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후(尹裕後, [[1541년]] [[1월 11일]] - [[1606년]] [[8월 13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작가, 시인으로, 자(字)는 경여(慶餘), 호는 송당(松堂), 쌍백(雙栢), 쌍백당(雙栢堂)이고,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이다. [[세조반정]] 이후 전하지 않는 사육신 [[성삼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육신]] [[성삼문]]의 시문 몇편을 모아 성근보유고와 기타 시문을 정리해 [[성삼문]]의 문집 2권을 간행한다. [[한성부]] 출신.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사과(司果)로 재직 중 [[1568년]](선조 1년) 증광사마시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행용양위부사과, 좌랑을 거쳐 고양군수에 이르러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삭녕군|삭녕]][[군수]]를 거쳐 [[1590년]](선조 23년) 영월부사가 되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자산군수를 거쳐 [[임진왜란]]을 겪은 뒤, 관직은 [[한성부]][[서윤]]에 이르렀다. 그는 집안에 전해지던 [[성삼문]](成三問)의 문집과, 문집에 실리지 못하고 각종 문헌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邱風雅), [[용재총화]](慵齋叢話), [[황화집]](皇華集),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전하던 [[성삼문]]의 시와 글들을 모아서 정리, 성근보선생집 (成謹甫先生集),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등을 간행하였으며, 발문을 썼다. [[성근보집]]과 [[육선생유고]] 모두 [[성삼문]]의 문집인데 서로 다른 내용들이 실려있다. 윤곤(尹坤)의 5대손으로, [[정현왕후]]의 친정 종손자가 된다.
윤유후의 어머니의 외삼촌 [[송인]]이 [[조선 중종|중종]]의 서녀와 결혼하여, 대고모할머니 [[정현왕후]]의 아들인 [[조선 중종|중종]]하고는 이중 인척관계가 된다. 인재 [[홍섬]]과 이암 [[송인]]의 문인이다.
== 생애 ==
=== 출생과 가계 ===
[[1541년]](중종 36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탕로]](尹湯老)이고, 할머니 전주이씨는 이계(雲山君 李誡)의 딸로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 이침의 손녀딸이 된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돈녕부]][[도정]](通政大夫 敦寧府都正)을 지낸 윤진(尹珍)이다. [[정현왕후]]는 대고모 할머니였다.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문희공 [[홍언필]]의 딸이며, 외할머니는 [[송질]](宋軼)의 딸이고, [[홍섬]](洪暹)은 윤유후의 외삼촌이 된다. 중종의 [[숙원 이씨 (중종)|숙원 이씨]] 소생 서녀 정순옹주(貞順翁主) 정환(貞環)의 남편이자, 지족당 [[남곤]]의 외손자 [[송인]]은 윤유후의 어머니 남양홍씨의 외삼촌이 된다.
[[조선 선조|선조]]의 형 [[하원군]] 정의 부인인 [[남양군부인]]은 외삼촌 [[홍섬]]의 딸로 윤유후의 외사촌여동생이 된다. [[조선 중종|중종]]이 내종숙부가 되기에 [[덕흥대원군]] 이초는 서6촌형이고, 하원군은 조카뻘이 된다.
그는 [[윤곤]]의 5대손으로, 고조부는 [[윤삼산]]이며, 종고조부 [[윤희이]]는 [[조선 세종|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마 [[윤사로]]의 할아버지가 된다. 증조부 [[윤호]]는 [[조선 성종|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가 된다. 세종의 부마 [[윤사로]]는 그의 삼종조부가 된다. [[정현왕후]]는 대고모 할머니이고, [[조선 중종|중종]]은 내종숙부가 된다.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며 [[장경왕후]], [[문정왕후]], [[윤원형]],[[윤원로]]와 [[윤지임]], [[윤춘년]] 및 [[윤여필]], [[윤여해]], [[윤임]]의 선조가 되는 정정공 [[윤번]]은 5대조 윤곤의 사촌으로, 윤유후에게는 재종5대조가 된다.
