]는 베를린 요새의 지하실에서 여비서 [[에바 브라운]]과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42-147페이지 [[8월]] 초순 [[중앙학교]] 정문에서 동쪽 좁은 골목 언덕을 넘어서면서 [[창덕궁]] 뒤뜰 비원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집을 찾아갔더니 고하는 뜻밖의 교섭을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이쿠다 [[경기도지사]]로부터 받았노라고 하며 이놈들이 망할 날이 가까워왔나 보다고 하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건국동맹]]이 이미 지하에서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윤치영에 의하면 [[여운형]]이 [[박헌영]], [[이강국]], [[이현상]]과 함께 점조직 방식으로 진행시켜 왔다고 증언하였다. [[8월 6일]]과 [[8월 9일]]에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를 두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B-29가 원자탄을 투하하여 전대미문의 참사이 전하여지고 북으로부터는 소련군이 함경도에 침입했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고 회고하였다. 윤치영은 잔뜩 기대하고 안국동 집에 머무르고 있다가 일본 천황의 항복 성명서를 청취했다. === 광복 이후 === ==== 국민준비대회, 한민당 창당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b/bf/%EC%86%A1%EC%A7%84%EC%9A%B0.gif/180px-%EC%86%A1%EC%A7%84%EC%9A%B0.gif 한민당의 초대 당수 송진우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까지 윤치영은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본문|한국민주당}} {{본문|국민대회준비위원회}}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장덕수]], [[임영신]] 등과 함께 별도의 국민정당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민당]]이 창당된다는 소식을 듣고 활동을 중단하고 한민당에 가담하였다. [[1945년]] [[9월 2일]]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군정청]] [[재무부]] 재산처분국장에 임명되었다. [[9월 6일]] 오전 그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수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집 안국동 104번지에서 담 하나 사이인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는 6백여 명이 모여 소위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은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각본대로 좌익 인사들이 중심이 된 55인의 헌법기초위원을 정하고 소위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켰다. 경기여고 강당에서 담장 하나 건너편에 있던 윤치영은 자기 집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다. [[9월 6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약칭 국준)을 조직하였다. 윤치영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겸 외교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9월 16일]] [[경성부]]에서 결성된 [[한국민주당]] 창당에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한국민주당|한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152a 윤치영 - Daum 백과사전] 이후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임정 봉대론]]에 동조하였고, 임정을 추대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1945년]] [[10월 12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공항장으로 나가 그를 영접했다. 이후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민당]] 활동은 소원해졌고, 자연스럽게 [[한민당]]과 멀어져갔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10월 12일]] 저녁 [[중앙방송]]에 출연, "대표적인 [[친일파]]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일체 문책하지 않겠다."라고 방송을 하여 민심을 수습시켰다. 이어 [[미군정]] 재산처분국장 직을 사퇴하고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했다. ==== 이승만의 비서실장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c/Syngman_Rhee_and_Yun_Chi-young.jpg/150px-Syngman_Rhee_and_Yun_Chi-young.jpg 1945년 10월 16일 중앙청에서 귀국인사를 하는 이승만을 수행중인 윤치영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1/1e/%EC%9C%A4%EC%B9%98%EC%98%81_%26_%EC%9D%B4%EC%8A%B9%EB%A7%8C_1945.jpg/210px-%EC%9C%A4%EC%B9%98%EC%98%81_%26_%EC%9D%B4%EC%8A%B9%EB%A7%8C_1945.jpg 돈암장에서 이승만과 함께 (왼쪽 맨 끝이 윤치영, 가운데 검은 한복을 입은 앉은 이가 이승만) [[1945년]] [[10월 12일]] [[이승만]]의 귀국 이후, [[돈암장]]의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고 비서실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 귀국 직후 기자회견 당시부터 윤치영은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한·미·일 3국인의 삶을 산 최기일 박사 자서전》 (생각의나무, 2002) 86-89페이지 [[최기일]]은 그 자리에서 윤치영과 면담하였다. [[최기일]]은 윤치영에게 [[이승만]] [[박사]]가 지도자로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학생층과 이북 출신 청년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치영은 자신의 생각과 일치했던 [[최기일]]에게 청년 및 학생단체를 다루어 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그는 2년 동안 [[돈암장]]에서 생활하면서 [[이승만]] [[박사]]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윤치영이 맡긴 소임대로 [[최기일]]은 많은 실력 있는 젊은 사람들을 [[이승만]]에게 소개했다. 윤치영은 [[이승만]]을 방문하는 방문자를 선별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돈암장]]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 임영신의 눈에 들어야 했다. 특히 윤치영이 싫어하는 사람은 [[돈암장]]에 절대 출입할 수가 없었다. 윤치영은 청년 인재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최기일]]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년들을 비서로 채용하였다. 이들을 통해 정치, 언론, 사회동향과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의 비서이자 정보조직원으로 활용하였고, 그가 청년들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자료들은 [[이승만]]의 정세변화와 대응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승만]]의 비서실장이 되면서 그는 [[한민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끝내 [[한민당]]과 단절되었다. [[이승만]]의 비서실장이던 그는 [[최기일]] 등을 자신의 공보비서로 채용하였으며, 인재들을 [[이승만]]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자신의 비서로 채용한 [[최기일]] 등을 [[이승만]]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0/Syngman_Rhee_Welcome_Ceremony%2C_1945_%281%29.jpg/280px-Syngman_Rhee_Welcome_Ceremony%2C_1945_%281%29.jpg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 환영회 [[1945년]] [[12월]] 사촌형인 [[윤치호]]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활동에 관련되어 그는 비판받지 않았고, [[윤치호]]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지는 않았다. 이후 [[12월 27일]] [[경교장]]에서 열린 소집회의에 참석하였고, [[12월 30일]]부터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 해방 정국의 정치활동 ==== ===== 이승만의 신변 보호 ===== 윤치영은 이승만의 사무 비서 외에도 이승만의 경호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45년 [[11월 7일]] [[돈암장]]에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등 고급 장교들을 초대해놓고 명월관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들은 윤치영이 문서에 출입자 날인을 하기 전에는 보내줄 수 없다고 늘어지는 바람에 5~6시간을 버티면서 격론을 벌이며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60-161페이지 그는 나를 아무리 붙잡고 있어야 일으 성사는 안될 터인 즉 돈암장으로 몇 사람 같이 가서 내가 이박사의 승낙을 얻어내야 하겠노라고 둘러대고 5,6명이 따라 나서서 같이 돈암장으로 갔다. 이박사는 손님과의 약속 시간이 가까워 와도 그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초조히 기다렸다. 그가 간신히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가서 이승만에게 그 날 일어난 일을 자초지종 아뢰자 이박사는 분개하여 따라온 사람들을 꾸짖었다. 또한 45년 11월 중순 이승만의 돈암장 주변에 테러 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날(11월 7일)로부터 며칠 뒤 돈암장은 무장한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 집 주변은 그로부터 더욱 삼엄한 경비하에 놓이게 되었다. 윤치영은 이승만의 경호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박사다 돈암장으로 옮겨온 뒤에도 스미스 부관은 매일 돈암장으로 출근하며 이박사의 시중을 들었는데 하지 장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장한 헌병 1개 분대와 함께 그 당시 학병 출신으로 미군정에 소속되어 있던 우리 청년학도병 13명을 이치업 대위(훗날 육군 수송감 역임)의 인솔로 보내주어 경비에 임하도록 하였다. 시국이 점차 험하게 되어감에 따라 돈암장으로서도 정당한 자기 방어를 위하여 미군에게 무기를 양여받아 청년학도들을 무장시키게 되었는데 그 수효는 점차 늘어나 한창일 때는 7,8백 명 선에까지 다다랐다. 군정청에서 이승만을 경호할 경호원들을 보내줌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사무비서 외에 출입자 확인과 선별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돈암장]]으로 숙소를 옮긴 뒤에도 경향 각지에서 리박사를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손님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몰려드는 판국이었다. 리박사의 건강이나 일정을 생각해서 나는 면담 여부의 최종 결정을 내려야 했고 또 좌익 세력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라서 신변보호에도 신경을 써야 하므로 나에게는 난처한 일이 많았다. 그는 아무나 쉽게 돈암장이나 이화장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전라도나 경상도 오지에서 일부러 먼 길 상경한 유림(儒林)이나 촌로들은 무조건 이박사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겠다는데 윤치영 당신이 뭐기에 면회를 가로막고 나서느냐며 호통도 치고 덤비는 사람도 있었다 '고 한다. ===== 돈암장, 이화장 사무 주관 ===== 그는 [[이승만]]의 비서진을 직접 짜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자후]]([[이준 (1859년)|이준]] 열사의 사위, 이승만의 공보 선전 담당 비서관), 황규면(영문 담당 비서), 윤석오(국한문 서신 담당), [[임영신]] 등등이 업무를 분담하여 주었다. 고 한다. 또한 [[임영신]]은 윤치영의 후처 이은혜와 함께 [[프란체스카 도너]]를 도와 [[돈암장]]과 [[이화장]]의 음식과 안살림을 도맡았다.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는 이승만이 좋아하는 음식이 뭐고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이며 맞지 않는 음식이 무엇인가까지 상세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윤치영은 (돈암장과 이화장) 집안 살림은 전적으로 아내가 책임을 맡아서 해 냈는데 이박사의 생활 습관이나 음식 기호 등 [[미국]]시절부터 잘 아는 터였다라고 증언했다. [[이기붕]]을 사무비서로 고용한 뒤에도, 윤치영은 방문자 선별과 이승만 내외 경호 업무는 직접 맡았다. 송진우 암살과 여운형 암살, 장덕수 암살 이후로 윤치영은 밤을 새면서 [[이승만]]의 신변 안전을 위해 미군정이 보낸 경호원들과 함께 이승만을 직접 경호하였다. 그는 [[5.10 총선거]] 직전까지 [[이승만]]의 신변을 담당했는데, 나중에는 종종 짜증을 내기도 했다. 사소한 방문자들이면 너는 누구냐? 웬놈이냐? 라는 반말도 하게 됐다. ===== 우익 정치인 활동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c/ca/%EC%8B%A0%ED%83%81%ED%86%B5%EC%B9%98_%EB%B0%98%EB%8C%80_%EC%A7%91%ED%9A%8C_01.PNG/200px-%EC%8B%A0%ED%83%81%ED%86%B5%EC%B9%98_%EB%B0%98%EB%8C%80_%EC%A7%91%ED%9A%8C_01.PNG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6년]] [[1월]]에 벌어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반탁 운동에 앞장선 학련 운동원들을 적극적으로 독려, 치하하였으며 반탁을 통해 국민적 총의를 결집시키려 노력하였으나, 반탁 시위를 폭력사태로 규정한 [[미군정]]에 의해 저지된다. [[1946년]] [[1월 15일]] 독촉중협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윤치영은 향후 대책이 [[임정]]의 비상정치회의 · 반탁총동원회를 "중협(中協)에다 어떻게 연결하느냐"하는 점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독촉중협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18페이지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 설치되자 민주의원 비서국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사무총장에 피선되었다. 그해 임정에서 조직한 국제법급외교연구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이승만]]을 대신하여 [[신태평양]]지 주필 겸 이사에 선출되었고, [[1947년]] [[서울시 경기연맹]]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이 경제보국회에서 3백만원을 얻어 쓰게 되었다. 이때 윤치영이 중간에서 얻어 쓰게 되었다. 미군정에서 감사를 해 보니까 이 돈은 이승만에게 갔고, 미군정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윤치영은 중간에서 일부를 소비하고 나머지를 이승만에게 갖다 주었으므로 윤치영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33페이지 이후 그는 46년 [[2월]]과 [[5월]]에 열리는 미소공위를 놓고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를 결사 반대하자, 그 역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반대하는 칼럼과 강연, 홍보활동에 나섰다. 외국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역설했고, 여러 청년들이 그의 주장에 호응했다. 46년 [[2월]]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 대표 자격으로 UN에 파견, UN대표들에게 한국 정부의 조속한 수립에 협조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48년 [[1월]] [[인도]] 대표 [[크리슈나 메논]]을 단장으로 한 유엔한위 조사단의 파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윤치영은 공로를 [[임영신]]에게 모두 돌렸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그해 조선국제법학회와, 외교학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 조봉암의 전향 후원 ===== [[1946년]] [[5월]] [[미군정]]에 끌려갔다 온 [[조봉암]]을 적극 지원하여 그의 전향을 유도한 것은 윤치영이었다.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에게 보낸 [[조봉암]]의 편지가 미군 정보 기관에 압수되어 공개된 일이 있었다.조용중, 《대통령의 무혈혁명, 1952 여름, 부산:조용중의 한국 현대사 연구》 (나남출판, 2004) 388페이지 이왕 미군정에 의해 이왕 공개될 것이면 자발적으로 공개하라고 유도했다. [[조선공산당]]을 장악하고 있던 박헌영의 당 운영에 불만을 품은 조봉암이 박헌영의 1 인체제 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신문에 공개 하게끔 은밀하게 주선한 것이 바로 윤치영이었던 것이다. 미군정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에 [[조봉암]]은 윤치영의 권고대로 선수를 쳐서 언론에 '[[박헌영]]에 대한 비판을 공개비판'으로 발표하고 전향을 선언하게 된다. 이는 [[조선일보]]와 [[안재홍]]의 [[한성일보]]에서는 특히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 임정 쿠테타 저지, 미군정과의 갈등 ===== 이때 그는 [[경교장]] 측과 [[미군정]] 측 양측의 표적이 되었다. 46년 [[8월]]의 [[신익희]]의 쿠데타를 밀고한 일로 [[경교장]]과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1946년]] [[8월]] [[신익희]]는 무력으로 미군정을 접수하고 두 번째로 쿠데타를 시도할 계획을 세웠다. [[신익희]]의 쿠데타 계획을 입수한 윤치영은 즉시 CIC 미군 방첩대에 신익희의 쿠데타 기도를 알렸다. [[8월 21일]], [[8월 22일]]에 [[장덕수]], 윤치영 등은 미군 CIC에 신익희의 쿠데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정변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역사비평사, 1997) 440페이지HUSFIK 2, 222~225페이지 [[8월 22일]] 윤치영은 CIC요원에게 신익희가 1) 8·29에 중경임정 승인 탐색, 2) 영향력 있는 새 인물 임정에 배치, 3) 승인될 새 정부 구성 탐색, 4) 군정의 무능 드러내고 새 정부를 위한 요구를 주장하는 미군정에 대한 대중시위를 갖는다는 4단계 계획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9/Yuncy%26Kimss_19470221.jpg/180px-Yuncy%26Kimss_19470221.jpg 1947년 2월 21일 AP도쿄 지국장을 만난 김성수와 윤치영 한편 주한국 총영사이자 [[하지]]장군 정치고문이었던 [[랭던]]을 규탄한 익명의 진정서를 보냈다가, 진정서사건으로 [[이묘묵]]의 비판을 받고 이승만의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819&v=44 '이묘묵' - 네이트 백과사전]{{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819&v=44 }} 쿠데타가 좌절되자 신익희는 일을 폭로한 윤치영을 책망했고, 미군정과 갈등하던 윤치영은 후회한다. [[1947년]] [[2월]] [[안재홍]]이 민정장관이 되면서 [[미군정청]] 재산처분국장으로 복직한다. [[1948년]] [[이승만]]의 비서에서 밀려나자 이때부터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 [[이기붕]] 등이 [[이승만]]을 주변에서 시종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던 조카딸 [[윤노라]] 역시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윤치영의 오랜 지우이자 [[이승만]]과는 한때 로맨스가 있었던 [[임영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윤치영의 부인에게도 거부감을 갖던 [[프란체스카]]는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사소한 심부름까지 하게 되면서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협상]] 직후 [[5.10 총선거]]에 출마하려던 [[한국독립당]] 당원들이 상당수 당에서 쫓겨났다. 