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순'''(尹景純, [[1855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말기의 상인, 무신, 혁명가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 행동대장의 한사람이자 [[서재필]]의 휘하에서 1개 분견대를 지휘하였다. [[박영효]], [[서재필]] 등을 만나 감화되어 그들의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의 집에 드나들며 이인종, 이규완 등과 어울리다가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민태원, 《불우지사 김옥균 선생 실기》 (이선아 역, 한국국학진흥원, 2006) 57페이지] 정변 실패 후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숨어들어 은신하였으며 [[1885년]] [[경기도]] [[부천시|부천]]에 사는 누이에게 가던 중 체포되어에서 사형당했다. [[갑신정변]] 당시 전영 소대장인 [[윤경완]]의 형이다. 다른 이름은 경순(景舜)이다.
== 생애 ==
=== 초기 활동 ===
[[1855년]](철종 6년) [[한성부]] 동부(東部) 동문밖 홍수동(紅樹洞)에서 윤흥진(尹興鎭)의 손자이며, 윤광운(尹光運)과 한치복(韓致福)의 딸 한 조이(韓召史)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일은 미상이다. 5년 연상이었던 그의 누나 윤조이는 [[부평군]] 서면에 사는 박사경(朴士京)에게 출가하였다. 형제들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고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5년 연하의 동생 [[윤경완]](다른 이름은 윤계완)이 있었다. 그가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도주했을 때 아버지 윤광운은 딸 윤조이가 사는 곳 근처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처음에는 [[한성부]]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했고, 그의 동생 [[윤경완]]은 무청(菁根) 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작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동지가 되었다. 이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집에 드나들면서 [[서재필]], 이인종(李寅鍾), [[이규완]](李圭完), 황용택(黃龍澤), 최은동(崔恩同), [[서재창]], [[신중모]](申重模) 등을 만나 알게 되었으며, [[압구정]]에서 회합하고 [[1884년]]의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
[[1883년]]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과 함께 입학하였다. [[1884년]] [[7월]] 수료하고 귀국, [[병조]] [[조련국]]의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갑신정변]] 거사 직전 [[서재필]]의 지휘하에 있던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며 거사를 준비, 모의하였다.
=== 갑신정변 거사 계획 ===
갑신정변 직전 그는 다른 무사들과 함께 정보 입수를 맡아보았다. 정변이 계획되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그는 신속히 정보 정탐과 무기 구입을 맡아보았다. [[1884년]] [[11월]] 고종이 김옥균을 소환하자 개화파는 긴장하였다. 이때 개화파는 평소부터 양성 규합해 둔, [[이규완]], 임은명, 정란교, 이인종, 윤경순 등의 사관생도와 그밖의 장사패 수십 명을 지휘하여 연일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구입에 착수하였다.[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1페이지]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서재필]]이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이인종,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의 동지들과 함께 모이기로 한 여러 장사들, 이규정(李圭貞),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김봉균, 이은종(李殷種),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만일 그 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12월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8페이지]
=== 갑신정변 참여 ===
{{참고|갑신정변}}
[[12월 4일]] 거사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작정되었아. 별궁에 방화할 사람은 이인종의 지휘 하에 [[이규완]], 임은명, 윤경순, 최은룡의 네 사람이 실행하기로 했다. 이때 [[변수]]가 포대 수십 매를 만들도록 해서 이 포대를 [[서광범]]의 남쪽 뜰 안에서 어두컴컴한 때를 타서 별궁담을 월경한 후 별궁정전 안에 쌓기로 하였다. 별궁 방화는 이인종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명, 윤경순,최은동 등이 맡았다.[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한길사, 2003) 104페이지] 이들은 포대 수십 개를 만들어서 화약을 담아 별궁 후문에 있는 [[서광범]]의 집에 보관하였다가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했다. 또 [[석유]]를 담은 작은 병(화염병) 30여 개도 행랑에 쌓아 두었다.
수구파 대신 척살을 계획했을 때 그는 [[민영익]] 담당을 맡게 되었다. 실행할 담당자는 요인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씩 배정하되 한 사람은 단검을, 또 한 사람은 단총을 소지하기로 했다.[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9페이지] 또 만일 그 장소에서 실패하는 때에는 예비로 특별히 조선 옷을 입은 일본 사람 네 사람으로 각각 한 사람씩 감당키로 했다. 그리하여 [[민영익]]은 윤경순, 이은종 두 사람이, [[윤태준]]은 박삼룡,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 임은명 두 사람이 담당키로 했다. 그러나 사건 당일 민영익은 [[서재창]]의 피습을 당해 한쪽 눈을 찔렸다고 한다.