그는 돈녕부도정을 지낸 윤진(尹珍)과 남양홍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윤진은 [[남효온]], [[김시습]]의 친구이자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소총 [[홍유손]](篠叢 洪裕孫)의 문인이다. [[홍유손]]은 [[세조]]와 [[연산군]]에 저항한 조선 초기 죽림 7현(竹林七賢)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친형은 [[충의위]]와 부사과를 지내고 사후 [[증직|증]] [[이조]][[참판]]에 [[추증]]되고에 [[추봉]]된 윤유곤(尹裕昆)이다. 형수는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 함양군 이포(咸陽君李布)의 손자 이수남(保安正 李壽男)의 손녀였다. 그러나 형 유곤이 일찍 죽어 자신의 차남으로 공조참의를 지내고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된 윤공(尹鞏)을 양자로 보냈다.
어려서 외삼촌 인재 [[홍섬]]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다가, 뒤에 외외종숙 이암 [[송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강 [[정구 (1543년)|정구]]를 만나 오래 교류하였다 한다.
=== 관료 생활과 성삼문 문집 복원, 간행 ===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사과로 재직 중이던 [[1568년]](선조 1년) 무진(戊辰)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후 [[종부시]]주부, [[장예원]]사의 등을 거쳐 [[1574년]](선조 7년) [[좌랑]](佐郞)으로 재직 중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書狀官) [[허봉]](許篈), 기타 권벽(權擘), 유이현(柳而見), 한호(韓濩), 양대박(梁大樸), [[홍순언]] 등과 함께 [[명나라]]로 파견되는 종계변무사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시문을 잘 써서 [[명나라]]의 양응원(楊應元), 등계달(滕季達) 등으로부터 7자라는 칭찬을 들었다. 귀국 후 낭청(儀仗庫郞廳) 겸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1575년]](선조 8년)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가 되고 이후 [[공조]][[정랑]], [[형조]][[정랑]], [[호조]][[정랑]] 등을 거쳐 [[고양시|고양]][[군수]](高陽郡守)로 나갔다.
그는 [[1575년]]에서 [[1590년]] 사이로 추정되는 어느 때에 그는 집안에 전해지던 [[성삼문]](成三問)의 문집 성근보유고와 기타 시문을 정리해 [[성삼문]]의 문집 2권을 간행한다. 문집에 실리지 못하고 각종 문헌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邱風雅), [[용재총화]](慵齋叢話), [[황화집]](皇華集),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전하던 [[성삼문]]의 시와 글들을 모아서 정리, 성근보선생집 (成謹甫先生集),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등을 간행하였으며, 발문을 썼다. 윤유후는 자신이 [[성삼문]]의 문집을 정리하게 된 것에 대해 성근보집 발문에 누가 편집한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필사본으로 베낀 성근보유고 (成謹甫遺稿) 1권이 집안에 대대로 가전(家傳)되어 왔기에, 문집에 실리지 못한 시문이 있을까 찾다가 자신이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邱風雅), [[용재총화]](慵齋叢話), [[황화집]](皇華集),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수록된 [[성삼문]]의 미수록 유작을 채집하여 시부(詩賦) 89수‚ 전(箋)‚ 찬(讚)‚ 함(箴)‚ 서(書)‚ 설(說)‚ 성삼문이 지은 타인의 묘비명(墓碑銘)‚ 대책(對策) 등 16편의 글을 찾아내 유집을 완성시켰다 하였다. 그의 성근보집과 육선생유고는 [[조선 고종|고종]] 때에 간행한 매죽헌선생문집 (梅竹軒先生文集) 등의 참고자료가 된다.
=== 생애 후반 ===
[[1585년]](선조 18년) [[4월 16일]] [[고양군|고양]][[군수]] 재직 중, 구황(救荒)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암행어사]] 유근(柳根)의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선조실록 19권, 1585년(선조 18년, 명 만력 13년) 4월 16일 정사 4번째기사, "어사 유근의 보고에 따라 구황을 삼가지 않은 고양 군수 윤유후를 파면하다"]
이후 [[삭녕군|삭녕]][[군수]]를 거쳐 [[1591년]](선조 24) [[3월 2일]] [[영월군|영월]][[군수]]로 부임하고, 그해 [[10월 12일]] 체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자산군|자산]][[군수]](慈山郡守)로 재직 중 그해 [[4월 27일]] [[탄금대]]가 함락되고 일본군이 [[경기도]]로 상륙하자,[[4월 30일]] [[조선 선조|선조]]는 어가를 이끌고 [[의주파천|파천]]하였다. [[6월 12일]] 선조의 어가를 맞이하고, 3천 병사를 이끌고 자산군의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병력이 소수이기에, 그는 빽빽한 숲 사이 소나무에 사람의 옷을 걸어두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연려실기술 제15권][재조번방지 제1권] 이후 그는 선조의 어가가 [[평양성]]을 탈출하여 [[의주]]로 갈수 있도록 길목을 지켰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렀다.