윤치영은 [[한독당]]에서 출당당한 인사들을 대다수 [[이승만]] 진영으로 영입해 왔다. [[1948년]] 정부 수립 직전 한미정권이양 한국특명전권 위원을 지냈다. ===== 여운형과의 관계 ===== [[1940년]]대 윤치영은 [[여운형]]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양식집 백합원에 갔다가 관상가를 만났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 관상가는 학맥으로는 박영효 계열의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관상가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장덕수]], [[여운형]]이 모두 암살될 운명이라고 예언하자, 화가 난 [[여운형]]은 이런 고약한 놈이라며 다시는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윤치영은 이를 기억해 두고 있다가 후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여운형, [[장덕수]]가 암살되자 기인이라고 회고하였다. [[태평양 전쟁]] 후반까지만 해도 윤치영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중앙학교]] 동창인데다가, [[여운형]]과도 친분관계가 있었으나 해방 이후 적으로 돌변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과 [[임영신]]은 [[여운형]]에 대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여서 좀처럼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여운형]]은 [[강원룡]]에게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주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1:엑소더스》 (한길사, 2003) 263-264페이지 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승만|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 해방 이전에는 사적인 일로 [[여운형]]과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나 해방 이후에 그는 [[여운형]]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 남북협상 비판과 단정론 지지 ==== {{참고|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한반도에 입국하였다. [[인도의 수상]] [[자와할랄 네루]]가 개인적으로 반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그는 UN한국위원단 단원들, 특히 [[인도]] 출신 [[크리슈나 메논]]의 주변에 사람을 붙여 그의 발언과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페이지 윤치영의 성토가 있자 청중은 흥분하여 연설을 중단시키라며 연단으로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윤치영은 흥분한 청중을 피해 뒷문으로 뛰어 도망쳤다. 그는 [[김구]] 등의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 윤치영은 [[남북협상]]이란 기만적인 술책이며 평양 일방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회담]]에 불과하다 고 일축했다. {{인용문2|[[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형님 아우 하며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의 연락도 끊었다. [[김규식]]은 사촌형 [[윤치호]]와 친분이 있었고, 자신의 [[프린스턴 대학교]] 동창 [[김관식 (목회자)|김관식]]의 6촌 형이기도 했다. === 정치 활동 === ==== 정부 수립과 정치 활동 ==== ===== 단독 정부 수립 참여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6/South_Korean_general_election_1948.JPG/230px-South_Korean_general_election_1948.JPG 제헌국회 총선 투표 광경 그 뒤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5·10 단독 총선거]]에 [[서울]] 중구에서 무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마 공약으로는 "깨끗한 한표는 진정한 애국자", "사랑하는 나의 조국 그리스도화 하자"라고 공약하였다. 당시 서울 중구에는 그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임영신]]이 출마했다. 한편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 중 17명의 여성을 [[제헌국회의원]] 후보로 출마시켰다. [[황신덕]]의 언니인 [[황에스더]]도 윤치영이 마지막에 입후보시켰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8페이지 윤치영은 [[황에스더]]가 [[중구 (서울특별시)|서울 중구]]에 출마하도록 유도했는데, [[김선]]은 여기 중구에 살지도 않는데 왜 했느냐고 하자 윤치영은 상관없다고 했다. 그가 [[황에스더]]의 출마를 권한 것은 여자 후보를 더 내서 [[여자]] 유권자의 표를 분산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윤치영은 선거기간 중 편지로 유세를 하였는데, [[김선]]의 증언에 의하면 '전부 편지를 써서 [[보성중학교 (서울)|보성중학교]] 학생들한테 시켜서 각자의 집에 모두 편지를 보냈다. 우리(김선) 집에도 보냈다.'는 것이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4/44/%EC%A0%9C%ED%97%8C%EA%B5%AD%ED%9A%8C_%EC%B4%9D%EC%84%A0_%EC%9D%98%EC%84%9D%EC%88%98.svg/150px-%EC%A0%9C%ED%97%8C%EA%B5%AD%ED%9A%8C_%EC%B4%9D%EC%84%A0_%EC%9D%98%EC%84%9D%EC%88%98.svg.png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총선 의석수 제헌 국회의원 선거기간 중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 정치인들을 친[[이승만]] 진영으로 포섭, 끌어들이는데 노력했다.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던 이들 중 상당수는 이념적 차이가 농후한 타 정당보다는, 차이점이 적은 [[이승만]]진영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윤치영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일부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하는데, 자금과 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3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승리하여 [[5월 30일]] [[1948년 서울특별자유시 중구의 선거|국회의원에 당선]], [[6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서상일]], [[유진오]], [[조봉암]] 등과 함께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 헌법 기초위원과 초대 내각 입각 =====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의 초안에는 [[국민]]을 '[[인민]]'으로 표현했다. 초안 작성자인 그가 [[국민]] 대신 [[인민]]이란차병직, 《안녕 헌법》 (지안출판사, 2009) 40-41페이지 어휘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우월적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니 [[유진오]]에 의하면 국가를 구성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을 표시하는 데 인민이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던 윤치영은 [[대한민국 헌법]] 초안의 [[인민]]이라는 용어를 문제삼아 [[유진오]]를 통박하였다. 그는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유진오]])의 사상이 의심스럽다." 고 흥분했다. [[유진오]]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항의했고 윤치영은 틀린말 하지 않았다며 맞받아쳤다. [[대한민국 국회|국회]]는 논쟁이 벌어졌고,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용어는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되던 용어였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e/e1/Leesyman19480722.jpg/200px-Leesyman19480722.jpg 1948년 7월 22일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첫 국무회의에 참석한 윤치영 (가운데 안경 쓴 이) [[1948년]] [[7월 1일]]부터 시작한 [[대한민국 국회|국회]] 본회의 헌법 초안 제2회독 때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진헌식]]이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몇 개 조문을 제외하고 모두 [[인민]]으로 하자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역시 윤치영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좋은 말을 [[공산주의]]에 빼앗긴 셈 치고 포기하였다. 그는 38선 이북 조선에 [[공산주의]] 집단이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국회]]에서 북괴와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유진오]]에게 따졌고, 유진오는 인민이라는 말은 People를 한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며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며 반박, 설전이 계속되었다. [[1948년]] [[7월 22일]] [[대한민국]] [[이승만]]정권의 조각 인선시 [[외무부]][[장관]]의 물망에 올랐으나, 뒤에 [[장택상]]과 그 직이 바뀌어 초대 [[내무부장관]]으로 천거되었다.이후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장택상]]과 개인적으로 알력이 생겼다. ===== 초대 내무부 장관 시절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a/a6/Ceremony_inaugurating_the_government_of_the_Republic_of_Korea.JPG/190px-Ceremony_inaugurating_the_government_of_the_Republic_of_Korea.JPG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7월 22일]] 바로 초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이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내무부 장관으로 비국 및 [[프랑스|불국]] 한국[[특명전권대사]], [[국제 연합]] 총회 한국대표 등으로 해외에 다녀왔다. 소속 정당이 없었던 윤치영은 [[1948년]] [[조봉암]]과 함께 [[이정회]]를 결성하였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역비한국학연구총서 13)》 (역사비평사, 1996) 304-306페이지 이후 [[8월]]초 정부수립 직전 한미정권이양한국특명전권위원을 지냈다. 초대 내무부 장관이었던 그는 특별히 총기휴대증을 발급받아, 총기휴대를 허락받기도 했다. 48년 [[8월 10일]] 경찰기구 재편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서울신문, 1948년 08월 11일자 {{인용문|완전한 조직이 될 때 까지는 당분간 현재의 기구와 인원을 그대로 쓰겠으나 앞으로는 지방관구경찰청제는 없애고 서울 안에는 경시총감부(가칭)같은 것을 두어 인천 개성 서울을 포함한 서울도 일원의 강력 치안확보에 대비하고자 한다. 그밖에 방금 훈련중에 있는 특무기관 정예들의 활동에 의하여 범죄의 과학적인 수사의 미연방지에 이바지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윤치영의 바램과는 달리 경찰 중앙집중화는 실현되지 못하였고, 중앙경찰청 산하 지방경찰청 체제로 정착되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7/7f/1948%EB%85%84_%EB%8C%80%ED%95%9C%EB%AF%BC%EA%B5%AD_%EB%8C%80%ED%86%B5%EB%A0%B9%EB%A0%B9_%EC%A0%9C_1%ED%98%B8.PNG/160px-1948%EB%85%84_%EB%8C%80%ED%95%9C%EB%AF%BC%EA%B5%AD_%EB%8C%80%ED%86%B5%EB%A0%B9%EB%A0%B9_%EC%A0%9C_1%ED%98%B8.PNG 1948년 8월 30일 공표된 대한민국 대통령령 제1호 대통령 이승만의 수결 서명 왼쪽 두 번째 항목, 각료명단 맨 오른쪽에 그의 자필 서명이 보인다.) 그는 [[경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는 경찰권을 장악한 [[장택상]], [[조병옥]] 등과 수시로 갈등, 마찰하는 원인이 된다. 그는 [[일제 강점기]] 당시 경찰관으로 있던 자들을 등용했다며 경찰청을 공격했고, [[조병옥]]은 Pro-jab과 Pro-jap(일본)은 구별해야 된다는 논리로 맞섰다. 내각 조각 때부터 윤치영과 알력을 빚던 [[장택상]]은 [[조병옥]]의 손을 들어주었고,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의 [[경찰]]권 장악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해 [[10월 9일]] [[여순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강경 진압론에 동조하였다. 한편 윤치영은 내무장관 재직 중인 [[1948년]] [[10월]]경부터 암암리에 원내에서 이박사 노선을 지지하고 한국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는 인사들을 규합하는 운동을 벌여나갔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31페이지 이들을 통해 이승만 친위세력을 규합하고 야당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바로 [[경교장]]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6월 30일]] [[김구]]의 국민장 장례기간 중 국민장 준비위원회에 참석, 상주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를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으로 입당, 유치하는 정책을 펼친다. ===== 여순 사건 전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e/%EC%9C%A4%EC%B9%98%EC%98%81_%EB%82%B4%EB%AC%B4%EC%9E%A5%EA%B4%80_%EC%B7%A8%EC%9E%84%EC%A7%81%ED%9B%84.jpg/140px-%EC%9C%A4%EC%B9%98%EC%98%81_%EB%82%B4%EB%AC%B4%EC%9E%A5%EA%B4%80_%EC%B7%A8%EC%9E%84%EC%A7%81%ED%9B%84.jpg 내무장관 취임직후 초도순시 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중순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국무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배후를 김구로 지목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 연합뉴스 2008년 8월 29일자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강경 진압론을 주장하였고 극우 세력이 배후에 가담했다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7042&PAGE_CD= 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 - 오마이뉴스] 2001년 10월 26일자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자"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밝혔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서는 소란이 발생했고, 그 극우파가 누구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윤치영은 극우파가 가담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대응했다. 이범석은 또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인용문|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자}}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이 사건에 대해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 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이에 [[김구]]는 그 극우가 대체 누구냐며 윤치영에게 따졌고, 윤치영은 누군지는 알수 없지만 극우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며 응대하였다. [[10월 29일]] 윤치영은 [[대한민국 국회|국회]] 본회의에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발표했다. "10월 28일 오후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무장 폭도 약 40명이 [[강화군|강화도]]에 상륙하였고, 북측으로 향하는 것 같아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 300명이 파견되었다", 또한 "서울 시내에서 남로당원이 열 아홉살 된 어린아이를 포함해 가족 네 사람을 찔러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으며, [[동대문]] 밖에서는 민애청단원이 수류탄을 잘못 던져 자신이 죽은 사건이 있었다"는 사건을 공개했다. 그러나 [[강화도]]를 통해 월북을 시도한 무장 폭도들을 체포하지 못했고,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자세한 경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48년 [[11월 8일]] 윤치영은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폭동이 1주일 전부터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그는 "[[부산광역시|부산]], [[신의주]], [[부산광역시|부산]], [[서울특별시|서울]] 등 기타 4개 도시는 폭동에 휩쓸려 들어갔으며 [[부산광역시|부산]]의 6천 명의 반도 전부는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경향신문, 1948년 11월 10일자"고 발표했다. 