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정보 | 이름 = 윤기정 | 원래 이름 = 尹基鼎 | 필명 = 호(號)는 효봉(曉峰), 효봉산인(曉峰山人) | 출생일 = [[1903년]]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사망일 = [[1955년]] [[3월 1일]] (53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울특별시]] | 경력 = 작가, 평론가, 영화인 | 임기 = [[1949년]] [[6월 1일]] ~ [[1950년]] [[5월 31일]] | 직책 =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북조선국 문화선전성 예하]] 문화예술특보비서관
(前 北朝鮮國 文化宣傳省 隸下 文化藝術特報秘書官) | 주석 = [[김일성]] | 정당 = [[무소속]] | 소속 = 前 조소문화협회 서기장 | 부주석 = [[김두봉]] | 총리 = [[김일성]] | 부총리 = [[박헌영]]
[[홍명희]]
[[김책]] | 학력 = [[보인고등학교|경성 보인고등보통학교]] }} '''윤기정'''(尹基鼎, [[1903년]] ~ [[1955년]] [[3월 1일]])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 생애 ==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시절이던 [[1918년]]경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1927년]] [[방준경]]과의 [[아나키즘]] 논쟁에서 [[한설야]]와 함께 볼셰비즘 편에 서면서, 카프를 소장파가 장악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 무렵 평론과 소설을 발표하고 순회강연 연사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에 카프의 조직 개편으로 영화부가 신설되었을 때 영화부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영화계에도 입문했다. 윤기정은 좌파적 입장에서 대중선동 매체로서의 영화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한 인물로 꼽힌다. 영화 평론과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문학잡지 《집단》도 창간하였다. 그러나 [[1933년]]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되어, 전향을 서약하고 풀려났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미군정]] 지역에서 카프를 계승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는 등 좌익 활동을 벌이다가 [[1946년]]에 월북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소문화협회]] 서기장을 지냈다. == 같이 보기 ==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 참고 자료 == * {{서적 인용 |저자=권영민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날짜=2004-02-25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출판위치=서울 |id={{ISBN|89-521-0461-7}} |페이지=213~215쪽}} {{토막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작가}} [[분류:1903년 태어남]][[분류:195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각본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보인학교 동문]][[분류:염군사 동인]][[분류: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산주의자]][[분류:조선공산당의 정치인]][[분류:남조선로동당]][[분류:조선로동당 당원]][[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영화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