그밖에 가깝게 지낸 인물로는 약봉 [[서성]] 등이 있어 서성의 문집인 《약봉문집》의 사우록 편에도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1606년]](선조 36년) [[8월 13일]] 사망했다.
=== 사후 ===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용인군]](현 [[용인시]] [[기흥구]]) 병원(幷原) 언덕에 있으며 부인 우계이씨의 묘소가 윤유후의 묘 뒤에 있다.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뒤에 묘소를 [[용인시]] [[기흥구]] 로 이장(移葬)하였다.
근처에는 그의 묘소 북쪽 용인 읍내면 북마동(北馬洞) 인원(寅原,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언덕에 [[연안부부인 전씨 묘|연안부부인 담양전씨 묘소]]가 있다. 정확한 사망일자가 전하지 않으며, [[용인시|용인]] 매년 음력 [[10월 8일]] 아버지 윤진, 형 파원군 윤유곤 등과 함께 향사한다.
== 가족 관계 ==
친할머니 전주이씨를 통해 [[세종대왕]]의 외 5대손이 된다.
* 증조부 : [[윤호 (1424년)|윤호]](尹壕, [[1424년]] ~ [[1496년]] [[4월 9일]])
* 증조모 :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延安府夫人 潭陽 田氏)
** 대고모 :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 [[1462년]] [[7월 21일]] ([[음력 6월 25일]])~[[1530년]] [[9월 13일]] ([[음력 8월 22일]])
** 대고모부 : [[조선 성종|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5)
*** 내종숙부 : [[조선 중종|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 종조부 : 윤은로(尹殷老)
* 할아버지 : 윤탕로(尹湯老, [[1466년]] ~ [[1508년]]), [[정국공신]] [[중추부]][[판사]] 봉 파천군(坡川君)
* 할머니 : 전주이씨, [[운산군 (조선 왕족)|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의 딸,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밀성군 이침]]의 손녀
** 고모 : 파평윤씨
** 고모부 : 이창인(李昌仁, 전주이씨, 사직(司直))
*** 고종사촌 : 이숙(李淑, 판관)
* 서조모 : 이름 미상
** 서 삼촌 : 윤석(尹錫)
** 서 삼촌 : 윤난동(尹蘭同)
* 아버지 : 윤진(尹珍, [[1498년]] [[11월 24일]][호음유고 제7권, 有明朝鮮國通政大夫敦寧府都正尹公墓碣銘 幷序] ~ [[1545년]] [[2월 23일]])
* 어머니(전모) :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겸광]]의 넷째 아들 [[김극개]](金克愷, [[1474년]] [[11월 14일]] ~ ?)의 딸
** 자녀 없음
* 어머니 : 남양홍씨([[1505년]] ~ [[1587년]]), [[홍언필]](洪彦弼)의 딸
** 형 : 윤유곤(尹裕昆, [[1526년]] [[3월 13일]] ~ [[1549년]]? [[1월 21일]])
** 형수 : 전주이씨([[1528년]] ~ [[1590년]] [[10월 18일]]), 통례, 수원부사 이희손(李希孫)의 딸, [[양녕대군]]의 손자 호산군 이현(湖山君 李鉉)의 증손
*** 아들 윤공을 양자로 입양
** 누나 : 파평윤씨
** 매형 : 한경상(韓景祥, 감찰 역임)
*** 외조카 : 한침(韓琛, 김화현감 역임)
** 누이 : 파평윤씨
** 매부 : 이의건(李義健, 전주이씨, 호는 호 동은(峒隱), 정랑, [[수운]][[판관]] 증 집의), 배천군수 이한(李漢)의 아들
* 부인 : 우계이씨(羽溪李氏, [[1541년]] [[12월 1일]] ~ [[1607년]] [[5월 17일]]), 사헌부대사헌 [[이감 (조선)|이감]](李戡)의 딸