이어 윤치영은 "광주,부산,서울, [[광주광역시|광주]], [[대구광역시|대구]] 등지로 확대되어 가는 북한의 대소동은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인한 남한의 공산화를 우려한 민중들이 각지에서 호응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벌어진 반공 시위는 소규모인데다가 바로 진압되었고,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949년 1월경, 주[[필리핀]] 특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고사하였다.경향신문, 1949년 1월 29일자,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1290032920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1-29&officeId=00032&pageNo=1&printNo=719&publishType=00020 駐比 特使에 卞榮泰博士]〉 ==== 이승만, 박정희의 측근 ==== ===== 친여정당 대한국민당 당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e/e6/1948%EB%85%84_%EC%9C%A4%EC%B9%98%EC%98%81_%EA%B0%80%EC%A1%B1%EC%82%AC%EC%A7%84.jpg/150px-1948%EB%85%84_%EC%9C%A4%EC%B9%98%EC%98%81_%EA%B0%80%EC%A1%B1%EC%82%AC%EC%A7%84.jpg 1948년 윤치영의 가족 사진, 부인 이은혜와 차남 윤인선, 딸 윤성선, 윤치영 순 {{참고|여자국민당|대한국민당 (1948년)}} [[1948년]] [[11월 13일]] [[여자국민당]]의 [[임영신]], [[대동청년단]]의 [[이청천]], [[한국독립당]] 탈당파 [[신익희]], 함께 이정회에 가담했던 [[조봉암]] 등과 함께 친[[이승만]]성향의 정당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민당 당수를 지냈으며, 재선에 성공하여 2,3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대한국민당은 여당은 아니었으나 친[[이승만]]계 정당으로 사실상 친여 정당이었다. [[한민당]]을 주축으로 하는 내각개헌안이 제출되자 반한민(反韓民) 계열은 모두 이에 대한 반대 진영에 결집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반한민 계열의 총수로, [[이재형]]은 그의 모사신동운, 《효당 엄상섭 형사소송법논집》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176페이지 로 지목되었다.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은 2대 국회 때에는 24명의 당선자를 내기도 했으나, 그 후 당세가 기울어서 약체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에서 [[신익희]], [[지청천]] 등이 탈당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1949년 2월 대한국민당 일부의 민국당 입당으로 당이 사실상 와해되자 그는 이정회를 조직하여 꾸렸다. 이정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데 선봉에 섰다.[[1949년]] 반민특위에서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때는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이기붕]] 세력, [[장택상]] 세력 등과 경쟁관계에 놓였으며,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이승만]]의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국민당이 민족주의적 혁명세력임과 [[반공주의]]를 적극 홍보하여 [[김구]] 암살 후 해체 위기에 직면한 [[한국독립당]]의 당원들을 [[대한국민당 (1948년)|국민당]]으로 영입하는 활동을 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이념이 차이가 없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세력이었던 점과, 민족주의적 혁명 세력임을 적극 부각시켜 [[한민당]]과 차별을 둠으로써 공감대를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부터 청년층과 꾸준히 접촉하고, 축구, 야구 등의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거나 개입한 점 역시 효과를 보였다. 줄곧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여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으로 흡수하였다. 한편 [[국회 프락치 사건]]과 [[1949년]] [[11월]] 3.8선 근방에서 [[북한]]의 도발이 있자 그는 안보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소수 정당이었지만 [[대한국민당 (1948년)|국민당]]의 지위와 입지는 올라갔다. [[1949년]] [[11월 12일]] [[이인]], [[임영신]] 등과 함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했다.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족자주연맹]]의 [[원세훈]](元世勳)에게 낙선하였다. ===== 한국 전쟁 전후 ===== ====== 프랑스 공사관 부임과 소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9/97/Yun_Lim_Oh_Lim.jpg/180px-Yun_Lim_Oh_Lim.jpg 1950년 12월의 파리 UN 총회에서 (왼쪽이 윤치영, 오른쪽은 임병직과 임영신)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1/15/%EC%9C%A4%EC%B9%98%EC%98%81_%EC%A3%BC%EB%B6%88%EA%B3%B5%EC%82%AC.png/160px-%EC%9C%A4%EC%B9%98%EC%98%81_%EC%A3%BC%EB%B6%88%EA%B3%B5%EC%82%AC.png 1950년 12월 주프랑스 공사 부임중 하와이에서 열린 축하식에 참석 {{참고|한국 전쟁}}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터지자 [[서울특별시|서울]]을 탈출, [[대전광역시|대전]]에서 합류한 이후 [[한국 전쟁]] 당시 정부가 이전할 때 함께 이동하였다. [[서울특별시|서울]]을 탈출하기 전 가족들을 미리 피신시킨 그는 인척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데리고 가려다가 그가 먼저 탈출한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비밀리에 전화연락과 서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서울특별시|서울]]점령 소식을 알리고 피난, 은신할 것을 알리고 다녔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50년]] [[8월]] [[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단 대표(특사 대우)에 임명되었다. 50년 [[9월]] [[일본]] [[도쿄 시|도쿄]]를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했다. [[9월]] 하순 [[일본]] [[도쿄 시|도쿄]]에서 [[의민태자|영친왕 이은]]을 예방하고 [[일본]] 수상 이하 정계 인사들과 면담했다. [[일본]] 정계 인사들을 만난 뒤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고 [[미국]]에 도착하여 제5차 유엔 총회에 대표로 파견되었던 [[임병직]]을 만나 미국 정계 인사들을 방문하였다. [[1950년]] [[12월]] [[미국]] 체류 중 그는 주 [[프랑스 공사관]] 공사에 임명되어 [[파리 (프랑스)|파리]]로 부임했으나, 유엔 총회가 끝나는 대로 빨리 돌아오라는 이승만의 호출을 받아 [[1951년]] [[4월]] 사표를 제출하고 귀국하였다.후임자는 전규홍이 임명되었다. 그 뒤 [[일일신문]](日日新聞)사를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이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곧 폐간된다. 곧 [[제헌동지회]] 회장에 선출되고 [[1952년]]에는 다시 태평양주보사에서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한편 [[6.25 전쟁]] 중 공식 성명서를 내고 [[인도]]군과 [[일본]]자위대의 파견을 적극 반대했다. [[인도]]군 파병에 반대한 것은 [[인도]]가 [[1948년]] UN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비호의적이었던 것에 대해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평생 반감을 가졌다. [[1952년]] 잠깐 [[중앙대학교]]에 출강하여 [[국제법학]] 강사와 [[외교학]] 강사로 강의하기도 했다. ====== 국회 부의장 시절 ====== [[1951년]] [[12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自由黨)이 결성되었다. 자유당에는 윤치영의 아내 [[이은혜 (정치인)|이은혜]]의 인척이자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 중의 한사람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몸담고 있었으며 그에게도 입당 권유가 들어왔으나 그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에게 주변에 질시하는 이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하였다. [[1952년]] [[2월]] 보궐선거 때, [[충청남도]] [[공주시|공주군]]에서 [[민의원|민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야당 의원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이유로 연좌농성을 벌였다. 윤치영은 [[마작]]에 마약을 하는 애국자들 있다면서 야당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이에 [[마작]]을 할 줄 알았던 [[신익희]]나 [[정구영]]은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부산 정치 파동]] 때 그는 연좌시위를 하는 야당 의원들을 향해 너절한 놈들이윤영, 백사 이윤영 회고록 (사초, 1984) 213 이라고 조롱하였다. 국민 방위군 사건(1951), 부산정치파동 등을 목격한 [[윤보선]]은 [[이승만]]에게 사태를 바로 볼 것을 촉구했고, 주변에서 아첨하는 측근들을 내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윤보선]]이 그의 숙부인 윤치영이 자신에게 총애를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사적으로 청탁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멀리했다. 실망한 [[윤보선]]은 이때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윤보선이 [[이승만]]과의 결별을 계기로, [[1920년]]대부터 [[이승만]]의 열성적인 추종자였던 숙부 윤치영과 멀어지게 된다. 윤보선은 윤보선 대로 한민당을 탈당한 윤치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윤치영은 윤치영 대로 그가 [[이승만]] 박사에게 대든다고 판단했다. [[1952년]] [[7월]] [[조봉암]]과 함께 [[민의원]]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축구와 야구, 달리기 등으로 체력이 다져진 그는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질 때 순발력을 발휘해 단상위를 뛰어내리거나 피신했다. 국회부의장 재직 당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조직부장 임철호에게 요직을 추천하는 [[김일훈]]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사이가 틀어졌다. 이후 [[조봉암]]이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의 리더가 되자 그는 개인적으로는 조봉암과 친분을 유지했지만, 이후 원내외에서 [[조봉암]]에게 비판과 비난이 쏟아질 때 감싸주거나 도와주지 않는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5/1952_Yun_Shin_Cho.jpg/280px-1952_Yun_Shin_Cho.jpg 제2대 후반기 국회 의장단 선출, 1952년 7월 10일 새로 선출된 국회의장단. 좌로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 다른 이승만 측근들과의 관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0/Lee_Si_Young_1950-10-24.jpg/160px-Lee_Si_Young_1950-10-24.jpg 이시영,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오른쪽 화분 뒤에 얼굴이 가려진 사람이 윤치영 그는 자유당을 탈당해 [[호헌동지회]](1954.11)에 가담한 정치인들을 향해 국회의원 금뱃지를 붙여주었더니 명월관에나 가서 기생 이마에 돈붙이는 놈들, 검사 하다가 마작해서 파면당한 놈들, 우리가 등용했더니 국민 앞에서는 딴소리 하는 놈들 투성이라며 야유하였다. [[호헌동지회]]를 결성할 때도 그는 강력한 지도자가 사회를 단결시키는 법이라며 냉소를 보였다. 그는 같은 [[이승만]]의 측근으로 함께 [[이승만]]을 모시던 측근들 중 [[이윤영 (1894년)|이윤영]], [[임영신]], [[이범석 (1900년)|이범석]]과 절친하였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이 붕괴된 뒤에도 [[임영신]]이나 [[이윤영 (1894년)|이윤영]],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개인적인 행사에는 늘 참석했고, 초청하였다. [[박용만 (1924년)|박용만]]과도 가까이 지냈으며, [[허정]]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장택상]]과 상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의 성격이 맞지 않았고 초대 내각 때 자리가 바뀌면서 오해가 생긴 일로 오랫동안 척을 지고 지냈다. [[1955년]] [[1월]] 유엔에 파견되는 [[대한민국]]대표단으로 파견되어 다녀왔고, 그해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하였다. [[1956년]] [[5월]]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 조봉암 법살사건 전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b/b3/%EB%A7%8C%EC%86%A1_%EC%9D%B4%EA%B8%B0%EB%B6%95.JPG/140px-%EB%A7%8C%EC%86%A1_%EC%9D%B4%EA%B8%B0%EB%B6%95.JPG 동지이자 경쟁자인 이기붕, 돈암장 시절 이후로 그의 라이벌로 전락했다. [[1958년]] 7월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의 해산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단기간 대학 강단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봉암]]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던 상인 [[양명산]]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문제 되자,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며 [[조봉암]]의 무죄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택상]] 등의 주도로 [[조봉암]] 구명운동이 전개되었을 때는 소극적으로 관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비호와 장택상 등 다른 사람들의 구명운동과 상관없이 그 해 [[10월]] 제2심 재판에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후일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3 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조봉암]]의 사법살인은 [[이기붕]]일파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당원들의 농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보면서도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일파들의 정치인 법살행위에는 분개했다. ===== 부통령 재출마와 낙선 =====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그는 부통령 출마의 변 중 하나로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였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308-309페이지 '나는 만송이 [[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극성으로 나라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염려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파당책 작폐를 예방하려는 뜻에서 내가 속해 있는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의 [[부통령|부통령 후보]]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선되리라는 예상 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후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낙선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사명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은 그를 선거대책위원회로 영입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그는 부통령에 출마한 이유를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완주해야 된다며 [[부통령]] 후보로 출마, 완주하였다. 다만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 지지를 선언하였다. [[3월 15일]] 부통령 선거 기표결과 낙선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기붕]]은 부정선거 및 개표조작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 4·19 혁명 전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8/8a/4.19_%ED%98%81%EB%AA%85.jpg/180px-4.19_%ED%98%81%EB%AA%85.jpg 4.19 혁명.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0/03/1960%EB%85%84_3%EC%9B%94_15%EC%9D%BC_%EB%8F%99%EC%95%84%EC%9D%BC%EB%B3%B4.jpg/240px-1960%EB%85%84_3%EC%9B%94_15%EC%9D%BC_%EB%8F%99%EC%95%84%EC%9D%BC%EB%B3%B4.jpg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룬 기사. {{참조|3·15 부정선거|4·19 혁명}} [[3·15 부정선거]]에 대한 후유증으로 [[4·19 혁명]]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측근이었다가 [[이기붕]] 등에 밀려났으므로 화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치영은 [[4·19 혁명]]을 4.19 사태라며 비판하였다. 윤치영은 [[4·19 혁명|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학생 운동권들의 격렬한 반발을 유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 겸 [[대한민국 국무총리|내각수반]]인 [[허정]]은 [[1960년]] [[5월 29일]] 새벽 [[이수영 (1921년)|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이화장]]으로 가서 직접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지시하고, 그는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갔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231페이지 [[허정]]은 [[이승만]]의 측근들은 물론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비밀리에 [[이승만]]의 출국을 추진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304페이지 했다. 