[[12월]]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를 이끌고 [[우정국]]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우정국]] 축하연에 참석하러 온 [[민영익]](閔泳翊)을 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어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윤태준]] 등을 철퇴로 척살하였다. [[윤태준]]은 당시 [[소중문]] 밖에서 대기하던 [[이규완]], 윤경순에게 일격지하에 처치되고 말았다.[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70페이지]
[[경우궁]]에 당도한 이조연이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국왕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들고 "내가 이 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안에 들어가리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서재필의 부하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70페이지] 이에 이조연과 한규직은 뒷문으로 나아갔다. 막 문밖에 나아가자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 등에 의해 타살당했다. 이어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당시 당시 정부 고관인 [[민영목]](閔泳穆), [[조영하]](趙寧夏) 등을 살해하였다.
=== 체포와 최후 ===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야밤에 [[전라남도|전라도]] [[곡성군|곡성]]으로 도피하여 은신하였다. 이때 그는 [[배추]]장수[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한길사, 2003) 127페이지]로 행세하며 신분을 숨겼다. [[1885년]](고종 22년) 초 누이가 살던 [[경기도]] [[부천시|부천]]에 왔다가 관원에게 잡혀에 투옥당했다. [[1885년]](고종 22년) [[12월]] 에서 신문당한 뒤, [[12월 23일]]에 모반대역부도죄로 추국청에서 참수되었다.
최종 판결 당시 함께 정변에 가담한 동생 [[윤계완]]은 함께 처형당했다. 누나 윤 조이(尹召史)는 이미 시집간지 오래되어 출가외인이라 하여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한 조이(韓召史)는 [[1886년]] 초에 사망했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아버지 윤광운은 계속 [[연좌제]]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 [[의금부]]의 거듭된 탄핵으로 [[1886년]] [[5월 22일]] 참수형을 당했다. [[연좌제]]는 할아버지 윤흥진과 외할아버지 한치복에게까지 적용되었으나 이들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 사후 ==
[[1907년]](융희 1년) [[11월 18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 (조선 말기)|대신]] [[조중응]](趙重應)이 그의 죄명을 벗겨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다. [[1908년]] [[3월 25일]] 다시 [[이완용]], [[조중응]] 등이 다시 상주하여 죄명이 벗겨졌다.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윤흥진(尹興鎭)
* 아버지 : 윤광운(尹光運, [[1817년]] ~ [[1886년]] [[5월 22일]])
* 어머니 : 한조이(韓召史, ? ~ [[1886년]])
** 누이 : 윤 조이(尹召史, [[1850년]] ~ ?)
** 매부 : 박사경(朴士京)
** 동생 : [[윤경완]](尹景完, [[1860년]] ~ [[1885년]] [[12월 23일]]) 또는 [[윤계완]](尹啓完)[《승정원일기》에는 윤계완으로 되어 있고, 《갑신일록(甲申日錄)》과 《서재필박사자서전》에는 윤경완으로 되어 있다.]
* 부인 : 이름 미상, 연좌제로 노비가 되었다.
* 외할아버지 : 한치복(韓致福)
== 기타 ==
[[승정원일기]]의 [[1885년]](고종 22년 을유, 광서 11년) [[12월 23일]]자 죄인 윤경순의 결안에 적힌 보고에 '아비 윤광운(尹光雲)은 생존해 있고, 어미 한 조이(韓召史)는 생존해 있고, 할아비의 이름은 알지 못하는데 죽었고, 외할아비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데 죽었습니다. 부모가 동부(東部) 동문 밖에서 낳았는데, 호적에 편입되어 살았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년 을유, 광서 11년) [[12월 23일]]자 죄인 윤계완의 결안에 의하면 '죄인의 근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비 윤광운(尹光雲)은 생존해 있고, 어미 한 조이(韓召史)는 생존해 있고, 할아비 윤흥진(尹興鎭)은 죽었고, 외할아비 한치복(韓致福)은 죽었습니다. 부모가 동부 동문 밖 홍수동(紅樹洞)에서 낳아서 호적에 편입되어 살았습니다'라고 한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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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2}}
* [[갑신정변]]
* [[개화파]]
* [[김옥균]]
* [[박영효]]
* [[서재필]]
* [[홍영식]]
* [[박영교]]
* [[박정양]]
* [[박중양]]
* [[서광범]]
* [[이규완]]
* [[조영하]]
* [[민영목]]
* [[민승호]]
* [[하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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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 [[김홍집 (1842년)|김홍집]]
* [[김규식]]
* [[변수]]
* [[신중모]]
* [[유길준]]
* [[안경수]]
* [[윤치호]]
* [[윤태준]]
* [[이상재]]
* [[정병하]]
* [[박원양]]
* [[홍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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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 참고 자료 ==
* 아세아문화사 편집부, 《갑신정변 관련자 심문 진술 기록:추안급국안 중》 (박은숙 역, 아세아문화사, 2009)
*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 이광린, 《개화당 연구》 (일조각, 1973)
[[분류:1855년 태어남]][[분류:1885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상인]][[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급진개화파]][[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