** 아들 : [[윤조]](尹肇, [[1558년]] ~ ?)
** 며느리 : 전주이씨([[1556년]] ~ ?), 성종의 서자 이성군 관(利城君 慣)의 손자 영평군 이구(寧平君 李耉)의 딸
*** 손자 : 윤상빙(尹商聘, [[1580년]] ~ ?), 초명은 지복(志福)
*** 손자 : 윤상임(尹商任, [[1592년]] ~ ?), 초명은 지행(志行)
*** 사위 : 유대화(柳大華), 문과 승지, 문화인
** 아들 : [[윤공]](尹鞏, [[1561년]] ~ [[1629년]]), 형 [[윤유곤]]의 양자로 출계
*** 손자 : 윤원룡(尹元龍)
* 외할아버지 : [[홍언필]](洪彦弼, [[1476년]] ~ [[1549년]])
* 외할머니 : 여산송씨, [[송질]]의 딸
** 외삼촌 : [[홍섬]](洪暹, [[1504년]] ~ [[1585년]])
*** 외사촌여동생 : [[남양군부인]], [[덕흥대원군]]의 며느리
** 외외종조부이자 6촌매부 : [[송인]](宋寅), [[남곤]](南袞)의 외손자
== 기타 ==
그는 [[조선 중종|중종]]과 이중으로 인척관계가 되는데, [[조선 중종|중종]]은 대고모할머니 [[정현왕후]]의 아들로써 내종 5촌숙이 된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윤진은 남양홍씨 [[홍언필]]의 딸이자 [[송질]]의 외손녀와 결혼하는데, [[홍언필]]은 외조부, 송인은 외외증조부, [[홍섬]]이 윤유후의 외삼촌이 된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녀와 결혼한 [[송인]]은 윤유후의 어머니 남양홍씨의 외삼촌으로, 윤유후의 외외종조부가 된다.
[[혜정옹주]] 이철환은 [[조선 중종|중종]]의 서녀로서, 혜정옹주 이철환은 고모할머니 쪽으로 내종 6촌 여동생이지만, 친외가 어머니쪽으로는 외외종조모가 된다.
[[용인시|용인]] [[단국대학교]] 근처에 증조모 연안부부인 담양전씨의 묘소와 그 아래편에 형 윤유곤, 형수 전주이씨 내외의 묘소가 있고, 연안부부인 담양전씨 묘 오른쪽 언덕에는 어머니 남양홍씨의 묘소가 있다.
형 윤유곤은 [[충의위]](忠義衛)로 근무하다가 관직에 올라 전력부위 행[[충좌위]] 부사용을 지냈지만 일찍 사망한다. 후에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파원군에 추봉되었다.[1921년의 파평윤씨 족보에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한다.]
== 각주 ==
{{각주}}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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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3}}
* [[성삼문]]
* [[사육신]]
* [[성근보집]]
* [[육선생유고]]
* [[생육신]]
* [[윤호]]
* [[정현왕후]]
* [[조선 중종]]
* [[조선 성종]]
* [[윤사로]]
* [[윤탕로]]
* [[윤필상]]
* [[홍언필]]
* [[혜정옹주]]
* [[운산군 (조선 왕족)|운산군]]
* [[윤공]]
{{Col-3}}
* [[임진왜란]]
* [[의주파천]]
* [[연안부부인 전씨 묘]]
* [[윤곤]]
* [[윤승례]]
* [[김종직]]
* [[남효온]]
* [[김시습]]
* [[성수침]]
* [[윤번]]
* [[양녕대군]]
* [[정희왕후]]
* [[정사룡]]
* [[덕흥대원군]]
* [[함양군 (왕족)|함양군]]
* [[임권]]
{{Col-3}}
* [[정현옹주]]
* [[이감 (조선)|이감]]
* [[윤삼산]]
* [[홍섬]]
* [[남양군부인]]
* [[송인]]
* [[송질]]
* [[남곤]]
* [[하원군]]
* [[임권]]
* [[윤번]]
* [[이희손]]
{{Col-end}}
== 참고문헌 ==
* 성근보집, 육선생유고, 연려실기술, 재조번방지, 영월군읍지(1898년판), 징비록
[[분류:음서 제도]][[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도정궁]][[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파평 윤씨]][[분류:임진왜란 관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