이는 허정이 단독으로 비밀리에 주한[[미국]]대사관 대사와 상의하여 [[이승만]]을 출국시켰던 것이다. [[허정]]이 [[이승만]]을 비밀리에 [[하와이]]로 출국시키고 이후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사후에 귀환한다. 윤치영은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비밀리에 출국조치시킨 [[허정]]을 비판하였다. {{인용문|한 두어 주일 후에는 돌아오게 될 것 이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떠나간 이박사는 이것이 영영 살아서 고국과의 이별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일을 꾸민 자세한 음모가 이제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나 개인으로는 당시의 정부를 책임지고 있었던 [[허정]] [[과도정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내각 수반]]과 하와이로의 일시 요양을 권고한 매카나기 주한미국 대사와 그 여행을 위해 심부름을 맡았던 [[이수영 (1921년)|이수영]](李壽榮) [[외무부|외무]][[차관]]에게 그 경위를 묻고 싶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329-334페이지}} [[장면]] 내각 출범 이후 [[함태영]] 등을 중심으로 [[이승만]]의 환국운동이 추진되었다. [[장면]]이 찾아와 그에게 내각 참여를 요청했지만, 그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거절했다. 윤치영은 [[이승만]] 환국운동이 일어나자 역시 환국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의 반대로 이승만의 귀국은 무산되었고, 윤치영은 [[장면]]을 비난하였다. {{인용문|그 뒤로도 이박사의 환국을 막아버린 [[장면]] 씨에게는 더 말할나위가 없다. 이박사 제거 음모를 꾸민 것은 [[휴전 반대]]와 [[반공포로 석방]] 때부터 두 차례나 되고 4.19를 빙자해서 끝내는 세 번째에 성공을 시켰으니 내가 지금까지 한스럽게 생각해 온 것은 이 나라와 지도자의 운명이다.}} 윤치영은 [[장면]]의 [[이승만]] 귀국 저지를 비판함과 동시에 [[장면]]이 [[이승만]]을 세 번이나 제거하려 모략을 꾸몄다고 비판했다. ===== 제2공화국 기간 중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b/John_Myun.jpg 장면 윤치영은 [[장면]]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장면 내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장면이 이승만을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봤다. 한번은 반도 호텔 지하실 이발소에 갔던 길에 윤치영은 우연히 [[장면]] [[국무총리]]와 마주쳤다. 윤치영에 의하면 "[[이기붕]]이 그러했던 것처럼 장면도 이 건물의 8층인가 어딘가에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생각났다." 는 것이다. 이후 [[장면]]을 만날 때마다 조소하게 되었다. 취임 직후 [[장면]]은 [[반도호텔]]에 나타난 윤치영을 보더니 "나를 잘 좀 도와주시오"하는 것이어서 나도 외교사령(外交辭令) 겸 진 반 농 반으로 "당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내각 책임제]] 세상이 되었으니 잘 해 보시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말한다면 치안부터 안정시키길 바랄 뿐이오"라고 하였다. 윤치영은 [[장면]]과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 비판적, 냉소적이었다. 2공화국 기간 중 내내 윤치영은 이승만의 귀국 운동을 추진했는데,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장택상]], [[이범석 (1900년)|이범석]], [[함태영]], [[허정]] 등과 이승만의 귀국을 추진하는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을 주도했다. 63년 [[1월]] 이승만 박사 환국추진회의 결성에 동참하였다. ===== 반 장면 정권 쿠데타 기도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0/South_Korea_Second_Republic.jpg/190px-South_Korea_Second_Republic.jpg 제2공화국의 대통령인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윤치영은 시종일관 제2공화국에 냉소적, 적대적이었다.) 윤치영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당시 [[장면]] 내각의 시위, 집회의 자유가 혼란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던 [[반공주의]] 우익단체의 주장에 동조하여 우익시위와 집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조카인 [[윤보선]] [[대통령]]에게는 비판적이지는 않았으나, 딱히 협력하지는 않았다. 혁신세력의 통일시위가 격해지자 [[1961년]] [[3월]] 윤치영은 혁신세력을 자처하는 좌익계열의 조직분자들이 학생들을 앞세워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2대 악법이라고 규정짓고 더욱 거세가 국민 대중을 선동하며 연일 휏불데모까지 이어가며 기승을 부렸다. 고 비판하였다. 윤치영 등은 종로 1가에 있는 우주 다방을 중심으로 매일 모임을 갖고 움직임을 분석하면서 대응책을 세워나갔다. [[이규갑]], [[임영신]], [[김두한]], [[원상남]] 등 주요 인사를 비롯해서 [[한국전쟁|6.25 동란]] 시에도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약했던 청년동지들 가운데 반성환(潘星煥), 한철민(韓哲民), [[손진]], 정태석(鄭泰錫), [[유명욱]](劉明郁) 등이 있었다. [[3월 28일]] 61개 우익단체를 동원,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광역시|부산]], [[대구광역시|대구]] 등지에서 좌경분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대적인 데모를 우리들이 주동한 것을 기폭으로 하여 이제는 약체를 면치 못하는 민주당 정권을 뒤엎고 강력한 [[반공주의|반공]]정권을 쟁취해야 한다는 결의가 다져졌다. 이것은 혁명모의가 분명했지만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우리가 활로를 찾는 유일한 방략이라는데 뜻이 모아졌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대강 약 2억원으로 우선 성사시키고 그 이후의 일은 다시 조달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는데 자금 마련도 얼마 안 가서 5천여 만원에 달하였다. 그러나 우익단체의 혁명 모의는 정보가 [[장면 내각]] 담당자에게 새어나감으로서 경찰 등의 감시로 실패하였다. 윤치영은 사람과 자원,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을 상대로 쿠데타를 기도하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후일 언론 인터뷰에서 "[[장면]] 정권은 너무나도 무능해서 횃불데모가 벌어지는 등 [[공산당]]의 발호가 염려되는 만큼, 사회가 극도로 혼란되어 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나 자신이 직접 혁명을 하려고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요."라고 하였다. 정변이 실패하자 [[장면]]은 극우 인사라며 그를 공박했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따라붙게 되었다. ===== 5.16 군사 정변 직후 ===== [[1961년]] 그는 우익 청년단체를 규합, [[장면]] 정권에 대항하여 거사를 계획했으나 [[박정희]], [[장도영]] 등의 [[5.16 군사 정변]]으로 실패하고 만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군사 정변을 지지하였다.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군사혁명위원회]]의 2인자였던 [[육군]] [[소장]] [[박정희]]가 직접 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 지식인들의 5.16 군사 혁명 지지 성명이 있자 윤치영 역시 혁명 지지 선언에 동참한다. [[1962년]]초 [[서울특별시|서울]]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5.16 군사 정변]]의 핵심 인물인 김모 씨 등을 만났다. 혁명의 취지를 설명하는 그에게 윤치영은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군정 중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한 움직임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구국운동으로 생각하고 창당에 협조하기로 했다. 한편 구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계 정치인들이 정치정화법으로 단죄될 때 그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계열은 아니었으므로 정치정화법에 해당되지는 않았다. ==== 박정희 정권 시절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9/%EC%9C%A4%EC%B9%98%EC%98%81_1961.jpg 1961년 당시의 윤치영 ===== 민주공화당 입당과 군정 참여 ===== {{참고|민주공화당 (대한민국)|대한민국 제3공화국}} [[1963년]] 초에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활동했고, [[박정희]](朴正熙) 당시 [[국가재건최고희의|국가재건최고희의 의장]]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추천하였으며, 민정(民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 뒤 [[1963년]] [[5월]] [[정구영 (1894년)|정구영]](鄭求瑛)의 뒤를 이어 제2대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조카인 [[윤일선]]이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의 사전 조직인 [[재건당]]의 리더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과 [[김종필]]의 꾸준한 설득과 극진한 예우가 그를 공화당으로 입당하게 했다. 이후 [[박정희]]를 만나 시국관과 강력한 [[반공주의]]와 [[민족국가]]론을 토론하면서 깊이 공감한 그는 공화당에 적극적으로 참여, 활동하게 된다. {{인용문2|이승만 박사를 모시던 것과 같은 심정으로 박 대통령을 모시겠다.}} 이후 당시 최고회의의장인 [[박정희]]를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토록 한 것도 동산이었다. 그는 [[여운홍]]과 함께 [[박정희]] 공화당 총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군정 연장을 반대하던 야당에서는 그가 음모를 꾸민다며 비난했다. ===== 박정희 후보 선거사무장 활동 ===== [[1963년]]초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의사를 보이자 그는 적극 환영하였다. 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치영은 [[박정희]]의 선거 사무장으로 활약했다. [[광주시 (경기도)|광주]]에서 그는 "반만년래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박정희]] 씨를 [[대통령]]으로!"라며 [[박정희]]의 지원 유세를 하였다.한상범,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삼인, 2006) 94페이지 그는 [[박정희]] 후보의 선거사무장 겸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 유세를 다녔다. 그는 [[박정희]]라는 청년 정치인의 참신성과 함께 상대방이 [[한민당]]에서부터 내려온 구태 정치집단임을 강조했다.그러나 윤치영도 [[1945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민당]]의 당원이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6월 26일]] [[서울특별시|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김구]] 14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남로당 전력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는 구 정치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자 [[9월 30일]] 그는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3페이지"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정치인들 중에는 그의 조카였던 [[윤보선]]도 있었다. 윤치영이 [[박정희]]의 선거사무장으로 선거관리를 총괄하면서 야당인사인 [[허정]], [[김준연]]과 야당의 대선 주자인 [[윤보선]]과도 갈등하였다. 윤보선의 어머니이자 윤치영의 형수인 [[이범숙]]이 윤치영의 안국동 집에 찾아와 통곡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영과 윤보선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화가 난 [[윤보선]]은 윤치영을 만났을 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의 악수를 거절한다. [[윤보선]]은 사석에서 그를 만났을 때도 수인사 조차 거절하였다. [[윤보선]]과의 관계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었다. ===== 국회의원 활동 =====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그는 비례대표([[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2번으로 당선되었다. 6대 국회에서 [[국회의장]]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공화당 당내 일각에서는 윤치영을 의장 후보로 미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초 [[박정희]]는 [[1963년]] [[12월]] 초에 [[정구영 (1894년)|정구영]]을 [[청와대]]로 불러서 [[대한민국 국회|국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양순직,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 (에디터, 2002), 97-98페이지 [[박정희]][[대통령]]은 윤치영에게 [[국회의장]]을 맡길 마음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정구영 (1894년)|정구영]]과 윤치영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김종필]]은 "[[국회의장]]은 [[정구영 (1894년)|정구영]] 선생하고 윤치영 씨가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황이라 골치가 아픕니다."라고 했다. 결국 국회의장직은 [[이효상]]에게 돌아갔다. [[국회의장]]직에 낙마한 대신 그는 곧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서울시장직에 취임하면서 그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직을 사퇴했다. [[1964년]] [[5월]] 사퇴한 [[최두선]] [[국무총리]]의 후임의 물망에 올랐으나, 야당의 집단 반발로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총리]] 지명은 무산되었다. 그는 자신이 [[한민당]]을 탈당했던 것에 대한 감정적인 정치보복이라며 야당 인사들을 맹비난하였다. [[1960년]]대 서울이 만원이 되자 윤치영은 아예 [[서울특별시|서울]]로의 이주의 자유를 제한하자고 제의한적도 있었다. [[서울특별시]]로 이주하는 것을 제한하자는 그 제안은 비난을 잔뜩 받았고, 실현되지 않았다.박노자, 《박노자의 만감일기》 (인물과사상사, 2008) 250페이지 [[1964년]]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일 회담이 추진되자 그는 [[이승만]] 정부의 10년간의 치적은 반공과 반일이라며,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를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외교를 체결하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 서울특별시장 재직 시절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6/1963_%EC%A0%9C%EC%95%BC%EC%9D%98_%EC%A2%85.jpg/200px-1963_%EC%A0%9C%EC%95%BC%EC%9D%98_%EC%A2%85.jpg 1963년 제야의 종 타종식에 참가한 윤치영 {{참고|서울특별시장}} 그 뒤 제13대 관선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했다. [[1963년]] [[서울시장]]이 된 윤치영은 "[[서울특별시|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지 말아야 농촌 인구가 몰려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조선일보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7/2008070700262.html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39세 불도저 시장(市長)' 서울의 얼굴을 바꾸다] {{웨이백|url=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7/2008070700262.html |date=20080904201540 }} 2008년 07월 05일자 [[서울특별시|서울]]의 인구가 폭증하자 1963~1966년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그는 "서울에는 도시계획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년 20~30만 명씩 인구가 모이니, 만약 도시계획을 잘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몰려 인구집중을 유발하지 않으려면 아예 도시계획을 안하는 것이 좋다."고 공언하였다.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한스미디어, 2007) 279-280페이지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에 재입당,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 7대 국회의원, 국토통일원 고문,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1968년]] [[5월]] 다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의장에 피선되었다. [[1964년]] [[5월 23일]] [[대한웅변협회]] 제15대 회장에 선출되었다.{{웹 인용 |url=http://daihan1949.com/new/sub_01_03.php |제목=대한웅변협회 역대 회장단 |확인날짜=2010-08-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828110706/http://daihan1949.com/new/sub_01_03.php |보존날짜=2008-08-28 |깨진링크=예 }} [[1965년]] [[5월 23일]] 다시 [[대한웅변협회]] 16대 회장으로 재선했고, [[1967년]] [[10월 21일]] 대한웅변협회장직을 사직하였다. [[7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이승만 시신이 귀국하자, 오전 8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이승만]]의 시신이 도착하자 영접하였다. 방송 인터뷰에 출연하여 [[이승만]]에 대한 회고를 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허정]], [[장택상]],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과 이승만의 [[국장 (장례)|국장]](國葬)을 요구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국민장]](國民葬)을 추진하였으나, 허정, 윤치영, [[이범석 (1900년)|이범석]], [[장택상]] 등은 [[국장 (장례)|국장]](國葬)을 고수하였다. 4.19 관련 단체에서는 [[국장 (장례)|국장]]도 [[국민장]]도 안 된다며 대규모 시위, 집회를 열었다. [[박정희]] 집권기간 중 윤치영은 [[박정희]]를 가리켜 "[[단군]]이래의 최고의 지도자"라고 찬양하자, 야당에서는 이런 윤치영을 두고 "[[단군]] 이래 최고의 아첨꾼" 이라고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서울 시장 재직 중 그는 구로, 숭인, 은평, 뚝섬 등 4개지구 4천만평에 대한 도시계획을 직접 수립하였으나 서울시의 팽창에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국토종합개발계획 5개년 계획을 본따 서울시 최초의 장기계획인 '시정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는 그가 물러난 뒤 백지화된다. [[1967년]] 제7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그해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며 전국 순회유세를 다녔다. ===== 3선개헌 및 유신 적극 지지 ===== {{참고|삼선 개헌}} [[1968년|1969년]] [[1월]]초 [[박정희]]의 3선 개헌 시도가 공공연하게 알려지자 그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1968년|1969년]] [[1월 7일]]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당의장 서리 자격으로 [[명동]]에 있는 한 경양식당에서 [[대한민국 국회|국회]] 상임위원장과 [[민주공화당|공화당]] 시도 지부장을 초대하여 오찬 모임양순직,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 (에디터, 2002) 155페이지 을 주관하였다. 그것은 3선개헌 문제를 다루기 위한 첫 공식회의였다. 모임 초두에 윤치영은 이런 요지의 말을 하였다. {{인용문|민족중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단군]] 이래의 민족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하며, [[헌법]]상의 [[대통령]] 연임 금지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당 간부들도 개헌 무드 조성에 앞장서 주었으면 한다. 이것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발을 막고 경제건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다.}} 그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당내에서도 3선개헌을 반대하는 일부 소장파 의원들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연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공화당 내에서도 3선으로 용퇴하라는 여론이 빗발쳤고,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발전의 동력을 계속 이어나가야 된다며 3선 퇴진론에 맞섰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비토하면서 쏟아지던 비판은, 윤치영에게 쏠렸다. [[1968년|1969년]] [[1월 18일]] 윤치영은 "[[민족중흥]]의 강력한 [[리더십]]을 위해 3선개헌을 하겠다"고 거듭 말했다.송건호, 《송건호 전집 07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2) 255페이지[[5월 7일]] 윤치영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선 박 [[대통령]]의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이병주, 《그해 5월 6》(한길사, 2006) 39페이지 68년 [[12월 19일]] 개헌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윤치영 당 의장 서리가 한 지구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조항인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윤치영은 개발도상국에서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당이 장기간 집권하는 것이 중요하다.민준기, 《한국의 정치발전 무엇이 문제인가》(을유문화사, 2003) 54페이지"고 선언했다. 윤치영은 [[개헌]] 문제야 말로 국제상황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8년 12월 30일자, 2면 그해 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그는 한국에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한 법이라며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야당의 견해에 맞섰다. [[1969년]] [[4월 12일]] 윤치영은 공화당 의장서리 자격으로 반 당(黨) 행위를 조사하라는 총재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조사에 착수하였다.경향신문, 1969년 04월 12일자, 1면 [[1969년]] [[8월 7일]] 윤치영 외 121명의 이름으로 된, [[박정희]] [[대통령]]에게 3선의 길을 터놓는 것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야당의 반발 끝에 3선개헌안은 통과되었다. ==== 유신체제 출범 직전 ==== [[1970년]] [[1월 7일]] 윤치영은 시국이 [[조국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강력한 지도 체제를 요청하고 있으므로 여당은[[대통령]] 임기 조항을 포함한 헌법상의 결함을 연구·검토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을 재차 피력했다.동아일보, 1969년 1월 7일자, 1면 [[1월 8일]]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 [[김주인]]도 윤치영의 의견에 동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이때, 강력한 영도자가 국가를 영도하기 위해 대통령 출마자의 3선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함으로써 윤치영 당 의장 서리의 견해를 되풀이했다.동아일보, 1969년 1월 8일자Constitutional Amendment is Necessiated, 《korean Quarterly》Vol. IX, No 3(1969년 가을호) 2페이지 여당은 개발도상국에서 서구 선진국형의 정치 질서와 안정의 전제조건인 경제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강력한 영도 체제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한국의 현 시국은 박 대통령이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한번 더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국민은 조국의 밝은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헌법적 장애를 제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력한 지도자와 리더십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유신 개헌을 지지하였다.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다. ==== 유신 시절 ====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1971년]] [[미국]]을 방문, [[고든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Doctor of Letters)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발표된 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그가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성토가 쏟아져나왔으나 곧 긴급조치 발표로 묻혀졌다. 이후 그는 각종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과 야당은 국익보다 권력욕에 눈먼 집단이라며 야당,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또한 일부 야당은 [[미국]]을 등에 업고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며 질타하였다. 조카인 대통령 [[윤보선]]과는 달리 여당인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과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에 가입하여서 정치적으로 [[윤보선]]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윤보선]]이 한때 [[이승만]]의 측근에 있다가 떨어져 나감으로서 대립하게 되었으나, [[박정희]]의 경우는 윤보선의 정적임에도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윤보선]]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계속된 여당 생활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1976년]]에는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었고,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두 번 지냈다. [[1978년]] [[한국유신학술원]] 고문을 지냈다. 말년에는 덕수교회 [[장로]]로서 봉사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파]]가 세웠다는 주장에 반박, 학생운동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9년]] [[12월 9일]]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 생애 후반 === ==== 5공 이후 ==== [[1980년]]초 그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해 초 [[박창암]]이 [[이갑성]]의 밀정설을 주장했다가 소송당하자 [[박창암]]을 찾아가 아무도 해결못할 일을 해결하려 했다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1980년]] [[4월 24일]]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에 위촉되어 [[국정자문회의]] 운영회의를 주관하였다. 그해 재혼한 아내 [[이은혜 (정치인)|이은혜]]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치영은 재혼하지 않았다. [[1980년]] [[8월]]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에 재위촉되었다. 기타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 회장 등을 지냈다. 63년과 68년 2차례에 걸쳐 민주공화당 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는 격동기 한국정치의 한가운데에 서왔다. [[1982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이승만]] 기념사업회와 [[이승만]] 재평가 운동, [[이승만]] 복권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정계은퇴 후에도 92년까지 [[서울특별시]] 직원들의 모임인 서울시 시우회장과 [[안중근]]의사 숭모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왕성한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 [[1980년]]대 그는 학생운동권 중 [[민족해방]]계열로부터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민족해방]]파의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단독 정부로 보고, 단독정부 수립은 한국 분열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하자 그는 [[미국]]에 의한 분단 주장을 반박하고, [[박용만 (1924년)|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8년]] [[8월 18일]]의 [[경향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가리켜 "정치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 인물들"이라며 두둔하기도 했다. [[1985년]] [[이준 (1859년)|이준]]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한국자유총연맹 고문에 위촉되었고, 우익단체인 건국청년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던 과거 우익 청년운동가 출신 회원 30만 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경향신문, 1988년 09월 13일자 ==== 6공화국 시절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5/57/%EC%9C%A4%EC%B9%98%EC%98%81_%26_%EC%9C%A4%EC%9D%B8%EC%84%A0.jpg/150px-%EC%9C%A4%EC%B9%98%EC%98%81_%26_%EC%9C%A4%EC%9D%B8%EC%84%A0.jpg 아들 윤인선과 함께 (1949년) 윤치영은 87세가 넘어서도 서울 CC클럽에 혼자 나와 골프를 치곤 했다.방우영,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김영사, 2008) 395페이지 사람들이 "선생님. 어떻게 혼자 나와 치십니까" 하면 그가 "이봐, 다 죽었잖아"라고 일갈했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은 위트 속에 비애가 담겼다고 평가했다. [[1986년]] [[국회의원동우회]] 회장에 선출되고 [[1987년]] 재선되었으며 [[전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 회장 등을 지냈다. [[1987년]] [[3월 12일]] 구순 기념 논문집을 봉헌하였다.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 (1917년)|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1989년]] [[6월]] 모교인 [[중앙고등학교]]로부터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 [[2월]] 2·8독립선언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총본부 회장을 지냈다. [[1989년]] [[12월 23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건국청년운동사]] 출판 기념식에 [[최병렬 (1938년)|최병렬]] [[문화공보부]] 장관과 함께 임석하였다. [[1989년]] 반공주의적 성향의 잡지 [[한국논단]]이 창간하자, 필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90년]]에는 [[대한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만년 여당인가 봅니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 만년 ==== [[1991년]]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며 [[이승만]]의 재평가를 주장하였다. [[1992년]]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출마하자 구 군사정권 출신인 제3공화국 당시 총리인 [[정일권]], 제5공, 6공화국의 실세인 [[정호용]] 등이 [[김영삼]]을 찍어줄 것을 호소하며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 지지 선언에 불참하였다. [[1995년]] [[3월 27일]] [[이승만]] [[박사]] 탄신 12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였다.[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5032773803 이승만 박사 탄신 백20주년 예배/조선일보-선경에 감사패 전달도] 조선일보 1995년 03월 27일자 만년에 그는 자신이 20년대 미국 유학시절부터 수집해온 장서 3천118권과 [[제헌국회]] 개헌기념사진등 기념물 1백21점을 에 기증했다. 만년에 그는 서울 충정로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이름을 쓴 문패를 달지 않고 윤저(尹邸)라는 문패를 달았다.〈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1 [[1990년]] 조카인 [[윤보선]]이 [[서울대학교|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자 직접 찾아 병간호를 하였고, [[윤보선]]이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90대의 고령에도 윤보선의 아들, 며느리 등과 함께 문상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위키문헌|고 윤치영 전 서울특별시장 영결식 김재순 추도사|김재순 전 국회의장 추도사 전문}} 만년에 그는 1920년 미국 유학 이후부터 수집하던 책 3118권과 국회의원 재직 시절 문서 121권을 국회 도서관에 무상 기증하였다. [[1996년]] [[1월]] 병환으로 [[서울]] 중앙병원에 입원하였다. [[1996년]] [[2월 9일]] 오후 5시17분 서울 중앙병원 병실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9세였다. [[2월 13일]] 10시 [[서울특별시]] 성북동 덕수교회에서 발인하였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렀다. === 사후 ===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 곤좌 장지에 이병영, 이은혜 두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비석은 묘소 앞에서 묘소를 마주보고 서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 공적과 관련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동아일보,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08220076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2008년 8월 22일자 [[2010년]] [[10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다른 15명과 함께 서훈취소가 검토되었다.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08/2010100800371.html 장지연 등 '친일사전'오른 독립유공자 20명 서훈취소 검토], 2010년 10월 08일자 [[2010년]] 그에게 수여된 건국포장이 서훈취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일 의혹 여부는 논란 중에 있다. == 학력 == * [[서울특별시|경성]] 교동보통학교 졸업 * [[중앙대학교|경성 YMCA 영어학교]] 졸업 *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 졸업 * [[미국]] [[하와이 대학교|하와이 주립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미국]] 헤이스팅스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미국]] 엘리자베스 시티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 (법학석사) *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졸업 (문학석사) * [[1934년]]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졸업 (사회과학 석사) == 명예 박사 학위 == * [[1965년]] [[중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8년]] [[건국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71년]] [[미국]] 골든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약력 == * [[1916년]]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학생[[야구]]부 감독 * 1934년 아메리칸 대학교 학사원 석사 *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겸 외교부 차장 * 1946년 2월 민주의원 비서국 국장 * 1946년 9월 31일 민주의원이인정전에서 아놀드 군정장관 송별연에 참석하였다. *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 : [[1948년 서울특별자유시 중구의 선거|제헌 국회의원(서울 중구)]] * 1950년 12월 외무부장관 임병직, 국민당 간부 임영신, 뉴욕 총영사 최용진 등과 함께 유엔총회에 파견, 참석하고 돌아왔다. * 1954년 10월 대통령 특사로 [[중화민국]]을 방문하고, [[중화민국]] 대사 김홍일을 만났다. * 1958년 10월 나용균, 최규남 등과 함께 유엔 대표로 파견되었다. * 1964년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 1965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68년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69년 5월 28일 방한한 [[베트남 공화국]] 대통령 [[응오딘지엠]]을 영접하였다. * 1970년 민주공화당 당의장 * 1971년 미국 고든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76년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 * 1978년 고황재단, 경희대학교 이사 * 1980년 민주공화당 탈당 * [[1981년]] 국정자문회의 의원 * 1982년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장 재선 * [[1984년]] [[12월 18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국정자문위원회]] 위원 오찬에 참석하다. * 1985년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 * [[1985년]] [[8월 15일]] [[하와이]] [[호놀롤루]][[한인]][[교회]]의 [[이승만]]박사 동상제막식에 참석 * 1986년 충무공 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회장 * 1987년 김마리아 동상건립추진위원회 회장 * 1987년 12월 12일 역대 국회의장단을 초청하는 국회의장 주최 만찬에 초청되었다. * 1988년 3월 12일 구순기념 논문을 세계 국제법협회 한국본부에 기증하는 봉정식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조카이자 [[대통령]] [[윤보선]] 등이 참석하였다. == 논란과 의혹 == === 84회의 고문 논란 ===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그는 84회의 고문을 당했다.김을한, 《좌옹 윤치호전》 (을유문화사, 1973) 144페이지 윤치영이 서대문 경찰서에 투옥되었을 때 일제 경찰관은 윤치영을 84회나 고문을 강행하였다. 경찰은 [[흥업구락부]]의 간사인 윤치영을 전후 84회를 고문하여 물도 먹이고, 소위 비행기도 태워보았지만 이를 악물고 끝끝내 불지 않았으므로 슈토오 경부도 어찌하는 수가 없어서 극도로 초조해하였다. 고문의 종류는 다양하여 물고문, 전기고문, 공중에 배만 묶어서 매달기, 비행기 태우기(거꾸로 매달기), 각목으로 배를 누르고 물을 먹이기, 각목으로 주리 틀기 등의 고문을 행했다. 축구와 야구, 등산, 달리기 등으로 단련되었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자 윤치영은 고문 중간 중간 달변으로 시간을 끌었고, 고문이 연이어 행해지는 것을 약간씩 지연시켰다. 이때 윤치영을 고문하던 중에 취재중인 신문기자에게 들켜서 형사들이 그 기자에까지 폭행하는 부산물이 발생하여, 결국 일본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도쿄로부터 사카다니(坂谷) 남작(중앙조선협회장),과 세키야(關屋) 귀족원 의원이 달려와서 조선총독을 보고 조선의 민족주의자를 다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고 경고하였다. 결국 84회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흥업구락부 동료의 명단을 발설하고 만다. 타고난 체력으로 84회의 고문을 당했지만 겨우 견뎌냈다. [[동아일보]]의 서정억 기자가 윤치영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보고 항의하다가 경찰관에게 구타당해 갈비뼈와 얼굴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서정억]] 기자는 죄인이 아니었고 이는 일본 언론계의 맹렬한 항의를 받으면서 윤치영에게 가해지던 고문 조차 완화되었다. === 친일 활동 의혹 === [[1941년]] [[태평양 전쟁]] 무렵에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동양지광사 주최의 미영타도(美英打倒) 대좌담회 연사로 참가하여 황민(皇民)의 사명에 대해 연설하였으며, {매일신보} 사설에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미칠 회담의 영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미영 타도 대좌담회"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인용문|대동아 성전을 위해서 정의의 칼을 뽑은 제국의 사명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과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달성하고자 일억일심(一億一心)으로
매진하는 것이며......대동아 전 민족 특히 황국국민으로서의 우리의 어깨에 지워
진 공정무사한 대 사명이 여기에 잇는 것입니다(「동양지광」, 1942년 2월호).}} 이후 [[일제강점기]] 말기에 전쟁 지원과 참가를 독려하는 각종 시국강연회와 좌담회에 참석하였으며, 친일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친일 행적이 지적되어, 후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분류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지목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윤치영은 서울시장이던 [[1963년]] 12월, 시인 [[이은상]], [[우덕순]], [[김양선]] 등과 함께 [[안중근의사 숭모회]]를 설립하고, 초대와 3대 이사장을 맡았다. {{웹 인용 |제목=안중근 추모사업의 현황과 과제 |url=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1&id=59 |출판사=[[한국역사연구회]] |확인날짜=2007-10-31 |날짜=2004-09-06 |저자=한상권 }}{{웹 인용 |제목 = 역사에 대한 모독 |url = http://www.bjynews.com/news/read.php?idxno=9123 |저자 = 정지환 |날짜 = 2005-03-11 |확인날짜 = 2007-10-31 |출판사 = 바른지역언론연대 }}{{깨진 링크|url=http://www.bjynews.com/news/read.php?idxno=9123 }}전두환 정부시절 [[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 === 그에 의하면 자신에게 가해진 친일파라는 주장은 오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에 의하면 정치는 혁명이나 독립 운동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일제하에서 왜놈에게 협력했다고 해서 신생국가가 이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처벌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우리가 본 역사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도 회개하는 사람은 일단 그 죄를 사해 주듯이 해방된 조국이 새 정부를 출범시킨 마당에 우리가 또 다른 우리 적인 공산당을 북에 두고 있는........현실에서 우리 국민은 서로 관용과 용서로써 이해하고 화합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영도자인 이 대통령의 노선에 따라 신생국가 건설에 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22페이지 라는 것이다. == 사상과 신념 == === 견문 확대와 미래 지향 === 윤치영은 평소 나이가 어린 사람, 아랫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고 훈시하였다. 동시에 넓은 곳을 다니며 가릴 것, 거칠 것 없이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훈시하였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선현의 말과 같이 불치하문(不恥下問)은 물론이려니와 역사의 전철을 참고로 하여 후진들이 자중자애하며 널리 보고 널리 배워 전문 지식을 익히고 큰 일을 그르치지 말고 대성이 있기를 기원한다고 하였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8페이지 그는 또 우리가 나갈 길은 미래지향적인 삶이라고 주장하였다.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를 헤아리는 지금에 와서도 친일 논의가 상존하는 것은 하나의 역사의 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된다고 보며 그러한 역사는 하나의 교훈으로 돌리고 새로운 사고와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전향적인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463-465페이지 === 창씨개명에 대한 저항 ===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단행한다고 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여러 사람의 중의에 의해 밀리게 되었지만, 그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반드시 조선의 독립은 이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창씨개명 후에도 창씨한 이름을 잘 쓰지 않았는데, 1942년의 미영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여했을 때는 자신의 이름 윤치영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여한 다른 인사들은 대부분 창씨개명한 이름을 사용했다. [[1940년]] [[1월]] 문중에서 [[창씨개명]]을 단행하는 문제를 두고 회의를 했다. 이때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해 [[5월]] 문중에서 공적으로 이토 로 창씨하자, 윤치영은 조선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며 이 결정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후에도 창씨 성을 사용하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한국]]식 성명을 고집했다. 이는 [[1941년]]의 [[동양지광]] 주최 [[미영타도 좌담회]]에서도 나타났다. 다른 참석자들은 [[창씨개명]]한 성명을 썼지만 윤치영은 홀로 윤치영이라는 조선식 성명을 썼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개최식 때도 항상 그는 창씨명을 쓰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본명을 고집했다.매일신보, 1941년 10월 23일자, 2면 이후 임전보국단 행사에 불참했지만 그는 명단을 올리려거든 윤치영으로 올리라며 자신의 본명을 고집했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45년]] 여름 총독부 경무국에 출입하는 어느 지인이 윤치영을 찾아와 하는 말이 "오는 [[10월 17일]] 밤 1시를 기하여 [[안양]] 근교의 어느 산록에서 과거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던 조선인 유지들을 끌어다가 전부 사형시킨다."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그의 정보가 막연한 것이 아니고 6하원칙에 들어맞는 것이므로 반드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윤치영은 도주를 시도한다. {{인용문2|륙색에다 찹살 가루며 비상금 등 갖출 것들을 챙겨 넣고 밤 자정을 기해 망우리 고개까지 걸어갔다. 곰곰이 생각하니 방방곡곡 그들의 감시가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닭아 피할 곳이 없으니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공연히 길가에서 붙잡히면 오히려 위험을 자초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거늘 잡히더라도 집에서 잡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광명천지에 사람이 몸을 숨기려고 들더라도 생각보다 정말 숨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도 이때 터득하였던 것이다.}}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패전에 대비하여 총독부 당국은 불온한 인사들에 의한 후환을 없애려고 그들이 요시찰 인물로 지목했던 한국의 지도급 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그것도 총탄이 아까워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군정|미 군정기]] 무렵 [[조선총독부]]가 남기고 간 서류들을 살펴보던 윤치영은 [[조선총독부|총독부]]가 [[1945년]] 초, 그해 [[10월 17일]]과 [[8월]] 패전 직전에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불령선인, 요시찰 인사들을 안양군 골짜기로 끌어모은 뒤 모조리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윤치영은 이를 간단하게 메모해두었다가 자신의 회고록을 낼 때 기술하였다. === 강력한 리더십과 부국강병론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0/05/%EB%AC%B4%EC%B4%88_%EC%9D%B4%EB%B2%94%EC%84%9D_%EC%9C%A4%EC%B9%98%EC%98%81.png/180px-%EB%AC%B4%EC%B4%88_%EC%9D%B4%EB%B2%94%EC%84%9D_%EC%9C%A4%EC%B9%98%EC%98%81.png 미군정 간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는 이범석 총리와 윤치영 내무부장관 윤치영은 강력한 지도자만이 안정된 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에 따라 유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각종 고문을 당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더욱 강화해나가게 된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 하에 일치 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된다는 부국 강병론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 조지 워싱턴과 케말 파샤를 합친 정치인이 될 것과 대통령과 스승과 천황을 겸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하기도 했다. 이는 임금이자 동시에 스승, 아버지여야 된다는 [[조선]]시대의 군사부일체론과 유사하다.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 하에 일치 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된다는 그의 확신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 선포]]에 대한 확고한 지지로 이어진다. 그는 일찍부터 [[이승만]]에게 '[[국부]](國父 : the father of Korea)' [[이승만]]이 (독립 이후) 건국 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승만]]에게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독재적 지도자가 되라 고 권고하면서 윤치영 자신은 이승만을 위해 '견마지로(견마지로)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다짐대로 그는 많은 청년을 모아서 [[이승만]]의 측근에 배치하였고, 이승만의 [[동지회]]의 [[뉴욕]] 지회, [[하와이]] 지회,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등 한국인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며 청년들을 포섭하였다. 그는 [[1968년]]부터 [[박정희]]에 의해 추진된 [[삼선 개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단군]] 이래의 민족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하며, [[헌법]]상의 [[대통령]] 연임 금지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것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발을 막고 경제건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를 중심으로 전국민이 사심없이 일치단결하는 것이 국력을 신장시키는 지름길이라 하였다. === 4·19에 대한 부정적 평가 === 그는 [[4·19 혁명]]을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4.19 사태'로 평가하였다. 윤치영은 또한 4.19 혁명을 두고 특무대장을 지낸 [[김창룡]] 육군 소장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그는 4.19를 두고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계략과 [[장면]]의 욕심을 비난했고, 4.19 이후의 사건 처리미숙으로 [[이승만]]까지 하야하게 되었다고 봤다. 그는 [[김창룡]]의 요절을 안타까워했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4·19 혁명]]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 이승만에 대한 변론 === 그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한국논단 1991년 9월호 (한국논단, 1991) pp.73'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의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 조봉암에 대한 변론 === 윤치영은 [[1959년]] [[조봉암]]이 용공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부터 [[조봉암]]이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조봉암]]이 수감되었을 때 [[장택상]]과 함께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후일 그는 '그(조봉암)가 [[진보당 사건]]으로 연루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그가 그리 된 데에는 주변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용공분자로 몰리는 불운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과 애석함이 남아 있다.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285페이지'라고 평하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 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 윤치영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규정했다. 윤치영은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연적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천부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며 과학문명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한 비인간적 주의주장'이라 봤다. 그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천부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며 과학문명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한 비인간적 주의주장임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 나라의 주권을 남한에서만이라도 찾으려 하였던 이 박사의 노선에 나는 적극 찬동하여 나는 연부역강했던 한 시절을 보람있게 보냈노라고 자부한다. 며 인간의 본능을 심하게 억압하는 획일화된 사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 시국관 === 윤치영은 [[1980년]]대의 한 인터뷰에서 [[대한민국|남한]]의 재벌들을 비판했다. 그는 재벌들이 시류에 잘 영합하는 것을 내심 아니꼽고 불쾌하게 바라봤다. 그는 '재벌들이 어디서 생겼소? 모두 [[이승만]]과 [[박정희]](정권) 한테서 생긴 것 아니요? 그런데 그들이 요즘 어떻게 합니까?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디 은인(恩人) 대접 합니까?국무총리서리 백사 이윤영 회고록(사초, 1984) 214페이지'라며 재벌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대한민국 재벌의 대다수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만든 결과물로 인식하였다. 한편 그는 [[1960년]] [[4·19 혁명|4.19]]와 관련해서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4·19 혁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를 [[4·19 혁명|4.19 사태]]라고 보았다.윤치영 외에도 [[허정]] 등은 4.19를 4.19 사태로 평가하였다. == 평가와 비판 == === 긍정적 평가 === 독립운동가, 학자, 정치가로서 두세기에 걸쳐 온갖 영욕을 겪은 현대사의 증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과 발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다.'는 시각도 있다. 합리주의자 라는 평가가 있고, 동시에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제헌[[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과 초대 [[내부무|내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과 발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다. 정계은퇴 후에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 [[2008년]] [[8월]]의 ‘한국사 시민강좌’ 학술대회에서는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보수주의 세력 일각에서는 그가 오랫동안 [[이승만]]을 측근에서 성실하게 보좌한 점 역시 높이 평가하고 있다. === 부정적 평가 === 한편 윤치영은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의 귀를 막았다는 비판도 있다. 윤치영은 청년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젊은이들을 채용하여 주변에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최기일]]에 의하면 윤치영과 [[이기붕]]에게 [[이승만]]에 대한 언론과 여론은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일반 대중, 그리고 이 박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의 독선에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떨어졌다. [[최기일]]에 의하면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환멸과 결과적으로 생기는 대중의 [[이승만]] 지지 악화를 윤치영과 이기붕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한다. 그들의 자세는 다만 이승만 박사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최기일]]은 '그들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지지하고 따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최기일]]은 또한 이해할 수 없게도 돈암장 사람들(이승만의 측근들)은 언론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그를 [[극우주의]]자 라고 평가하였다. [[박노자]]는 그의 [[1960년]]대 [[서울특별시|서울]] 이주 제한 주장을 '[[전체주의]]적 꿈'이라고 평가했다. [[박노자]]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윤치영 전 [[서울시장]]의 [[전체주의]]적 꿈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저술가 겸 시민운동가 [[정경모]]는 그를 [[여운형]]과 [[김구]]의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83페이지 == 저서 및 논문 == === 저서 === * 《윤치영의 20세기 : 동산회고록》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삼성출판사, 1991) * 《건국청년운동사》(建國靑年運動史) * 《민족의 갈 길》 === 논문 === * 논문, 나의 내무부장관시대 (지방행정 1958 년 8월호(통권 제60호)에 수록) * 단편논문, 유엔에서 논의되는 한국통일 방안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57) == 상훈 == * [[대한민국]] [[건국포장]] [[1982년]] [[3월]] 서훈, 2010년 취소 * [[국민훈장]] 무궁화장 * [[아르헨티나]] 문화훈장 * [[베트남]] 금관2등훈장 * [[1989년]] [[6월]] 모교인 자랑스러운 중앙인상 == 취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3/3c/Yun_Doo-su_01.PNG/160px-Yun_Doo-su_01.PNG 9대 선조 윤두수 영정 * 말년까지도 '멋쟁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골프를 즐겼으며 빨간 넥타이를 자주 맸다. 빨간 넥타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가 되기도 했다. 윤치영의 공보비서를 지낸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한국에서 내가 보았던 사람 중에 옷을 가장 잘 차려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깡마른 편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신체적 외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 체육을 좋아한 그는 [[YMCA 청년회]]에 있을 때 [[축구]]부와 [[야구]]부에 관여하였고, 야구부의 주장 겸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도 [[이승만]]을 모시고 체육서울장을 늘 찾았으며, [[1947년]] [[서울특별시|서울시]] [[체육경기연맹]]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보다 20여 세 연하의 사람들과도 호형호제를 했는데, 그는 운동과 청년들과의 대화하기를 좋아하였다. 80대의 나이에도 [[골프]]와 [[축구]], [[족구]] 등에 참여하였다. * 처음 보는 이에게는 거만하고 거칠게 대하였으나,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여 나이에 상관없이 여러 젊은이들이 그와 쉽게 어울렸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젊은이들을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을 지지하게 하는데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 윤치영은 늘 9대 선조 [[윤두수]]의 영정 족자, 아버지 [[윤영렬]]과 어머니 [[한진숙]]의 사진, [[이승만]] 사진, [[박정희]] 사진을 늘 자신의 옆에 두었다. 또한 [[더글러스 맥아더]]와 [[장개석]]의 사진 역시 곁에 두었다. == 가족 관계 ==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은 그의 둘째 형 [[윤치소]]의 장남이었다.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의 아들 김상석(金相晳)이 그의 사위이다.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는 그의 본처의 처남인 동시에 사돈이기도 했다. {{윤영렬 가계도}}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2/2c/Yunchioh.PNG/160px-Yunchioh.PNG 맏형 윤치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b/bc/Yun_chi-seong.JPG/160px-Yun_chi-seong.JPG 셋째 형 악연 윤치성 *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년]] - [[1823년]] [[9월 25일]]) * 증조모: 남양홍씨([[1765년]] - [[1816년]] [[5월 7일]]) ** 종조부: [[윤교동]](尹敎東, [[1786년]] - [[1829년]] [[5월 8일]]) ** 종조모: 나주임씨(羅州林氏) ** 종조부: 윤우동(尹祐東) * 할아버지: [[윤취동]](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 * 할머니: 고령신씨(高靈申氏) * 할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 [[1800년]]? - [[1900년]] [[10월]], 아버지 [[윤영렬]], 큰아버지 [[윤웅렬]] 형제의 생모) ** 고모: 해평윤씨([[1835년]] - [[1920년]]) ** 고모부: 이원시(李源始, 본관은 용인), 2남 2녀 *** 고종사촌: 용인이씨 *** 고종매부 : 이정구(李鼎九), 본관은 우봉 * 아버지: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 부인: 홍진순씨 [[한진숙]](韓鎭淑, [[1851년]] ~ [[1938년]] [[2월 18일]]), 한말 전라도 관찰사와 경상도 관찰사, 육군 참장을 지낸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아들 : 윤동혁, [[2003년]]생, ** 아들:[[윤동혁]](尹仁善, [[1948년]] [[1월 9일]] ~ , 백제병원 기획실장, [[국회사무처]] [[서기관]] 역임 ** 딸: [[윤예진] ** 큰 형: 동암[[윤치오]](東庵尹致旿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40페이지, [[1869년]] [[8월 5일]] ~ [[1950년]] [[12월 22일]]) ** 둘째 형: 동야[[윤치소]]{{웹 인용 |제목 = 역사에 대한 모독 |url = http://www.bjynews.com/news/read.php?idxno=9123 |저자 = 정지환 |날짜 = 2005-03-11 |확인날짜 = 2007-10-31 |출판사 = 바른지역언론연대 }}{{깨진 링크|url=http://www.bjynews.com/news/read.php?idxno=9123 }} 東野尹致昭, 일본식 이름: 伊東致昭,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 *** 조카: [[대통령]] 해위 [[윤보선]](海葦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 셋째 형: 악연[[윤치성]](岳淵尹致晟, [[1875년]] [[음력]] [[3월 2일]] - [[1936년]] [[양력]] [[8월 11일]]) ** 넷째 형: 간송[[윤치병]](澗松尹致昞, [[1880년]] [[음력]] [[6월 4일]] - [[1939년]] [[양력]] [[1월 24일]]) ** 다섯째 형: 남강[[윤치명]](南岡尹致明, [[1885년]] [[음력]] [[9월]] - [[1944년]] [[양력]] [[4월 21일]]) ** 남동생: 이름 미상 ** 첫째 누나: 윤활란(尹活蘭, ? - ?, 5남 3녀를 둠) ** 둘째 누나: [[윤정숙]](尹貞淑, [[1889년]] [[6월 14일]] - [[1979년]] [[11월 24일]], 아명은 노덕(老德)): 사학자 [[이병도]]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 둘째 매형: [[이병림]](李丙琳), 사학자 [[이병도]]의 6촌 형, 1남 4녀 *** 외조카: 이영희, [[이화여자대학교]] 음과대학 교수 *** 외조카: 이달희 *** 외조카 사위: [[한상준]], 제6대 [[한양대학교]] 총장 * 서모: 이름 미상윤치호, 《윤치호 일기 (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페이지, 아버지 윤영렬의 첩 ** 이복 여동생: 윤씨(이름 미상, ? ~ ?) *** 외조카딸: 허현자(許炫子) *** 외조카사위: [[김두만]](金斗萬, [[1927년]] [[2월 16일]] ~ , 전 공군참모총장, 대붕상사 회장 역임) *** 진외종손: [[김상우]](金翔宇, [[1954년]] [[10월 14일]] ~ , 정치가·국회의원, 정치학자) * 서모 : 장복첨(張福瞻, [[1902년]] [[1월 22일]] ~ [[1950년]] [[8월 3일]]) ** 이복 동생 : 윤치정(尹致晶, [[1921년]] [[11월 25일]] ~ ?) ** 이복 여동생 : 윤길희(尹吉喜, [[1924년]] [[6월 16일]] ~ [[1973년]] [[6월 28일]]) ** 이복 여동생 : 윤인희(尹麟喜, [[1927년]] [[1월 17일]] ~ ?) ** 이복 동생 :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 [[1985년]] [[4월 8일]]) ** 이복 제수 : 김정숙(金貞淑, 김해김씨, [[1938년]] [[3월 10일]] ~ ), 김계준(金溪俊)의 딸 *** 조카 : 윤우선(尹宇善, [[1960년]] [[8월 5일]] ~ ) *** 조카 : 윤혜선(尹慧善, [[1962년]] [[3월 24일]] ~ ) *** 조카 : 윤필선(尹弼善, [[1964년]] [[12월 20일]] ~ ) *** 조카딸 : 윤선경(尹仙卿, [[1966년]] [[10월 26일]] ~ ) * 처: [[이병영]](李丙暎, [[1900년]] ~ [[1926년]](?) [[2월 7일]]), 본관은 우봉,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딸, 사학자 [[이병도]]의 여동생 ** 아들: 윤기성(尹琦成, [[1917년]] ~ [[1923년]], 6세에 사망) * 처: [[이은혜 (정치인)|이은혜]](異恩惠, [[1898년]] [[4월 21일]]~[[1980년]] [[8월 23일]], [[이화여자대학교|이화학당]] 여교사 역임)[http://cafe.naver.com/powergroup.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613 신호철의 한국사회혼맥 :: 네이버 카페] ** 딸: [[윤성선]](尹成善, [[1924년]] [[8월 11일]] ~ , 교육자·[[숙명여자대학교]] 교수) ** 사위: [[김상석]](金相晳,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의 아들) *** 외손자: [[김병기 (1962년)|김병기]](金炳基, [[1962년]] ~ , 교육자·[[고려대학교]] 교수, 국제대학원장 역임) ** 아들 : 이름 미상, [[1944년]]생, 어려서 요절 * 처: 전주이씨 (? ~ ?) ** 아들: [[윤인선 (1944년)|윤인선]](尹仁善, [[1944년]] [[1월 9일]] ~ , 백제병원 기획실장, [[국회사무처]] [[서기관]] 역임 ** 며느리: [[노호경]](盧好京, [[1948년]] [[10월 23일]] ~ , 의학자 노동두(盧東斗)의 딸 *** 손자: [[윤인구 (1972년)|윤인구]](尹寅求, [[1972년]] [[9월 13일]] ~ , 방송인·KBS아나운서) *** 손자: 윤한구(尹漢求, [[1975년]] [[3월 31일]] ~ ) * 큰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큰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1844년]] [[9월 27일]] - [[1936년]] [[2월 12일]], 이름은 이정무) ** 사촌 누나: 윤경희(尹慶姬, [[1862년]] - [[1931년]]) ** 사촌 형: 좌옹[[윤치호]](佐翁尹致昊, [[1864년]] [[12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 큰어머니: 다옥(茶玉, 윤웅렬의 기생 첩) * 큰어머니: 김정순(金貞淳, [[1879년]] [[3월 15일]] - [[1959년]] [[11월 16일]]) ** 사촌 형: 남포[[윤치왕]](南圃尹致旺, [[1895년]] [[2월 17일]] - [[1982년]] [[12월 21일]]) ** 사촌 형수: 이모임(李慕姙, ? - 사망, [[이희덕]](李熙悳)의 딸, 창씨명은 伊東慕姙) ** 사촌 동생: [[윤치창]](尹致昌, [[1899년]] [[3월 5일]] ~ [[1973년]] [[10월 1일]]) ** 사촌 제수: [[손진실]](孫眞實, [[1901년]] - 1990년, 다른 이름은 원미(元美), [[독립운동|독립운동가]] 겸 [[임시의정원|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의 딸) * 큰어머니 : 이름 미상, [[윤웅렬]]의 첩 ** 사촌 형 : 윤길용(尹吉鏞, [[1894년]] - 요절) * 외증조부 : [[한익상]](韓益相, [[1767년]] ~ [[1846년]], [[병조]][[참판]] 역임) * 외할아버지 : [[한치원]](韓致元, [[1821년]] ~ [[1881년]], 호는 동랑(冬郎), [[부호군]] 역임) ** 외삼촌 : [[한진창]](韓鎭昌, [[1858년]] [[1월 26일]] ~ [[1935년]] [[2월 2일]]) * 사돈: [[김성수 (1891년)|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 호는 인촌(仁村)) - 딸 윤성선의 시아버지 * 사돈 :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 5촌 조카 윤광선의 장인 * 사돈 : 민영철(閔泳喆, [[1864년]] ~ [[1912년]]) - 형 [[윤치오]]의 딸 [[윤시선]]의 시아버지이자 형 [[윤치소]]의 아들 [[윤보선]]의 장인, [[민영환]]의 6촌 동생 * 사돈 :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 - 7촌 조카사위 현정건의 동생이며, 형 윤치오의 후처 현송자의 6촌 동생 * 사돈 : [[손정도]](孫貞道, [[1872년]] [[7월 26일]] ~ [[1931년]] [[2월 19일]]) - 사촌동생 [[윤치창]]의 장인 * 사돈 : [[손원일]](孫元一 , [[1909년]] [[5월 5일]] ~ [[1980년]] [[2월 15일]]) - 사촌동생 [[윤치창]]의 처남 * 사돈 : [[노동두]](盧東斗, [[1926년]] ~ [[2002년]] [[11월 26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211281852261&code=910100 노동두 전 서울백제병원장 타계] 경향신문 2002.11.28., 의학박사, [[신경정신과]] 의사) == 역사학자 이병도 가문과의 관계 ==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와는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이병도]]는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은 이재영(李宰寧, ? ~ ?)과 결혼했다.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189페이지 이재영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로,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이다.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은 [[이병영]](李丙暎, 1900년 ~ )과 결혼했는데, [[이병영]]은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딸, [[사학자]] [[이병도]]의 여동생이었다. [[이병도]], [[이병묵]]은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소]]의 딸이 [[이병도]]의 조카와 결혼하여 윤치영의 형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했다. 또한, 형 [[윤치오]]의 아들인 [[윤승선]]은 [[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과 결혼했다. 조카며느리 [[이을남]]은 윤치영의 첫 부인 [[이병영]]의 6촌 여동생이 된다. == 일화 == 윤치영의 가문은 장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1984년]] 윤치영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80세 이전에 별세하는 것은 예외적이며 환갑을 맞은 사람은 30대 젊은이 취급을 받는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새로 밝혀 쓰는 친일인물사》 (개마고원, 1999) 158페이지 19세기 한국 남성 중 이례적으로 요리도 할줄 알았던 그는 직접 요리를 하여 [[이승만]]의 [[돈암장]]을 찾아온 [[김원봉]]과 [[박헌영]]을 대접했다. [[김원봉]]은 윤치영이 손수 요리해서 차려온 음식을 먹었으나, [[박헌영]]은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며 끝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제 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대통령후보]]들을 겨냥, "만약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몇달안에 [[혁명]]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폭탄발언을 하여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는 등 눈치를 살피지 않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적지않은 화제를 뿌렸다. 개인적으로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 [[안호상]] 등과 가까이 지냈다.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이은혜 (정치인)|이은혜]]에게 누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이었던 [[허정]](許政)은 그의 두 번째 부인 [[이은혜 (정치인)|이은혜]]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먼 인척관계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였다 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이승만]]의 또다른 측근이었던 [[장택상]]과는 앙숙이었다. 후에는 [[이기붕]]과도 앙숙이었고, [[장면]]이 [[이승만]]의 곁을 떠나자 [[장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목사로 [[국무총리]]서리에서 3번 인준부결된 [[이윤영 (1890년)|이윤영]]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는 호의적이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사형당한 [[조봉암]]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조봉암은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옹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된 뒤에도 윤치영은 그가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가 진보당 사건으로 연루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그가 그리 된 데에는 주변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용공분자로 몰리는 불운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과 애석함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조봉암]]의 체포 당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과 [[민주당 (1955년)|민주당]] 양측에서 [[조봉암]]을 공격하는 중, [[장택상]]과 함께 조봉암을 옹호한 몇 안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윤치영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덕수교회]]장로로 선출되었다. 아버지 대에 개종하여 모태신앙인이기도 했던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90이 넘은 고령에도 [[장로]] 자격으로 다니던 교회인 [[덕수교회]]의 각종 행사를 도맡아서 주관하였다. 한편 그는 해방 정국에서 우익운동 할 때부터 '나는 (이승만의) 비서니까 다 알고, 다 내 말이면 된다'하고 다녔다. 그는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 [[윤보선]]은 제2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보선]]이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을 당시 그는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이었다. 그의 조카사위인 [[장석윤]] 역시 후에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 신조 === * 공취천하 수지이겸(功就天下 守之以謙) * 불취하문(不恥下問) == 기타 == [[1948년]] [[11월]] 친[[이승만]] 성향의 정당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지청천]], [[신익희]] 일파가 [[한국민주당]]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을 창당할때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임영신]]과 함께 독자적으로 친(親) 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이끌어갔다. [[1950년]] [[1월 27일]] 민국당과 무소속 일부가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해서, "개헌을 추진하는 자들이야말로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라고 주장하며 개헌 저지에 앞장섰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37페이지 이후 개헌을 시도하는 [[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과 [[민주당 (1955년)|민주당]]에 대항하여 개헌논의를 막았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인척이었던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데리고 탈출하려고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집을 방문했으나 그가 먼저 탈출한 사실을 확인하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1963년]] 이후에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탈당,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에 건너가서 활동했다. 제1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 장관이었으며 제7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인 [[장석윤]](張錫潤)은 그의 당조카사위였다. [[장석윤]]은 윤치영의 사촌 형이며 [[산부인과]]의사 겸 군의관 [[윤치왕]](尹致旺)의 넷째 딸 윤선희(尹善姬)의 남편이다.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에는 그의 별장이 있었다. == 윤치영을 연기한 배우들 == * [[김용건]] - [[1981년]] ([[제1공화국 (드라마)|제1공화국]]) [[MBC]] 텔레비전 드라마 * [[김용건]] - [[1989년]] ([[제2공화국 (드라마)|제2공화국]]) [[MBC]] 텔레비전 드라마 * [[안대용]] - [[1990년]] ([[여명의 그날]]) KBS 텔레비전 드라마 * [[김수일]] - [[1993년]]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MBC]] 텔레비전 드라마 * [[박종관]] - [[1995년]]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SBS 텔레비전 드라마 * [[이필훈]] - [[2002년]] ([[야인시대]]) SBS 텔레비전 드라마 * [[김호영]] - [[2006년]] ([[서울 1945]]) KBS 텔레비전 드라마 == 같이 보기 == *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외교위원부]] * [[흥업구락부]] * [[프린스턴 대학교]] * [[청구구락부]] * [[한국민주당]] *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 [[국정자문회의]] * [[민주의원]] * [[삼일신보]] == 관련 서적 == *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 일조각 편집부, 한국사 시민강좌:제43집 (일조각, 2008)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6) *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1 (돌베개, 1993) * 역사문제연구소, 《바로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역사비평사, 1993) * 반민족문제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 1》 (반민족문제연구소청년사, 1994)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 공덕귀,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공덕귀 회고록》 (여성신문사, 1994) * 이현희,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동방도서, 1987) *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문당, 1982)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65∼1970)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인물록》 (국가보훈처, 1992) * 박용만, 경무대 비화 (삼국문화사, 1965) * 우남이승만문서편찬위원회,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 1~9》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중앙일보사, 1998) *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 윤보선, 《구국의 가시밭길》 (정경문화사, 1967) * 양우종, 《이대통령투쟁사》(연합신문사, 1949) * 이승만, 《일민주의 개설》(일민주의보급회, 1949) * 리승만박사투쟁사간행회, 《민족의 거성》 (문성당, 1957) * 〈2·8독립선언의 마지막 증언자 윤치영박사를 모시고:대담〉 《정우 69호:88년 2월호》 (국회의원 동우회, 1988) pp. 23–28 * 〈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 40–51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 선거|제1대 총선]]||[[서울 중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중구)]]||1대||[[한국민주당]]||{{막대|녹|4|3|5}} 43.5%||28,496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 총선]]||[[서울 중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중구 갑)]]||2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3|5|9}} 35.9%||9,238표||2위||낙선 |- |[[1952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2.5 재보궐선거]]||[[공주군의 국회의원|국회의원(충남 공주군 을)]]||2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4|7|2}} 47.2%||3,529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0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 |[[대한민국 제3대 총선|제3대 총선]]||[[서울 중구의 국회의원|민의원의원(서울 중구 갑)]]||3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4|7|6}} 47.6%||9,392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제4대 대선]]||[[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4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0|2|8}} 2.8%||241,278표||3위||낙선 |- |[[대한민국 제4대 총선|제4대 총선]]||[[서울 중구의 국회의원|민의원의원(서울 중구)]]||4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2|4}} 23.9%||6,105표||2위||낙선 |-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제5대 대선]]||[[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5대||[[무소속]]||-||-||-||낙선 |- |[[대한민국 제5대 총선|제5대 총선]]||[[서울 중구의 국회의원|민의원의원(서울 중구)]]||5대||[[무소속]]||-||-||-||낙선 |- |[[대한민국 제6대 총선|제6대 총선]]||[[틀:제6대 비례대표 민주공화당|국회의원(전국구)]]||6대||[[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막대|갈|3|3|5}} 33.5%||3,112,985표||전국구 2번||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 |[[대한민국 제7대 총선|제7대 총선]]||[[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목록|국회의원(전국구)]]||7대||[[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막대|갈|5|0|6}} 50.6%||5,494,922표||전국구 2번||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 == 각주 == {{각주|2}} == 외부 링크 == {{위키문헌|저자:윤치영}} * {{헌정회|1436}} * {{독립유공자|5109|윤치영}}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34326/http://www.seoul.go.kr/v2007/seoul/mayor_his/mayor.html 역대 서울 시장:13대 시장] *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110000&newsId=20091125000113 [강종규의 세상 속으로] 윤치영 서울시장, 이명박 서울시장] * [https://web.archive.org/web/20080803155021/http://www.kkk60.kr/ 건국회 홈페이지]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5081901012330136001 서울 변천 60년속 '숨겨진 드라마']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1182.html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전임후임 |전임자 = [[김약수]] |후임자 = [[장택상]] |대수 =1 |직책 = [[대한민국의 국회부의장|(제1)국회부의장]] |임기 = 1949년 7월 4일 ~ 1950년 5월 3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신성모]] |대수 = |직책 = 초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 |임기 = 1948년 7월 27일 ~ 1948년 12월 24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공진항]] |후임자 = [[전규홍]] |대수 = 2 |직책 =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주 프랑스 공사]] |임기 = 1950년 11월 23일 ~ 1951년 4월 27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이청천]]
[[이윤영 (1890년)|이윤영]] |후임자 = [[이윤영 (1890년)|이윤영]]
[[허정]] |대수 = |직책 = 전시 내각의 [[대한민국 무임소장관실|무임소장관]] |임기 = 1951년 4월 27일 ~ 1952년 7월 9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동성 (1890년)|김동성]] |후임자 = [[이재학]] |대수 = 2 |직책 = [[대한민국의 국회부의장|후반기 (제2)민의원부의장]] |임기 = 1952년 7월 10일 - 1954년 5월 3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윤태일 (1918년)|윤태일]] |후임자 = [[김현옥]] |대수 = 13 |직책 = [[서울특별시장]]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6년 3월 30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정렬 (1917년)|김정렬]] |후임자 = 윤치영 |대수 = |직책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임시의장 |임기 = 1963년 5월 2일 ~ 1963년 5월 27일 }} {{전임후임 |전임자 = 윤치영 (임시의장) |후임자 = [[김종필]] |대수 = 2 |직책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의장 |임기 = 1963년 5월 27일 ~ 1963년 12월 2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종필]] |후임자 = [[백남억]] (의장서리) |대수 = 6 |직책 =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의장 |임기 = 1968년 6월 5일 ~ 1970년 12월 26일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초대) |후임자 = (서울 중구 갑)[[원세훈 (1887년)|원세훈]]
(서울 중구 을)[[정일형]] |대수 = 1 |직책 = [[서울 중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중구)]]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소속정당 = [[한국민주당]] → [[대한국민당 (1949년)|대한국민당]]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공주군 을)[[김명동]] |후임자 = (공주군 갑)[[염우량]]
(공주군 을)[[김달수 (1917년)|김달수]] |대수 = 2 |직책 = [[공주시의 국회의원|국회의원(충남 공주군 을)]] |임기 = 1952년 2월 6일 ~ 1954년 5월 30일 |소속정당 = [[대한국민당 (1949년)|대한국민당]] |같은 지역구 의원 = (공주군 갑)[[박충식 (정치인)|박충식]] }}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서울 중구 갑)[[원세훈 (1887년)|원세훈]]
(서울 중구 을)[[정일형]] |후임자 = (서울 중구 갑)[[주요한]]
(서울 중구 을)[[정일형]] |대수 = 3 |직책 = [[서울 중구의 국회의원|민의원의원(서울 중구 갑)]] |임기 =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소속정당 = [[대한국민당 (1949년)|대한국민당]] |같은 지역구 의원 = (중구 을)[[정일형]] }} {{제6대 비례대표 민주공화당}} {{제7대 비례대표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장}} [[분류:윤치영]][[분류:1898년 태어남]][[분류:1996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외교관]][[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법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야구 감독]][[분류:일제 강점기의 야구 선수]][[분류: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정치학자]][[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종교 지도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분류: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한국민주당 당원]][[분류:대한국민당 (1948년) 당원]][[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분류:해평 윤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하와이 대학교 동문]][[분류:헤이스팅스 대학교 동문]][[분류:프린스턴 대학교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엘리자베스 시립 대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아메리칸 대학교 동문]][[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고문 피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